■ 역사/역사이야기

애욕에 눈먼 임금 정치보복을 許하다.

야촌(1) 2010. 9. 16. 00:04

■ 애욕에 눈먼 임금 정치보복을 許하다.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29호 | 20090830 입력]

 

노나라 대부 계강자(季康子)가 ‘무도한 사람을 죽여 도(道)가 있는 데로 나가게 하면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정치를 하면서 어찌 죽임(殺)을 수단으로 쓰겠는가?”라고 반대했다.

 

모두 공자의 제자를 자처했으나 상대방을 포용하기보다 배척하기를 좋아했던 군주와 당파들이 서로 만나 살(殺)이 난무했던 증오의 시대로부터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충청남도 강경의 죽림서원 옛날에는 황산서원이었다. 효종 때 송시열과 윤선거가 윤휴 문제를 두고 크게 다퉜던

서원인데, 훗날 송준길·송시열 등이 향사되면서 노론의 주요 서원이 되었다.

 

三宗의 혈맥 숙종

⑦기사환국


숙종 15년(1689) 후궁 장씨가 왕자를 낳음으로써 9년 만에 재집권한 남인들은 과거사 청산에 나섰다.

남인 허새·허영 등을 역모로 고변해 죽게 만든 임술고변의 기획자 김석주는 숙종 10년(1684) 이미 사망했으므로 김익훈이 주요 대상이었다. 남인들은 의금부에 국청을 설치하고 숙종 15년 2월 25일 김익훈 등 6인을 체포해 투옥했다.

 

이 날짜 『숙종실록』은 “한수만(韓壽萬)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한수만은 김익훈의 사주로 전 병사(兵使) 김환 등과 함께 허새 등을 고변한 기패관(旗牌官: 군영의 장교)이었다.

 

고변자 이회는 허새가 화약과 화전(火箭:불화살)을 주었다고 진술하다가 다섯 차례의 혹독한 형신(刑訊:형장을 치며 묻는 것) 끝에 “김익훈이 은 100냥을 주어 화약과 화전을 샀다”고 실토했다. 김환도 다섯 차례의 형신 끝에 ‘김익훈이 강상(江上)에다 집을 사서 주면서 사람들을 기찰(譏察)하게 했다”고 자백 했다.

 

 

↑우암 송시열 초상.

 

남인들은 숙종 15년의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후, 영의정 김수항과 영부사 송시열을 사사시키는 정치보복을 단행했다. 김익훈은 죽은 김석주에게 정치공작의 책임을 떠넘겼으나 끝내 장하(杖下)에서 물고(物故)당했다. 김환·김중하 등의 고변자들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집은 적몰되었다.

임술고변은 정치공작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이므로 그 재조사는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보복으로 확대되는 흐름이었다. 남인정권은 전 영의정 김수항과 송시열을 사형시키려 했다.


숙종 15년(1689) 윤 3월 28일 예조판서 민암(閔黯)을 비롯한 6판서 전원과 성균관 대사성 유명현 등이 합동상소를 올려 김수항과 송시열을 죽일 것을 청했다. 숙종은 김수항의 사사는 허용했으나 송시열에 대해선 일단 거부했다.


노론에서 편찬한 『숙종실록』은 어떤 사람이 우의정 김덕원에게 “김수항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지자 김덕원이 “우리 덕이(德而)는 어찌하겠는가?”라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숙종실록』은 “덕이는 오시수(吳始壽)의 자(字)인데 오시수의 죽음에 대한 당연한 보복(報復)이라는 뜻이다(15년 윤 3월 28일)”라고 덧붙이고 있다.

숙종 원년(1675) 청 사신 원접사((遠接使)였던 오시수는 청나라 황제가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고 했다는 군약신강(君弱臣强) 등의 발언을 전했다가 경신환국 이후 서인에 의해 사형당했다.

 

김수항의 죽음이 오시수의 죽음에 대한 보복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오시수의 사형이 억울하다면 김수항도 마찬가지였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낳는 악순환이었다. 송시열이 숙종 15년(1689) 2월 1일 원자 정호가 시급했다는 비판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날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웠다.

 

정권까지 갈아치운 목적은 왕비 민씨를 내쫓고 후궁 장씨를 왕비로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날 숙종은 장옥정의 선조 3대에게 정승을 추증(追贈)했다. 추증은 위로 올라갈수록 한 등급씩 감하는 것이 관례여서 장씨의 부친 장형(張炯)에게 영의정을 증직하면, 조부에게는 종1품 찬성(贊成)을 증직해야 했다.

 

그러나 숙종은 “사체(事體)가 다름이 있으니, 모두 의정(議政)을 증직하라”고 명해 장형은 영의정, 장수(張壽)는 좌의정,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3대가 모두 정승에 증직된 드문 경우였다.


장형은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에, 본부인 고씨는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에 추증되었고, 궁중에 옥교를 타고 들어왔다 모욕을 당했던 장씨의 생모 윤씨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에 봉해졌다. 장형의 묘갈(墓碣)을 다시 세우는 데 1500명의 백성이 동원되었다.

 

 

장형 신도비와 묘.

역관 장형은 서녀 장옥정이 왕자를 낳은 후 영의정에 증직되고, 옥정이 왕비가 된 후 옥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석물을 세우는 데 1500명이 동원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그러나 남인 정권이라고 해서 뚜렷하게 드러난 잘못이 없는 왕비 폐출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왕비 폐출과 남인이 원하는 송시열의 죽음을 맞바꾸기로 결심했다.

4월 21일 대사헌 목창명(睦昌明) 등이 제주도에 유배 간 송시열을 잡아다 국문(鞠問)하자고 청하자 숙종은 느닷없이 왕비 민씨를 비판하고 나섰다.“세상 풍속이 말세로 떨어질수록 인심이 점점 악해지지만 어찌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이 있겠는가? 중궁은 관저의 덕풍(關雎德風:주 문왕의 아내 같은 덕풍)은 없고 투기의 습관이 있다.


병인년(丙寅年:숙종 12) 희빈(禧嬪:장씨)이 처음 숙원이 될 때부터 귀인(후궁 김씨)과 당(黨)을 이루어 성내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숙종실록』 15년 4월 21일)”신하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들 앞에서 어머니를 욕하는 격이기 때문이었다.


숙종은 왕비 민씨가 ‘꿈에 선왕(先王:현종) 부부가 자신과 귀인 김씨는 자손이 많겠지만 숙원 장씨는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궐내에 있으면 경신년(庚申年=숙종 6)에 실각한 사람들(남인)에게 당부(當付)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선왕까지 투기에 끌어들였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숙원에게 아들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원자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그 거짓된 작태가 여기에서 더욱 증험되었다(『숙종실록』 15년 4월 21일)”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다.


4월 23일은 왕비 민씨의 생일이었는데 숙종은 영의정 권대운 등의 하례를 막으면서 민씨를 후궁 척 부인(戚夫人)을 인체(人彘: 돼 지우리에 넣은 사람)로 만들고 소제(少帝)를 살해했다는 한 고조(漢高祖)의 황후 여후(呂后) 등과 비교하면서 “하루인들 이런 사람이 일국의 국모로 군림할 수 있겠는가?”라고 힐난했다.

노골적인 왕비 폐출 선언이었다. 드디어 4월 25일 전 사직(司直) 오두인(吳斗寅)을 소두(疏頭: 상소의 우두머리)로 86인이 왕비 폐출 반대 상소를 올렸는데, 글은 전 목사 박태보(朴泰輔)가 쓴 것이었다. 

 

날이 이미 어두웠고 승지 등이 ‘역옥(逆獄)이 아니니 친국(親鞫)할 필요가 없다’고 권했으나 숙종은 “이는 모반대역(謀反大逆)보다 더 심하다”면서 “내가 이들 무리를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 수가 있겠는가”라면서 심야 친국을 강행했다.

 

『숙종실록』이 상소가 찢어진 부분이 있었는데 “임금의 분노가 극심해서 손으로 쳤기 때문”이라고 전할 정도였다.  숙종은 박태보에게 “이러한 독물(毒物)은 곧바로 머리를 베어야 된다”고 극언하면서 “만약 저(왕비)가 옳다면 나는 이광한(李光漢: 김익훈의 심복)이 무고(誣告)한 것과 같은 것이니 나를 폐출시켜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하늘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이 아니라 애욕에 눈이 먼 필부에 불과했다.

숙종이 “군부(君父)를 배반하고 부인(婦人:왕비)을 위하여 절의를 세우려 한다”고 힐난하자 박태보는 “이미 전하를 배반했다면 중전을 위하여 절의를 세운다 한들 어떻게 절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숙종은 “네가 더욱 독기를 부리는구나”라면서 “매우 쳐라, 매우 쳐라”를 반복했다.

 

진도(珍島)로 귀양에 처해졌던 박태보는 5월 4일 과천까지 갔다가 장독(杖毒)으로 죽고 말았다.

박태보가 죽은 당일 숙종은 드디어 왕비 민씨를 폐출해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사흘 후에는 도승지를 역임한 오두인도 파주에서 죽었는데 박태보는 39세, 오두인은 66세의 노구였다.

 

박태보는 이미 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쓰는 것을 반대하고 노소 분당 때 송시열을 강하게 비판했던 소론이었으나 왕비 폐출은 원칙의 문제라고 생각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숙종실록』은 ‘송시열이 제주에서 나치(拿致)되어 (서울에서 국문 받기 위해) 돌아오는데 바다를 건너와서 중궁(中宮)이 이미 폐출된 것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송시열은 그러나 서울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국문 받기 위해 상경하던 6월 3일 정읍에서 만난 금부도사가 사약(賜藥)을 내민 것이었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이 ‘굳이 국문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라’고 권하자 금부도사가 만나는 곳에서 사사하라고 명한 것이다.

 

숱한 논란의 중심에 있던 83세의 노구(老軀)는 결국 사형으로 끝났다.

 

9년 전 허적과 윤휴의 사형을 남인들이 정치보복으로 여긴 것처럼 김수항과 송시열의 사형 역시 서인들은 정치보복으로 여겼다. 송시열은 임종 때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후궁 장씨가 사실상 왕비였으나 숙종 14년에 사망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왕비책봉식만 거행하지 않았을 뿐이다. 숙종은 재위 16년(1690) 6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10월 22일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정권을 노린 남인과 왕비 자리를 노린 장옥정의 결합이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실록』은 “송시열의 상(喪) 때 서울 남문 밖 우수대(禹壽臺)에 모여 곡한 사람이 수천 명을 넘었는데, ‘각자 그 종 5, 6인씩만 내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20년 4월 1일)”고 전한다. 노론가(家)의 노비들을 동원해 군사로 쓸 수 있다는 뜻이리라. 노론의 이런 분노는 남인 정권과 장희빈을 향한 것이었지만 여차하면 숙종을 직접 겨냥할 수도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