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연집(雷淵集卷之十四 >記]
■ 李 文忠公 고매기(古梅記)
熊御史旣以天子所賜宋元書歸李文忠。又輟卧內一古梅以副之。其種大播于湖西。至于今不絶。崇禎後再丙辰。有好事者爲致一本於文忠嗣孫判院公家。於是書與梅。離二百年而復合矣。余乃拜手而爲之記曰。嗚呼。江南草澤之中。庶幾有顯皇帝雲孫也不乎。
丁巳三月二十五日書(1737년 영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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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연 남유용(雷淵 南有容)
[생졸년] 1698년(숙종 24)∼1773년(영조 49).
[문과] 영조(英祖) 16년 (1740) 경신(庚申)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1위
[생원진사시] 경종(景宗) 1년 (1721) 신축(辛丑) 증광시(增廣試) 2등(二等) 25위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 자(字)는 덕재(德哉), 호(號)는 뇌연(雷淵)· 소화(小華). 서울 출신이다. 증조부는 대제학(大提學) 용익(龍翼)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한기(漢紀)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여러 벼슬뒤, 호조참판을 거친 뒤 1758년에는 전 대제학윤봉조(尹鳳朝)의 추천을 받아 양관(兩館)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하게 되었으며, 그밖에 여러 곳의 제조직을 받은 바 있고, 1765년에는 지중추부사와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766년에는 정헌(正憲)으로 승계한 뒤 상소를 올려 벼슬길에서 물러났으며, 1767년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72년에는 《명사정강 明史正綱》을 편찬하였으나, 그 서법이 존주지의(尊周之義)에 심히 어긋난다고 하여 영조는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이는 그의 역사관이 성리학적 역사인식방법을 극복하고자 하였다는 점을 나타내준다.
이로 말미암아 장차 조선사기(朝鮮史記)를 편찬할 인물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으며, 명성왕후(明聖王后 : 제18대 헌종의 비)의 측책문을 제진하여 칭송을 받았다. 인물됨이 실박하면서도 바른말을 잘하고 청백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명사정강》·《천의리편》·《뇌연집》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단양에 있는 우화교비(羽化橋碑)와 해백윤세수비(海伯尹世綏碑)를 쓴 글씨가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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