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석작(石碏)과 유하혜(柳下惠)

야촌(1) 2010. 8. 28. 20:53

■ 석작(石碏)

     위(衛) 나라 환공(桓公) 때의 충신(BC 734~719)

 

↑중화 석성시조 석작 상

 

춘추시대 위(魏)나라 임금 환공(桓公)은 이복동생으로, 서자(庶子)였던 주우(州旴)에게 살해당했다.

장공(莊公)은 주우(州旴)를 사랑한 나머지 방탕하게 길렀고 석작대신(石碏大臣)은 이를 염려하였다.

 

석작(石碏)의 아들 석후((石厚)는 주우를 도왔다. 임금이 된 주우는 지위를 굳히기 위해 이웃나라를 침공하는 등의 힘을 과시해 보았으나 백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벼슬에 물러나 있는 석작에게 아들 석후가 인심 획득 방법을 물었다.

 

석작은 . 그러기 위해서는 왕실과 사이가 좋은 진(陳) 나라에 중계를 부탁해 보라'고 했다. 석작은 미리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렇게 전했다.

 

'주우(州旴)와 석후((石厚)는 임금을 죽인 반역자이니 적절히 조치해 주시오. '두 사람이 도착하자 진(陳)나라에서는 위나라의 부하들이 보는 데서 그들을 죽였다. 이에 대해 군자는 말했다. 대의를 위해 육친의 정을 버린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大義滅親 :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한다는 뜻으로 나라나 민족을 위한 일에 사사로운 정은 끊어야 한다는 뜻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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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하혜(柳下惠) - 노(魯) 나라의 현인(賢人)

 

유하혜는 중국 춘추 시대 노(魯) 나라 때의  현인(賢人)으로 성은 전(展), 이름은 획(獲). 자는 금(禽), 계(季). 유하(柳下)에서 살았으므로 이것이 호가 되었으며, 문인들이 혜(惠)라는 시호를 올렸으므로 유하혜라고 불리었다. 

 

직도(直道)를 지켜 임금을 섬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춘추시대 대도(大盜)의 악인(惡人)으로 유명한 도척(盜跖)이 바로 그의 동생이다.

 

이에 따라 형제간에 현인과 악인이 있을 때 이들에 비유하였다.  

맹자는 유하혜를 성인(聖人)에 화(和)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는 화(和)의 덕(德)이 있고 절개(節槪)를 생명으로 삼고 살았기 때문이다. 유하혜(柳下惠)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작은 벼슬자리를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벼슬하러 나가면 자기의 우수한 면을 숨기지 않고 반드시 정당한 방법으로 일을 했다.

버려져도 원망치 않았고 곤궁에 빠져도 성내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너고 나는 나인데, 내 곁에서 옷을 벗고 있은들 내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고 말했다. 

『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편

 

유하혜(柳下惠)가 노(魯)나라의 옥관(獄官)이 되어 세 번이나 파면을 당했다. 어떤 이가 그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이렇게 되어도 다른 나라로 떠나지 아니하오?’라고 이르자 유하혜는 대답하기를 ‘곧은 마음으로 사람을 섬기면 어디 간들 세 번 파면을 당하지 않으리오.

 

도의를 굽혀서 사람을 섬긴다면 어찌 반드시 조국을 버려야 하리오’라고 답했다. 『논어』「미자(微子)」편 공자는 유하혜의 충직함과 변치 않는 절개를 찬양했다. 

 

 

↑유하혜(柳下惠) 초상

 

↑유하혜 묘(柳下惠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