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영윤자문(令尹子文)/초나라의 신하

야촌(1) 2010. 8. 15. 03:36

■ 영윤자문[令尹子文: (楚)나라 성왕(成王:671~625)]때의 신하.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 사람으로. 본명은 투곡어도(鬪穀於菟)이다. 세 번이나 영윤(令尹=춘추시대 초나라의 지방관) 직(職)에 임명(任命)되고 세 번 파직(罷職)을 당했으되 조금도 희온(喜慍: 기뻐하거나 성을 냄)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며 공자(孔子)가 이를 칭탄(稱歎)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초(楚)의 3대 명문의 하나인 투약오(鬪若敖)의 아들인 투백비(鬪伯比)와 우(虞)나라 공녀(貢女)사이에 태어났다. 출생 직후 들판에 버려졌으나 호랑이가 젖을 먹여 길러 다시 데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젖을 곡(穀)이라 하고 범을 오도(於도)라 하는 초나라 말에 따라 이름을 곡오도(穀於菟)라 이름짓고 자를 자문(子文)이라 했다.영윤(令尹)자리가 비자 초성왕(楚成王)은 다른 신하를 영윤에 앉히려 했으나 대적관계에 있는 명재상 관중((管仲)과 겨루기 위해 투곡오도(鬪穀於菟)에게 양보하여 영윤이 되었다.

 

초성왕(671~625)은 그를 주석지신으로 극찬하고 모든 신하에게 자(字)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28년간 영윤(令尹)자리에 있으면서 부국강병을 적극 추진하여 남방의 초(楚)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어 중원의 강국과 겨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