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비 쓰는 법
1. 비의 정의(인터넷 검색글)
돌에 새겨서 세운 돌, 이것을 비석(碑石)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석에 새긴 글자는 금석문의 하나로, 또는 역사적인 자료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 나라 이전에는 자연형의 돌에 새긴 각석(刻石)이 있었으나 정방형으로 돌을 다듬어 새긴 정식의 비는 한 나라 시대 묘비에서 발달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비는 글자를 돌에 그대로 새긴 갈(碣)이 있고, 일정한 형태로 돌을 다듬어 글자를 새긴 비(碑)가 있다. 비의 모양은 몸체인 사각기둥 모양의 비신(碑身)이 있고, 머리 갓 부분인 뿔 없는 용을 조각한 이수(螭首)가 있고, 비석을 기반으로 받치는 거북모양의 귀부(龜趺)가 있다.
비신의 앞, 겉면을 비양(碑陽), 뒷면을 비음(碑陰)이라고 하고, 새겨진 글을 명(銘), 비음부분에 새겨진 글을 음기(陰記) 또는 비음이라고 한다. 비의 종류에는 능에 세우는 능비, 묘에 세우는 묘비,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 그 외로 순수비, 기념비 등이 있고, 최근에는 시비, 노래비 등이 있다. 이러한 비에 쓰인 문장들은 대체로 한자를 많이 썼으나 최근에는 한글을 많이 쓰게 되었다.
2. 비문의 격식과 내용
비문의 문체는 산문으로 된 서(書)와 운문으로 된 명(銘)으로 대별된다. 서와 명으로 된 비문을 대개 비명병서(碑銘幷序) 또는 비명이라 부른다. 서가 없이 명으로만 된 비문이나, 명이 없이 서로만 된 비문도 있기는 하나, 이런 것은 비송(碑頌) 또는 비기(碑記)라 하여 따로 구별하기도 한다.
서(序)는 비문을 쓰는 경위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본문에 의의를 부여하는 곳이다. 비명은 4언·5언·7언 등의 운문으로 이루어진다. 명(銘)에서는 짧고 화려한 수식을 동원하여 공덕을 찬양하고자 <시경 詩經>의 송(頌)이나 아(雅)와 같은 전아한 시가에 그 근원을 둔다.
명(銘)이 없는 비기는 원래 한문 문체의 기(記)에서 온 것으로 기사(記事)를 뜻하는데, 사적비 따위의 사실을 기록하는 비문의 많은 부분이 이런 비기의 형식을 취한다. 비문을 서술하는 형식과 그 순서는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는 내용에 따라 순수비문· 기공비문· 능묘비문· 신도비문· 탑비문· 사적비문· 사묘비문· 정려비문· 송덕비문 등으로 나누어진다. 순수비문의 예로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신라시대 영토 확장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기공비문은군장(軍將)의 전공을 기리고, 그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관구검기공비· 유인원기공비 등이 있다. 능묘비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실물이 현전하는데 대개 주인공의 생몰 연대 및 그의 행적을 적는다.
신도비문은 조선시대에 당상관 이상의 고관을 지낸 사람에게만 세워주던 비인데, 뒤에 문중의 건비가 성행하면서 이런 제약이 흐려졌다. 신도비문은 비명, 주인공의 가계(家系)·행적 외에 글을 지은이와 글씨를 쓴 이, 그리고 건립 연월일 등을 기록한다.
탑비문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예가 보이고 있으나, 특히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탑비가 줄고 신도비가 성행하였다. 사적비는 삼국시대에 경주 남산의 신성비에서 비롯되어 전시기에 걸쳐 건립되었다. 사적비문의 내용은 공사의 동기· 진행과정· 동원인력 등 일반적 사항과 때로는 관직명이 적히기도 하여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사묘비는 사당·묘정·서원 등에 건립되는 비인데, 그 비문에는 사묘의 설치된 유래와 관련된 인물의 공훈이나 사적을 적는다. 정려비는 효자비· 효부비· 열녀비로 나누어 대개 문중에서 건립하는데 조선 시대에서는 유교사상 아래서 크게 유행하였다. 정려비문은 사적과 찬송이 그 주요 내용이 된다.
송덕비문은 대개 선정비문과 시혜비문으로 갈라지는데, 운문으로 그 공적을 미화해서 표현하고, 글 지은이는 밝히지 않고 세운 사람이나 동기를 밝힌다. 비문의 서체에는 예서·해서·행서 등이 있는데, 전서는 조선 숙종 때 허목(許穆)이 쓴 척주동해비 (涉州東海碑)가 유명하다.
서체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어, 점제현신사비는 고예(古隸), 관구검기공비·광개토왕릉비는 한예(漢隸)의 분서(分書)에 속하며,해서가 가장 많고 다음이 행서이다. 비의 제액은 대부분 전서로 썼으므로 전액이라고도 한다.
문체는 운문·고문이 있으나, 당대 (唐代)부터 별도로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가 유행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후의 금석문은 대부분 이 문체를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3. 가례집람 1권(페이지 19 번역문)
당 아래에서 문에 이르기까지를 정(庭)이라한다. 정을 셋으로 나누어 그 북쪽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곳에 碑를 세운다. [의례] 빙례편의 주석에 말하기를 “宮에는 반드시 비가 있다. 이는 해 그림자를 표시하여 陰陽을 알아보려고 설치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비를 설치할 때는 堂의 길이와 같게 한다.」하였다. 당(堂)의 길이란 당의 염(廉)으로부터 북쪽으로 방실(房室)의 벽에 이르는 길이이다. 정을 셋으로 나누어 북쪽으로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곳에 비를 설치하되 비는 당의 길이와 같이한다.
그러므로 정은 대개 당의 길이의 세 배가 된다. 또 살펴보니 <향사례>에서 후(侯 : 과녁)는 당에서 삼십장이 떨어진 거리이며, <대사례>의 후(侯)는 당에서 오십사장이 떨어진 거리이다. 그러므로 정의 길이를 이로써 알 수 있는데 그 늘이고 줄이고 하는 제도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보충] 손하 씨는 말하기를 옛적의 이른바 비(碑)라는 것은 곧 장례를 지내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손님 접대를 할 때 세운 나무였을 뿐이었는데 그러나 그 글자를 돌석(石)변에 쓴 것은 그 굳고 오래가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성균관 예절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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