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우봉 도리촌 선영 묘단(牛峰挑李村先塋墓壇) - 이유원

야촌(1) 2010. 8. 13. 23:43

■ 우봉 도리촌 선영묘단(牛峰挑李村先塋墓壇) 

 

후손 유원 찬(後孫 有元 撰)

 

 이씨 옛 족보에 경주 이씨의 선영이 우봉 도리촌(牛峰挑李村)에 있다고 되어 있다

살펴보건데 우봉은 서해안 금천군(金川郡)이니 숭양(崧陽 : 개성)에서 三十리도 안되는 가까운 지점이다.

 

우리 이씨의 세묘(世墓)가 처음부터 그자리를 얻어서 익재 선생 제현(益齋先生 齊賢)의 묘소와 그의 자제 밀직사(密直使) 창로(彰路)의 묘소가 현재 마을 가운데 있어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 왔다 그 위에 선조의 묘소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틀림었다.

 

경주부 금오산(金鰲山)의 시조의 산소라고 하는 것이 징빙할 수 없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족보에 태복야(太僕射) 열헌 핵(悅軒 翮)과 그의 자제 검교 정승 (檢校政丞) 진(瑱)과 둘째 자제 대제학 송암 세기(松岩)와 송암공의 자제 상서(尙書) 과(薖)의 三대에 걸친 네(四) 묘가 익재(益齋)의 묘소 위에 있다. 태복야는 나의 十九대 조이고 대제학은 나의 十八대조다.

 

세대가 점점 아득 하여 져서 다만 익재의 묘소와 밀직의 묘소만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익재는 곧 동암공의 자제이고 상서는 송암공의 자재이니 다 같이 태복야의 소몽(所蒙 : 직계 선조)이 된다. 나 유원(裕元)이 익재 묘소를 성묘하고 두루두루 여러 선대의 묘소를 찿아 보았더니 익재묘소 위에 무덤이 둘 있고 밀직사 묘소 위에 또 무덤이 둘 있었다. 三세 四분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마침내 분별할 수가 없어 돌아와서 여러 종인들에게 말하기를 증자(曾子)가 공자에게 질문하기를 종자(宗子)가 타국에 가 있을 때 선조의 제사에 대한 예를 물었더니 공자가 묘 있는 쪽을 바라보고 단을 쌓아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니 돌아 보건데 지금 千년이나 된 뒤에 다시 제사의 의례를 강구하는 것은 예문가들이 혹 의심할는지 모르나 단을 쌓고 비를 세워 선영을 표지하는 것이 성인의 뜻에 어긋날 것이 없다고 하였더니 모두 좋다고 하였다.

 

송암공이 자제 넷을 두었으니 장자는 국당 천( 菊堂 蒨)이고 차자는 부정 매(副正 邁)이고 제三자는 상서 과(尙書 薖)이고 제四자는 사인 조(舍人 蓧)이다. 국당공파의 판서 현직(判書 顯稷). 승지 학영(丞旨 鶴榮) . 부총관 용상(副摠管 容象)과 상서공파의 좌의정 유원(裕元) . 참판 유응(叅判 裕膺) . 승지유석(丞旨 裕奭) . 응교 유승(應敎 裕丞)이 역사를 감독하고 익재 후손 정언 용우(正言 龍雨)는 장파이므로 이 일을 주관하여 나 유원에게 그 사실을 적도록 하였다.

 

아! 총(塚)은 높은 무덤을 의미하는 것이고 농(儱)은 언덕을 의미하는 것이요. 묘는 무덤의 구역을 의미하는 것이니, 옛날에 봉분을 짓지 않고 석물을 세우지 않은 것은 검소를 숭상했기 때문이다. 벽돌로 단(壇)을 쌓는 것은 사모의 뜻을 부치는 것이다. 지금 선대의 산소역내에 단을 모아 봉제하고 돌을 세워 새기여 후인으로 하여금 우리 집의 보본(報本)의 뜻을 알도록 하는 것이니 어찌특히 울타리와 정자를 초동과 목동을 막겠는가.

 

무진년(1868) 봄에 유원이 직접 도리촌의 일을 살펴보고 그 사실을 상세하게 묘단비(墓壇碑)에 기록하였다. 뒤이어 족질(族侄) 민영(民榮)으로 하여금 다시 파서 징험하여 보았더니 밀직공의 묘소 위에 첫 무덤에 다만 유기 수저 하나와 쇠못 네 개가 나왔는데 너더대 치 되었다.

 

제일 위의 무덤에는 석관(石槨)앞에 조그마한 돌이 하나 서 있어서 길이가 몇자 되었다. 석곽 위에는 큰 돌을 세 개 얹어 놓았는데 천판 같았다. 믿에 돌이 이지러진 데가 있어서 여나뭇이 조금 열고 살펴 보았더니 황토만 가득 차 있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곧 개봉하여 전과 같이 하여 가로하고 나무뿌리와 풀덩쿨을 제거하고 익재공 묘직(墓直)에게 수호하도록 하였다. 대개 고려 때는 관에다 쇠못을 사용하고 먹던 수저를 넣어 주었다. 예장(禮葬)에는 석관을 사용하였고 한반석(限半石 : 대문 역할을 하는 조그만 평판돌)을 넣었다.

 

 제일 첫 무덤이 예장인 것은 가히 알 수 있다. 생각큰대 송암은 고려의 대관이었으니 반드시 상설(象設)이 볼 만한 것이 있는데 지금 아무 징험할 것도 없고, 기와 부스러기와 벽돌 따위가 앞뒤로 나올 뿐이다. 대저 무덤은 계급이 낮은 장지는 아니다.

 

 이것이 우리 이씨의 무덤이라면 송암공의 묘소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징험할 만한 아무런 표지도 못 얻었으니 후손들의 한이 다하지를 않느다. 설단하고 사실을 기록하고 또 이것을 끝내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