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沙先生別集卷之四>雜記
■선부인규범(先夫人閨範)/백사 이항복의 어머니
백사 항복 술(白沙 恒福 述)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우리 집은 가법(家法)이 매우 엄격하였다.
선부인(先夫人)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하고 인자하였으나, 규범(閨範)에 이르러서는 엄숙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 고아(孤兒)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행실을 만분의 일도 다 기억할 수 없으므로, 직접 보아서 전할 만한 것만을 기록하는 바이다.
선부인(先夫人)께서는 자제들이 앞에 가득 있을 적에는 아무리 심한 더위일지라도 감히 옷자락을 걷거나 웃통을 벗지 않았다. 중형(仲兄)이 한 번은 몸이 피곤하여 관(冠)을 벗고 한쪽으로 기우듬히 기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부인의 좌석과는 매우 멀었으나 바라보이는 곳이었으므로, 부인이 정색(正色)하여 이르기를, “네가 이미 장성한 나이인데 아직도 부모 앞에서 무례(無禮)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우리 집에 전해 온 교훈은 본래 이러하지 않다.”하였다.
이어서 여러 딸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우리 집은 자녀들이 매우 많고 또 이미 장성한 나이이니 충분히 예법(禮法)을 알 만하다. 비록 남매 사이일지라도 절대로 웃으며 서로 농 지거리를 하여 스스로 전훈(典訓)을 손상시켜서는 안 되고, 앉거나 눕거나 말을 할 때에 모두 분별이 있어야 한다.” 하였다.
외숙(外叔) 최 안음공(崔安陰公)은 어려서 부인과 함께 자라면서 형제들 가운데 가장 서로 친하였고, 장성해서는 집이 한 이웃에 있어 조석(朝夕)으로 내방(來訪)하였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매양 서로 만날 때마다 한 번도 혼자 앉아서 서로 대(對)한 적이 없이 반드시 시비(侍婢)를 곁에 있게 하고서 이르기를, “내 나이 이미 늙었고 오라버니 또한 늙었으니, 친친(親親)의 도리에 있어 참으로 이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데, 습성(習性)에 얽매여 절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부인(婦人)의 도리는 서로 무람없이 친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나치게 스스로 장중(莊重)한 태도를 갖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부인의 평생 행하신 일 가운데 이와 같은 유(類)가 매우 많았을 것이나, 내가 어렸기 때문에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할 뿐이다.
우리 가문(家門)의 이러한 법도를 서로 전하여 실추시키지 않았는데, 내 몸에 이르러서는 타고난 성질이 탄솔(坦率)하여 하는 일이 대부분 데면 데면하였고, 또 선훈(先訓)을 잘 준행해서 종당(宗黨)에 본보기가 되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매양 여러 조카들이나 자제들이 때로 와서 찾아볼 적마다 혹 부인(婦人) 등과 절제 없이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구분 없이 서로 섞여 앉아서 예법을 실추시키어, 남들이 보고 듣기에 해괴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가한 때에 매양 선부인의 의연하게 행실을 규제하시던 일을 생각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놀라며 두려워하곤 하였다.
성인(聖人)이 예(禮)를 제정함에 있어 나이 10세가 넘으면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옷걸이를 함께 쓰지 않으며, 여자가 밤길을 다닐 적에는 촛불을 들고 다니고, 수숙(嫂叔) 사이에는 서로 방문(訪問)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래서 춘추 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의 부인 경강(敬姜)은 종조모(從祖母)로서 종손(從孫)인 계강자(季康子)와 이야기를 할 적에도 문(門)만 반쯤 열고 서로 문턱을 넘어가지 않았으니, 그 혐의쩍은 것을 변별하고 미세한 일을 신중히 하는 뜻이 지극히 세밀하고 자상하였다.
성인(聖人)의 마음으로 말하자면, 남녀가 자리를 같이하고 옷걸이를 함께 쓸 경우에는 문득 부정한 마음이 생기고 욕정(慾情)이 동한다거나, 여자가 촛불 없이 밤길을 다닐 경우에는 문득 남의 처첩(妻妾)을 끌어가는 일이 생긴다고 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남녀의 분별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후세의 혐의를 막을 수 없고, 음일(淫佚)의 단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經)을 저술하여 훈계를 내린 것이 이렇게 엄절(嚴切)하였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이런 뜻을 알지 못하고 친척끼리 서로 접대 할 때에 분별이 있게 하면 ‘친척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다’고 말하고, 윤기(倫紀)도 없고 법도도 없는 집을 가리켜 ‘친척들 사이에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며, 심지어는 서로 무릎을 가까이 대어 앉고 한 밥상에서 밥을 먹으며 농지거리를 하고 웃고 노닐면서 급진적으로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져 들어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혹은 실정 밖의 비방이 일어나거나 규방(閨房)에서 상피(相避)의 변이 생기기도 하여 패가망신을 한 다음에야 후회를 하게 되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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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白沙先生別集卷之四>雜記
吾家家法甚嚴。先夫人天性溫柔慈順。至於閨範。有斬斬不可犯者。余少孤不能記其萬一。其得於親覩而可傳者。子弟滿前。雖盛暑。不敢褰袒。仲兄甞因倦跛倚脫冠。與夫人座甚遠。而可以望見。夫人正色曰。汝年已長大。猶不知父母前不可無禮耶。吾家相傳之訓。本不如是。因顧謂諸女曰。吾家子女甚繁。而年歲已長。足知禮法。雖娚妹之間。切不可嬉笑相謔。自虧典訓。坐卧言語。皆當有別。外叔崔安陰公。與夫人少相長。於兄弟中㝡親。及長。家在一隣。朝夕來訪。每相見。必使侍婢在側。未甞於獨處相對曰。
吾年已老。娚亦老矣。親親之道。固不當如是。習性所拘。自不得不爾。且婦人之道。與其流於褻狎。寧過自莊重。夫人平生所行。若此類甚多。惜乎。余以幼稚多不能記也。吾門此法。相傳不墜。至于余身。稟性怛01卛。事多簡易。且不能克遵先訓。以式宗黨。每諸姪子弟以時來見。或與婦人輩。笑語無節。雜坐無間。墜失禮法。有駭瞻聽。時於燕閑。每念先夫人制行之毅。不覺蹶然驚懼。聖人制禮。年過十歲。男女不同席。不同拖02架。夜行以燭。嫂叔不通問。敬姜以從祖母之親。與季康子 語。䦱門而不踰閾。其別嫌愼微之意。至密且詳。聖人之心。非謂同席同架則便生心動慾。無燭夜行則便摟人妻妾。盖男女之別。不如是。無以防後世之嫌。而有以起淫佚之端。故其立經垂訓。嚴切如此。後世之人。不知此意。親戚接遇。有別則曰。短於睦族。指無倫無法之家曰。親戚相愛。甚至於接膝而坐。同床而食。謔浪笑傲。浸浸03淪入於禽獸之域而自不能覺。或謗興於情外。變生於帷薄。亡身滅家而後悔之。可不戒哉。
[01]怛 : 坦
[02]拖 : 椸
[03]浸浸 : 駸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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