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백사선생구제중수기(白沙先生舊第重修記).

야촌(1) 2010. 8. 8. 15:20

■ 白沙先生舊第重修記
   (백사선생구제중수기)    

 

월성 이유원 경춘 저(月城李裕元景春著) 

 

유원이 삼가 「백사선생연보」를 살펴보니 선생은 병진년 10월 15(1556, 명종 11)일에 한성부 서부 양생방 집의 서쪽에서 출생하셨다. 즉 숭례문 내 남록 아래의 자각봉의 제1 동학이다. 나라에서 창고를 설치한 후에는 창동이라 불렸던 곳이다. 옛날에 선생의 구택이 있었다. 선생은 대부인 최씨를 모시고 이곳에서 성장하셨다.

 

임진왜란 후에도 홀로 우뚝하게 솟아서 존재하였다. 봉사손인 효정공 경일에 이르기까지 7대가 서로 전한 땅이다. 선생이 회나무 2그루를 그 위에 심었고, 후인들이 작은 정자를 짓고 이로 인하여 명명하였다. 세대가 점점 내려와서 남에게 빌려주는 집으로 바뀐 지가 60년이 되었다.

 

세인들은 여전히 선생의 구택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인다. 유원이 종중에 의논하였다. 먼저 작은 정자 터를 살피고 뒤에 옛터의 가격을 보상하였다. 사당은 매우 넓고 훌륭했다. 예전처럼 붉게 칠했다.

 

인조 계해년 이후에 연양 이공의 사당을 건립하기를 명하였다. 승평 김공이 왕께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들의 존경하는 스승의 사당은 비바람도 제대로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스승의 제자의 사당이 먼저 건립되니 매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인조임금께서 호조에 명하시어 선생의 사당과 서천 정공의 사당을 건립하도록 하셨다. 용마루 끝이 지금까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정당은 겨우 수십 칸인데, 무릎이나 간신히 넣는데 지나지 않는다. 뜰에서는 말을 돌릴 수 없다. 외당은  현재는 없다.

 

그러나 옛 노인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온돌방이 2칸이 채 안되었고, 흙으로 지은 마루도 1칸이 채 안되었다고 한다. 그 300여 년 전의 일을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집이 높고 메마른 곳이 아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이에 먼지를 쓸고 잡초를 제거하고 약간 수리하였지만 집의 구조는 바꾸지 않았다.

 

아, 이 집이 액운을 당한지 매우 오래 되었다. 지금 비로소 우리 종친들이 이집을 지키도록 했다. 영묘한 물건이 옛 모습을 회복하였으니 마치 조상들이 묵묵히 명령하는 것 같도다!

 

한강가의 양벽정 유지는 이미 종가에 귀속되었다. 선생의 신주를 받들어 지금 이에 다시 돌려준다. 감히 선조의 유지를 좆는 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생각건대 이 늙고 병든 사람은 물끄러미 응시하고 포기할 수는 없다. 또한 훗날의 일을 알 수 없으니 그 마음이 아픔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 일이 다 마무리되는 날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슬프게 지난 일을 생각하고 즐겁게 낙성식을 가졌다. 비단 우리 종인들에게 다행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사우들에게도 다행스런 일이 될 것이다. 갑신(1884, 철종 21)년 늦여름에 백사공의 9세손 유원은 삼가 쓰다.

 

[부기]

 

연양은 황해도 연안의 별칭입니다. 연양 이공은 백사선생의 제자인 조암 이시백으로 생각됩니다. 승평은 전라남도 순천의 별칭입니다. 승평 김공은 북저 김유로 생각됩니다.

 

[국역]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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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裕元謹按白沙先生年譜。先生於丙辰十月十五日。降于西部養生坊第西部。卽崇禮門內南麓下紫閣峯之第一洞壑。而設倉之後。稱爲倉洞者也。舊有先生宅。先生奉大夫人崔氏。生長于此。壬辰後巋然獨存。至祀孫孝定公敬一。爲七世相傳之地。先生手植雙檜在其上。後人構小亭。因以名之。世代浸降。轉爲僦舍。爲六十年。世人尙指點以先生舊宅。裕元謀宗中。先占小亭。後償舊址。祠宇則極宏偉。丹艧如昨。仁祖癸亥後。命建延陽李公祠。昇平金公奏曰。臣等尊師之祠。風雨不蔽。而門弟之祠先建甚不安。上命度支建先生祠及西川鄭公祠。屋角至今相望。正堂則僅數十間。不過容膝。庭不得旋馬。外堂則今不存。而古老所傳。房堗未滿二間。其軒土而亦未滿一間。其三百餘年事。雖未可詳。不其爽塏可知。乃掃塵除草。畧加修葺。間架不改也。噫。此舍遭厄許久。今始使吾宗守之。神物之返舊。若有祖先之所默命也歟。漢水上漾碧亭遺基。已歸宗家。奉先生祠版。今於此復爲還償。非敢曰追先志。而顧此老且病者。不能久視。拋而棄之。又未知他日事。其爲傷心果何如哉。訖役之日。咸聚族親。愀然感舊。歡然落成。非但爲吾宗之幸。抑爲士友之幸也。甲申季夏。九世孫裕元謹識。

 

[자료문헌]

◇嘉梧藁略) >嘉梧藁略册十二 >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