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중국사(中國史)

환공(桓公) /관중(管仲) /조말(曺沫)

야촌(1) 2010. 6. 20. 13:55

■환공(桓公) : 중국(中國) 춘추(春秋) 시대의 사람으로 

   제(齊)나라 15대 임금[在位 : 685 ~ 643 B.C] 이다.

 

포숙아(鮑叔牙)의 진언으로 공자 규의 신하였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한 뒤 패자(覇者)의 자리를 확고히 하여 춘추오패(五覇)의 한 사람이 되었다.

 

성은 강(姜), 이름은 소백(小白)이며, 희공(僖公)의 아들이다. 

희공을 이어 즉위한 형 양공(襄公)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죽이자 화를 피하기 위하여 거(莒) 땅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희공은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피살되었고 공손무지도 곧이어 암살됨으로써 제나라는 군주가 없이 혼란에 빠졌다.


이에 환공(桓公) 은 노나라로 망명하여 노나라의 후원을 업은 이복형 공자(公子) 규(糾)와 후계 다툼을 벌여 공자 규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즉위 후 포숙아(鮑叔牙)의 진언으로 규의 신하였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한 뒤 관중의 도움으로 제후와 종종 회맹(會盟)하여 신뢰를 얻었으며, 특히 규구(葵丘:河南省)의 회맹을 계기로 패자(覇者)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균등(均等)한 조세제도시행(租稅制度施行). 군대(軍隊)를 창설(創設). 소금과 철(鐵)을 국가가 독점생산(獨占生産). 세습(世襲)이 아닌 중앙집권적 관료제도(中央集權的 官僚制度)등을 완전히 확립(確立). 하였다. 관중(管仲)이 죽으면서 수조(竪刁)와 역아(易牙)를 멀리하라 일렀으나 결국 수조[스스로 거세하여 환관(宦官)이 됨]와 역아(환공의 환심을 사기위해 자기 아들을 죽여 삶아바침, 음식을 잘 만들었음)를 불러 화(禍)를 자초(自招함)했다.

 

환공(桓公) 이 죽자 장례를 67일 만에 치렀는데, 수조(竪刁)와 역아(易牙)는 환공의 장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권력다툼만 심해 혼란이 극심하여 국력(國力)이 급속(急速)히 약화(弱化)되었다.

 

※환공이 공자였을 때 형인 제(齊) 양공이 누이인 문강(文姜)과 정분이 있었다. 문강이 노나라 왕에게 시집을 갔는데, 15년만에 제나라로 남편과 같이 근친을 가서 다시 양공과 사련(邪戀)을 불태우다가 남편에게 들켜서 제(齊) 양공(襄公)이 팽생을 시켜 노(魯) 환공(桓公)을 죽였다.

 




↑제환공(齐桓公)         ↑제환공(齐桓公)         ↑春秋時期形势圖

 

 

■관중(管仲,미상 ~ BC  645)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으로, 환공(桓公) 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中原을 制壓부국강병을 꾀하였다. 소년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포숙아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라 하여 유명하다.

 

이름은 이오(荑吾). 영상(潁上:지금의 안후이 성[安徽省] 서북부) 사람으로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에 경(卿)의 벼슬에 올랐던 그는 환공의 개혁 추진을 도왔다. 토지등급에 따라 세금을 걷고 농업을 발전시켰다. 동시에 염전·제철업을 일으켜 제나라를 춘추시대 가장 막강한 맹주(盟主)로 만들었다.

 

그의 저서로 알려진 관자(管子>의 목민(牧民)에선 "창고가 가득 찬 뒤에야 예절을 알게 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라고 써서 도덕교화(道德敎化)가 물질생활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설파했으며,얻으려고 하면 먼저 줘라. 그것이 정치의 진리다라고 설파했다.

 

또한「4유(四維:예(禮)· 의(義)· 염(廉)· 치(恥)가 널리 퍼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라고 강조하여 도덕교화의 역할을 중시했다. 관중의 이름을 딴 〈관자 管子〉는 86편 가운데 현재 76편만 전한다. 그중 목민(牧民)· 권수(權修)· 형세(形勢)· 칠법(七法) 등은 관중의 언론사상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관자(管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가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관중 상(管仲 像)                                ↑관중 묘(管仲 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