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비각기(瓢巖碑閣記)
월성이유원경춘저(月城 李裕元 景春 著)
慶州邑治之東月城未五里。有山巖巖背石而特立者曰瓢巖。我李氏鼻祖諱謁平也。按三韓史乘。有神人降于瓢巖下。翊赫居世爲王。賜姓李氏。得壽二百歲。後姓蕃衍。羅麗以降。簪組蟬聯。遂爲大家。山非高而不敢不仰也。巖雖古而不敢不敬也。純祖丙寅。族祖相國敬一,宗丈尙書集斗兩公。伐石謀竪。起述事蹟。架椽簷以庇風雨。丙午。先君子文貞公巡到玆邑。拜舊址。重修碑閣。讌宗族。聞風會者甚衆。寔報本追遠之意也。噫。嶠南今之鄒魯也。山得正氣。磅礴淸淑。絃誦之聲。家家尙聞。而月城爲吾家鄕。奚特海南千里之謂也。先儒曰。子孫之多。雖至千萬人。而莫非一本也。原厥始而返諸本。則千萬年一日也。千萬人亦一身也。然則碑閣之奉。非玄元立廟之比。惟我諸宗。謹守焉。汛掃焉。其勿替之。
◇嘉梧藁略 册十二 > 記
[국역]
경주읍(慶州邑) 동쪽으로 월성(月城)에서 5리(五里)가 못되는 지점에 산이 높고 높아 돌을 등지고 우뚝하게 서있는 곳이 바로 표암(瓢巖)이니 우리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이신 알평공(謁平公)이 처음 강처(降處)한 곳이다.
삼한사승(三韓史乘)을 살펴보면 신인(神人)이 표암(瓢巖) 아래에 내려와 혁거세(赫居世)를 도와 왕으로 삼고 이(李)로 사성(賜姓)되며, 이백세(二百歲)의 수(壽)를 누리고 후손(後孫)이 번창하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를 지내오면서 벼슬이 이어지어 드디어 대가(大家)가 되었으니 산(山)이 높지 않으나 감히 우러러 보지 않을 수가 없으며, 바위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감히 공경하지 않을수가 없다.
순조(純祖) 병인년(丙寅年, 1806) 에 족조(族祖) 의 정승인 경일(慶一)과 종장(宗丈)인 판서(判書) 집두(集斗) 양공(兩公)이 비석(碑石)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고 비각(碑閣)을 지어 풍우(風雨)를 방비 하였다.
병오년(丙午年, 현종 12,1846)에 우리 선친(先親) 문정공(文貞公)께서 이 고을에 순행 하시었다가 옛터를 찾아 참배하고 비각(碑閣)을 중수하고 종족들과 연회를 베풀자 소문을 듣고 모인 자가 심히 많았으니 이것이 바로 보본추원(報本追遠)하는 뜻이라 하겠다.
아! 영남(嶺南)은 지금의 추로(鄒魯①)의 고을이다. 산은 정기(正氣)를 얻어 방박(磅礴)하고 청숙(淸淑)하며, 현송(絃誦②)의 소리가 집집마다 들리는데 월성(月城)이 우리 집의 고향이 되었으니 어찌 바다의 남쪽 천리(千里)라고 이러겠는가.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자손(子孫)이 많아서 비록 천만(千萬) 명에 이르러도 한 근본이 아님이 없으니 그 처음을 생각하여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천만년(千萬年)이라도 1일(一日)과 같고, 천만(千萬) 명이라도 또한 일신(一身)과 같으니 그러한즉 비각(碑閣)을 받드는 것이 현원입묘(玄元立廟③)에 비할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 제종(諸宗)들은 삼가 수호하고 깨끗이 간직하여 쇠체(衰替)하지 말지어다. ’
[註解]
①추로(鄒魯)의 나라 :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순후한 풍속(風俗)이 있는 곳을 말함. 추(鄒)는 맹자(孟子)가 태어난
곳이고 노(魯)는 공자(孔子)가 태어난 곳이다.
②현송(絃誦)의 소리 : 거문고 타고 글 외우는 소리로 선비들이 학문함을 말한다.
③현원입묘(玄元立廟) : 당(唐)나라때, 노자(老子)를 시조(始祖)로 추존하여 사당을 지어 받들었음.
자료문헌 : 1987년 경주이씨대종보(慶州李氏大宗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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