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참판 생곡 이인환(李寅煥) 묘지명/30世
[생졸년] 1633년(인조 11) ~ 1699년(숙종 25).
이유원 찬(李裕元 撰)
공의 휘(諱)는 인환(寅煥)이요. 자는 문백(文伯)이요. 성(性)은 이 씨이니 경주(慶州) 사람이다.
신라 원신(元臣=大臣) 알평(謁平)으로 시조를 삼고 여조(麗朝)에 휘 제현(齊賢)이 있으니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이요.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호는 익재(益齋)이다.
본조(本朝=조선을 말함)에 휘 원(黿)은 갑자년의 사화에 혹화(酷禍)를 입었는데 뒤에 도승지(都承旨)를 증직하였고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니 공의 육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경륜(憬胤)이니 이조판서를, 증직하였고 증조의 휘는 대건(大建)이니 진사요. 호는 오촌(梧村)이니 좌찬성(左贊成)을 증직하였고 할아버지의 휘는 시발(時發)이니 형조판서로 영의정을 증직하였고 호는 벽오(碧梧)이다.
아버지의 휘는 경휘(慶徽)이니 이조판서요. 호는 춘전(春田)이다. 어머니는 해 평 윤씨(海平尹氏)니 광흥수(廣興守) 게(垍)의 따님이다. 공이 숭정(崇禎=명나라연호) 계유(癸酉) 1633년(인조 11)에 출생하여 백부(伯父) 증 이조참판 경연(慶衍)에게 입후(入後=양자로 들어감) 하였다.
양어머니는 증 정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니 충의위(忠義衛) 대복(大復)의 따님이다.
공이 경자년[庚子年, 1660년(현종 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사년[乙巳年, 1665(현종 6)] 정시(庭試)때 대궐앞마당에서 보이던 문과(文科)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正九品)에 보직되었다.
정미년[丁未年,1667(현종 8)]에 천거되어 한원(翰苑=‘한림원’이나 ‘예문관’을 말함)에 들어가 검열(檢閱-正九品)을 배수하였다가 대교(待敎-正八品), 봉교(奉敎-正七品)로 전직되었다.
기유(己酉) 1669년(현종 10)에 생부(生父) 판서공 상사를 만나고 신해년(辛亥年,1671)에 복(服)을 벗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正六品)에 승진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郎-正六品)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正六品)으로 옮겼다.
조사기(趙嗣基)가 제용정(濟用正-正三品)이 되어 탐하고 포악함이 법도가 없었다. 공이 탄핵하니 사기(嗣基)가 상소를 올리니 도리어 모함하고 인하여 예론(禮論)에 언급하여 말이 극도로 모험하였다.
대사간 이압(李押)이 논박하여 사기(嗣基)를 귀양 보냈다.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正六品)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교체되어 지제교 정초청(精抄廳), 낭청(郎廳)을 겸직하였다가 양친(養親)하기를 빌어 연천현감(漣川縣監-從六品)이 되었다.
계축년[癸丑年, 1673(현종 14)]에 천입(薦入=추천)으로 옥당(玉堂)에 들어와 수찬(修撰-正六品)이 되었고 갑인년[甲寅年,1674(현종 15)]에 부교리(副校理-從五品)에서 금성현감(錦城縣監-從六品/지금의 나주)으로 나가게 되니 또한 양친(養親)하기를 위한 것이다.
조금 있다가 돌아와 다시 옥당을 배수하니 이때 우재(尤齋) 송공(宋公=송시열)이 기해년[己亥年,1659(효종 10)] 예론(禮論)으로써 일변인(一邊人=자기의 상대방 인물)의 모함한바가 되었다.
공이 상소로 변명하여 말하되『곽세건(郭世楗)의 상소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 것도 실상 이 일을 위한 것인데 인산(因山 : 임금의 장례)을 겨우 마치매 온 나라가 애통하는데 대관(臺官)이 세건(世楗)의 의론을 엮어 기회를 타서 모함하여 반드시 조정을 비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하니 임금은 엄한 비답으로 크게 꾸짖었다.
을묘년[乙卯年,1675(숙종 원년)]에 호서(湖西) 안렴사(按廉使-從二品)로 나갔다가 돌아와 천안군수(天安郡守-從四品)가 되었고 조금 있다가 파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병진년「丙辰年,1676(숙종 2)」에 양양부사(襄陽府使-從三品)를 제수하고 경신년「庚申年,1680(숙종 6)」에 청주목사(淸州牧使-正三品)를 제수했는데 나가지 않았다.
헌납(獻納)으로서 소명을 받아 사간에 승진하고 보사 원종훈(保社原從勳 : 1680년 경신대출척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 호)에 참여하여 봉상시(奉常寺), 사복시정(司僕寺正-正三品), 성균관(成均館)의 사성(司成-從三品)을 역임하였다.
인경왕후(仁敬王后) 상사에 산릉(山陵) 도감도청(都監都廳)으로 차출되었고, 그사이에 집의(執義-從三品)와 응교(應敎-正四品)를 지냈다. 신유년(辛酉年,1681)에 장사를 마무리하고 통정(通政-正三品)에 승진하여 형조, 병조에서 참의(參議-正三品), 참지(參知-正三品)가 되었고 은대(銀臺 : 승정원의 별칭)에 들어와 좌부승지(左副承旨-正三品)가 되었다.
겨울에 어머니 상을 당하고 갑자년「甲子年, 1684(숙종 10)」에 복을 벗자 대사간(大司諫-正三品)을 배수하니 가뭄으로 인하여 상소로 재앙을 누그리는 도를 진술하고 인하여 호서(湖西)의 전답 측량이 급선무가 아니다 말하니 임금이 받아 들였다. 가을에 좌승지(左承旨)를 배수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전직되었다.
을축년「乙丑年)에 관학(館學 : 성균관과 사학(四學)」에서 통문을 돌린 일이 있고, 서로 상소 비방하여 정착될 날이 없었다. 공이 대관(臺官에 있으면서 명재(明齋) 윤공(尹公)을 신구하여 말하되 『윤증(尹拯)이 친우에게 편지를 준 것은 현인을 모함하고 죄안(罪案)을 인증한 것이 아닌데 시비가 혼잡하고 의논이 더욱 격 열하니 임금으로서 조제할 도는 마땅히 밝게 분별하여 통쾌하게 물리칠 것이라』했다.
경질하여 공조참의를 배수하였다가 양친(兩親)을 위하여 외직으로 무주(茂朱) 부사가 되었다.
병인년(丙寅年,1686)에 윤부인(尹夫人=생가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무진년(戊辰年,1688)에 복(服)을 벗으매 호조참의(戶曹參議-正三品)를 배수하였다가 대사성(大司成-正三品)으로 옮기었다.
기사년(己巳年,1689)에 시사(時事)가 변천함을 보고 나가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 돌아와 아우 매산(梅山)공과 더불어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갑술년(甲戌年,1694) 개혁되매 경상감사(慶尙監司-從二品)를 제수하니 청렴하게 몸을 갖고 간소하게 일을 제재(制裁)하였다.
을해(乙亥1695), 병자(丙子,1696) 두 해의 큰 흉년을 만나 잔휼(賑恤)을 논의하는데 곡식 모으는 계책을 내는 이가 있었다. 공은 말하되 『관으로부터 곡식을 무역하는 것은 민간에 저축된 것을 모으는데 불과하니 이는 허명만 있고 실해(實害)를 받는데 불과한 것이라』했다.
조정에서는 여러 도(道)의 주전(鑄錢)을 허급하여 하여금 진휼(賑恤)에 보용케 하였다. 공은 생각하기를 돈의 폐단 된지가 오래인데 이제 또 화폐를 늘리면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는다. 하여 그에 대한 불편상황을 주달하였다.
도정방침이 조적(糶糴)을 고르게 하고 부역을 면제하여 백성을 요란하지 않게 함으로서 급선무를 삼아서 유리하는이가 적고 진휼정책이 가장 우수하니 백성들은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사모의 뜻을 부쳤다.
진휼(賑恤)을 마무리하매 대사간(大司諫-正三品)을 제수했다. 상신(相臣) 남공(南公) 구만(九萬)이 임금께 아뢰기를 『이 모든 외직이 전극[剸劇=전결(專決)과 같은 뜻임]으로 성명이 있었으니 마땅히 외직으로 유임하여 성적을 거두게 할 것인데 대관으로서 외직청하기가 곤란할 것이라』하였다.
임금은 특명으로 외직에 유임하여 병자년(丙子年,1696)에 개성유수(開城留守-從二品)를 발탁 제수하고 정축년(丁丑年,1697)에 대사성(大司成-正三品)으로 돌아와 동지경연(同知經筵), 춘추관, 의금부, 성균관사, 주사당상(籌司堂上: 비변사의 당상관), 전생서(典牲署)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를 겸직하였다.
여름에 도승지를 배수하였다가 한성부 좌윤, 예조참판(禮曹參判-從二品)에 전보 되였다.
무인년(戊寅年,1698)에 용만(龍灣)시장에서 북로(北虜 : 북쪽의 오랑캐)와 관련된 일이 있게 되자 공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삼아 북사(北使 : 청나라사신)를 영접하게 했고, 조금 있다가 이조, 병조참판을 배수하였다.
겨울에 단종(端宗)이 복위하게 되자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에 차출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고 기묘년(己卯年,1699)에 지진사(知申事)를 배수하였다가 삼월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六十七歲이다.
이해 오월에 초취(初娶)와 후취부인(後娶婦人)과 함께 진천군(鎭川郡) 동쪽 묘좌(卯坐) 언덕에 합폄(合窆) 하였다. 초취 증 정부인(贈 貞夫人)은 완산이씨(完山李氏)니 군수(郡守) 욱(旭)의 따님이요.
후취(後娶) 정부인(貞夫人)은 정주한씨(淸州韓氏)니 선무랑(宣務郎-從六品) 유경(有慶)의 따님인데 모두 아들이 없어 막내아우 인식(寅烒)의 아들 태곤(泰坤)으로 양자하니 참봉(參奉)이요. 큰 따님은 감사(監司) 남정중(南正重)에게 출가하였으니 초취소생이요.
다음은 교관(敎官) 민백기(閔伯基), 부사 류봉일(柳鳳逸), 장원급제한 윤성시(尹聖時), 윤성(尹晟)에게 출가하였으니 후취소생이다. 태곤(泰坤)은 승지 박세전(朴世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三남一녀를 낳으니 석호(錫祜), 석위(錫褘), 석우(錫祐)요. 여서(女壻)는 감역(監役) 홍계만(洪啓萬)이다.
석호(錫祜)의 남은 복원(復源)이요. 여(女)는 송수명(宋洙明)이요. 석위(錫褘)의 계남(系男)은 유원(有源)이요. 계남(系男)은 박내원(朴來源)이요. 석우(錫祐)의 남은 장원(長源)이요. 여(女)는 정준량(鄭駿良)이요.
복원(復源)의 아들 집린(集麟)은 현감이요. 집구(集龜), 집봉(集鳳)은 모두 출계(出繼)하였고 여(女)는 류인진(柳仁鎭), 진사 홍우연(洪祐淵), 박중규(朴重圭), 박상규(朴象圭)요.
유원(有源)의 계남(系男)은 집봉(集鳳)이요. 장원(長源)의 계남(系男)은 집구(集龜)요. 여(女)는 정언(正言) 박종겸(朴宗謙)이요. 집린(集麟)의 아들 진영(晉榮)은 현감이요. 다음은 보영(普榮)이요. 여(女)는 서공보(徐恭輔), 진사 정동미(鄭東美), 직장(直長) 심주손(沈周孫)이요
진영(晉榮)의 아들은 규철(圭哲)이요. 내외 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자품이 어질고 효우에 독실하여 심부인(沈夫人)이 병이 있어 달걀의 노른자를 복용하였다. 공은 나이가 열 살도 못 되었어대 매일 새벽에 닭장 밑에 기다려 가져다 드리니 심부인은 그 노고를 딱히 여겼다.
공은 말하기를 「비복들은 새것과 오래된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하였다. 심부인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 병이 낫겠구나」하였다. 장성한데 미치매 몸가짐을 간소하고 깨끗하며 번화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외직으로 나가매 구획과 재처가 편이에 합하고 내직[전지(銓地=이조를 말함)에 들어오매 문정(門庭)이 물처럼 깨끗하여 한사(寒士)의 집과 같았다. 반장(泮長=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을 때 유생으로 하여금 나이를 비례하여 앉게 하고 말하기를 「명륜당에서 장유(長幼=어른과 아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의 차서를 폐핳 수 없다.」하고 주달하여 옛 규칙을 회복하였다.
대성(대성(臺省=사헌부의 사간원)에 있을 제 일을 만나면 상소로 항거하여 밝게 시비를 분석하고 당쟁으로서 경계하여 시세 의논에 쫒지 않으니 아는 이들은 공이 중도를 잡 는다 일컬었다.
일찍이 말하되 「내가 조정에 벼슬한지 三十년에 직위가 경재에 이르러 비록 자그마한 연애(涓埃=물방울과 티끌이라는 뜻으로, 아주 미세한 것을 말함) 일도 보답하지 못하였지만 벼슬을 얻고 잃는 즈음에 이러서는 일찍이 마음에 싹트고 입에 발설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내 평생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라」하였다.
아! 공은 나에게 동향의 선배이다. 익히 공의 위대한 업적을 듣고 만생으로 뵙지 못한 한탄이 있었는데 후손 규철(圭哲)이 약재(約齋) 류공[柳公=文化人 류상운(柳尙運)을 말함)이 저술한 행장으로서 묘지명을 위촉하니 나의 서술한바가 모두 약재(約齋)공의 말이다.
선배의 뒤에 부기(附驥=후배가 선배에 힘입어 명성을 얻음) 함을 다행으로 여겨 이에 명을 지으니 명에 이르되,
익재(益齋) 세가(世家)에서
춘전(春田)을 독실이 가르쳤도다.
춘전이 아들이 있으니
생곡(生谷)이 어지었네.
종가를 주장하여 후손을 열고
선대를 빛냈도다.
여섯 번 수령직에 부임하였고
두 번 감사. 유수 직을 맡았었네.
백성들은 기념비석을 세우고
묘당에선 대신 천이 있었지
흉년 진휼에는 곡식을 조절하였고
폐단방지는 돈의 남발일세.
들어와 계획을 찬조하여
이조(吏曹), 호조(戶曹), 병조(兵曹) 참판을 역임하였고
대사간이 되매 조정은 숙연하였네.
사람들은 엎어지고 쓰러져
온전한 이가 적은데
공은 홀로 우뚝하여
의지함도 없고 편벽(偏僻) 됨도 없도다
임금의 은총은 바야흐로 경주했는데
七十수도 못하였네.
두 부인과 합폄하니
잔천 동쪽 언덕일세.
명사(銘詞)로 추후 추천하니
옛 묘에 새 새김이로다.
옮긴이 : 야촌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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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吏曹參判李公墓誌銘(이조참판이공묘지명)
月城 李裕元 景春 著
公諱寅煥。字文伯。號生谷。姓李。慶州人。以新羅元臣謁平爲鼻祖。麗朝有諱齊賢。鷄林府院君。謚文忠號益齋。本朝有諱黿。被甲子禍。後贈都承旨。號再思堂。寔公六世祖也。高祖諱憬胤。贈吏曹判書。曾祖諱大建進士。號梧村。贈左贊成。祖諱時發。刑曹判書。贈領議政。號碧梧。考諱慶徽。吏曹判書。號春田。妣海平尹氏。廣興守垍之女。公生以崇禎癸酉。爲伯父贈吏曹參判諱慶衍後。妣贈貞夫人靑松沈氏。忠義衛大復女。公登庚子司馬。中乙巳庭試文科。補承文院正字。丁未。薦入翰苑。拜檢閱。轉待敎,奉敎。己酉。丁判書公憂。辛亥制闋。陞成均舘典籍。歷兵曹佐郞。移司諫院正言。趙嗣基爲濟用正。貪虐不法。公論劾之。嗣基投䟽反噬。仍及禮論事。語極危險。大司諫李押論竄嗣基。遞拜侍講院司書,司憲府持平。兼知製敎,精抄廳郞廳。乞養爲漣川縣監。癸丑。薦入玉堂爲修撰。甲寅。遷副校理。出守金城縣。亦爲養親也。未幾還。復拜玉堂。時尤齋宋公。以己亥議禮。爲一邊人所搆誣。公上章論辨曰。郭世楗之䟽斥宋時烈者。實是此事也。因山纔畢。擧國含恤。而臺官掇拾世楗之餘論。乘機傾陷。必欲空朝廷而後已。上嚴旨切責。乙卯。按廉湖西還。拜天安郡守。尋坐罷還鄕。丙辰。除襄陽府使。庚申。拜淸州牧使不赴。以獻納被召。陞司諫。參保社勳原從。歷奉常寺司僕寺正,司成。仁敬王后喪。差山陵都監都廳。間經執義,應敎。辛酉事竣。陞通政階。拜刑兵曹參議,參知。入銀臺。爲左副承旨。冬丁內憂。甲子服闋。拜大司諫。因旱疏陳弭灾之道。仍言湖西量田之非急務。上納之。秋拜左承旨。轉兵曹參議。乙丑。舘學有諭通事。互相投疏。莫能底定。公在臺官。救明齋尹公曰。尹拯與親友書非誣賢。而證成罪案。是非相蒙。論議益激。在聖明調停之道。固宜明卞痛斥。遞拜工曹參議。爲養求外。得茂朱府使。丙寅。丁尹夫人憂。戊辰服閱。拜戶曹參議。遷大司成。己巳。見時事嬗變。出爲靑松府使。無何投紱歸。與弟梅山公。屛居楸鄕。甲戌改紀。授慶尙監司。廉以自持。簡以制事。値乙丙大侵。議賑。有進聚糓之策。公曰。自官貿穀。不過聚民間蓄儲。是有虗名而民受實害也。朝家許諸道鑄錢。使補賑。公以爲錢之爲弊久矣。今又加鑄則惠不及民。啓陳其不便狀。其政均糶糴蠲徭役。以不擾民爲先務。流亡少而賑政最。民立生祠以寓慕。賑畢。除大司諫。相臣南公九萬白上曰。李某制劇有聲。宜仍畀以收成績。臺官之請仍外職爲難。上特仍之。丙子。擢授開城府留守。丁丑。以大司成還。兼同知經筵,春秋舘,義禁府,成均舘事,籌司堂上,典牲署,承文院提調。夏拜都承旨。轉漢城府左尹,禮曹參判。戊寅。有灣上和市事。以公爲戶曹參判。接伴北使。尋拜吏兵曹參判。冬端宗復位。差祔廟都監提調。陞嘉義。己卯。拜知申。三月以病卒。壽六十七。是年五月。與前後夫人。合窆于鎭川治東卯坐原。初配贈貞夫人完山李氏。郡守旭女。繼配貞夫人淸州韓氏。宣務郞有慶女。俱無子。以季弟寅烒子泰坤爲嗣。參奉。女長適監司南正重。初配出也。次適敎官閔伯基,府使柳鳳逸,及第尹聖時,尹晟。繼配出也。泰坤娶承旨朴世?女。生三男一女。男錫祜,錫禕,錫祐。女監役洪啓萬。錫祜男復源。女宋洙明。錫禕系男有源。女朴來源。錫祐男長源。女鄭駿良。復源男集麟縣監。集龜,集鳳皆出系。女柳仁鎭,進士洪祐淵,朴重圭,朴象圭。有源系男集鳳。長源系男集龜。女正言朴宗謙。集麟男晉榮縣監,普榮。女徐恭輔,進士鄭東美,直長沈周孫。晉榮男圭哲。內外孫曾多不能盡記。公資禀慈良。篤於孝友。沈夫人甞有疾。服鷄子黃。公未十歲。每早候鷄棲下取進。夫人悶其勞。公曰。婢僕輩不知新舊。夫人喜曰。吾病可瘳矣。及長。持身簡潔。不喜浮華。出典州藩。區劃猷爲。動合便宜。入居銓地。門庭如水。若寒士居也。爲泮長。使儒生坐。視齒曰。明倫之地。不可廢長幼之序。陳白復䂓。在臺省。遇事抗章。明卞是非。以黨比爲戒。不逐逐於時議。識者稱公執中嘗曰。吾立朝三十年。位致宰列。雖未能報效涓埃。而至於得失之際。未嘗萌於心發諸口。此吾終身無愧者。嗚呼。公不佞之同黨先輩也。稔聞公偉蹟。有生晩之歎。後孫圭哲。以約齋柳公所著狀。屬納幽之銘。所叙者皆約齋公語也。竊幸附驥。迺述之銘。其銘曰。
益齋世家。篤生春田。春田有子。生谷其賢。載尸于宗。啓後光先。六符州牧。兩節藩宣。民有紀石。廟有奏筵。恤荒則糓。防弊者錢。入贊籌畫。迺參貳銓。迺長臺閣。朝著肅然。人或顚躓。鮮有完全。公則獨立。無倚無偏。聖眷方注。古稀未延。兩配同原。鎭東之阡。銘詞追薦。舊堂新鐫。
[자료문헌)
가오고략(嘉梧藁略) >嘉梧藁略冊十七 >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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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문신 生谷 李寅煥[1633(인조 11)∼1699(숙종 25)]의 墓誌다. 본관은 慶州, 字는 文伯, 碧梧 李時
發의 손자이고, 부친은 李慶衍, 어머니 靑松沈氏는 沈大復의 딸이고, 生父는 春田 李慶徽, 生母는 海平尹氏
이다.
1665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이후의 官歷을 상세히 서술했다. 柳尙運이 지은 이인환의 행장을 후손 李圭哲이 갖
고 와서 글을 부탁해 귤산 이유원선생이 짓게 되었다고 했다.
<글 : 이재훈>
↑조선국 가의대부 행 이조참판 생곡 이공 인환 지묘/ 증 정부인 완산이씨/ 증 정부인 청주한씨 부좌
(朝鮮國 嘉義大夫 行 吏曹參判 生谷 李公 寅煥 之墓/ 贈 貞夫人 完山李氏/ 贈 貞夫人 淸州韓氏 祔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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