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몽량(李夢亮)

야촌(1) 2010. 7. 13. 17:18

■ 24世 이몽량(李夢亮)

 

  [세 계]백사 항복의 아버지 *상서공파 

  [문 과] 중종(中宗) 23년(152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7위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2등(二等) 19위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1등(一等)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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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9년(연산군 5)∼1564년(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응명(應明). 진사 예신(禮臣)의 아들이고, 백사(白沙) 항복(恒福)의 아버지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진사시에 급제하고, 1528년 형 몽윤(夢尹)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正九品)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正七品).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正六品)을 역임하고, 1539년 국왕의 특명으로 경상도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그뒤 명종이 즉위하자 동부승지로 발탁되면서 위사공신(衛社功臣)3등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고, 이어서 대사간으로서 학문에 입각한 도학정치를 제창하였다. 1547년(명종 2)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도민의 진휼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어서 예조참의· 병조참지· 대사간을 역임하고 1550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조식(曺植) 등 재야사림을 천거하였고, 이어서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뒤 대사간· 병조참판· 경기감사· 예조참판· 도승지를 역임하고, 1560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어서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냈는데, 형조판서로서 형률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한때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서용되어 동지중추부사· 한성부판윤을 거쳐 우참판에 이르렀다.성품이 온유하였고 형제 사이에 우의가 돈독하였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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