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문집

관란집(觀瀾集) - 이승증(李承曾) 著

야촌(1) 2010. 5. 26. 17:53

■ 관란집(觀瀾集) 

 

관란 이승증선생문집 석판본 3권1책.

19世 교감공 존사(校勘公 存斯)의 六代孫임.

간행연도 : 1863년[중간본]

필자 소장본(경매일자 : 2009. 09. 11)

 

 

필자 소장본(1863년 간행본)

 

 

 

 

 

 

 

 

 

 

● 문집개요 및 간략 해제.

  

1821년(순조 21) 傍孫 홍리(弘离)와 7대손 은호(彦灝) 등이 편집 간행한 초간본을 보완한 것으로‚ 1863년(철종 14) 9대손 익경(益慶)과 방손 운정運楨) 등이 중간하였다.

 

책머리에 오한원(吳翰源)의 서문을 이민수(李民秀)가 쓴 것과 장시하(蔣時夏)의 구서가 있고‚ 책 끝에 성구세(成龜世) 외 5인의 발문이 있다.

 

<故微士觀瀾李先生行狀>을 보면 <九容箴>·<九思箴>·<六有箴>·<三畏箴> 등을 지어 자신을 경계했다고 하는데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그의 많은 글들이 일실하게 된 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중간본의 발문을 보면 <通大邱士林文>도 우연히 崔雲發의 집에서 발견해서 수록하게 되었는데‚ 본 문집도 이승증의 글은 시 30여 편과 잡저 3편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는 모두 그에 대한<행장>과 <묘지명>·<발문> 등으로 되어 있다.

페이지 번호가 본 문집의 판심에 일괄적으로 되어 있지 않고 글의 형식에 따라 번호를 매기고 있기 때문에 그 예에 따랐다.

 

■ 저자소개

 

●  편저자 : 이승증(李承曾)

●  저자개요 : 1515(중종 10)~1599선조 32)

    ◇字 : 希魯‚ ◇號 : 觀瀾‚ ◇本貫 : 慶州‚ ◇父 : 季幹‚ ◇母 : 永川李氏

 

●  저자소개

조선 중기의 의병. 1558년(명종 13)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추천으로 1560년 建元陵參奉‚ 1562년 司饔院提調‚ 1564년 尙衣院提調‚ 1572년(선조 5) 尙瑞院 直長‚ 1580년 宗簿寺 典籤‚ 1585년 司䆃寺 直長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는데‚ 호랑이가 짐승을 잡아다가 제물을 바쳤고 그 지방에 할거하던 八龍이라는 도적이 廬墓 근처를 지나가다 여기는 효자가 있는 곳으로 시끄럽게 굴어서 안 된다며 딴 길을 갔다고 한다.

 

이에 관찰사가 그의 문장과 효행을 조정에 알려 旌閭가 내려졌고‚ 마을 사람들은 그 효행에 감탄하여 마을이름을 <孝子里>로 고쳤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孝를 매우 중요시했는데‚ 그의 이름도 효자로 유명한 曾參의 덕행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承曾으로 지었던 것이다.

 

만년에는 金鶴山에 들어가 <三會堂>이라는 서당을 짓고 은거하며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여 문도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崔東輔· 崔汝琥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을을 지켰다. 도연서원(道淵書院)에 봉향되었다.

 

■ 내용개요.

 

● 제목없음

1821년. 문집의 서문은‚ 吳翰源이 내용을 짓고 李民秀가 글을 쓴 것이다. 선비란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여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도 있고‚ 이와 달리 李承曾처럼 일신을 깨끗이 하고 곧음을 지킬 수도 있다(潔身守貞). 양자의 出處가 비록 다르더라도 세상의 모범이 되고 민의 덕성을 함양하는(範世長民) 데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李承曾이 晦齋 李彦迪(1491-1553)과 동향 사람이었고‚ 三足堂 金大有(1479-1551)의 문하에서 체계적인 학문을 쌓았던 점을 들어‚ 그의 학문적 계통을 의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는 부모를 섬기는데 매우 지극하였는데‚ 이는 천성적으로 그러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효행의 일례로 어머니의 3년 상을 치르며‚ 그가 여묘(廬墓)에 머물 때 호랑이가 사슴과 돼지 등을 짐승을 물어다 바쳐 조석공양을 하는데 보탬을 주었고, 그 고장의 도적이 廬墓를 지나가며 이곳은 효자가 있는 곳이라며 서로 시끄럽게 소리 내어 방해할 수 없다며 다른 길로 돌아간 일화를 들고 있다.

 

이는 그의 효행이 얼마나 지극했으며 금수와 같은 도적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겠느냐며 칭찬을 하고 있다.

 

● 舊序(序2) : 1800년(순조즉위). 弘禽의 부탁으로 蔣時夏가 쓴 구서이다. 蔣時夏는 ≪三綱續錄≫과 ≪輿地勝覽≫을 보고서 일찍이 李承曾의 효행이 하늘에서 낸 것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와 관련 두 가지 일화를 예를 들면서 그는 도적은 약탈과 위협을 일로 삼는 무리들로 금수와 같아서 효자의 경건함과 현자의 경외스러움을 어떻게 알겠느냐며 반문을 한다.

 

그러면서도 도적들이 李承曾의 여묘(廬墓)를 피해간 것은 금수일지라도 그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던 그의 지극한 효성을 칭찬하고 있다. 그는 1558(명종 13)에 司馬 양시에 합격하여 文章과 節行으로 일세의 모범이 되었지만‚ 爲己之學에 전력하며 강학활동에 전념했다고 하여 이승중의 學行을 孝行과 더불어 칭송하고 있다.

 

● 詩

盟鴻臺‚ 樵漁窩‚ 三會堂‚ 東籬種菊‚ 西壇梅竹松桃‚ 南墻躑躅鳳仙花‚ 北窓梨花‚ 自驚‚ 漁父‚ 閒居‚ 自詠‚ 金文仲家會飮‚ 奉呈崔立之尊叙‚ 嘲孫熙遠失約‚ 在陳歎‚ 兩夜叙懷‚ 寄金文仲‚ 寄卞上舍‚ 李彦休摘霜毛‚ 過烈婦墓‚ 夜對逐臣吟‚ 鳳凰臺次權松溪韻

 

● 詩格論 (詩5)

문장가란 글을 화려하게 구사하고 전문적인 사법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의 精神과 命脈이 사람의 마음의 근원을 씻어주거나 세상일에 초연히 벗어나 자유의 경지를 읊지 못한다면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당대의 문장가를 비판하고 있다. 첫 번째 작자의 心地가 세속적인 일에 얽매여 있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문장을 쓸 때도 어떻게 쓸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손이 움직이는 대로 쓰게 된다.

 

다른 경우를 들면 작자가 세상일에 연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장을 지을 때도 말의 선택과 배치를 잘 하기 위해서 신경을 쓰지만‚ 그런 사람은 결국 좋은 글을 쓰지 못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로 陶潛과 陸游를 들 수 있고 후자의 입장으로 沈佺期와 宋之問을 들 수 있다. 후자는 格과 律을 맞추기 위해서 정력을 기우렸지만 결국 전자와 같은 좋은 글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 易論 (論1)

≪주역≫의 대의를 논한 것으로‚ 易이란 天地와 人物의 이치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역이 흩어져서(散) 만물을 이루게 되는 것이 천 가지, 만 가지나 되고(千條萬緖)‚ 역이 운행하여(運) 시대의 흐름(時勢)을 나타내는 것이 천만가지가 된다(千分萬析). 다시 말하자면 크고 작고 정밀하고 조야한(巨細精粗) 사물이 끊임없이 생겨나거나‚ 가고 오고 앞으로 밀거나 변화하는(往來推遷) 시세가 일순간의 멈춤이 없이 흘려가는 것에서 그러한 이치를 알 수 있다.

 

이 때 그러한 이치를 따져보면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하는 것일 뿐이다(一陰一陽而已).” 이러한 이치가 없으면 사물이 생겨나지 않게 되고‚ 시세를 설명할 수 없게 되고‚ 우주도 우주가 될 수 없다.

 

이러한 一陰과 一陽의 작용이 곧 도의 원류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역의 원리에 천지의 역(天地之易)과 성인의 역(聖人之易)이 있는데‚ 전자는 造化를 이루고 후자는 중용(中庸)을 體化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 造化論 (論2)

성리학의 理氣와 性情을 천지 운행에서 經의 측면과 緯의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과 만물이 품수 받은 동일한 性命은 천지 운행에서 經의 측면인데‚ 이것은 곧 태극의 리(太極之理)를 말한다. 緯의 측면은 인간이 陰陽의 二氣 중에서 빼어난 것과 五行 중에서 순수한 것을 품수 받아서 만물보다 종적인 차별성을 가지고 천지의 운행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性情의 情을 意·志·思慮의 측면에서 분석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意는 7情이 헤아리는 측면을 말하고(所料度之名)‚ 志는 7情이 일정한 방향성을 갖는 측면을 말하고(有定向者之名)‚ 思慮는 7情으로 인하여 세상의 모든 변화에 대해 두루 관찰하고 생각하는 측면을 말한다(周流省念於萬變者之名)고 설명한다.

 

● 通大邱士林文(文1)

1592. 임진왜란 때 대구사림에게 보낸 격문으로 초기 의병활동을 주도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게 된 글이다. 그는 士의 의무란 忠과 孝일 뿐으로 충효밖에 별도로 士의 도덕이 있지 않다(大凡士者‚ 忠孝而已)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선비는 평화시에 부모의 뜻을 잘 받들면서 봉양하고‚ 세상일을 도와서 민을 편안하게 하는 忠과 孝가 대립하지 않는 단서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숨이 끊어질듯 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서 일신의 平安만을 도모하는 것은 선비의 올바른 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혹 선비 중에 왜구의 말발굽이 자기 지방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정세를 관망하는 것도 선비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은 비록 70세의 늙은 몸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설 터이니‚ 동참하여 적을 소멸 하고자는 내용이다.

 

원래 이 글은 李承曾의 가문에서 소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通文> 뒤에 부기된 運楨의 글을 보면‚ 滄洲 崔雲發 집의 巾衍에서 찾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건 이외에 憂樂齋 崔東輔의 ≪壬辰日記≫와 崔汝琥의 ≪日錄≫을 보면 李承曾의 통문을 5월 29일에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후자의 기록을 보면 李承曾의 통문 이외에 朴慶宣·李魯의 <통문>과 朴應誠이 적과 분전하다가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李承曾의 의병활동으로 왜적이 慶山 지방을 접근하지 못했다는 전말도 부기되어 있다.

 

● 詩

次韻(李益慶 作)‚ 敬次倡義文韻(李鼎運 作)

 

● 故微士觀瀾李先生行狀 (附錄1)

1815년(순조 15). 저자의 6대 후손인 홍금(弘禽)이 쓴 행장이다. 저자는 孝聞·文章·志節로 유명하여 당대 사람들에게 명망이 많았는데‚ 실례로 그가 모친의 상에 廬墓에 거처했을 때 도적이 피해갔던 일화를 들고 있다. 이는 ≪三綱續錄≫과 ≪輿地誌≫에 실려 있다.

 

홍금(弘禽) 자신이 행장을 쓰게 된 것은 능력이 닿지 않는 일이지만‚ 다행히 족인 중에 나이가 많고 어려서부터 나이 많은 어른들로부터 관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자주 들어와서 자신이 이 일을 맡게 되었다고 경위를 밝히고 있다.

 

홀로되신 어머니를 봉양할 때 가세가 빈한하여 뒤주가 자주 비었지만 맛있는 고기반찬을 걸리지 않았고‚ 어머니가 병이 들자 그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약을 다 려 바치면서 “다른 날 비록 어버이를 위해 효도를 하려고 해도 할 수 있겠느냐?”고 하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되자 자신이 어머니의 똥의 맛을 볼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1538년(24세)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에 거처할 때의 호랑이와 도적 이야기는 반복되지만 여기서 도적의 이름이 팔용(八龍) 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둘째 형 승민(承閔)이 염병에 걸리자 주야로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을 하고 매일 밤마다 목욕재계를 하고서 하늘에 기도하기를 자신이 대신 아프기를 원했다고 한다. 1529년-1530년(15-16세) 三足堂 金大有(1479-1551) 문하에서 性理說을 강론하였고‚ 尊德性과 道問學에 잠심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久容箴>·<九思箴>·<六有箴>·<三畏箴> 등을 지어 자신을 경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실되어 본 문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관직생활에 대한 뜻을 버린 뒤에 李熠· 松溪 權應仁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그리고 金鶴山에서 三會堂을 지어 인근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고 제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또 三會堂 남쪽에 樵漁窩를 지었고‚ 그 앞 30여보 사이를 두고 두 채의 土臺를 쌓았는데 동쪽을 盟鷗臺‚ 북쪽을 觀瀾臺라고 부르고 스스로 관란노수(觀瀾老叟)라고 자칭했다.

 

● 故微士觀瀾李先生墓誌銘-幷序 (附錄7)

活山 南龍萬(1709-1784)이 쓴 묘지명이다. 자신은 전해져오는 문헌과 오래된 서적을 보지 못하고 머리를 따지 않았던 어린 시절부터 구전되는 이야기를 통해서 觀瀾선생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觀瀾선생의 후손인 덕관(德觀)이 자신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자 자신은 몇번이나 사양을 하다가 마지못해서 묘지명을 쓰게 되었다고 그 경위를 적고 있다. 초두에 觀瀾선생의 뛰어난 효행으로 인해서 그 마을의 이름이 ‘孝子里’로 바뀌게 된 일과‚ 3형제의 이름‚ 즉 승민(承閔)· 승안(承顔)· 승증(承曾) [이 순서가 본 문집의 <世系圖>와 비교해보면 承閔과 承顔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을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즉 이들은 부모섬기는 것을 ≪논어≫에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난 승참(曾參)과 민자건(閔子騫)과 같게 되기를 기약하면서 항렬자 뒤에 閔子騫의 閔자와 曾參의 曾자를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1558년(44세) 사마양시에 응시한 뒤로 명예로 유명해지는 것에 뜻을 두지 않고 효에 진력하기로 하여 전심으로 부모를 섬겼다. 그러면서 일찍이 스스로 “아이가 배부르면 내가 주리더라도 나의 배고픔은 배부르게 생각 되네‚

 

아이가 추위에 떨면 내가 따뜻하게 지내더라도 나의 따뜻함은 추위에 떠는 것과 마찬가지라네. 만약 어버이의 이런 자애스러움이 부모에 대한 효에도 옮겨간다면 위대한 순임금과 증삼과 같은 효자들이 온 세상에 가득 차리라(兒飽我飢飢亦飽‚ 兒寒我暖暖猶寒. 若將慈愛移於孝‚ 大舜曾參滿世間)”라고 시를 지어 경계했다고 한다

 

(<自驚>). 벼슬살이에 나아가지 않고 金鶴山에서 三會堂을 짓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치력한 것은 名利에 초탈하고서 생활 속에 즐거움을 찾는 그의 취미가 아니었겠냐고 평가한다. 1749년 觀瀾書院의 旌閭 현판이 낡아서 수리를 했는데‚ 靑泉 申維翰(1681- 1752)이 글을 쓰고 趙明鼎이 “觀瀾李先生㫌孝閣”이라고 판각했던 일을 적고 있다.

 

● 旌閭閣記 (附錄10)

1750. 申維翰은 자신이 어릴 때 부친을 따라 다닐 적에 이미 慶州(鷄林)에는 옛날에 군자가 있어서 효행으로 유명했다는 것을 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1558년에 科業을 포기하며 이승증은 “과거의 길은 사람의 마음을 합격여부에 매달리게 한다.

 

내 어찌 나의 하고자 하는 포부를 그것에 빼앗기겠는가?”라며 다시 과업에 종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적이 李承曾의 여막을 피해서 간 뒤로 마을 사람들은 그를 더욱 더 숭앙하게 되었고‚ 큰 돌로 비를 새웠다고 한다.

 

그 뒤 宣祖대에 조정에서 旌閭를 하사하자 선생의 6세손인 世鳳(<세계도>를 보면 世胤으로 되어 있다)이 그 일을 주관하게 되었고 자신에게 글을 부탁하여 쓰게 된 경위를 적고 있다. 또한 선생의 사적이 ≪三綱行實≫· ≪輿地勝覽≫· ≪東京誌≫에 실리게 된 것도 적고 있다.

 

● 旌閭閣重修碑銘 (銘1)

1802년(순조 2). 정려 각을 중수하며 쓴 글.

 

● 智谷書院廟宇上樑文 (銘2)

觀瀾선생을 기리는 서원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1차는 재정곤란으로 중단했고‚ 2차는 그 해 흉년이 들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晦齋 李彦迪과 동향이었고 그를 추모하는 서원이 觀瀾書院인 관계로 같이 추도했었다.

金鶴山 동쪽 골짜기(東谷)에 별도의 장소에 서원을 건립하려고 해서 세운 것이 지곡서원(智谷書院)이었다.

 

● 常享祝文 (文2)

1795. 南景義가 智谷書院의 상량식에 즈음하여 쓴 축문임.

 

● 道淵書院廟宇移建上樑文 (文2)

李鼎儼이 지곡서원의 터에서 민호(汶湖)근처로 새로 잡은 터로 도연서원을 건립하여 쓴 상량문이다.

 

● 道淵書院記 (記1)

運禎이 道淵書院 건립을 마치며 쓴 글. 여기서는 觀瀾선생의 서원을 여러 차례 옮기게 된 경위를 먼저 적고 있다. 그리고 서원의 명칭을 도연서원으로 짓게 된 까닭을 적고 있다. 당대 아마 觀瀾선생의 학문계통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觀瀾이 일찍이 金大有의 문하에서 수학을 했고 李彦迪의 동향인으로 그의 학문적인 사승관계를 의심할 수 없다는 의도에서 <道淵>으로 지었는데 도연은 道學淵源의 줄인 말이다.

 

● 附諸賢銘詩 (銘1)

盟鷗臺銘-洪舜賓‚ 又-洪益源‚ 又-通政大夫前行慶尙監司金魯應‚ 盟鷗臺歌-進士蔡九章‚ 又-蔣時夏‚ 敬題觀瀾先生詩稿後四首-族後孫弘禽‚ 過觀瀾李先生遺墟敬次樵漁窩韻-鄭垢‚ 敬次盟鷗臺韻-金大鳴‚ 又-黃山承尹之鉉‚ 敬次李先生三會堂韻-曺允哲‚ 敬書觀瀾李先生遺稿後-綿城朴廷煓‚ 敬次盟鷗臺遺詩-傍裔運禎‚ 又次朴公題遺稿後韻‚ 敬次先祖遺韻-後孫益慶

 

● 世系圖 (圖1)

시조 李謁平에서 25세손인 李承曾을 거쳐 38대손까지의 세계를 적은 족보.

 

● 鄕校通文 (通文1)

1708(숙종 34). 선생의 효행은 지극할 뿐더러 사적에 기록되기까지 했는데‚ 선생과 같은 尊長者를 기리는 사당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며 지방에 돌린 통문임. 그 일에 참여한 사람은 任仁重· 李德璋· 陳世搏· 韓世重· 최섬손(崔暹孫)· 徐行信· 申命楨· 金濬· 李德祚· 任光世· 李斗經· 金元大· 이중담(李重聃)· 崔弼基· 鄭文宗· 權錫宗· 柳宜健 등이다.

 

● 道通文 (通文1)

1766년(영조 42). 大丘지방 선비들 539인 연명으로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건립을 위해서 쓴 통문임. 일찍이 공자가 “ 어떤 사람의 시를 외우고 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이 누군인지를 모른다면 되겠느냐”는 말을 인용하면서‚ 觀瀾先生의 사적이 역사에까지 기록이 되었는데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선생의 일생을 1) 조정에서 여러 번 초치했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것에서 그의 절조와 孝行을 상상할 수 있고‚ 2) 흉악한 도적을 감화시킬 수 있었던 일에서 그의 여러 범절을 상상할 수 있고 3) 그의 시가 인간의 性情에 근거하여 온화하여 뛰어난 것에서 그의 여타 문장을 상상할 수 있다고 요약한다.

 

이러한 선생의 평생을 요약하면 명리를 사양하고 벗어나서 수풀과 계곡에서 도를 즐기는(謝脫名利‚ 樂道林泉) 인생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작금에 李彦迪과 동향출신으로 觀瀾書院이 1660년(현종 1)에 건립되었는데 李承曾을 그곳에 從享하자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본문에는 명확하지 않지만‚ 李彦迪의 가문에서 그러한 계획을 반대하자 대구지방의 사람들이 연명으로 종향을 주장하는 글을 쓰게 된 배경으로 된 듯하다. 종향을 주장하는 근거는‚ 李承曾의 학행이 李彦迪보다 24년 뒤에 태어나 그의 학문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효행으로 매우 뛰어났던 점은 李彦迪의 사당에 從享해도 조금의 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本鄕通慈仁文 (通文3)

1766년(영조 42). 徐有權 등 103인이 <道通文>의 내용과 유사한 주장을 한 글임.

 

● 後叙 (後叙1)

1749년(영조 25). 선생의 7세손인 언현(彦顯)이 선생의 유문을 수집하여 초간본을 간행할 때 鄭存謙이 쓴 글임. ≪周易≫의 <中孚卦>에 나오는 돼지와 물고기는 감동시키기 어려운 동물인데 신의가 이것들에까지 미쳤다(豚魚吉‚ 信及豚魚也)는 말을 인용하여 관란선생의 지극한 신의를 칭찬하고 있다.

 

● 跋文 (跋1)

1863년(고종 1). 成龜世가 쓴 발문으로‚ 顔淵의 이름이 영원히 추숭되는 것은 그가 많은 글을 저작한 데에 있지 않다. 비록 觀瀾선생의 글이 병란으로 유실되어 많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의 德行과 孝行이 오늘날에도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백년 뒤에도 그의 얼마 남지 않는 것을 읽으면 진가를 알게 될 것이라고 평가함.

 

● 又 (跋2)

1749년(영조 25). 靜黙齋 柳宜健(1687-1760) 자신은 어린 시절 선생의 증손인 廷衡과 廷希에 의해 ≪觀瀾集≫ 1권을 보았지만‚ 내용을 잘 알지 못하였는데 그 뒤 다시 보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 뒤 7대손인 홍금(弘禽)과 덕관(德觀)이 유집을 수집하여 초간본을 낼 때‚ 다시 선생의 글을 보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글도 德觀의 부탁으로 발문을 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 又 (跋3)

鄭忠彦은 韓愈가 <差哉蕫生行>에서 동생(董邵南)의 덕행을 “刺史도 그를 천거할 수 없었고‚ 天子도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없었고‚ 명예와 작록이 그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라고 칭찬한 내용을 인용하여 觀瀾선생의 사적에 비유하고 있다.

 

동생(董生)은 다만 산천에서 자락(自樂)하는 생활을 했고 어린 개가 그의 집으로 와 먹이를 먹고 닭이 찾아서 병아리에게 모이를 주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관란(觀瀾)선생의 평생 언행도 한유(韓愈)가 찬탄해 마지않았던 동소남(董邵南)의 덕행과 조금과 뒤질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금학산(金鶴山)에서 소요하던 일을 적고 있다.

 

● 又 (跋5)

華泉 李采(1745-1820)는 특히 ≪관란집≫의 “아이가 배부르면 내가 주리더라도 나의 배고픔은 배부르게 생각되네‚ 아이가 추위에 떨면 내가 따뜻하게 지내더라도 나의 따뜻함은 추위에 떠는 것과 마찬가지라네. 만약 어버이의 이런 자애서러움이 부모에 대한 효에도 옮겨간다면 위대한 순임금과 증삼과 같은 효자들이 온 세상에 가득차리라(兒飽我飢飢亦飽‚ 兒寒我暖暖猶寒. 若將慈愛移於孝‚ 大舜曾參滿世間)”라는 귀절을 읽고서 3번 반복하지(三復) 않을 수 없었다고 술회한다.

 

● 又 (跋6)

愼庵 李晩慤(1815-1874)이 문집의 탈오를 교정하고 運楨이 초간본 이후에 새로 수집한 글을 가지고 자신에게 와서 중간본 발문을 요청하여 쓰게 된 경우를 적고 있다. 발문에 부기형식으로 발문이 끝날 무렵 崔東輔의 ≪壬辰日記≫에 觀瀾선생의 倡義사실이 적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소식을 보내오자‚ 觀瀾선생의 의병활동이 소문만으로 들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又 (跋9)

1863. 李在欽의 발문도 <通大邱士林文>의 충효를 선비의 의무로 강조하는 것에 대해 적고 있다.

 

◇敬書倡義文後 (跋10)

1863. 晦慶이 <通大邱士林文>을 발견하고서 문집에 수록하면서 쓴 글. 부기형식으로 運楨의 글이 있다. 運楨은 중간본을 간행하게 된 경위와 발문을 당대 거장들에게 부탁하던 일 등을 적고 있다. 또 부기형식으로 益慶의 글이 있다. 그의 글에는 중간본을 간행하며 감회와 선생에 대한 깊은 추모의 정을 적고 있다. (신정근)

 

■ 관란선생 계통도

19世 교감공 존사(校勘公 存斯)→20世 판서공 량(判書公 良)→21世 참운공 주(參運公 周)→22世 수의부위공윤흥(修義副尉公 允興)→23世 철동(哲仝→24世 백간(伯幹)→25世 관란공 승증(觀瀾公 承曾)

 

  2009년 09월 11일

 野村 李 在 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