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남원부(南原府)에 새로 설치한 제용재(濟用財)의 기문/이보림 행적

야촌(1) 2010. 3. 5. 17:48

■남원부(南原府)에 새로 설치한 제용재(濟用財)의 기문/이보림 행적

 

목은 이색 찬

 

금상(今上) 8년 봄에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시중(侍中)의 손자인 간관(諫官)을 외방으로 내보내어 남원부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1년도 채 안 되어 선정(善政)을 행한 업적이 동남 지역의 수령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므로, 내가 그에 대한 일을 써서 순리(循吏 : 법을 잘지켜 백성들을 위하는 관리)의 열전(列傳)에 붙이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다.


국자 학유(國子學諭)인 양군 이시(楊君 以時/남원양씨 9대손 楊以時)는 남원 출신이다. 행동거지가 신중하고 성실하였으며 말하는 것도 신실(信實)하기만 하였는데, 어느 날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원님의 정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깊이 감동하고 있으니 굳이 금석(金石)에 새겨 놓지 않더라도 그 자취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새로 설치한 제용재의 일 만큼은 쉽게 무너져 버릴 염려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뒷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고 경계할 줄을 알게 하지 못한다면, 영원토록 폐단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가 없으니, 선생께서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나는 익재 선생으로부터 평생에 걸쳐 두터운 은혜를 받아 온 처지였던 만큼, 선생의 손자가 훌륭하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하였고, 또 일찍이 간원(諫垣)에서 동료로 함께 근무할 적에 더욱 깊이 교분을 쌓았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양군의 말에 흔연히 응하면서 그 일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 일과 관련하여 양군이 말하기를, “사자(使者)가 와서 세금을 급하게 독촉할 때마다 우리 지현(支縣)에서 미처 마련해 내질 못하였는데, 그럴 때면 빚을 내서 보태어 세금을 내게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파산하는 경우도 가끔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원님이 바로 그런 사실을 알고서 탄식하기를, ‘이보다 더 심하게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고는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포세(逋稅)를 거두어 모아 약간의 포목(布木)을 얻고 나서 안렴사(按廉使)에게 장계(狀啓)를 올리니, 안렴사 역시 그 일을 가상하게 여기면서 포목을 내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노비 문제로 다투다가 관가에 소송을 낼 적에, 그 값으로 받는 것을 포목으로 받아들이되 1구(口)당 1필(匹)씩으로 하였는데, 우리 원님이 판결을 잘 내려 주었으므로 수입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합 650필의 포목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향교(鄕校)와 삼반(三班)에서 각각 한 사람씩을 뽑아 그 일을 맡아 보게 하였는데, 지현의 급한 일을 그 네 사람이 부(府)에 보고하면, 관아에서 공적 자금을 내주도록 하되 이식(利息)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의 관리들이 감히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게끔 정식(定式)으로 확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남원부가 비록 산중에 있다고는 하지만 빈객이 끊임없이 왕래하는 까닭에 그들을 대접할 비축용 자금을 징수하곤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원님이 바로 그런 사실을 알고서 또 탄식하기를, ‘이보다 더 심하게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또 있겠는가.’ 하고는 다시금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재고(財庫)를 설치할 뜻을 또 안렴사에게 아뢰어 우선 포목과 조미(糶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둔전(屯田)을 시행해 오는 과정에서 관리들이 제멋대로 간악한 짓을 자행하였는데, 우리 원님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직접 보살피자 관리들이 감히 속이는 짓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합 200석(石)의 미곡(米穀)과 150석의 두숙(豆菽)을 확보한 뒤에, 규정을 세워 내주고 거둬들이게 하되, 본전(本錢)은 남겨 두고 이식만 활용토록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72석 정도를 수확할 수 있는 새로운 밭의 개간을 계획하여, 빈객을 대접하는 비축용 자금으로 삼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 쓰는 집기나 도구까지도 모두 완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재원(財源)들을 모두 통틀어서 제용재(濟用財)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평민들에게서 마구 거두어들이는 일이 없어지고 지현에서도 정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로운 일만 생기고 해로운 일이 점차 제거됨으로써 백성들이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이 일에 대해 논하면서 글로 남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 일이 인정(仁政)의 하나라고는 하겠지만, 이후(李侯)의 정사(政事)로 볼 때 그런 일 정도는 마땅히 행해야 할 기본적인 일이라고 할 것이니, 내가 선뜻 그 일 하나만을 굳이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이후는 인후(仁厚)한 덕을 발휘하여 그 근본을 배양하였고 강명(剛明)하게 위엄을 보여 운용이 잘 되도록 함으로써 하나의 지역을 제대로 교화시켰다.

 

따라서 그 치적이 영천(穎川)이나 촉군(蜀郡)보다도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니, 글로 남길 만한 것이 그 일 하나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하나의 일을 통해서도 얼마나 근실하게 마음을 썼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겠는데, 남원 사람들이 이후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제대로 행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그대는 나를 대신해서 그대의 고을 사람들에게 유시하되,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내세울 것 없이 그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거론해서 증명하도록 하라.

 

병든 사람이 의원에게서 병이 낫고 굶주리던 사람이 먹을 것을 얻어서 살아난다면,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그대들의 마음이고 현(縣)은 지체(支體)이니, 현이 있고 백성이 있고 난 뒤에야 그대들의 부(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마음과 지체가 모두 고달팠던 것으로 말하면, 굶주리거나 병든 것보다도 더 심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후가 와서 병을 고쳐 주고 먹을 것을 주었는데도 보답할 줄을 모른다면, 그래도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보답해야 마땅하겠는가? 이후가 세운 법을 무너뜨리지 말고 이후의 뜻을 실추시키지 말아야만 그런대로 보답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니, 양군이 두 번 절하면서 삼가 가르침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후의 이름은 보림(寶林)으로, 을미년에 급제하였다. 신념이 확고한 데다 충성스럽고 올곧아서 옛날 쟁신(爭臣)의 풍도가 있었는데, 고을을 다스릴 때에도 대부분 여기에 뿌리를 두었다고 하겠다.

 

지정(至正) 기해년(1359, 공민왕8) 가을 8월에 짓다.

 

자료 : ◇목은문고 제1권.   ◇목민심서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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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삼반(三班): 고려 시대 지방 관아에 속한 향리(鄕吏)와 군졸(軍卒)과 관노(官奴)를 일컫는 말이다.

 

[주02]영천(穎川)이나 촉군(蜀郡): 한 선제(漢宣帝) 때 황패(黃覇)가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나가서 천하제일의

           정사를 펼친 고사와, 한 경제(漢景帝) 때 문옹(文翁)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나가서 시문(詩文)으로 교

          화시킨 결과 제(齊)ㆍ노(魯)처럼 변화시켰던 고사를 말한다. 《漢書 卷89 循吏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