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서얼 고폐에 대한 상소 건

야촌(1) 2010. 3. 21. 00:57

영조실록 2권, 영조 즉위년 12월 17일 병술 3번째기사 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정진교 등의 상소로 친행한 뒤 내시가 혼백을 받들어 내어 혼전의 정결한 땅에다 매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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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교(鄭震僑)의 상소를 봉입(奉入)하지 않은 승지를 추고(推考)하라고 명하였다. 대가(大駕)가 동문(東門)을 나섰을 때 길 북쪽에 한 사람이 진(陣) 안에 서서 장대나무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나무 끝에 종이를 매달았는데, 종이에는 ‘궁인포원(窮人抱寃)’ 네 글자가 크게 쓰여 져 있었다. 물어보라고 명하였더니, 곧 상소를 올리려는 사람이었다.

 

즉시 상소를 봉입하라 명하였는데, 곧 서얼(庶孽) 진사(進士) 정진교 등 2백 60명의 상소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정진교 등은 작문(作門) 안으로 난입하여 대가(大駕) 앞에서 호소하였습니다. 작문으로 제멋대로 들어온 것은 전고(前古)에 있지 않던 일이니, 청컨대, 파수(把守)하던 장교(將校)를 조사해 내어 다스리고 대장(大將)은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그리고 난입한 소유(疏儒)는 과죄(科罪)하소서."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대로 하되 이미 작문 앞으로 들어왔으니, 소유는 다스리지 말라."하고, 또 하교하기를,

"승선(承宣)이 대신(大臣)과 더불어 일찍이 ‘말이 비록 광망(狂妄)하다 하더라도 소장(疏章)을 봉입까지 않는다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고 진달(陳達)하였는데, 지금 정진교의 상소에서 말한 것으로 보건대, 와서 바친 지 오래 되었으나 후원(喉院)에서 봉입하지 않은 것이다. 해당 승지(承旨)를 추고(推考)하라."하였다. 정진교의 상소에 대략 이르기를,

 

"서얼(庶孽)을 고폐(錮廢)하는 법은 천하 만고에 있지 않던 바입니다. 삼대(三代)로부터 한(漢)·당(唐)·송(宋)·대명(大明)에 이르기까지 서얼이 장상(將相)의 자리를 차지하여 명적(名績)을 드러내었으며, 우리 동방(東方)의 경우 위로 삼국(三國) 때부터 고려(高麗) 5백여 년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취하는 법규(法規)가 한결 같이 중화(中華)를 따라 차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종조(太宗朝) 때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비로소 전에 없던 의논을 주창하여 서얼의 자손을 현직(顯職)에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했고, 그 뒤 강희맹(姜希孟)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차(纂次)할 때 입사(入仕)·부거(赴擧)하는 길까지 아울러 고색(錮塞)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대전(大典)》을 반포한 해에 가뭄이 흑심해서 굶어죽는 사람이 잇따라 생기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허물을 여기에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묘(成廟)께서 측은하게 여기시고 경동(警動)하시어 장차 경장(更張)하고자 하시었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선묘(宣廟) 초에 신분(申濆) 등 1천여 명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자, 선묘께서 하교하시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함은 겉 가지를 가리지 않으니, 인신(人臣)으로서 충성하기를 원하는 것이 어찌 꼭 정적(正嫡)이어야만 하랴?’ 하셨으니, 이에서 대성인(大聖人)의 지공지정(至公至正)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력(萬曆)계미년에 이르러 선 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비로소 옛날대로 회복해서 통용(通用)하자는 의논을 세웠는데, 마침 변방에 경보(警報)가 있어 갑자기 변통할 겨를이 없었지만, 먼저 허통(許通)·부거(赴擧)의 길을 열었으니, 그 뜻은 대개 차례로 소통(疏通)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인묘조(仁廟朝)에 이르러 부제학(副提學) 최명길(崔鳴吉)이 동료인 심지원(沈之源)·김남중(金南重)·이성신(李省身)·이경용(李景容)과 더불어 글을 올려 힘써 통용(通用)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예제(禮制)의 제정이 삼대(三代)보다 엄함이 없으나, 적(嫡)·서(庶)의 명목은 단지 사실(私室)에서만 행해졌고 공조(公朝)에서는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문지(門地)의 분별은 육조(六朝) 때보다 상세한 것이 없으나, 사람을 쓸 때는 오로지 그 아버지의 성(姓)만 묻고 그 어머니의 성은 묻지 않았습니다. 대개 하늘이 인재를 낼 때 귀(貴)·천(賤)의 차이를 두지 않았고, 왕자(王者)가 사람을 쓸 때 문지(門地)에 구애되지 않았으니, 이것은 천리(天理)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고 백왕(百王)이 바꾸지 않았던 바입니다.

 

우리나라의 서얼을 현직(顯職)에 서용하지 말자는 의논은 처음에서 서선(徐選)에게서 나왔는데, 그 뒤 가면 갈수록 한 마디 한 마디가 더욱 심각해져 마침내 자손까지 영원히 금고(禁錮)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재주와 덕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억눌리고 막혀 세상에 떨치지 못하고 배척받아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한 채 마치 큰 죄나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는 부자(父子)의 은혜도 군신(君臣)의 의리도 없으니, 윤리(倫理)를 해치고 어기는 것으로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필부(匹夫)가 원망을 품어도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족한데, 하물며 그 수가 엄청나게 많은 경우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였고, 신풍 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 또한 상소하여 계속해서 논하자, 인묘께서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조판서(吏曹判書) 김상용(金尙容)이 회계(回啓)하여, ‘장유의 말에 의해 시행함이 마땅하다.’ 하고, 이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게 할 것을 청했는데, 그 당시 상신(相臣)이었던 이원익(李元翼)·윤방(尹昉) 등은 헌의(獻議)하기를, ‘서얼을 비천(卑賤)하게 여기고 박대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있지 않던 법으로, 왕자(王者)의 「입현무방(立賢無方)」의 도리에 아주 부족함이 있습니다.’고 하였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헌의하기를, ‘서얼을 금고 하는 것은 선왕(先王)의 크게 공평한 정사(政事)가 아니니, 통용(通用)하는 일이 실로 이치에 맞습니다.

 

세간에서 행하기를 어렵게 여기는 자는 명분(名分)이 문란해진다고 말합니다만, 적(嫡)·서(庶)의 명분은 단지 자기 집안내부의 일이고, 조정에서는 단지 현명한 자를 쓰고 인재를 거둘 뿐입니다. 비록 귀현(貴顯)하게 된 뒤에 적서(嫡庶) 사이에 만약 명분을 범하는 일이 있다면, 나라의 법이 진실로 엄하게 적용될 것이니 문란해지리라는 것을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대신들의 헌의가 모두 일체(一體)로 통용하자는 뜻에서 나오고, 2품(品) 이상 여러 신하들의 헌의도 역시 모두 하나로 귀착되었으나, 오로지 몇 사람만 이견(異見)을 세워 단지 삼조(三曹)에만 허통(許通)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 뒤 최명길(崔鳴吉)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아뢰기를, ‘일찍이 을축년에 영부사(領府事) 이원익(李元翼)이 홍문관(弘文館)의 차자(箚子)로 인해 「서얼이 등과(登科)한 뒤에는 요직(要職)에 통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청직(淸職)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일로 성지(聖旨)를 품재(稟裁)하자, 양사(兩司)에서 서경(署經)한 뒤 예조(禮曹)에 간직해 두어 일대(一代)의 성법(成法)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9년이 지났지만 하나도 거행하지 않아서 성조(聖朝)께서 강정(講定)한 제도를 빈말로 돌리고 말았으니, 일이 매우 미안합니다. 사목(事目) 안에 이른바 「요직에 통용한다.」는 것은 곧 호조·형조·공조의 낭청(郞廳) 및 각사(各司)의 장관(長官)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청컨대, 이 수교(受敎)에 의해 재능에 따라 의망(擬望)하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셨으므로, 신희계(辛喜季)·심일운(沈日運)·김굉(金宏)·이경희(李慶喜) 등 약간 명이 형조와 공조의 낭청에 제배(除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거의 4, 50년이 지나 숙묘조(肅廟朝)에 이현(李礥) 한 사람이 겨우 호조낭청에 제배되었는데, 떼 지어 일어나 배척하였으므로 마침내 정체(呈遞)하였고, 아직까지도 쓸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역대(歷代)의 명신(名臣)들이 서얼에서 많이 나왔습니다. 중국의 경우로 말한다면, 한(漢)나라 때는 위청(衛菁)·곽거병(郭去病)이, 진(晉)나라 때는 배위(裵頠)·주개(周顗)·도간(陶侃)·환석건(桓石虔)·배수(裵秀)·완부(阮孚)가, 당(唐)나라 때는 소정(蘇頲)·이소(李愬)·두순(杜荀)·영호창(令狐彰)이, 송(宋)나라 때는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진영중(陳瑩中)·추지완(鄒志完)·호인(胡寅)이 있었고, 우리나라의 경우로 말한다면, 정문측(鄭文則)은 예부상서(禮部尙書)란 벼슬을, 이세황(李世黃)은 합문지후(閤門祗候)란 벼슬을 지냈으며, 권중화(權仲和)는 벼슬이 도헌(都憲: 사헌부의 으뜸벼슬)이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묘(成廟) 이후 서얼 중에서 걸출(傑出)한 사람이 많이 나왔는데, 박지화(朴枝華)·어숙권(魚叔權)·조신(曹伸)·이달(李達)·정화(鄭和)·임기(林芑)·양대박(梁大樸)·권응인(權應仁)·김근공(金謹恭)·송익필(宋翼弼)형제·이산겸(李山謙)·홍계남(洪季男)·유극량(劉克良)·권정길(權井吉)이 바로 그들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충(宸衷)에서 결단하시어 조용(調用)하는 길을 넓혀서 여신다면, 수백 년 이래로 허다하게 원통함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던 자들의 넋 또한 감격하고 고무되어 구천지하(九泉之下)에서 성덕(聖德)에 보답하려고 할 것이며, 천심(天心)이 저절로 형통하여 화기(和氣)가 흘러 넘 칠 것입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중국의 이른바 서얼은 단지 그 자신에게만 해당될 뿐이고, 그 자손까지 아울러 서얼이라 이름 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한 번만 서파(庶派)에 묶이면 수십 세(世)에 이르도록 능히 벗어나지 못합니다."하고, 또 말하기를,

 

"봉장(封章)하여 궐문(闕門)에 엎드린 지 장차 한 달이 되려 합니다. 상소한 것이 무릇 열세 번이엇으나, 한 사람의 승선(承宣)이 힘써 물리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신(臣)을 천하게 여기고 박대하여 사람들 사이에 끼워 넣어주지 않는 데 불과하나, 이미 그 몸을 금고(禁錮)해 놓고 또 그 입에 재갈을 물린 격입니다. 곧장 궐문(闕門) 밖에서 통곡하려 했지만 황공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우리나라는 본래 편소(偏小)한데다 사람을 쓰는 것도 역시 몹시 넓지 않으므로, 내가 적이 개탄스럽게 여겨 왔다.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고 해와 달의 비침은 이미 정(精)·조(粗)를 가리지 않으니, 왕자(王者)가 그 사람을 씀에 있어서 어찌 그 가운데 차이를 두랴? 그대들이 인용한 바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다만 이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변통할 수가 없으니, 신중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 오로지 천천히 강구하여 처리함이 마땅하다. 삼조(三曹)의 낭청에 관한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인묘조(仁廟朝)의 수교(受敎)에 의해 가려서 의망(擬望)하게 하라."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유자광(柳子光) 이후로 서얼의 통청(通淸)을 허락하지 않아 왔는데, 이에 이르러 못 서얼들이 스스로 통청을 청하니,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짐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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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사고본] 2책 2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45면

 

[분류]

정론(政論) / 가족(家族) / 역사(歷史)

 

[註] 계미년 : 1583 선조 16년.

[註] 입현무방(立賢無方) : 《맹자(孟子)》 이루장(離婁章) 하(下)에 나오는 말로, 현명한 인물을 높은 자리에 세우는 데는 그 출처(出處)와 귀천(貴賤)·친소(親疏)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임.

[註] 을축년 : 1625 인조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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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命鄭震僑疏不捧承旨推考。 大駕出東門, 路北有一人, 立陣內, 奉持一竿木。 木末懸紙, 紙上大書窮人抱冤四字。 命問之, 乃呈疏人也。 命上疏捧入, 卽庶孽進士鄭震僑等二百六十餘人疏也。 承政院啓: "震僑等, 闌入作門內, 呼訴駕前。 作門擅入, 前所未有, 請把守將校査治, 大將推考, 闌入疏儒科罪。" 批曰: "依啓, 旣入於作門之前, 疏儒勿治。" 又敎曰: "承宣與大臣, 曾以語雖狂妄, 不捧疏章, 有關後弊陳達, 則今觀鄭震僑疏云, 來呈已久, 喉院不捧。 當該承旨推考。" 震僑上疏, 略曰:

庶孽錮廢之法, 乃是天下萬古之所未有。 自三代以降于漢、唐、宋、大明之世, 庶孽位將相顯名績, 吾東方, 上自三國, 至高麗五百餘年, 取人之規, 一遵中華, 無所間隔。 太宗朝, 右代言徐選, 始倡無前之議, 庶孽子孫, 勿敍顯職, 其後姜希孟纂次《經國大典》也, 竝與其入仕、赴擧之路, 而錮塞之。 是以頒降《大典》之歲, 旱暵肆酷, 餓莩相望, 議者皆歸咎於此。 故成廟惻然警動, 將欲更張而未及施行。 宣廟初, 申濆等千餘人, 上章籲冤, 宣廟敎曰: "葵藿向日, 不擇旁枝。 人臣願忠, 豈必正嫡" 此可見大聖人至公至正之心。 至萬曆癸丑, 先正臣李珥始建復古通用之議, 而適有邊警, 未暇猝變, 先開許通、赴擧之路, 其意蓋欲次第疏通也。 及至仁廟朝, 副提學崔鳴吉, 與同僚沈之源、金南重、李省身、李景容, 陳章力請通用曰: "禮制之定, 莫嚴於三代, 而嫡庶之名, 只行於私室, 不行於公朝; 門地之別, 莫詳於六朝, 而用人之際, 惟問其父姓, 不問其母姓。 蓋天之生才, 無間於貴賤, 王者用人, 不拘於門地, 此天理之當然, 而百王之所不易也。 我國庶孽, 勿敍顯職之議, 初出於徐選, 而厥後輾轉, 一節深於一節, 終至子孫永錮, 雖有才德, 率皆抑塞而不揚於世, 擯斥而不與於人, 垂頭屛氣, 如負大罪, 無復父子之恩, 君臣之義, 傷倫逆理, 莫此爲甚。 匹夫含冤, 足傷和氣, 況其麗不億者乎 新豐府院君 張維, 亦上疏繼論, 仁廟令該曹稟處。 吏曹判書金尙容回啓, 謂宜依維言施行, 仍請議大臣, 其時, 相臣李元翼、尹昉等獻議曰: "卑薄庶孽, 天下萬古所未有之法, 殊欠王者立賢無方之道。" 相臣吳允謙獻議曰: "禁錮庶孽, 非先王大公之政, 通用之擧, 實爲合理。 世之病難行者, 以名分紊亂爲言, 而嫡庶名分, 只自家門戶中事, 朝廷只用賢收才而已。 雖貴顯之後, 嫡庶之間, 如有犯分之事, 則邦憲固嚴, 紊亂非所慮也。" 該曹之覆啓, 大臣之獻議, 皆出於一體通用之意, 二品以上諸臣之議, 亦皆歸一, 而惟以數人之立異, 只許三曹矣。 其後崔鳴吉判銓曹時, 啓云: "曾在乙丑年間, 領府事李元翼, 因弘文館箚子, 庶孽登科後, 許要, 不許淸, 稟裁聖旨, 兩司署經, 藏之禮曹, 以爲一代之成法矣。 今過九年, 一不擧行, 使聖朝講定之制, 歸於虛地, 事甚未安。 事目內所謂許要者, 卽戶、刑、工郞廳及各司長官之謂也。 自今以後, 請依受敎, 隨才擬望。" 許之。 辛喜季、沈日運、金宏、李慶善若干人, 得拜刑工郞, 今幾四五十年, 肅廟朝李礥一人, 僅拜戶郞, 而群起斥之, 竟至呈遞, 尙至今寂寥。

又曰:

歷代名臣, 多出庶孽。 以中國言之, 則在漢有衛靑、霍去病, 在晋有裵頠、周顗、陶侃、桓石虔、裵秀、阮孚, 在唐有蘇頲、李愬、杜荀鶴、令狐彰, 在宋有韓琦、范仲淹、陳瑩中、鄒志完、胡寅; 以東國言之, 則鄭文則官禮部尙書, 李世黃官閤門祗候, 權仲和官都憲。

又曰:

成廟以後, 庶孽多傑出之人, 如朴枝華、魚叔權、曺伸、李達、鄭和、林芑、梁大樸、權應仁、金謹恭、宋翼弼兄弟、李山謙、洪季男、劉克良、權井吉是也。 伏乞斷自宸衷, 廓開調用之路, 則數百年來許多抱冤長逝者, 魂亦感激鼓舞, 圖報聖德於九地之下, 天心自亨, 和氣旁流矣。

又曰:

中國所謂庶孽, 只其身耳, 未聞幷與其子孫而名之, 我國則一係庶派, 雖至累十世, 不能脫。

又曰:

封章伏闕, 將一月矣, 疏凡十三上, 而爲一承宣所力却, 此不過賤薄臣等, 不齒人類, 旣錮其身, 又箝其口。 直欲痛哭於闕門之外, 而惶恐不敢矣。

批曰: "我國本以偏小, 用人亦甚不廣, 予竊慨然。 天人一也。 日月所照, 旣不擇於精粗, 則王者用人, 豈有間於其中哉? 爾等所引有據, 而但玆事, 其來已久, 不可猝變, 其在愼重之道, 惟當徐究處之。 三曹郞事, 令該曹, 依仁廟受敎擇擬。"

[史臣曰: 柳子光以後, 不許庶孽通淸, 至是, 群庶孽, 自請通淸, 可見朝綱之日紊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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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사고본] 2책 2권 53장 A면【국편영인본】 41책 445면

[분류] 정론(政論) / 가족(家族)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