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남원부(南原府)에 새로 둔 제용재(濟用財)의 기.

야촌(1) 2010. 2. 11. 00:35

■ 남원부에 새로 둔 제용재의 기[南原府新置濟用財記

 

목은 이색 (牧隱 李穡 撰)

 

금상(今上) 8년 봄에 간관(諫官)인 익재 시중(益齋 侍中)의 손자(孫子)가 남원부(南原府)로 쫓겨나간 지 일년이 채 안 되어, 선정(善政)을 행한 업적이 남쪽지방의 수령 중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므로, 내가 그에 대한 일을 써서 순리(循吏)의 열전(列傳)에 붙이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다.


국자 학유(國子學諭)인 양이시군(楊君以時君)은 남원 출신인데, 행동거지가 신중하고 성실하며 말하는 것도 미더웠다.

하루는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우리 원님의 정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깊이 감동하고 있으니, 굳이 금석(金石)에 새겨 놓지 않더라도 그 자취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만, 새로 설치한제용재(濟用財)의 일만큼은 쉽게 무너져 버릴 염려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고 경계할 줄을 알게 하지 못한다면, 영원토록 폐단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가 없으니, 선생께서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하였다.


나는 익재(益齋) 선생으로부터 평생에 걸쳐, 두터운 은혜를 받아 온 처지였던 만큼, 선생의 손자가 훌륭하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하였고, 또 일찍이 간원(諫垣)에서 동료로 함께 근무할 적에 더욱 깊이 교분을 쌓았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양군의 말에 흔연히 응하면서 그 일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 일과 관련하여 양군이 말하기를,「사자(使者)가 와서 세금을 급하게 독촉할 때마다. 우리 지현(支縣)에서 미처 마련해 내질 못하였는데, 그럴 때면 빚을 내서 보태어 세금을 내게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파산하는 경우도 가끔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원님이 바로 그런 사실을 알고서 탄식하기를, "이보다 더 심하게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고는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포세(逋稅)를 거두어 모아 약간의 포목(布木)을 얻고 나서 안렴사(按廉使)에게 장계(狀啓)를 올리니, 안렴사 역시 그 일을 가상하게 여기면서 포목을 내어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노비 문제로 다투다가 관가에 소송을 낼 적에, 그 값으로 받는 것을 포목으로 받아들이되 1구(口)당 1필(匹)씩으로 하였는데, 우리 원님이 판결을 잘 내려 주었으므로 수입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합 650필의 포목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향교(鄕校)와 삼반(三班)에서 각각 한 사람씩을 뽑아 그 일을 맡아 보게 하였는데, 지현의 급한 일을 그 네 사람이 부(府)에 보고하면, 관아에서 공적 자금을 내주도록 하되 이식(利息)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부의 관리들이 감히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게끔 정식(定式)으로 확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남원부(南原府)가 비록 산중에 있다고는 하지만, 빈객이 끊임없이 왕래하는 까닭에 그들을 대접할 비축용 자금을 징수하곤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원님이 바로 그런 사실을 알고서 또 탄식하기를, "이보다 더 심하게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또 있겠는가."하고는 다시금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재고(財庫)를 설치할 뜻을 또 안렴사에게 아뢰어 우선 포목과 조미(糶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에는 둔전(屯田)을 시행해 오는 과정에서 관리들이 제멋대로 간악한 짓을 자행하였는데, 우리 원님이 노고를 아끼지 않고 직접 보살피자 관리들이 감히 속이는 짓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합 200석(石)의 미곡(米穀)과 150석의 두숙(豆菽)을 확보한 뒤에, 규정을 세워 내주고 거둬들이게 하되, 본전(本錢)은 남겨 두고 이식만 활용토록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72석 정도를 수확할 수 있는 새로운 밭의 개간을 계획하여, 빈객을 대접하는 비축용 자금으로 삼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 쓰는 집기나 도구까지도 모두 완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재원(財源)들을 모두 통틀어서 제용재(濟用財)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평민들에게서 마구 거두어들이는 일이 없어지고 지현에서도 정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로운 일만 생기고 해로운 일이 점차 제거됨으로써 백성들이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이 일에 대해 논하면서 글로 남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그 일이 인정(仁政)의 하나라고는 하겠지만, 이후(李侯)의 정사(政事)로 볼 때, 그런 일 정도는 마땅히 행해야 할 기본적인 일이라고 할 것이니, 내가 선뜻 그 일 하나만을 굳이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이후는 인후(仁厚)한 덕을 발휘하여 그 근본을 배양하였고 강명(剛明)하게 위엄을 보여 운용이 잘 되도록 함으로써 하나의 지역을 제대로 교화시켰다.

 

따라서 그 치적이영천(穎川)이나 촉군(蜀郡)보다도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니, 글로 남길 만한 것이 그 일 하나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하나의 일을 통해서도 얼마나 근실하게 마음을 썼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하겠는데, 남원 사람들이 이후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제대로 행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그대는 나를 대신해서 그대의 고을 사람들에게 유시하되,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내세울 것 없이 그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거론해서 증명하도록 하라.


병든 사람이 의원에게서 병이 낫고, 굶주리던 사람이 먹을 것을 얻어서 살아 난다면,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성은 그대들의 마음이고 현(縣)은 지체(支體)이니, 현이 있고 백성이 있고 난 뒤에야 그대들의 부(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마음과 지체가 모두 고달팠던 것으로 말하면, 굶주리거나 병든 것보다도 더 심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후가 와서 병을 고쳐 주고 먹을 것을 주었는데도 보답할 줄을 모른다면, 그래도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보답해야 마땅하겠는가? 

 

이후가 세운 법을 무너뜨리지 말고 이후(李侯)의 뜻을 실추시키지 말아야만 그런대로 보답할 수가 있을 것이다.」하니, 양군이 두 번 절하면서 삼가 가르침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후(李侯)의 이름은 보림(寶林)으로, 을미년(1355년 공민왕 四年)에 급제하였다. 신념이 확고한 데다, 충성스럽고 올곧아서 옛날 쟁신(爭臣)의 풍도가 있었는데, 고을을 다스릴 때에도 대부분 여기에 뿌리를 두었다고 하겠다.


지정(至正) 기해년(1359, 공민왕8) 가을 8월에 기록하다.

 

자료출처 :  牧隱文藁卷之一 >記 / 동문선 제72권(297페이지)>記

--------------------------------------------------------------------------------------------------------------------------------------
[주01]간관(諫官) : 사간원(司諫院) 사헌부(司憲府)의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

 

[주02]순리전(循吏傳): 지방에 군수로 가서 선정한 사람을 순리(循吏)라고 하여 역사에서는 따로 《순리전》을 두

           어서 성한 사람들 만을 표창하였다.

 

[주03]삼반(三班): 고려 시대 지방 관아에 속한 향리(鄕吏)와 군졸(軍卒)과 관노(官奴)를 일컫는 말이다.


[주04]영천(穎川)이나 촉군(蜀郡): 한 선제(漢宣帝) 때 황패(黃覇)가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나가서 천하제일의

            정사를 펼친 고사와, 한 경제(漢景帝) 때 문옹(文翁)이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나가서 시문(詩文)으로 교

           화시킨 결과 제(齊)ㆍ노(魯)처럼 변화시켰던 고사를 말한다. 《漢書 卷89 循吏傳》

--------------------------------------------------------------------------------------------------------------------------------------

[원문]

 

■ 南原府 新置 濟用財 記

上之八年春。出諫官益齋侍中之孫。知南原府。未朞。政聲最東南守令之上。予久欲書之付循吏傳。國子學諭楊君以時。南原人也。愿而愨。言且信。一日。來語予曰。吾侯之政。入人深矣。不刻之金石。亦不泯滅。惟所置濟用財。恐易以致壞。苟不使後之人知懼知戒。不可保其永永。無弊。願先生賜之言。予於益齋先生。世受厚恩。固喜其有孫之賢。又嘗同寮諫垣。相知益深。故忻然從楊君究其事。楊君之言曰。每使者索賦急。吾攴縣不及辦。稱貸而益之。由是或破產。吾侯知其然。則曰。虐民有尙此哉。會徵逋稅。得布若干。啓按廉使。使嘉之。出布以助。爭奴婢訟于官。受直者入布。口一匹。吾侯善決斷。所入尤多。總得布六百五十疋。擇鄕校三班各一人使典之。攴縣之急。四人者白府。官出予之。不取息。戒府吏無敢他用。著爲永式。吾府雖在山中。賓客絡繹。歛以委積。民甚苦之。吾侯知其然。則又曰。虐民復尙此哉。又以置財意。啓按廉使。得布糴米若干。舊有屯田。恣吏爲奸。吾侯躬親其勞。吏不敢罔。總得米爲石二百。豆菽爲石百五十。立法散斂。存本用息。度新墾之田可收七十二石者。以供委積。至於什用理具。旣備旣完。合而名之曰濟用財。於是。編氓無橫斂。支縣守常賦。利興害祛。民樂其生。可無論載歟。予曰。仁哉。然於李侯之政。此其米鹽也。予不屑焉。李侯以仁厚培其本。剛明齊其用。化一邑。宜不下穎川蜀郡。其可書者。不止於此。然此一事。亦足見用心之勤矣。未知南原之人。能不負李侯也哉。子其爲我諭子之邑人。無高談異論。直擧目前事明之。病者效於醫。飢者得食以活。其有不報者耶。民。汝之心也。縣。汝之支也。有縣焉有民焉。乃能有汝府也。昔也心與支交困。甚於飢且病。今也李侯旣醫之。旣食之。而不知報。汝尙人耶。報之當如何。無壞其法焉。無墜其志焉。斯可矣。楊君再拜曰。敬受敎。李侯名寶林。乙未及第。秉志忠謇。有古爭臣之風。其理郡亦多本於此云。

 

至正己亥秋八月。記。

자료 : 『牧隱文藁卷之一 >記』 『동문선 제72권>記』 한국고전종합DB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慶尙道 安東大都護府名宦 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