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간죽정 기(間竹亭 記)

야촌(1) 2010. 2. 12. 01:54

■ 간죽정기(間竹亭記)

 

재사당 이원 찬(再思堂 李黿 撰)

 

귀양살이 속에서 아픔도 많아 오랫동안 붓을 들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나의 벗박공(朴公 : 朴權)이 이에 편지를 써서 내게 보내어 이르기를,「나의 선친이 사시던 집이 영암(靈巖) 서쪽 二十里쯤에 있는데, 앞에는 덕진(德津) 앞바다의 조수(潮水)의 장관(壯觀)과 대하고,  뒤에는 기묘한 월출봉(月出峰)과 대하였으며, 그 가운데 한 시내가 도갑(道岬)에서 흘러내려, 여울은 구슬 같은 물방울을 튕기고, 물이 흥건하게 고여서는 못을 이루고, 백번도 더 꺾이고, 꺾이어서 빙빙 돌아 에워 둘으며, 서쪽으로 흐른다.

 

또 월출봉(月出峰)의 북쪽 산줄기는 이어 내려와, 엉기어 모여서 주먹 같이, 또는 혹 같이 집의 동쪽에 불끈 솟아 있다. 정자(亭子) 사이에는 대나무가, 대나무 사이에는 소나무가 욱어졌고, 우러러보면 천지 자연의 조화는 스스로 움직이고, 굽어 내려다 보면 물고기 노는 것이 환히 보이며 그 수효까지도 헤아릴 수가 있다.

 

전해 오는 말로는 신통(神通)한 스님 도선(道詵)이 자리잡아 살던 집터였다고 한다. 나의 외삼촌 박군빈(朴君彬)이 처음 이곳에 자리 잡아서 집을 지었고, 선친(先親) 께서는 이를 이어받아 집으로 삼았다.

 

굴싸리를 쳐내고, 대나무를 잘라내서, 그 옛터를 넓히고, 작은 정자를 지어놓고, 현판에는 간죽정(間竹亭)이라 써서 달았다. 스스로 호(號)를 오한거사(五恨居士)라 하고정자에 올라 시(詩)를 읊으며 평생을 지내려는 생각인것 같았다.

 

늦게 과거에 급제 하였으나 영달(榮達)의 길에서  걸려 넘어질가 저어하여 복건[幅巾 : 두건의 하나로서 은사(隱士)들이 쓰는것]을 쓰고  남쪽으로 돌아와서는, 아무 구속도 받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며 즐겼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선친이 세상을 뜨니 정자 또한 따라서 허물어졌다.

 

아아! 슬프다.

나 또한 과거(科擧)에 뜻을 두어 미처 손댈 겨를이 없었다. 외람되어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는 벼슬과 녹봉(祿俸 : 즉 급여)을 잃을까 걱정하다 보니 어언 여러해가 지났다. 무오년(戊午年)에 조정(朝廷)에 죄를 얻어 관북(關北 :함경북도 일대) 땅에 귀양 와 있으니, 집에 쓸쓸하게 홀로 계신 어머니를 뉘 있어 위로해 드리리요.

 

다행히 성은(聖恩 : 임금의 은혜)을 입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어머니는 예대로 자애(慈愛)로운 얼굴로 맞아줄 것이고, 고향에 묻힌 선조들의 무덤을 돌아보고, 아직도 남아있는 선친의 손때가 묻은 것들을 대할 것인즉,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야 어찌 이루 다 말로 하리요.

 

하물며, 이 정자(亭子)는 선친이 친이 지어 놓고 조석(朝夕)으로 시(詩)를 읊으시던 곳인즉, 그분의 손때가 남아 있으니 고향의 선조들의 무덤에 비길만 하다. 뿐만 아니라, 나는 꼭 옛터를 새롭게 경영(經營) 하여서, 오래오래 전해 가도록 한 뒤, 선친의 뜻을 따르고자 하니, 그대는 어찌 나를 위하여 그 자초지종을 자세히 하고, 나의 슬프고 사모하는 정(情)을 적어 주지 아니하겠는가」하였다.

나는 바로 앉아서 편지를 펼쳐 들고, 두번 세번 읽고 눈물이 뚝뚝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였다.

 

아아! 궁(窮)함과 영달(榮達)함은 운수(運數)에 달려 있고, 부귀(副貴)는 하늘에 달려 있고, 때를 만나고 못 만남은 시운(時運)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의 도리를 닦고 안 닦는 것은 자신(自身)에 달려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군자(君子)는 그의 인작(人爵 : 사람이 정한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천작(天爵 : 사람에게 갖추어진 자연의 아름다운 덕이니, 곧 하늘이 준 벼슬이란 뜻임)을 구하며, 하늘에 달려 있는 부귀(富貴)를 구하지 아니하고서 내 마음에 본디 부터 가지고 있는 타고난 그대로의 성품을 남김없이 겉으로 드러내어 밝힌다.

 

궁하고 영달함으로서 그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며, 부귀로서  그 지조(志操)를 변하지 아니하고, 그가 그의 벼슬로서 하면 나는 나의 어짐으로서 하고, 그가 그의 부귀로서 하면 나는 나의 의(義)로서 한다. 내 어찌 그들을 싫어하랴. 나의 마음에 본디 부터 있는 그대로의 덕성(德性)을 모조리 겉으로 드러내어 밝힐 뿐이다.

 

부귀를 뜬구름 같이 여기고, 높은 벼슬 자리를 더렵혀서 진흙탕 같이 보며, 산수의 즐거움을 실컷 맛보며, 산수(山水)의 어질고 슬기로움을 모조리 몸에 익혀 행하며, 거동하는 때를 마음대로 하고, 만물이 피어나고 자라는 근본 이치를 알며,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며, 한세상 위를 거닐면, 궁(窮)했다고 할 것인가 통달(通達)했다고 할 것인가.

 

선생께서 스스로 읊으시기를「동(東)으로 가선 죽정(竹亭 : 간죽정)에눕고,

서(西)로 가선 배를 띄우며

남(南)으로 가선 시내에 발 씻고,

북(北)으로 가선 동산에서 논다.

평생 마음이 자유로와

뜻을 얽매이지 않고,

남북동서(南北東西)

가고 오고 머물고 마음 내키는대로 한다.」고, 하신것을볼때, 그 호탕하고 뛰어난 인품이나, 세속(世俗) 사람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기상(氣像)은, 명리(名利)를 잊고 속세(俗世)를 떠나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마음내키는 대로 깨끗한 놀이를 즐기는 이와 같아서 그 자연에 나를 잊고 자연에 동화한 마음은 바로 천지 만물과 움직임을 같이 한다. 

 

모든 사물(事物)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으며, 스스로 천지만물과 움직임을 같이 한다.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으며,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즐김이 능히 이와 같으니, 참으로 세속(世俗)을 벗어난 높은 지견(知見)이 있는 사람이 사물(事物)의 도리를 깊이 이해하고 대국적(大國的) 견지(見地)에서 관찰(觀察)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애써서 경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 이덕유(李德裕)란 사람은 시골집에 꽃과 돌을 모아 놓고서, 그 자손들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하나의꽃, 하나의 돌이라도 내 자손이 지키지 못한다면 내 뜻을 이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 자손을 경계하기 위하여 가히 수고했다 할 것이다. 모두가 같지 않아서 자자손손(子子孫孫) 전하다가, 꽃과 돌을 지키지 못하고 남의 집으로 흩어져 들어간다면, 그 자손들이 덕유(德裕)의 뜻을 이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보건대 옛터를 새로이 경영(經營) 하고서, 선친의  뜻을 따르고자 한 이상, 그렇다면 옛터를 다시 새로이 경영하려는 뜻은, 덕유(德裕)의 일과 같아서,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그러나 선친의 뜻과 업(業)을 이어가려고 도모(圖謀)하는 뜻은 역시 가히 더없이 착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풍월(風月)과 강산(江山)의 아름다운 경치에 이르러서는 들은것 만으로는 추측하여 이를 쓸 수가 없다. 다음날  다행히 정자(亭子)에 오를 기회가 있기를 기다려서 직접 보고서 다시 쓸 것이다. 

 

자료 : 재사당선생일집 권지일 종(再思堂先生一集 卷之一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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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권(朴權)

생몰년은 미상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字)는 이경(而經), 호(號)는 고광(孤狂), 전적(典籍) 성건(成乾)의 아들이다.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은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길성(吉城)으로 정배(定配)되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때는, 해남으로 유배당하여 죽었다. 장수(長水)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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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原文) 

 

再思堂 李黿 撰 

 

謫裏多病。久廢擧筆。一日。吾友朴侯而經。手簡抵余曰。吾先人弊廬。在靈巖治西二十里許。前對德津壯潮。後對月出奇峯。中有一溪。源出道岬。跳珠成灘。渟滀爲淵。盤旋百折。逶迤而西。又有月出北條。連絡凝聚。如拳如疣。聳於家之東隅。亭間於竹。竹間於松。仰觀而天機自動。俯臨而游魚可數。傳云。神僧道詵之舊址也。吾舅朴君彬。始卜築于玆。先君繼之仍家焉。翦荊斬竹。廣其舊址。以搆小亭。扁其名曰間竹。自號五恨居士。吟詠其間。有若將終身之意。晩捷科第。蹇躓利途。幅巾南還。隨意自適。未幾。先人去世。亭又隨而毀矣。嗚呼痛哉。余亦留心擧業。未暇修葺。盜名桂籍。患失利祿之間者有年矣。歲戊午。獲罪朝廷。流落關北。孤親在堂。隻影誰弔。幸蒙聖恩。得還田里。萱堂依舊。慈顏不改。顧瞻桑梓。先君之手澤尙存。則哀慕之心。可勝言哉。況是亭。先君之所親搆。而朝夕吟詠之處。則其於手澤之存。比之桑梓。不啻萬萬。余方謀新舊址。以壽其後。欲追先人之志。子盍爲我詳其顚末。以記余哀慕之情乎。余端坐披閱。讀之再三。不覺其涕之零也。嗟呼。窮達有命。富貴在天。人之遇不遇。時也。道之修不修。在己。是故。君子不求在彼之人爵。而求吾心之天爵。不求在天之富貴。而盡吾心之性命。不以窮達而易其心。不以富貴而貳其操。彼以其爵。我以吾仁。彼以其富。我以吾義。吾何慊於彼哉。盡吾心而已。浮雲富貴。泥塗軒冕。窮山水之樂。盡仁智之用。專動靜之機。達萬化之原。俯仰乾坤之內。逍遙一世之上。則可謂窮乎。可謂達乎。觀先生自詠云。東臥竹亭西泛舟。南溪濯足北園遊。平生浩蕩不羈志。南北東西任去留。其豪邁絶俗之氣。與浴沂者同。而其自然無我之心。直與天地萬物同機。非不物其物。自樂其樂者。能如是乎。眞可謂達人大觀者也。而經勉乎哉。昔李德裕聚花石於村莊。戒其子孫曰。一花一石。吾子孫不能守。則非繼吾志者。其戒子孫可謂勤矣。不一再傳。子孫不能守。花石散於人家。則其子孫能繼德裕之志乎。今觀而經謀新舊址。欲追先人之志。則而經之志。不亦悲乎。而經繼述之志。亦可謂至善至美矣。至於風月江山之勝。非可耳聽而臆說之也。他日幸邀于亭上。目覩而更記也。


자료 : 再思堂先生逸集卷之一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