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묘지명(墓誌銘)

서모 김씨 묘지명(庶母金氏墓誌銘) - 다산 정약용

야촌(1) 2010. 2. 20. 02:32

■ 서모 김 씨 묘지명(庶母 金氏 墓誌銘)

 

정약용 찬(丁若鏞 撰)

 

서모 김씨는 사역원 정(司譯院正)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의택(金宜澤)의 딸이다. 

본관은 잠성(岑城)이니 지금 금천군(金川郡)에 합하여졌다.


우리 선고(先考) 통정대부(通政大夫) 진주 목사(晋州牧使) 휘 재원(載遠)이 건륭(乾隆) 경인년(1770, 영조 46)에 우리 어머니 숙인(淑人)을 잃고 그 이듬해 금화현(金化縣)의 처녀 황씨(黃氏)를 취하여 측실(側室)로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요사하였다. 

 

계사년(1773, 영조 49)에 또 서울에서 처녀 김씨를 취하여 측실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 20이었으니 곧 서모(庶母)이다.

천성이 명민(明敏)하고 작은 체구에 말이 적었으며 또 부드럽고 화평하였다. 우리 아버지를 정성스럽고 부지런하게 섬기되 20년을 하루같이 하매 아버지가 편안하였으니, 그 공을 기록할 만하다.


처음 우리 집에 올 때 용의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머리에 서캐와 이가 많고 또 부스럼이 잘 났다. 서모는 손수 빗질해 주고 또 그 고름과 피를 씻어주었다. 그리고 바지ㆍ적삼ㆍ버선을 빨래하고 꿰매며 바느질하는 수고도 또한 서모가 담당하다가 장가를 든 뒤에야 그만두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 자매 중에서 특히 나와 정이 두터웠다.


신유년(1801, 순조 1)의 화에 내가 남쪽 지방으로 귀양가니, 서모는 매양 생각하여 눈물을 흘렸다. 죽을 때에 미쳐서는,

「내가 다시 영감(令監 정약용이 승지를 지냈는데 당상관이니 당상관 이상은 영감이라 함)을 보지 못하겠도다.」하는 말과 함께 숨이 끊어졌으니 아, 슬프도다.


우리 집은 본디 가난하였다. 병신년(1776, 영조 52) 봄에 아버지가 다시 벼슬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어 명례방(明禮坊)에 우거하고 정유년(1777, 정조 1) 가을에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가고, 경자년(1780, 정조 4) 봄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옮겨졌다가 겨울에 체직(遞職)되어 7년 동안 집에서 놀며 지냈다.

 

정미년(1787, 정조 11) 여름에 다시 벼슬하여 한성 서윤(漢城庶尹)이 되어 다시 명례방에 살았다. 기유년(1789, 정조 13) 여름에 울산 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로 나갔다가 경술년(1790, 정조 14) 겨울에 진주 목사로 옮겨져 임자년(1792, 정조 16) 여름에 임소에서 졸(卒)하였다. 서모가 다 따라다녔으니 그 고락(苦樂)과 영췌(榮悴)를 미루어서 알 수 있다.


건륭 갑술년(1754, 영조 30) 7월 9일에 태어나서 가경(嘉慶) 계유년(1813, 순조 13) 7월 14일에 죽으니 향년이 50이다. 예법으로 하담(荷澹)의 선영(先塋)에 따라 장사하여야 하나. 용은 적소(謫所)에 있어 일마다 어그러지는 것이 많아 용진(龍津) 산골짜기 속에 장사하였는데, 지금 조곡(鳥谷) 해좌 사향(亥坐巳向)의 언덕에 개장(改葬)하려 한다.


3녀 1남을 낳았다. 딸은 채홍근(蔡弘謹)에게 출가하였는데 번암(樊巖) 채 상국(蔡相國)의 서자이며, 다음은 이중식(李重植)에게 출가하였는데 나주 목사 이인섭(李寅燮)씨의 서자이다. 이들은 모두 일찍 과부가 되었다. 막내딸은 요절하였다.

 

아들은 약횡(若鐄)이다. 초취(初娶)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고 재취(再娶)는 평창 이씨(平昌李氏)이며 삼취(三娶)는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1남을 낳았는데 키우지 못하였으며 세 아내도 다 일찍 죽었는데 조곡(鳥谷)의 기슭에 장사지냈다. 채실(蔡室)에게 계자(繼子) 주영(柱永)이 있고 이실(李室)에게 계자 …… (원문 1자 빠짐) …… 구(□九)가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일생을 셋으로 나누면 / 參分其一生中
일분이 즐겁고 영화로웠네 / 一分其樂其榮


하담(荷潭) 선영(先塋) 기슭에 따라가지 못하였으니 / 旣不克從于荷之麓
차라리 세 며느리 무덤 있는 곳에 의지함이 낫지 않으랴 / 無寧來依乎三婦之塋

 

자료 : 다산시문집 제16권 >묘지명(墓誌銘)

 

 

[각주]

 

[주01]해좌 사향(亥坐巳向) : 해방(亥方)을 등지고 사방(巳方)으로 향한 좌향. 정남으로부터 동쪽으로 30도 되는

           방위를 중심으로 한 좌우 15도의 각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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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庶母金氏墓誌銘

 

庶母金氏者。司譯院正同知中樞府事金宜澤之女也。本貫岑城。今合于金川郡。我先考通訓大夫晉州牧使諱載遠。乾隆庚寅喪我先淑人。厥明年取金化縣處女黃氏爲側室。未久而夭。癸巳又於京城取處女金氏爲側室。時年二十。卽庶母也。性明敏小隘而寡言。又樂易可悅。奉事我先君以誠以勤。二十年如一日。先君安焉。其功可紀已。始來時鏞之齒甫十二。頭多蟣蝨。又善瘡癤。庶母手自枇櫛。又洗其膿血。襦袴衫韈。其澣濯緶緝之勞。亦庶母任之。至冠娶而後已焉。故於我昆弟姊妹。特與我情篤。辛酉之禍。余謫南中。庶母每念彈淚。及其死也。曰吾不復見令監。聲與息俱絶。嗚呼其可悲也。吾家素貧。丙申春。先君復仕爲戶曹佐郞。僑居明禮坊。丁酉秋。出宰和順縣。庚子春移守醴泉郡。至冬而遞。七年家食。丁未夏。復仕爲漢城庶尹。再居明禮坊。己酉夏。出爲蔚山都護。庚戌冬。移晉州牧使。壬子夏卒于官。庶母皆從焉。其苦樂榮悴。可推而知也。生於乾隆甲戌七月初九日。卒於嘉慶癸酉七月十四日。享年六十。法當從葬於荷潭之。鏞在謫。庶事多舛。乃葬於龍津山谷中。今將改葬于鳥谷負亥之原。擧三女一男。女長適蔡弘謹。樊巖蔡相國之庶子也。次適李重植。李羅州寅爕氏之庶子也。皆蚤寡。末出者夭。男曰若鐄。初娶淸州韓氏。再娶平昌李氏。三娶驪興閔氏。生一男不育。三妻皆蚤死。葬於鳥谷之麓。蔡室有繼子柱永。李室有繼子 缺 九。銘曰

參分其一生中。一分其樂其榮。旣不克從于荷之麓。無寧來依乎三婦之塋。

 

[주01] 瑩 : 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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