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 정약용 자찬 묘지명(茶山丁若鏞自撰 墓誌銘) - 광중본(壙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명을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직(蔭職)으로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 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용(鏞)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22세(1783, 정조 7)에 경의(經義 과문 육체(科文六體)의 하나)로 생원(生員)이 되고,01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 13, 1789)에 갑과(甲科)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奎章閣)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課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使)가 되었다.
을묘년(1795, 정조 19) 봄에 02경모궁 상호도감 낭관(景慕宮上號都監郞官)의 공로로 사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정사년(1797, 정조 21)에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1799, 정조 23)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 원옥(冤獄)을 다스렸다.
경신년(1800, 정조 24) 6월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정종대왕(正宗大王)이 승하하니 이에 03화(禍)가 일어났다. 15세(1776, 영조 52)에 풍산 홍씨(豐山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 선생 익(李先生瀷)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 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04상상(上庠)하여 이벽(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1787, 정조 11)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 정조 15)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을묘년(1795, 정조 19) 여름에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하여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의 일로써 05 발계(發啓)하여, 이가환ㆍ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下獄)되었다. 얼마 뒤에 06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 무죄로 판명되어 놓아 줌)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定配)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로 정배되었다.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 조정의 뜻)를 얻으니, 용과 전(銓)이 또 체포당하였다.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않았다.
07 태비(太妃)의 작처(酌處 죄의 경중을 따라 처단함)를 입어 용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계해년(1803, 순조 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臣) 서용보(徐龍輔)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년(1810, 순조 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冤 원통함을 호소함)으로 방축 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08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겨울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鏞)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지 18년 동안에 경전(經典)에 전심하여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역(易)》ㆍ《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 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많이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엮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ㆍ안옥(按獄)ㆍ무비(武備)ㆍ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ㆍ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簒)한 것이 거의 2백 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종대왕(正宗大王)의 총애와 가장(嘉獎)이 동렬(同列)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후에 상사(賞賜)로 받은 서적ㆍ내구마(內廐馬)ㆍ문피(文皮 호표(虎豹)의 가죽)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條陳)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항상 규장각(奎章閣)ㆍ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았다. 밤마다 진찬(珍饌)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고 무릇 내부(內府)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었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省察)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開國)한 뒤로 한양(漢陽)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否塞)하여 마현(馬峴)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고조의 휘(諱)는 도태(道泰), 증조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께서만 진사를 하셨다.
홍씨(洪氏)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09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에 바라던 대로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총애 입어 / 荷主之寵
근밀(近密)에 들어갔네 / 入居宥密
임금의 복심(腹心) 되어 / 爲之腹心
조석으로 모셨도다 / 朝夕以昵
하늘의 총애 입어 / 荷天之寵
우충(愚衷)이 열리었네 / 牖其愚衷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 精硏六經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 妙解微通
소인이 치성해지니 / 憸人旣張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 天用玉汝
거두어 간직하고 / 斂而藏之
장차10 훨훨 노니련다/將用矯矯然遐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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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여문(儷文) : 변려문(騈儷文)의 약칭. 수사(修辭)하는 데 4자와 6자의 대구(對句)를 많이 쓰고 음조(音調)를 맞추며 고사를 많이 쓰는 한문체(漢文體)의 한 가지. 과문(科文)에 주로 이 문체를 썼다.
[주02]경모궁 상호도감 낭관(景慕宮上號都監郞官) : 경모궁(景慕宮)은 정조(正祖)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 즉 장조(莊祖)의 궁호(宮號)임. 정조 19년(1795)에 장조의 궁호(宮號)를 내려주고,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였다.
[주03]화(禍)가 일어났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함으로써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된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는 정조 때 눌려지내던 벽파(僻派)와 손을 잡고 시파(時派)를 숙청하였는데, 시파로서 천주교와 관련 되어 다산(茶山) 형제와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등이 유배 또는 사형되었다.
[주04]상상(上庠): 태학(太學)을 말하는 것으로 곧 성균관(成均館)이다. 다산은 여기에 들어와 공부할 때 이벽을 만났다.
[주05]발계(發啓) : 임금이 재가한, 또는 의금부에서 처결한 죄인에 대하여 미심(未審)할 때에 사간원ㆍ사헌부에서 죄명을 갖추어서 아뢰는 일.
[주06]두 형 …살았다: 천주교 금법에 연루되어 형인 약전ㆍ약종과 함께 체포되어 정약종은 처형되고 약전과 다산은 정배되었다.
[주07]태비(太妃):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 본관은 경주(慶州). 김한구(金漢耈)의 딸이고, 벽파(僻派)의 영수 김귀주(金龜柱)의 누이다. 정조의 승하로 11세인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수렴청정하였다.
[주08]대계(臺啓) : 사헌부ㆍ사간원에서 유죄로 인정하여 올리는 계사(啓辭).
[주09]자좌오향(子坐午向) : 자방(子方)을 등지고 오방(午方)을 말함. 곧 정남방으로 앉음.
[주10]훨훨 노니련다[遐擧] : 고상한 행동의 비유.
자료 : 다산시문집 제16권 >묘지명(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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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原文)
是唯洌水丁鏞之墓也。本名曰若鏞。字曰美庸。號曰俟菴。父諱載遠。蔭仕至晉州牧使。母淑人海南尹氏。以英宗壬午六月十六日。生鏞于洌水之上馬峴之里。幼而穎悟。長而好學。二十二以經義爲進士。專治儷文。二十八中甲科第二人。大臣選啓。隷奎章閣月課文臣。旋入翰林。爲藝文館檢閱。升爲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弘文館修撰,校理,成均館直講,備邊司郞官。出而爲京畿暗行御史。乙卯春。以景慕宮上號都監郞官。由 司諫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由右副至左副承旨。爲兵曹參議。嘉慶丁巳。出爲谷山都護使。多惠政。己未復入爲承旨,刑曹參議。理冤獄。庚申六月。蒙賜漢書選。是月正宗大王薨。於是乎禍作矣。十五娶豐山洪氏。武편 01承旨和輔女也。旣娶游京師。則聞星湖李先生瀷學行醇篤。從李家煥,李承薰等得見其遺書。自此留心經籍。旣上庠。從李檗游。聞西敎見西書。丁未以後四五年。頗傾心焉。辛亥以來。邦禁嚴遂絶意。乙卯夏蘇州人周文謨來。邦內洶洶。出補金井察訪。受旨誘戢。辛酉春。臺臣閔命赫等。以西敎事發啓。與李家煥,李承薰等下獄。旣而二兄若銓,若鍾皆被逮。一死二生。諸大臣議白放。唯徐龍輔執不可。鏞配長鬐縣。銓配薪智島。秋逆賊黃嗣永就捕。惡人洪羲運李基慶等謀殺鏞。百計得朝旨。鏞與銓又被逮按事。無與知狀。獄又不成。蒙太妣편 02酌處。鏞配康津縣。銓配黑山島。癸亥冬。太妃命放鏞。相臣徐龍輔止之。庚午秋。男學淵鳴冤。命放逐鄕里。因有當時臺啓。禁府格之。後九年戊寅秋。始還鄕里。己卯冬。 朝議欲復用鏞以安民。徐龍輔又沮之。鏞在謫十有八年。專心經典。所著詩書禮樂易春秋及四書諸說共二百三十卷。精研妙悟。多得古聖人本旨。詩文所編共七十卷。多在朝時作。雜纂國家典章及牧民按獄武備疆域之事醫藥文字之辨。殆二百卷。皆本諸聖經而務適時宜。不泯則或有取之者矣。鏞以布衣。結人主之知。正宗大王寵愛嘉獎。踰於同列。前後受賞賜書籍廏馬文皮及珍異諸物。不可勝記。與聞機密。許有懷以筆札條陳。皆立賜允從。常在奎瀛府校書。不以職事督過。每夜賜珍饌以飫之。凡內府祕籍。許因閣監請見。皆異數也。其爲人也。樂善好古而果於行爲。卒以此取禍命也。夫平生罪孼極多。尤悔積於中。至於今年。曰重逢壬午。世之所謂回甲。如再生然。遂滌除閑務。蚤夜省察。以復乎天命之性。自今至死。庶弗畔矣。夫丁氏本貫押海。高麗之末。居白川。我朝定鼎。遂居漢陽。始仕之祖。校理子伋。自玆繩承。副提學壽崗,兵曹判書玉亨,左贊成應斗,大司憲胤福,觀察使好善,校 理彦璧,兵曹參議時潤。皆入玉堂。自玆時否。徙居馬峴。三世皆以布衣終。高祖諱道泰,曾祖諱恒愼,祖父諱志諧。唯曾祖爲進士也。洪氏產六男三女。夭者三之二。唯二男一女成立。男曰學淵,學游。女適尹昌謨。卜兆于家園之北子坐之原。尙能如願。
銘曰。
荷主之寵。入居宥密。爲之腹心。朝夕以昵。荷天之寵。牖其愚衷。精研六經。妙解微通。憸人旣張。天用玉汝。斂而藏之。將用矯矯然遐擧。
[편-01]武 : 左
[편-02]妣 : 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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