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정선생문집 서(霽亭先生文集 序)
지은이 : 이인행(李仁行)
제정(霽亭) 이문정(李文靖)공은 고려 말엽에 이름난 유학자이다. 대대로 문한(文翰)의 가문으로, 나이 18세에 장원으로 발탁되어 사한(史翰) 정언(正言)으로 말미암아 차례로 국자좨(國子祭酒-高麗時代國子學의 校長) 이부판사(吏部判事-從一品)에 올랐으니, 모두 최고의 인재 선발 이었다.
성품은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았으니, 공민왕 때, 팔관회(八關會)에 담당 관리가. 관세막(盥洗幕)을 설치하고, 번(藩)을 세워 내외를 구분 하거늘 공(公)이 막지부(地部)의 수장이 되어, 하여금 그 번(藩)을 거두게 하였다가, 주상의 노여움을 받아 화(禍)가 장차 헤아릴 수 없었으나, 좌우에서 힘써 구함에 힘입고 또 문학에 중한 명망이 있음으로 노여움을 풀 수 있었다.
일찍이 면전에서 돈곤(旽髡) 주색을 좋아함을 배척하여, 신돈에게 중상을 받아 파직 되었으니, 그가 세상과 타협하고, 구차히 용납 되고자 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관직이 계림윤(鷄林尹-오늘날의 경주시장)에서 마쳤으니, 그가 사직하는 전문에 말하기를 「병란이 일어난 뒤로, 신(臣)은 도운 것이 없고, 물러나 산림(山林)에 거처한지 몇 년 되었습니다.
저의 마음이 일찍이 왕실에 있지 않음이 없었으니, 밝은 창 고요한 책상에서 공경히 한 개의 향을 피웠고, 보배로운 책 상자와 아름다운 도서에서 항상 만년의 누림을 축원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시대를 상심하여 근심하고, 사랑하는(우군애국) 뜻이 언표에 넘친다.
공(公)의 책을 읽고, 공의 세대를 논한다면 공의 심사를 상상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고려사□□「명신전」을 보니, 공이 돌아가심은 신우(辛禑) 11년이다. 우리 예조(藝祖) 용흥(龍興) 초에, 특별히 공의 지손에게 명령하여 모두 「입(立)」자로 이름을 삼게 하였으니, 대개 함주(咸州) 전별의 자리(餞席)에서 서서 환조(桓祖)의 뒤에 있었던 일을 기록 함이다.
그러나 지금 공의 언지와 여러 작품 및 애오잠(愛惡箴). 척약재잠(惕若齋箴)으로 보건데, 그 굳세게 스스로 혼란한 세상에서 선 것을 오히려 한 둘을 상상 할 수 있으니, 어찌 무너진 세파에 우뚝이 선 절개가 성중의 뜻에 취택되어 모름지기 뒤에 계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생각하고 잊지 말아「명언재자(名言在玆)」백세 입나(立懦) 유풍을 실추 시키지 말게 함이 아님을 알겠는가?
당숙부(堂淑父) 익재(益齋) 선생은 자주 공의 문장을 칭찬 하였다. 익재가 일찍이 역사책이 기록되지 않음을 결점으로 여겨, 공과 백문조(白文寶)공과 함께 나누어 기년전(紀年傳)을 지었으니, 익재는 국초에서 시작하여 숙종(肅宗)에 이르고, 예종(睿宗) 이하는 공이 백공과 함께 진실로 편찬 하였다.
당세 문형이 가까이 같은 집안에 있고, 평일 칭찬을 받음이 이와 같은즉 그 입덕(공업을 세움)과 입언(문장을 짓다)은 진실로 우주를 밝혀, 불후(不朽)에 전혀 보여 줄 수 있었지만 공의 전집을 일찍이 춘천부(春川府)에서 판각 하였더니, 백년 전란의 나머지에 조손이 서울과 지방에 분산되어 원본을 능히 보전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손 승선공(承宣公) 이덕배(李德培)가 □□동문선 □□과 여지 등, 여러 책에서 수집하여 손수 한 책을 베껴서 건연(巾衍)에 간직하여 원본이 혹 출현하기를 기다렸다.
이에 이르러 문중 원로 이종재(李宗榟)씨가 종중에 의논하기를 「기송(杞宋)이 증명할 문헌이 없고, 이미 세상이 오래됨에 더욱 심할 것이니, 잿더미 가운데에서 주운 것을 또 날이 멀어져 없어질까 두려우니, 거듭 대추나무에 새겨 그 전함을 넓힐 것을 도모하자」하고, 족제 능재(能榟)를 시켜 와서 권(券) 머리에 붙일 서문을 구하였다.
스스로 생각 건데 병들고 정신이 어두워 문장이 시원찮아 이 부탁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고, 이미 여러 번 사양 했지만, 이루지 못하여 드디어 이렇게 말한다.
공이 조정에 세운 큰일은 역사책에 실렸고, 세상을 경영한 문장은 □□동문선(東文選)과 □□ 여지승람(與地勝覽) □□등 책에 흩어져 보이니, 진실로 구구한 후손의 서술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지만 어진 자손이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으로 새긴 판이 그 전함을 잃음을 상심하여 다시 인쇄하여 원이(遠邇)에 펴려는 뜻을 도모한 즉 기록이 없을 수 없다.
이에 쓰노라.
상의 32년 임진 황화절(9월)에 진성(眞城) 후인 이인행(李仁行)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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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내용.
◇ 이인행(李仁行) 1758년(영조 34)∼1833년(순조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공택(公宅), 호는 만문재(晩聞齋)· 일성(日省)· 신야(新野). 영천출신. 해(瀣)의 후손으로, 관섭(觀燮)의 아들이다.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여 정조의 친명으로 성균관에 거재(居齋)하기도 하였다.
1790년(정조 14)에 응제대책(應製對策)으로 인하여 온릉참봉(溫陵參奉)에 발탁되었고, 벼슬이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에 이르렀다. 서연(書筵)에도 입시하여 진강하였는데, 동료들로부터 진강관(眞講官)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만년까지 책을 놓지 않았는데, 특히 《심경》·《근사록》을 아꼈다 한다.
저서로 《신야문집》이 있다.
◇이달충(李達衷 : 1309년(고려 충선왕 1)- 1385(우왕 11).
경주이씨 18世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지중(止中), 호(號)는 제정(霽亭). 첨의참리(僉議參理) 천(蒨)의 아들로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거쳐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감찰대부(監察大夫)를 역임했다.
1359년(공민왕 8)에는 호부상서로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다음해 팔관회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으나 1366년 밀직제학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그러나 신돈에게 주색을 일삼는다고 공석에서 직언한 것이 화가 되어 다시 파면되었다.
신돈이 죽은 뒤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으며, 이때 신돈을 두고 시〈신돈 2수 辛旽二首〉를 지었는데, 그 시문이 이제현(李齊賢)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시문 수십 편이〈동문선 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제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용어풀이
◇ 거재(居齋) : 조선 시대, 선비들이 성균관이나 사학(四學) 또는 향교에서 숙식을 하면서 공부하는 일을 이
르던 말.
◇ 지부(地部) : 호조(戶曹)를 말한다.
◇ 돈곤(旽髡) : 신돈을 낮추어 부르는 말.
◇ 명신전(名臣傳) : 오운(吳澐)이 지은 책. ≪동사찬요(東史纂要≫에 실려 있다. 삼조선(三朝鮮). 사군(四郡). 이
부(二部). 삼한(三韓). 삼국(三國). 고려(高麗)의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삼국시대에 소국(小
國)이 나라라고 참칭한 것은 대략 그 국도(國都)와 년대(年代)를 기록하여 1권을 만들고, 고려
명신전 5권, 반역 권흉전(叛逆權凶傳) 1권으로 되어있다.
◇ 예조(藝祖) : 개국한 시조(始祖)를 말한다. 원래는 성군(聖君)이란 뜻으로 쓰이다가 후대에 와서, 개국한 시조의
뜻으로 쓰였다. 여기서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지칭한 말로 쓰였다.
◇ 함주(咸州) : 함경북도 함흥(咸興)을 말한다.
◇ 환조(桓祖) : 태조의 아버지를 말한다.
◇ 명언재자(名言在玆)
◇ 입나(立懦) :
◇ 건연(巾衍) : 천을 바른 서상(書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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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霽亭先生文集序
지은이 : 이인행(李仁行)
霽亭李文靖公。麗季名儒也。以奕世文翰之閥。年十八。擢上第。由史翰正言。歷敭國子祭酒吏部判事。皆極選也。性剛直不撓。恭愍朝。八關會有司。設盥洗幕。豎藩限內外。公方長地部。令撤其藩。觸上怒。禍將不測。賴左右力救。且以有文學重望得解。嘗面斥旽髠好酒色。爲所中見罷。其不欲諧世苟容如此。卒官鷄林尹。其辭箋曰。兵興以來。臣無所贊襄。退處山林有年。區區之心。未嘗不在王室。明窓靜几。敬焚一炷之香。寶籙瑤圖。恒祝萬年之算。傷時憂愛之意。溢於言表。讀公之書。論公之世。可以想公之心事矣。嘗見麗史名臣傳。公之沒。在辛禑十一年。逮我藝祖龍興初。特命公子孫皆名以立字。蓋志咸州餞席。立在桓祖後事也。然今以公言志諸作及愛惡惕若等箴看之。其毅然有以自立於昏亂之世者。猶可想見一二。則安知非屹立頹波之志節。有摡於當日聖意。而要使爲後承者。名言在玆。勿墜其百世立懦之風者耶。堂叔文益齋先生。蓋亟稱公之文章。嘗病國史不備。與公及白公文寶。分作紀年傳。益齋起國初至肅宗自睿宗以下。公與白公實撰之。當世文衡。近在同堂。而平日見賞若是。則其立德立言。固有以炳烺宇宙。傳示不朽。而公之全集。嘗鋟板于春川府。百年兵燹之餘。子孫分散京鄕。無有能保守元本者。後孫承宣公德培蒐輯於東文選輿地諸書。手寫一帙。藏之巾衍。以俟元本之或出焉。至是門老宗梓氏議宗中曰。杞宋之無徵。旣世久而益甚。煨燼之綴拾。又懼日遠而浸缺。重謀繡棗。以廣其傳。使族弟能梓來求弁卷之文。自惟病昏詞萎。不堪是寄。旣屢辭不獲。則遂復之曰。公之立朝大節。載之國乘。經世文章。散見於東文選勝覽等書。固不待區區後人之敍述。而乃若慈孫追遠之誠。傷鋟板之失其傳。圖重印以布遠邇之意。則不可以無識也。於是乎書。上之三十二年壬辰黃花節。眞城後人李仁行。謹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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