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이제현(李齊賢)

야촌(1) 2010. 2. 5. 21:02

■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계대] 17世 익재공파 파조(益齋公派派祖)]

[자(字)]  중사(仲思)

[호(號)]  익재(益齋)/역옹(櫟翁)

[시호(諡號)] 문충(文忠)

[생졸년(生卒年)]  1287 (충렬왕 13) - 1367 (공민왕 16)

[시대(時代)]  고려후기(高麗後期)

[본관(本貫)]  경주(慶州)

[활동분야] 교육/사상 / 학자 / 학자, 정치가

 

[과거 및 취재]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신축방(辛丑榜) 병과(丙科) 1위(4/33)

[고려사마] 충렬왕(忠烈王) 27년(1301) 신축(辛丑) 진사시(進士試) 1등(一等) 2위(2/77)

 

[상세내용]

이제현(李齊賢)에 대하여

1287년(충렬왕 13)∼1367년(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문신. 학자·. 문인. 외교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실재(實齋)· 역옹(櫟翁).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가계

고려 건국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瑱)이 신흥관료로서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그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하였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하여,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해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부(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2.관직

1303년(충렬왕 29)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재원(在元) 생애가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에게 익숙한 원나라에 있으면서 새로이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하였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李齊賢)을 지명하였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 한족(漢族)출신 일류 문인들과 잦은 접촉을 가지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재원 생애와 관련하여 특기할 것은 세번에 걸쳐 중국대륙 깊숙이까지 먼 여행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하여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하여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하여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하여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먼 여행은 일찍이 우리나라 사람이 경험해 보지 못하였던 것으로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원과의 관계

1320년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하면서,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고, 이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같은해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재원 생애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뒤이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고,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瀋王) 고(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이제현은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하여지고 있다. 그는 이어서 멀리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이배된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가 중조(重祚)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1339년 조적(曹頔)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여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하였는데, 그동안 《역옹패설 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4.공민왕의 보좌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 이다. 이때 문란하여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하여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뒷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네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 기철(奇轍)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하여서는 자문에 응하였으며,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정치가로서의 이제현(李齊賢)은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 들면서 활약하여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5.학문과 저술

학자로서의 이제현(李齊賢)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부의 문생이요 사위였으며,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과 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 國史》를 편찬하였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하여, 백문보(白文寶)· 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하여 《익재집》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 “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李益齋의 在元生涯에 대하여(金庠基, 大東文化硏究 1, 1964)
◇李齊賢(高柄翊, 人物韓國史 Ⅱ, 1965)
◇益齋 李齊賢의 史學에 대하여(金哲埈, 東方學志 8, 1967)
◇整治都監의 設置經緯(閔賢九, 國民大學論文集 11, 1977(
◇益齋 李齊賢의 政治活動(閔賢九, 震檀學報 51, 1981)
◇李齊賢의 歷史意識(鄭求福, 震檀學報 51, 1981)

◇益齋小樂府와 高麗歌謠(徐首生, 東洋文化硏究 11, 1984)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