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익재(益齋)의 《후서정록(後西征錄)》 서문

야촌(1) 2009. 12. 7. 23:29

■ 이익재(李益齋)의 《후서정록(後西征錄)》 서문

 

최해(崔瀣) 지음

 

익재 선생이 연우(延祐) 초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아미산(蛾眉山)에 가서 분향(焚香)을 하고는 《서정록(西征錄)》을 지었는데, 초승(楚僧)인 가모옥(可茅屋)이 그 서문을 썼다. 그리고 지치(至治) 말에 또 태위왕(太尉王)을 맞이하러 가기 위해 임조(臨洮)를 지나 하주(河州)까지 갔다가 와서《후서정록(後西征錄)》을 지었는데, 이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며 서문을 써달라고 하였다.


만 리 먼 땅을 가 보지 못하고 만 권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면 두보(杜甫)의 시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나의 얕은 식견으로 이렇게 훌륭한 시편을 본다는 것 조차도 오히려 참람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판국에 서문을 써 달라고 하는 부탁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번 읽어보니 사의(詞義)가 차분하면서도 노련하였는데, 이는 가슴속에 가득한 충의(忠義)가 사물을 만나 감발(感發)한 것으로 형세상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경박한 말은 한 구절도 없고, 옛일을 회상하고 일에 대한 느낌을 읊은 것은 그 의미가 더욱 정묘(精妙)하여 전배(前輩)들이 가려워하던 부분을 긁어준 것이 많았다.


회암 부자(晦菴夫子) 주희(朱熹))가 일찍이 구양공(歐陽公 구양수(歐陽脩))의 시 한 연(聯)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시로 말해도 제1 등의 시요, 의논(議論)으로 말하더라도 제 1 등의 의논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에 또한 느낀 바가 있어 우선 이렇게 써서 그의 부탁에 답하는 바이다.

 

동문선 > 동문선 제84권 / 서(序)

 

[原文]

 

益齋先生在延祐初。奉使降香峨眉山。有西征錄。

 

楚僧可茅屋序矣。至至治末。又迎大尉王。行過臨洮。至河州。有後西征錄。出示予俾序焉。予惟不行万里地。不讀万卷書。不可看杜詩。以予寡淺。寓目盛編。尙懼其僭。題辭之命。所不敢當。然伏讀數過。詞義沉玩。本乎忠義。充中遇物而發。故勢有不得不然者。其媱言嫚語。盖無一句。至其懷古感事。意又造微。爬著前輩癢處多矣。晦菴夫子甞稱歐公一聯云。以詩言之。是第一等詩。以議論言之。是第一等議論。予於此亦有所感。姑書以賡命云。

 

 

졸고천백 > 拙藁千百卷之一 雞林後學崔氏彥明父 /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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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익재 선생이---하고는 : 연우(延祐)는 원나라 인종(仁宗)의 연호로, 1314년 〜 1320년이다. 익재 이제현(李齊賢)이 30세 되던 1316년(충숙왕 3) 원나라 연경(燕京)에서 사명을 띠고 아미산(峨眉山)에 제사 지내기 위해 촉(蜀)의 땅 성도(成都)로 간 일을 말한 것이다.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 후집(後集)에 “연우 병진년에 내가 봉명 사신(奉命使臣)이 되어 아미산으로 제사 지내러 갔었는데, 조(趙)ㆍ위(魏)ㆍ주(周)ㆍ진(秦)의 옛 지역을 거쳐 기산(岐山) 남쪽에 이르렀으며, 다시 대산관(大散關)을 넘고 포성역(褒城驛)을 지나서 잔도(棧道)를 건너 검문(劍門)으로 들어가 성도에 이르렀다. 여기서 또 뱃길로 7일을 가서야 비로소 이른바 아미산에 도착하였다.” 하였다.


[주02]

지치(至治)---맞이하러 : 지치(至治)는 원나라 영종(英宗)의 연호로 1321년 〜 1323년이며, 태위왕(太尉王)은 고려의 제 26대 충선왕(忠宣王)을 말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충숙왕 3년(1316) 조에 “3월 상왕이 심왕(瀋王)의 위(位)를 세자 고(暠)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태위왕(太尉王)이라 칭하였다.” 하였는데, 그 아래에 “충선왕이 자신의 이복형인 강양공(江陽公) 자(滋)가 장자(長子)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는 그의 둘째 아들인 고(暠)를 극진히 돌보았다.

 

그리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심왕의 자리를 고에게 물려주고 스스로를 태위왕이라 칭하였는데, 그때 충선왕이 원의 태위(太尉)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충선왕은 원나라 영종이 즉위한 1320년에 토번(吐蕃)에 유배되었는데, 익재 선생 연보(益齋先生年譜)에 의하면, 지치 3년 계해년(1323)에 익재 이제현이 원나라 조정에 충선왕을 풀어줄 것을 청원하여 그 요청이 일부 받아들여져 죄를 감등하여 타사마(朶思麻)라는 곳으로 옮겨 주었고, 이에 익재가 충선왕을 맞이하러 토번으로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익재난고》 제 2 권에 《후서정록(後西征錄)》의 첫 작품으로 보이는 ‘지치 계해년 4월 20일에 경사를 출발하다. 至治癸亥四月二十日發京師]’라는 제목의 시가 있고, 그 주(註)에 “상왕이 이때 서번(西蕃)에 계셨으므로 뵈러 가려 한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지치 말이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1323년 4월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03]

전배(前輩)들이---많았다 : 앞서 다른 문인들이 표현하고자 하면서도 문장력이 짧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을 정확히 묘사한 부분이 많았다는 말이다.


[주04]

시로---의논이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39에, “구공(歐公)의 문장은 붓끝이 날카롭고 문장이 좋으며 의논 또한 좋다. 일찍이 그가 지은 시에, ‘옥 같은 미모는 예부터 몸의 누가 됐거니와, 고기 먹는 어떤 이와 나라를 꾀하리오.〔玉顔自昔爲身累 食肉何人與國謀〕’라는 구절이 있는데, 시로 말하자면 제 1 등의 시요, 의논으로 말하더라도 제 1 등의 의논이다.” 하였다.

 

이 시구는 위구르로 시집가게 된 당나라 숭휘공주의 울분을 담은 수흔비(手痕碑)를 보고서 지은 ‘당숭휘공주수흔화한내한(唐崇徽公主手痕和韓內翰)’이라는 시 속에 나오며, 그 전문은 구양수(歐陽脩)의 《문충집(文忠集)》 권13에 수록되어 있다.

 

[주05]

최해(崔瀣) 선생은 익재 선생과 동년배(同年輩)로 두분은 평생 시주(詩酒)로 벗하며, 지낸분으로 당대 문명을 떨친분이다.

 

[자료문헌]

◇최해 [崔瀣, 1287~1340]의 졸고천백 제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