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국보 제110호 익재영정(益齋影幀)

야촌(1) 2010. 2. 2. 02:32

■ 국보 제110호 익재영정(益齋影幀)

 

[지정번호] 국보 제 110호

[지정 년월일] 1962년 12월 20일

[시대] 고려 충숙왕 6년(1319)

[규모양식] 세로 177.3cm 가로 93cm 종축

[재료] 비단

[소유자] 국유

[소재지] 140-026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135 국립중앙박물관

 

 

 

익재영정(益齋影幀)은 원(元)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린 고려 말(高麗末)의 문신(文臣)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전신(全身) 초상화이다.

 

화면 상단에 적혀 있는 화기에 의하면, 이제현(李齊賢)이 33세 되던 해인 1319년(충숙왕 6)에 충숙왕을 모시고 중국 절강성의 보타산(寶陀山) 사찰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갔을 때, 왕명으로 항주(杭州) 최고의 명수인 진감여(陳鑑如)를 불러 그리게 하고, 당시 석학이었던 탕병룡(湯炳龍)에게 찬문(撰文)을 짓게 했다고 한다.

 

이 찬문은 화면 왼쪽 위에 적혀 있다. 이제현(李齊賢)은 귀국할 무렵 이 영정을 남에게 빌려주었다가 잃어버렸는데, 그 후 32년 만에 국서(國書)를 받들고 다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자신의 영정을 찾게되어 그 연유와 감회를 글로 표현하고 이를 한운(韓雲)으로 하여금 적어 넣게 한 것이다.


익재영정의 작가에 대해 이제현의 문집인 ≪익재집≫에는 오수산(吳壽山)으로 기재되어 있어 혼란을 주고 있지만, 작품 자체에 적혀있는 기록이 더 정확하기 때문에 진감여(陳鑑如)가 제작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얼굴과 탁상 일부분 만이 원작이고, 전신 초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체와 옷ㆍ의자ㆍ족대 등은 조선 후기 무렵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지나 영정이 낡게 되자 후손들이 얼굴과 한ㆍ두 군데를 제외하고 대부분 새롭게 보수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전남 장성군의 가산서원(佳山書院)과 충북 청원군의 수락영당(水洛影堂), 전남 강진군의 구곡사(龜谷寺)에 수장되어 있는 이제현상의 범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영정은 많은 부분이 보수 되기는 했지만, 원작의 형식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영향을 미친 원(元)나라 초상화법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심의(深衣)차림에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의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며, 이러한 우안상은 고려 후기 초상화의 전통을 이루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은 공수(拱手) 자세와 족대 위에 발을 올려놓는 형식 등은 조선시대 공신상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배경에 서책과 청동기명ㆍ금(琴)이 놓여있는 검은색 칠기 탁상을 배치한 형식은 채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보수되지 않은 얼굴 부분은 세밀한 철선(鐵線)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어 원대 항주의 일급 초상화가였던 진감여의 탁월한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옷 주름의 필선은 치밀한 맛이 부족하고 형식적으로 구사된 느낌을 주며, 특히 윤곽선은 원형 보다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어 가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의 안면과 복장을 선염(渲染) 없이 선묘 중심으로 묘사한 화법은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초상화풍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참고용어]

◇ 이모본(移模) : 서화(書畫)를 본떠서 그린 그림.

◇ 범본(範本) : 본보기

◇ 심의(深衣) : 예전에, 신분이 높은 선비들이 입던 웃옷. 대개 흰 베를 써서 두루마기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소매를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가를 둘렀다.

 

이 영정은 시서화에 뛰어났던 문인서화가이며, 성리학의 고려 유입에 선구적 역할을 했던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 이제현의 젊은 모습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한중 문화교류를 실제적으로 입증해 주는 자료로 중요하다.

 

그리고 원대 초상화 양식과 함께 고려와 조선시대 전신상 초상화의 원류 연구에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