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익재이제현선생

이제현(李齊賢)

야촌(1) 2009. 12. 6. 23:56

■ 익재 영정(益齋影幀)

 

[지정번호] 국보 제 110호

[지정 년월일] 1962년 12월 20일

[시대] 고려 충숙왕 6년(1319)

[규모양식] 세로 177.3cm 가로 93cm 종축

[재료] 비단

[소유자] 국유

[소재지] 140-026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135 국립중앙박물관

 

■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생년] 1287년(충렬왕 13) 12월 24일(경진일)

   [졸년] 1367년(공민왕 16).

 

   [세계] 경주이씨 익재공파 파조(益齋公派派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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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제현(李齊賢) 의 생애(生涯).

 

고려 때의 문신, 학자, 시인이다. 검교정승(檢校政承) 진(瑱)의 아들로 초명은 지공(之公)이며 자는 중사(仲思)이다. 호는 익재(益齋), 실재(實齋), 역옹(櫟翁)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충렬왕 27년(1301년) 성균시에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지낸 후 이듬해 사헌 규정(司憲糾正), 충선왕 2년(1310년) 선부산랑(選部散郞), 다음해 전교시승(典校侍丞), 삼사판관(三司判官)등을 역임했다.

 

충숙왕 1년(1314년)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했으며 이 해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이 만권당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에 가서 원나라 학자 요수염, 조맹부 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했다.

 

1319년 충선왕을 수행하여 중국 강남 지방을 유람하고 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으며, 이 해 원나라에 갔다가 충선왕이 빠이엔투그스의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밝혀 1323년 풀려 나오게 했다.

 

다음 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하여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으며, 1336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에 올랐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되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올랐다.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해 우정승에 재임되어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사직하고 저술과 학문 연구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에 호종하여 이 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編纂)했다.

 

당대의 명문가로 외교 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유행시켰다.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에 있는 17수의 고려 민간 가요는 고려 가요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민왕의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였고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 금천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하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이제현의 문학관(文學觀).

 

1). 고려 후기의 사상적(思想的) 배경(背景).

 

우리나라 유학(儒學) 사상(思想)의 전개는 중국과 다른 측면도 있지만 중국 유학 사상의 변천 양상은 우리나라에 파급되었다. 중국의 유학은 선진(先秦)유학, 한당(漢唐)유학, 송명(宋明)유학 등으로 변모된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에 와서야 문물의 수준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서 비로소 선진(先秦)유학의 본질인 논리성이 확인되고 교화풍상(敎化風尙)에 영향을 주었다.

 

통일 신라 시대 후기에 이르자 당 유학자들의 문장사조(文章詞藻)를 중시하는 풍조가 밀려와서 문물이 보다 세련되어 가기는 했지만 부화(浮華)한 문학 생활을 추구하는 추세였으며 이 경향은 고려 초에 인재 등용의 길이 과거로 집약 데고, 그 과목이 문장사조(文章詞藻) 중심으로 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고려 시대의 유학은 때로 충효인의(忠孝仁義)를 내세워 교화풍상(敎化風尙) 쪽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도 있었으나 유학은 한당풍(漢唐風)이 지속되어 불교가 국교인 고려 왕조에서 단순한 치세의 도구로만 이용되는 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학을 치세의 왕도로 끌어 올리고 불교에 대한 상대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은 고심하게 되었다. 이 고심은 최승로, 최충을 거쳐 이제현의 시대까지 계승되었다. 이제현이 생존하였던 고려 말의 불교계는 승려의 자질 하락, 불교의 세속화 등으로 타락상을 나타냈다. 종교는 세속과 거리를 두어야 하지만 세속에 대한 일정한 의존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불교 역시 무신정변과 몽고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불교계에 사회화와 세속화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불교의 사회화는 난세를 이끌어 가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대토지와 노비의 소유, 벼슬을 얻기 위한 왕의 측근에게의 접근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불교의 폐단은 가속화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이제현의 유학(儒學) 사상적(思想的) 기조(基調).

 

이제현은 성리학(性理學)이 고려에 수입되던 시기의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대표적 문인 학자이며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그것을 고려의 새로운 지식으로 소화 흡수하게 하였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제현이 새로 수입된 학문인 성리학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은 그의 사상방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1). 회통(會通)

이제현의 학문적 관심은 성리학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유교의 본원적, 대체적인 것을 모두 회통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이제현은 공자, 맹자의 개방적인 정신자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비록 정선 학을 배웠으나 그것이 유학의 전부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이제현이 학문에서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태도의 한 면이며 사유 방식의 한 특징이다. 회통이라는 용어는 '모든 이치를 모아들여서 막힘없이 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이제현의 폭넓은 학문과 사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용어로서 적절한 것으로 본다.

 

(2). 성(誠)

이제현의 글은 중용(中庸)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많다. 중용에서는 성(誠)을 중시하는데 이 중용의 정신은 이제현의 사유 방식에 드러나는 한 특징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3). 무실(務實)

이제현에게 있어서 이러한 실학(實學)의 구현, 현실의 교화, 왕도정치 등의 지향은 모두 그가 살던 현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가 지향한 사상적 경향을 무실이라는 용어로 묶을 수 있다. 이 무실의 경향은 이제현의 사상의 한 특징인 성경(誠敬)을 전제로 하여 그에 따르는 결과이며 성경을 현실에 적용하는 측면에서 파악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제현의 불교(佛敎) 수용(受容).

 

이제현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학자였으나 일부에서는 순수한 유학자가 아니었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제현의 학문이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에만 얽매이지 않고 포괄적인 회통(會通)의 성격을 지니는 것과 관련하여 특히 그가 불교에 대하여 포용적인 태도를 지녔던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현이 당시에 처해 있던 여건, 다시 말해 불교를 혹신(酷信)하는 충선왕을 충절을 다해 시종하고, 불교에 달통한 조맹부와 가까이 교제하고, 선대로 부터 불교와 친분을 유지해 오며 친인척이 바로 승려가 되기도 하는 여건 속에서 이제현은 유학자이기는 하나 불교에 대하여 포용적인 태도를 갖지 아니할 수 있었으며 승려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제현은 불교와 유교가 현상적으로 가는 길은 다르지만 그 근본정신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인식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제현의 금서밀교대장서(金書密敎大藏序)중에서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부처의 道는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를 근본으로 삼으니, 자비는 인(仁)이 되는 일이고 희사는 의(義)가 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글의 대지(大旨)를 대개는 알 수 있다.' 라는 이 인용문에서 불교의 자비(慈悲)와 희사(喜捨)를 인의(仁義)에 견주어서 긍정적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제현은 불교가 출세의 길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 또한 현실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현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유학자들의 생활에 불교가 깊이 침투해 있던 시기였다. 이제현은 선대로부터의 친불(親佛)하는 가풍과 그가 시종하던 충선왕의 호불(好佛)하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유 불 교유(儒 佛 交遊)의 기풍에 젖어 있었고 그의 학문이 지니는 회통적 성격으로서도 불교를 단순히 배격하기 보다는 유학의 바탕 위에서 긍정적으로 포용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제현이 생각하는 불교의 이치는 근본적으로 유학의 이치와 상통하는 것이다. 또한 이제현은 불교가 현실적으로 치도와 민생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는 관점을 드러내는데, 따라서 상대적으로 치도와 민생을 해치는 불사(佛事)의 폐단에 대해서는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관점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현의 불교 수용은 유학 사상에 기조를 둔 그의 사유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4).이제현의 시(詩)에 대한 인식(認識).

 

(1). 자기(自己) 확립(確立)의 관점(觀點).

이제현의 시에 대한 인식은 시인의 개성을 확보하고 새로운 뜻을 드러내어 자성일가(自成一家)하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전개된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誠敬)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충실(自己充實)을 지향하는 사유 방식에 바탕을 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이제현은 참다운 시가 되려면 다른 사람의 모방에서 벗어나서 시인의 개성을 확립하여야 한다고 했다.

 

(2). 이념(理念) 실현(實現)의 관점(觀點).

이제현이 시를 인식하는 또 하나의 관점은 시란 도덕, 교훈 등 효용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이며, 그것은 유가(儒家) 이념의 실현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이다. 이제현은 경서(經書)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이제현의 그러한 태도는 그의 평생을 통하여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현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 '과거는 작은 재주 -소기(小技)이니 이것으로 나의 덕을 크게 기룰 수 없다고 하고, 경(經) 서(書)를 널리 통하고 정밀하게 연구 절충하여 지당한 곳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제현이 소기라고 일컬은 과거의 내용은 문맥으로 보아 경서와는 동떨어진 문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현은 시를 소기라고 하였지만 그는 시 짓기를 평생을 두고 했다. 과거를 소기라고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은 시를 배격한 것이 라기 보다는 덕을 쌓는다는 유학자로서의 자기 확충의 도를 극도로 높이는 데서 오는 상대적인 평가절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현에게 있어서 그 길은 경를 높이고 따르는 성경, 무실 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3). 시(詩) 인식(認識)의 회통적(會通的) 성격(性格).

이제현의 유학(儒學) 사상(思想)이 회통적 성격을 지니는 것처럼 문학관(文學觀)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현이 긍정적으로 관심을 두는 시는 다음과 같다.

 

①시에는 시인의 個性이 反影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시는 시인의 개성을 지닌 자성일가(自成一家)한 것이다.

②시에는 신의(信義)가 확인되어야 한다. 시인은 새로운 시의(詩意)를 말하고 시세계(詩世界)를 제시한다.

③시는 무엇인가 전해준다. 그것은 도덕, 교훈이기도 하고 진실한 무엇이며 오랜 수련을 통해 터득한 내용 이기도 하다.

④시는 사실에 핍진한 것이어야 한다. 시에 담기는 내용은 객관성이 있고 사실에 들어 맞는 것이어야 한다.

 

3.이제현의 문학작품(文學作品)에 반영(反影)된 사상(思想).

 

1).이제현의 시세계(詩世界).

이제현의 시에서도 이 세상의 다른 여러 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인생의 여러 가지 면, 인생 경험의 다양한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내고 있으나 이러한 모든 것이 단독 작품 속에 단일한 사고(思考)의 체계(體系) 속에 연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이제현은 유가(儒家)의 소양(素養)을 갖춘 문인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현의 생애는 피폐(疲弊)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걱정과, 기나긴 나그네 길의 향수(鄕愁)에 있었으며, 그것은 실현되어야 할 조국의 번영(繁榮)과 귀향(歸鄕)이라는 이상(理想) 이념(理念)에 대한 끝없는 지향(指向)을 표현하는 시적 자아(詩的自我)를 드러내며, 그러한 시적 자아가 인식하는 양면이라 할 수 있는 현실과 지향이 담기게 된다.

 

(1). 이념 지향(理念 指向)의 세계.

이제현의 시에는 현실(現實)의 세계와 지향(指向)하는 세계가 함께 제시되는데, 이 지향의 세계는 대개 유가 이념(儒家理念)의 현실을 내용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나 이때에도 대개는 효(孝)의 윤리(倫理)와 결부된다. 그의 이상은 이원화(二元化)된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조화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현의 시에는 고향을 그리는 내용이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오랜 나그네 생활과 관련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도 고려될 수 있다. 이제현의 향수(鄕愁)는 현실의 극복에 대한 지향, 즉 유가 이념 현실의 지향이라는 상징적(象徵的)인 측면도 지닌다. 시의 대상이 피폐한 민생(民生)을 읊을 경우에는 현실의 세계가 매우 확대되기도 한다. 또한 이제현의 시는 그리움을 기조로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한 시의 구체적 상황은 나그네 길에서 고향을 그리는 것이 위주가 되지만 그것은 또한 실현되지 못한 지향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옮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이제현의 시에서는 현실과 지향의 세계가 괴리(乖離)됨에도 불구하고 심한 갈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사유 방식이 유가적 자기 확립과 유가적 이념의 실현을 바탕으로 하면서 현실과 지향의 세계를 아울어 긍정하는 포용적(包容的) 성격을 띤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리고 유가의 덕화(德化)와 왕도(王道) 정치는 하나의 당위법칙(當爲法則)으로 존재하는 이념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므로 시인으로서는 끊임없는 지향의 과정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소악부(小樂府) 중사리화(沙里花)를 살펴보자.

 

黃雀何方來去飛

一年農事不曾知

鰥翁獨自耕耘了

耗盡田中禾黍爲

 

이 시(詩)는 세금(稅金)이 무겁고 관(官)의 수탈(收奪)이 심해 백성이 궁핍(窮乏)해지는 것을 참새가 곡식을 쪼아 먹는 데 비유한 노래이다.

 

(2). 자연교감(自然交感)의 세계.

이제현의 시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자연의 경관(景觀)이 시적 대상(詩的對象)이 되는 경우에도 시인이 처하는 경관인 현실과 그로부터 촉발(促發)되는 지향의 세계가 공존(共存)하는 관계로 파악(把握)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한시(漢詩)에서 자연은 아름다움과 흥취(興趣)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려진다.

이제현의 경우에 있어서도 자연은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노래되거나 자연에서 유발되는 흥취는 시의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제현의 시에 자연이 중요하게 개재(介在)되는 경우는 많으며 이제현은 같은 시대의 다른 시인들에 비해서 자연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사경(寫景)에 특장(特長)을 발휘하여 그의 사경시(寫景詩)는 당시 시계(詩界)에 파다한 이름이 있었다. 따라서 이제현의 시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이해는 그의 시 세계를 해명(解明)하는데 상당한 의의(意義)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시(詩)에 있어서 그의 사경(寫景)은 그가 청장년 시기에 오래 중국에 거주한데 말미암아 대부분 중국의 자연 승경(勝景)을 그린 것이 많으며, 우리나라의 자연을 읊은 것은 오히려 소수의 예외에 속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시의 대상이 되는 경(景)이 중국의 것이냐 우리나라의 것이냐에 따르는, 시의 수법(手法)이나 내용상의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제현의 <금강산(金剛山)> 2절絶) 중 <보덕굴(普德窟)>을 예로 들어보자.

 

시원한 바람 바위를 노래하고/陰風生巖曲

계곡물 더욱 깊어 푸르름을 더하네./溪水深更綠

지팡이에 의지하여 산마루 바라보니/倚杖望層嶺

높다란 추녀끝 구름위에 떠 있구나./飛詹 雲木

 

이 시에서는 바위, 절벽, 시냇물, 구름,바람 등이 잘 어우러진 자연경관(自然景觀) 속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이 함께 어울린다. 자연과 시인은 하나의 세계 속에서 조화되고 있다.

 

2).소악부(小樂府)

악부(樂府)는 원래 한 대(漢代)에 음악을 맡은 관부(官府)의 명칭으로 전(轉)해서 악장(樂章)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데 왜 <소악부>라 해서 한 격을 낮추어 놓았을까? <소악부>의 창시자인 이제현은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우리는 이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상정(上程)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중국 재래의 악부와 구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제현은 우리나라 문인 중에 사곡(詞曲)에 능통(能通)한 유일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사(詞)를 자유로이 창작(創作)할 수 있을 만큼 중국의 악조(樂調)에 조예가 깊었었다는 그가 중국 재래의 악부를 의식하면서 그것과는 완전히 출발부터 달리한 이 작품들을 <소악부>라고 명명했음이 그럴성도 싶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려 재래의 아악(雅樂), 당악(唐樂), 기타 궁정악에 구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제현은 궁정악인 아악, 당악계 사곡과는 순연히 별도로 민간의 풍요(風謠), 즉 속요(俗謠)를 시로 옮긴 것이다. 궁정악이 아닌 민간의 노래 -속요를 시로 옮긴 것이므로 <소악부>라고 명명 했음직 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제현은 종전에 없었던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우리나라 한문학 사상에 <소악부>라는 새 명칭의 작품을 생산함으로써 획기적(劃期的) 업적(業績)을 이룩한 것이다. <소악부>는 모두 11장인데, 편의상 전(前) 9장, 후(後) 2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처음 이제현이 전 9장을 발표했을 때 당시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지우(知友)들 중에 곧 그것을 본떠서 화답(和答)하려는 의사를 표시하는 이도 있었다. 급암(及庵) 민사평(閔思平)과 같은 이가 그 예이다. 이제현은 그것을 전해 듣고 곧 후(後) 2장을 지어 민사평에게 화답을 재촉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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