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6-05 07:47:29 입력/영남일보/글·사진=김신곤기자
德峯선생, 茶山과 2년간 사헌부에 근무…개혁 전력
정조의 탕평책 적극 실천…악습타파 앞장
사도세자 신원 상소 등 義로 일관한 일생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경주시 토함산 기슭 마동에 자리한 덕봉정(德峯亭)은 이진택(李鎭宅 · 1738(영조 14)∼1805(순조 5)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머물던 곳이다. 덕봉정사(德峯精舍)로 불리기도 하는 이 정자는 덕봉이 본래 태어난 외동읍 방어리를 떠나 구정동(현 소정리), 지금의 경주 온천관광호텔 뒤편에 초당을 지은데서부터 비롯되었다.
그 후 조선 광무(光武) 9년(1905)에 덕봉의 증손자인 야은(野隱) 이우영(李祐榮 ·1822~1913)이 증조부의 유촉(遺 )이 서려 있는 마동에 정자를 건립하고 덕봉을 추모하였다.덕봉정 입구에는 덕봉의 묘소가 있고 뒤편에는 아름드리 노송이 묘소와 정자주변을 감싸고 있다.
앞에는 넓고 큰 연못이 있고 그 안에 갖가지 초목들이무성한 원형의 섬 등 조경이 뛰어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덕봉정에서 조금 내려가면 경주 온천관광호텔이 있는데, 이곳은 본래 덕봉이 터를 잡아 입향한 곳이고 종가가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개발에 밀려 현재는 종택이 호텔 맞은편으로 옮겨졌고 경주이씨 덕봉 후손 일부 가구의 옛집들만 쓸쓸하게 남아 있어 한때 번성했던 가문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을 따름이다.
●악습타파에 앞장선 덕봉
이종기(李種杞)가 지은 행장에 의하면 덕봉은 겨우 여덟 살 때 남애(南厓) 이진원(李晉遠)에게 나아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한 번 눈이 지나간 것은 다 외웠을 정도로 총명하였다.
한 번은 닭이 싸우는 것을 보고 글을 짓기를 '만약에 진나라 상앙의 법으로 처단한다면, 이 닭은 마땅히 삶아먹어 버려야 한다 (若論商 法, 此鷄當烹食)'라고 하였다.어린 것이 진나라 상앙의 수정 개혁된 형벌의 악법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미 꿰뚫어 보았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이에 남애는 어린 덕봉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이씨 문중을 크게 일으킬 자는 이 아이"라고 하였다.장성한 후에 부친의 명으로 명경과(明經科)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영조 40년(1764), 성균생원으로 들어가 학문을 성숙시켰고, 정조원년(1777)에는 준동당(雋東堂) 정시(廷試)에 응시하였으나 고의로 현토(懸吐)한 구절을 틀리게 읽어 낙방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시 사도세자를 모함한 자들의 일파가 시관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같이 자기에게 이득이 있어도 의롭지 않으면 취하지 않는 의리사관의 선비정신으로 일관한 인물이었다.정조 4년(1780), 식년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 성균관전적, 예조정랑, 사헌부지평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정조의 특명으로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다.
덕봉은 당시 정조대왕이 펼친 탕평정책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인물로, 당파간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남인 계열이 주장한 사도세자의 신원(伸寃)문제와 노론계열이 주장한 공노비제도 혁파 등이 비록 정치적 논리로 이어졌지만, 덕봉은 오직 의리와 명분으로써 둘 다 수용, 국가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소신 정책을 펼침으로써 사노비혁파(寺奴婢革罷)에 이어, 공노비해방을 보게 되었다.
특히 다산(茶山) 정약용과 2년 동안 사헌부에 근무하면서 실학과 개혁으로 국가재건에 전력을 쏟았다. 덕봉의 관직생활은 청렴과 악습개혁으로 일관하였다.
↑숲으로 둘러싸인 덕봉정(德峯亭) 전경
한 예로 그가 개성부(開城府) 경력(經歷)에 부임하여 일하던 시절이었다. 청나라에서 황제의 부고를 전하러 온 사신 행렬을 맞이하는데 지나는 고을마다 거만금(巨萬金)의 경비를 들여 음악과 연회를 열어 주어야 했다.
덕봉은 그러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시켰다. 이에 청나라 사신은 분노하여 덕봉을 문책하자 그는 굽히지 않고 정색을 하여 말하였다.
"지금 사신은 황제의 부음을 통보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던가. 황제가 죽으면 온 나라가 음악을 금하는 법인데 어찌하여 술과 음악을 베풀어 사신을 대우할 수 있단 말이오. 내 비록 죽는 한이 있으도 그것은 거행할 수 없소이다.(今之勅行, 非通訃耶. 天子云崩, 四海 密八音, 豈可置酒張樂以待訃使乎. 雖死不得擧行)"라고 하니 사신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었고 그 후부터 이러한 폐단이 없어 졌다.
● 영남만인소를 주도한 의(義) 정신의 실천가
조선후기 임오화변(壬午禍變)은 우리역사의 한 비극이었다. 영조임금은 사도세자에게 임금을 대리하여 국사를 결정토록 하였으나 김상로, 홍계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에게 10여 조목의 나쁜 버릇이 있다고 끝까지 모함하고 상소하여 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훗날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대왕이 영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자 안동의 유생 이도현(李道顯) 부자가 세자의 원통한 사실을 밝히고 관련자 엄벌을 주청했다가 함께 처형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희생의 결과 그 후 탕평책으로 남인의 영수인 번암(樊菴) 채제공이 재상에 등용되었고 정조가 영남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어 언로(言路)가 열렸다.
또한 도산서원 앞에서 별시(別試)를 거행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영남 유생들은 봉화의 삼계서원(三溪書院))을 거점으로 하여 이우(李 )를 비롯한 30여명이 영남의 소임(疏任)을 맡았다.또 덕봉을 위시한 류규, 이세윤, 이헌유, 권방, 이기정 등 10여명의 서울 거주 관리들이 단합, 만인이 연명하여 사도세자 신원의 의리상소(義理上疏)를 올린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비답(批答)은 만족할 만하지 못하였고 덕봉은 홀로 일어나 다시 상소하여 죄인들을 부관참시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너무 과격하다는 당론이 일자 벼슬을 접고 낙향하게 된다.정조대왕이 승하한 후에는 서유방을 두둔하고 이가환과 행보를 같이 했으며 정약용과 밀부(密符)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삼수갑산(三水甲山)에 유배된다.
2년 후 유배에서 풀려나 그 이듬해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덕봉의 생애는 오직 의리로 점철된 삶이었다.
●덕봉의 학문은 퇴계학파에서 연원
덕봉이 사사한 남애는 갈암(葛菴) 이현일의 증손자이다. 남애는 본래 영해 출신이었으나 당시 경주 건천에 우거하고 있을 때 덕봉과 사제간이 되었다. 이를 볼 때 그의 학풍은 퇴계, 학봉, 경당 장흥효, 갈암 이현일 등으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덕봉이 방어리에서 소정(蘇亭)으로 터를 잡아 은거한 초당은 지금 그곳에 없지만 증손자인 야은이 세운 덕봉정에서 그 혼을 찾아보기에 충분하다. 그 내력은 야은이 지은 덕봉정사기(德峯精舍記)에 상세히 남아있다. 소정은 대덕산(大德山) 남쪽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덕봉은 대덕산의 덕(德)자를 자호로 삼았고 집 이름으로 정했던 것이다. 야은은 정자를 마동에 복원하였으나 이름은 그대로 쓰면서 북송 때 주렴계가 여산에서 염계서당을 짓고 강학하다가 분강으로 이주한 후에도 염계란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을 예로 들어 덕봉정도 옮겨졌지만 이름을 그대로 쓴다고 하였다.
야은(野隱)은 덕행으로 일세의 추중을 받았고 천거되어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등을 역임하였으며 덕봉집 6권을 간행하였다. 야은의 아들 역하(轢下) 이규일(李圭一 ·1840~1905/덕봉 이진택의 현손)은 생원시에 합격한 후 벼슬을 단념하고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성재(性齋) 허전(許傳) 등과 교유하면서 암동리(暗洞里)에 소유정(小有亭)을 건립하고 금서(琴書)와 벗하고 자연에 묻혀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역하집 5권 3책이 전한다.덕봉의 종손 소호(蘇瑚) 이상걸(李相杰)씨는 3천여점의 고문서와 1천여권의 고서를 경주 동국대에 기증, 소호문고로 보존되어 국학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소호의 종제인 이상필(李相弼)씨는 고문서정리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덕봉선생문집해제 등을 써서 국학계승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고문서집성 제62권', 동국대 경주도서관 '소정문고목록' 등이 간행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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