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書)]
■ 호조 판서 이인엽(李寅燁)에게 답함
<기축년(1709년, 숙종35) 12월>
보낸이 :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
모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검토한 뒤에야 폐단을 바로잡는 방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폐단이 생겨나는 이유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으니, 근본은 처음이고 말단은 끝입니다.
근본과 말단을 따지지 않고 중간에서 폐단을 바로잡는 계책을 찾고자 한다면 실로 말하기가 곤란하며, 만약 근본과 말단을 함께 논하려고 하면 온갖 폐단이 서로 이어져서 엇갈려 뒤엉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 가지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면 다른 폐단이 여기저기서 생겨나 끝내 반드시 나라의 형세는 황하가 터지는 것처럼 되고 민심은 물고기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처럼 되고 말 것이니, 진실로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인족(隣族)에게 부세를 징수하는 폐단이 진실로 이와 같으니,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함부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수령을 얻어 임명하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수령을 진실로 하나하나 잘 가려서 뽑기는 어렵습니다.
국가에서는 다만 한 명의 이조 판서를 잘 가려 뽑고 다음으로 여러 도의 감사를 잘 가려 뽑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훌륭한 수령을 얻는 근본입니다. 반드시 고을마다 사람마다 훌륭한 사람을 가려 뽑고자 한다면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호포(戶布)를 시행하는 일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현재 인징(隣徵)과 족징(族徵) 때문에 이웃과 친족이 곤란을 겪는 것은 진실로 인정(仁政)을 행하는 자가 차마 볼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듣는 자와 당하는 자가 모두 귀와 눈에 익숙하므로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포에 이르러서는 예전부터 온 나라에 양반이라고 일컬으며 한가로이 노는 자가 수도 없이 많은데, 하루아침에 이들에게 모두 호포를 거두어들이려 한다면 놀라고 소요하고 원망하여 반드시 큰 변란이 생겨날 것이요,
조정에서도 결코 굳게 참고 확고히 지켜서 끝내 중지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니, 다만 온 나라가 소란함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도고(逃故)를 대신 채우는 것을 촌(村)에서 정하고 이(里)에서 정하고 통(統)에서 정하도록 하자는 말을 온 나라가 소동하는 폐단에 이르지 않는다면 한번 시험해 보는 것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필시 촌과 이와 통 안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원수가 되어 다투고 보복할 염려가 있으니, 재능이 있는 수령이 스스로 잘 시행한다면 좋겠지만 각 도와 각 고을에 두루 시행하여 장구하게 일정한 법으로 삼음에 이르러서는 또한 진실로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가에서 만든 법이 전역(田役)은 오직 전세(田稅)만이 있을 뿐이요, 공물(貢物)은 각각 그 지방의 토산물을 진상하는 것이지 본래 전결(田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데, 진상할 때에 조등(刁蹬)ㆍ방납(防納)ㆍ월리(月利) 등의 여러 가지 폐단이 모두 공물로 인하여 생겨나서 백성들이 지탱하고 감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 선혜청(宣惠廳)에서 주관하는 대동법(大同法)의 일이 있게 된 것인데, 지금 전세는 토지 1결(結)당 쌀 4두(斗)에 지나지 않으나 공물은 여러 도(道) 가운데에 많은 곳은 16두이고 적은 곳도 12두나 되어서 원래의 전세에 비하면 서너 배에 이릅니다.
그러나 전역에 응하는 자들은 그래도 살아갈 수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로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이 폐지되어서 1결에 쌀 20두를 내는 상상 등(上上 等)의 전결이 모두 1결에 쌀 4두를 내는 하하 등(下下 等)의 준례로 변해서 비록 별도로 대동법을 시행해도 크게 곤란한 지경에 빠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또다시 전결에 따라 호포를 거두고 또 전결에 따라 속오(束伍)의 군포를 내게 할 경우 농민들이 이미 본세(本稅)에 응하고 또 공물가(貢物價)에 응하고 또다시 수포(收布)와 속오포의 두 가지 큰 부담까지 더하게 되니, 이렇게 된다면 농민들이 반드시 토지를 황폐하게 하고 경작하지 아니하여 그 폐단이 반드시 현재보다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이는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
각 군문(軍門)을 모두 혁파하여 다시 오위(五衛) 체제로 만드는 문제는 모든 일이 말할 때는 쉬우나 시행할 때는 실로 어렵습니다. 변경하는 즈음에 지금 드러난 것 이외에 이리저리 생겨나는 새로운 폐단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이 또한 손쓰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조령(鳥嶺)과 극성(棘城)에 관방(關防)을 설치하는 것과 연변(沿邊)의 각 고을에 토성(土城)을 쌓고 탱자나무와 버드나무를 심는 것은 지금처럼 한가할 때에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듯하고, 또 위에 열거한 여러 조목의 법제를 변경하는 것처럼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 조정의 조처가 건의한 사람이 조정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받들어 시행하는 사람도 잘 시행하지 못해서 일이 효험을 보기도 전에 갑자기 시행하다가 갑자기 중단되니, 이것이 우려할 만합니다.
경외(京外)의 무사들을 무신군관(武臣軍官)이라 호칭하고 단속하여 무예를 시험하는 것 또한 좋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는 정군(正軍)과 차이가 있으니, 무릇 그들이 사사로운 일로 출입하는 것을 금지할 수가 없는 바, 그중에도 가장 금할 수 없는 것은 벼슬을 구하러 서울에 올라가는 것과 각 지방 영진(營鎭)의 군관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미 금할 수 없으면 그 가운데 비록 거짓으로 탈이 있다고 칭탁하는 자가 있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알아내겠습니까. 이들은 결코 마음속으로 달게 여겨 단속을 따를 리가 없으니, 끝내 실속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또 팔도(八道)의 수많은 무사들을 각 지방에서 무예를 시험하고 모두 무과에 직부(直赴)하도록 허락한다면 그 허위와 난잡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호위하는 세 명의 대장(大將)이 회좌(會坐)하여 무예를 시험할 때에도 군관들이 농간하는 일이 많은데, 더구나 팔도의 사람이 각 지방에서 무예를 시험하고 모두 무과에 직부 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찌 시행할 수 있는 방도이겠습니까.
구구히 대감을 위하여 충실히 계획해 보건대 되도록 정성을 쌓아서 현명하신 군주에게 인정을 받고, 스스로 한 몸을 닦아 중외(中外)에 신복을 받으며, 상벌이 공정하고 분명하여 기강이 스스로 서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한 뒤에야 시행에 관한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기에 미진함이 있다면 온갖 일이 모두 시행되고 성공할 리가 없을 듯한데, 어떻습니까?
--------------------------------------------------------------------------------------------------------------------------------------
[주01]
인족(隣族)에게……폐단 : 조선 중기 이후 부당하게 부과하던 징세(徵稅)의 하나로 인(隣)은 인징(隣徵) 즉 경작자가 실종되어 10년이 경과하면 면세하게 되어 있는데도 그 규정을 무시하고 실종자의 이웃에게 실종자의 과세까지 납부하게 하던 일이며, 족(族)은 족징(族徵) 즉 생활의 곤궁으로 군역(軍役)을 피하여 도망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친족이 대신하여 군포(軍布)를 납부하게 하던 일을 이른다.
[주02]
도고(逃故) : 도망한 자와 물고(物故) 난 자를 이른다.
[주03]
조등(刁蹬)ㆍ방납(防納)ㆍ월리(月利) : 조등은 공물의 값을 조작하여 높게 책정함을 이르며, 방납은 각 군현에서 바치는 공물이나 진상물(進上物)을 경주인(京主人)이나 관청의 관속 또는 시전(市廛) 상인들이 대신 납품하고 그 대금을 배액(倍額)으로 받아 내는 것을 말한다.
월리는 공물 값을 매월 높은 이자를 붙여 징수함을 이른다. 조선 시대에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기 이전에는 수많은 공물과 진상을 각 군현에서 시기에 맞추어 중앙으로 올려 보내야 했는데, 그 고을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시기에 맞추기 어려운 물품도 있고, 또 올려 보내도 불량품으로 인정되어 수납되지 못하는 이른바 퇴자(退字)의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마련하여 납품하도록 청탁하는 일들이 생겨났는데, 그 보수가 적지 않아 이 이익을 노리는 부정행위가 점차 많아지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각 군현에서의 공물의 상납을 아예 포기시키고 배 또는 몇 배에 달하는 대가를 억지로 수취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행위를 합쳐서 방납ㆍ조등이라 일컬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이 같은 부정행위는 거의 사라졌다. 조등(刁蹬)의 ‘刁’가 원문에는 ‘刀’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04]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 : 1444년(세종26)에 실시한 조세 부과의 기준으로 그해의 수확을 농사의 풍흉에 따라 지역 단위로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9등급으로 나누어, 토지 1결당 세액을 최고 20두(斗)에서 최하 4두까지 부과하였다.
[주05]
속오(束伍) : 역(役)을 지지 아니한 양인과 천민으로 편성한 군대로 1594년(선조27)에 두었으며, 평시에는 군포를 바치게 하고 나라에 일이 있거나 훈련할 때에 소집하였다.
'■ 경주이씨 > 선세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 반룡여대사서(送盤龍如大師序[체원스님] - 최해 (0) | 2009.12.12 |
---|---|
경주이씨 양월문중 고문서 및 향안 (0) | 2009.11.12 |
경주이씨 세록비(慶州李氏 世錄碑) (0) | 2009.10.27 |
부정공 삼세 전(副正公三世 傳) ※17世 (0) | 2009.10.01 |
경주이씨 지역별 인구수 (0) | 2009.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