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이경선선생 전사일기(李慶善先生戰死日記)

야촌(1) 2009. 11. 30. 20:13

예조참의 이경선선생 묘(禮曹參議李慶善先生墓)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22-18.

 

↑죽산후인(竹山後人) 안형열(安亨烈)이 찬(撰)한 묘비(墓碑).

 

 

 

 

 

↑이경선 선생 7대손 규오(圭五) 공과 배위 진주 유씨(晋州柳氏) 묘이고

    위의 묘가 이경선 선생 묘이다. 사진촬영: 2012. 04. 22 仁村 李在英

 

↑예조참의 이경선 선생 충신 정려문

 

 

↑예조참의 이경선선생 묘 / 촬영>2022년 9월

↑예조참의 이경선선생 충신문 전경 / 촬영>2022년 9월

↑충신문 좌측면 모습 / 촬영>2022년 9월

 

↑예조참의 이경선선생 충신문 안내표지판 / 촬영>2022년 9월

 

1636년(인조 14) 1월 1일 남포 현감에 부임 재직 중, 그해 12월 9일 청나라 태종(2대) 홍타이지가 이끄는 14만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포 현감 이경선은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가 이끄는 충청 근왕병의 참모관으로 참전, 경기도 광주 검천 전투(廣州 儉川 戰鬪)에서 적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듬해인 1637년 5월 26일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1730년(영조 6년) 11월에 왕명으로 후손들이 살던 오늘날의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마을 입구에 충신 정려문이 세워졌었다.

 

그 후 왜정시대 일본의 조선인의 정신문화 말살정책에 의거 현판만 수습하고 소실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11월 진천군에서 공의 묘소 아래, 새로이 건립하고 현판은 12대손인 필자가 원판을 탁본해서 과거 진천중학교 교정에 서있던 천연기념 목인 후박나무로 주문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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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참의 이경선 전사일기(禮曺參義李慶善戰死日記)

 

공의 초명(初名)은 경징(慶徵)이요. 자(字)는 군선(君善), 호(號)는 남포(藍浦), 오촌공(梧村公) 대건(大建)의 손(孫)이요. 충익공 벽오 시발(忠翼公 碧梧 時發)의 아들로 1600년(선조 33) 5월 초(初) 2일 태어나. 1636년(인조 14) 12월 27일, 병자호란(丙子胡亂)시, 광주 검천 전투(廣州 險川 戰鬪)에서 적과 용감히 싸우다 장열히 전사(戰死)하니 향년 36세였고, 1637년(인조 15) 5월에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 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1624년(인조 2) 사마(司馬)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1633년(인조 11) 11월 17일 계유 식년방, 33인중 10등(을과 7등)으로 문과 급제(文科及第)하여, 교서(校書), 교리(校理), 저작(著作), 예조좌랑(禮曹佐郞),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을 역임한 후, 1636년(인조 14) 1월에 남포현감 겸, 홍주진관 병마절제사(洪州鎭管 兵馬節制使)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14일 북녘 오랑케 청 태종 홍타시(弘他時)가 난(亂)을 일어 켜, 12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서울로 물밀듯 쳐들어오자 미쳐, 막아 내지를 못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몽진(夢塵)하여 들어가니 때는 추운 겨울밤 9시였고 인조께서는 민익진(閔益震)에게 명하여 삼남(三南)에서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아 출전하라 하였다.

 

이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충청도내의 병마를 불러 모으고 각 읍 수령(各邑守令)들과 찰방(察訪)들도 불러 모아 남포현감 이경선(李慶善)을 참모(參謀)로 삼고 전(前) 참판(參判)인 무인 최진립(武人 崔震立)을 좌영장, 심일민(沈逸民)을 우영장(右營將)에, 별장에 황박(黃珀), 중군에 이건(李楗),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에 이상재(李尙載), 군기 차사원(軍器 差使員)에 연산현감 김홍익(連山縣監 金弘翼), 심약(審藥)에 이시량(李時亮)을 삼고 출전했는데 벼슬한 사람이 140명이고 잡색군(雜色軍)이 2,432명이였다.

 

수원산성으로 들어가 적정을 정찰하며 전진하여 12월 26일 헌인 능으로 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적세가 크게 떨쳐, 더 나가지 못하고 광주 검천(廣州 儉川) 에 진(陣)을 머물렀다. 그 이튼 날, 12월 27일 이른 아침에 적병은 높은 봉우리로 부터 내려오는 짙은 안개를 타고 급습 해왔다.

 

불의에 급습을 당한 아군은 혼란에 빠져 지탱을 못하고 감사 정세규(監司 鄭世規)는 절벽아래 구렁으로 굴러 떨어졌으나 간신히 살아났고 이상재, 최진립, 황백, 이건, 이시량은 죽은 곳을 알 수 없었다. 이경선과 김홍익만은 여전히 적과 싸우며 손에 잡고 있던 칼로 거추장스런 옷자락과 옷 소매를 잘라버려 몸 놀리기에 편하게 하고 몸을 바쳐 나라를 돕고 여기서 죽자는 결심 이였던 것이다.

 

군량미를 쌓아놓고 노적(露積)가리로 올라가 우뚝히, 서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독전(督戰)하였고 물러서는 병사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칼로 쳐버렸다. 창끝과 살촉이 서로 마주치는 데서도 흩어 지지 않고 적을 무찌르며 버티고 싸운 것은 이경선과 김홍익의 힘이었던 것이다.

 

군중(軍中)이 놀라고 어지러워진데다 이미 주장(主將)을 잃었으므로 서로 밟고 밟히며 흩어지기 시작 했다. 이경선은 큰소리로 병마절제사가 여기 있다. 도망가는 자는 참한다고 외치며 몸을 날려 뒤쫒아가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겁에 질려 전의(戰意)를 잃고 무너지는 진세(陳勢)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전세를 알아차린 공(公)은 여기서 죽자 결심하고 곧바로 노적(露積)가리위로 되돌아와서 칼을 고쳐 잡고 달려드는 호병 십여명(湖兵 十餘名)을 치고서 말 아래로 떨어졌다. 급히 다시일어나 또 수명의 호병을 쳐 죽이니 호병들도 두려워서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이렇게 싸우던 중 불행히도 칼이 부러지는 바람에 적에게 살해(殺害)되었고 김홍익도 여기서 전사(戰死)하였으니 12월 27일이였고 이는 군중에서 직접 눈으로 본 병사들이 전(傳)한 말이다. 이듬해 1637년 1월 19일에 가서야 형(兄) 경충공(兄 慶忠公)이 소식을 듣고 시신(屍身)을 모아 거두어 본적, 온몸이 창자국 투성이었고 성한 곳이라곤 없어서 형용(形容)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차고 있던 혁낭(革囊)과 병부(兵符)가 시신과 같이 있었고 노적가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판별(判別)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진중(陳中)에서 죽은 사람이 늘려 있었건만 유독 이경선과 김홍익의 시신만이 이같이 참혹(慘酷)하고 잔인(殘忍)하게 창에 찔린 것은 싸움에서 시종(始終) 물러서지 않고 독전(督戰)하며 많은 호병을 쳐죽였기 때문에 앙갚음으로, 죽은 뒤에도 난자(亂刺)한 것이 틀림없고 여러 백명(白名)이 전하는 바도 이를 밑 바침 해주고 있다.

 

대군(大軍)이 이미 무너지고 주장(主將)의 통솔(統率)도 없는데 이경선과 김홍익은 지방의 말단(末端) 관료(官僚)로서 죽어 마땅할 때, 죽지 않고 욕(辱)되게 살기를 탐하여 살기를 꾀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이 생각하고 더욱 굳게 적에 대항한 숭고(崇高)한 뜻과 몸에는 수십군데나 창에 찔리면서도 죽는 것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가벼이 생각 하였으니 공(公)의 죽음은 어찌 그리도 장열 하였던가!

 

공의 나이 37세로 한참 일할 나이였건만 나라를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경술 1730년(영조 6) 9월에 왕명으로 정려(旌廬)를 세워라 명하여 그해 11월 용인 공세곡 동구(龍仁 貢稅谷 洞口)에 충신정려(旌閭)를 세우다. 설하에 인섭(寅燮).인형(寅炯)두 아들이 모두 성균진사이다.

 

- 찬인미상(撰人未詳) -

 

[참고문헌]

「조선왕조 실록」

「송자대전(宋子大全)」

「상산지(常山誌)」

「경주이씨 금석록(1868년간)」

「경주이씨 중앙화수회간행 표암지 8편」

「나만갑. 저. 병자록(羅萬甲. 著. 丙子錄)」

「남한일기(1992년간 광주 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