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평안도관찰사 이윤인 묘(李尹仁 墓)

야촌(1) 2009. 11. 16. 23:50

■ 평안도관찰사 이윤인 묘(平安道觀察使 李尹仁 墓)

 

    [생졸년] 을미(1415, 태종 15)~신묘년(1471 성종 2) 7월 16 = 향년 57세(歲)

    [소재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14-1

 

 

↑이윤인 선생의 묘지이다. 2010. 09월에 봉분 둘레석을 새로히 마련했다. 묘지앞의 상석은 조선의

    제9대왕 성종(成宗)이 내린 석물 이다.

 

 

 

 

 

 

 

 

 

 

 

 

 

일시 : 2010. 10. 16(토요일) 감사공의 신도비 제막식이 있었다. 우측의 흰 석물은 관찰사공 배위인

남양홍씨 절부비각이고 우측의 큼직한 검은돌은 공의 다섯째 손자인 장육당 이별(鷩)의 시(詩)비이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산14-1 분석골의 해발 70~80m 가량의 나지막한 구릉의 9부 능선 상에 南向하여 위치한다. 묘는 정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와의 합장묘이고, 용미(龍尾)는 뚜렷하나 활개는 갖추고 있지 않다.

 

봉분은 원형으로 규모는 동서직경 540cm. 높이 170cm이며, 봉분 전면에 묘표(墓表)가 있고, 좌우측에 문인석이 있으며 나머지 여러 석물들은 근래 건립된 것이다.

 

문인석의 높이는 좌우 모두 174cm로 얼굴과 신체의 마모가 심하여 윤곽만 남아있다. 묘표는 전면에 가정대부 평안도관찰사 이공 지묘(嘉靖大夫平安道觀察使李公之墓)라 세겨져 있고, 성화(成化) 8년의 년기(年紀)로 보아 1472년(성종 3)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마모로 인해 뚜렷이 알아볼 수 없다. 규모는 비신 높이 145cm. 상단 너비 54cm. 하단 너비 58cm. 두께 17cm이다. 이윤인(1415~1471)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慶州)이다. 자는 임지(任之)이고, 고려 말의 명신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5대 손이자, 참판 계번(繼藩)의 아들이다.

 

1441년(세종 23) 생원, 진사 양시에 급제하였고, 1447년에는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춘추관에 들어간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470년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 觀察使)가 되었으나 그 다음 해 임지(任地)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이윤인(李尹仁)은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청렴결백과 공정한 업무처리로 이름이 높았다.

 

○ 漣川文化院,『鄕土史料集』,1995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연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2000 /연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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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표내용

 

평안도 관찰사공 묘표음기(平安道 觀察使公 墓表陰記) 22世

 

진산군 강희맹 지음(晋山君 姜希孟 撰)

 

공(公)은 계림인(鷄林人-慶州)이다. 성(性)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윤인(尹仁)이며, 자는 임지(任之)로, 고려시대에 정승(政丞)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익재 제현(齊賢)의 오세손(五世孫)이다.

 

문충공(文忠公)이 제학 달존(提學 達尊)을 낳았고, 제학공이 사간 덕림(司諫 德林)을 낳았고, 사간공이 도안무사 신(都按撫使 伸)을 낳았고, 도안무사공이 참판 계번(參判 繼蕃)을 낳았다. 참판이 무송(茂松)사람 현감 윤상(縣監 尹常)의 따님과 혼인하여 영락(永樂 : 明成祖의 연호), 을미(1415, 태종 15)에 공을 낳았다.

 

공이 신유년(1441 세종 23)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의 양시에 급제 하였고, 정묘년(1447, 세종 29)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春秋館)에 선발되어 들어 갔다. 기사년(1449 세종 31)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복(服)을 마치고 다시 본관(本館-春秋館을 말함)에 들어 갔다.

 

계유년(1453 단종 원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이 되었고, 갑술(1454, 단종 2)에 이조좌랑(吏曺左郞)이 되었으며, 세조조에 원종(原從 : 조선시대, 큰 공을 세운 정공신 이외에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던 공신의 칭호 ) 공신의 명이 내렸다.

 

병자년(1456 세조 2)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복을 벗고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 正5品)을 제수 받았다. 신사년(1461 세조 7)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으로서 사복시 소윤(司僕寺 少尹 : 소윤은 少監을 고친이름으로 수레, 말, 등을 맡아 보던 관아의 從5품 벼슬)이 되었고, 임오년(1462 세조 8)에는 사복시윤(司僕寺尹)으로 승진 하였다.

 

갑신년(1464 세조 10)에 명나라 성화황제(成化皇帝)가 즉위하여 등극사(登極使)의 검찰관(檢察官)으로 명나라 서울(北京)을 다녀왔고, 가을에 판시사(判寺事 : 사복시 판사. 正3品)로 승진 하였다.

 

겨울에 지병조사(知兵曹事 : 병조의 지사. 즉 병조참의)가 되었고, 을유년(1465 세조 11)에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고. 병술년(1466 세조 12)에 상(王-임금)께서 강원도를 순행하시면서 의복을 하사하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시키고 삼대(三代)의 관작을 추증(追贈)하였다.

 

정해년(1467 세조 13)에 한성우윤(漢城右尹)이 되고 가을에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다. 기축년(1469 예종 원년)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올라 평양 부윤이 되었고. 경인년(1470, 성종 원년)에 본도의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觀察使)에 올라 평양부윤(平壤府尹)을 겸직하였다.

 

신묘년(1471 성종 2) 7월 16일에 병으로 평양부중(平壤府中)에서 하세 하였다. 나이 57세였다. 윤 9월 22일에 마전 북촌 분석리(麻田北村分石利)의 남쪽 언덕에 안장 하였다.

 

공은 염정(廉正-마음이 청렴하고 바름)하고 인간(仁簡-어질면서도 수수함) 하여 왕(王)께서 이를 기중(器重-중하게 여김) 하게 여겨 병이 위중 하다는 소식을 듣고, 내의(內醫)를 보냈으나 효험을 보지 못했다. 탄식하며 애도하기를 마지 않았으며, 제물(祭物)과 관곽(棺槨)을 하사하여으니 오호(嗚呼)라! 공(公)에 대한 애영(哀榮-죽은 후에 얻는 영예)이 지극하였다고 할수 있다.

 

공이 남양홍씨(南陽洪氏) 만호(萬戶-각도의 여러 진에 파견된 從四品의 무관직) 중량(仲良)의 따님과 혼인하였으니 정부인(貞夫人)이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공린(公麟)이고, 공린은 박팽년(朴彭年)의 딸과 혼인하여 3남을 낳으니 장남은 오(鰲)이고, 다음은 구(龜)이며, 다음은 원(黿)인데 모두 어리다.

 

성화(成化 8년,1472,성종 3) 임진년 8월 O에 묘표를 세우고 묘소는 정향(丁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