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제의례·제문

제례의 연원과 의의

야촌(1) 2009. 10. 31. 14:22

■제례의 연원과 의의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려 하늘과 조상을 섬기다.

제례를 가리켜 형식주의에 치우친 봉건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제례의 본래 의미와 뜻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제례의 절차에 담긴 의미도 모르면서 형식만 탓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잘못이 아닐까? 저멀리 요순시대 부터 이어져 내려온 제례의 역사와 그 의미를 살펴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동양에서 제례를 지내는 나라는 크게 두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공자. 맹자. 정자. 주자. 퇴계. 율곡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가의 전통적인 의식과 방법으로 제례를 올리는 우리나라이고, 또 하나는 청나라 만주족의 의식으로 제례를 지내는 나라이니,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폴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는 대게 제례를 지내지 않고 있으며, 제례를 지낸다 하더라도 청나라 때의 제사의식으로 간단하게 행하고 있다. 홍콩. 대만. 싱가폴등 에서도 약식으로 간단하게 행하거나 청나라 때의 복장과 의식으로 제례를 행하기도 한다.

 

예를들면 무릎을 꿇고 재배또는 사배를하는 궤배의 의례를 하지않고, 향을 피워들고 선채로 허리만 세번 굽히는 국궁의 예로 하기도 하고, 청나라 군례인 마제수로 궤배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이래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 까지 제례를 행하여 왔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국가적인 례나 민간의 제례나 모두 유교식으로 행하여 졌고,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무속 신앙적인 제사와 불교. 천주교등 종교식 제사가 없는 것이 아니고, 일반 대중의 제례의식 또한 집안에 따라 저마다 예법이 변형된 부분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제례의식은 주례. 의례. 예기의 삼례와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퇴계 이 황, 율곡 이 이, 사계 김 장생, 한강 정 구, 우암 송시열, 도암 이 재등이 계승하여온 제례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고대 제정 일치 시대에는 종교적 의식으로 제례가 성행하여 왔다고 한다.

고대의 제례에 관한 기록을 살펴 보면 멀리 요순 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요 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물려 줄때 "정월 초하룻날에 문조-시조 신께 제사를 올리며 요 임금이 제위를 마치고 순이 섭정을 하게 되었음을 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다.

 

한편, 탕 임금이 처음으로 갈백을 정벌할때 그 발단은 갈백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칠때도 은나라 왕인 주-수의 죄목 가운데 하나가"상제와 신기를 섬기지 않으며, 그 선대의 종묘를 버리고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는 것임을 볼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국가를 통치할 자격도 없는 것으로 보았 음을 알 수있다.

 

그러나 주나라의 제례는 제물에 있어서는 간소하고 정성은 지극하게 하는, 합리적인 제례의 표본을 이룩하였으니 이는 공자도 칭송한바 있다. 따라서 공자는 주나라의 예제를 계승 발전시켜 유가의 예학을 정립하였고, 제례에 있어서도 주나라의 예를 따른 것이다.

 

제례의 시작과 동방예의지국 우리나라 제례의 시원은 단군신화에서 찾기도한다. "태백산 신단수 아래의 신시"를 천신이 정사를 보는 도읍인 동시에, 천신에게 기도하고 제사드리는 재단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동맹, 예에서는 무천, 부여에서는 영고라는 제천의례를 행하였다.

 

백제는 온조왕 원년(B.C 18년)에 그의 아버지인 동명 성왕의 사당을 세우고 제향했다.

고려사에도 원구단에 나아가 제천의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11번이나 보인다.

조선조는 역대 왕조중에서 가장 순수한 유교적 의례를 시행한 왕조이다.

 

세종실록의 오례의와 성종때 편찬된 국조오례의는 가장 잘 정비된 형태의 오례의이며, 이를 실천함으로서 조선은 명실공히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의 오례의에서 부터는 천자의 오례의가 아니라 제후국의 오례의를 택하였으므로 원구단의 제천 행사나 태묘의 7묘제등 천자의 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조10년(1464년)의 제천행사 이후 정례적인 국가례로서 원구단의 제천 의례는 중단되었다.

광무 원년(1897년)9월17일(양력10월12일),고종은 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가 친히 하늘에 고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때 사직을 높여 태사, 태직이라고 위폐를 고치고, 종묘를 태묘라고 높였다.

 

그러나 제천 행사는 몇해 가지 못하고 한일 합방으로 끝나고 만다. 해방 이후에는 서양문화의 지배로 국가적인 제례는 모두 없어졌다. 그러나 국민들의 제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제사 의식은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국법으로 계급에 따라 제례의식을 달리했다.

 

그러므로 퇴계나 율곡선생도 위로 3대조 까지만 제사를 모시는 3대 봉사만을 하였으나, 율곡선생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 이후로는 만민평등한 주자가례를 적용해 모든 사대부 집에서 4대 봉사를 하게 되었다.

 

물론 천민들은 갑오경장 이후에야 주자가례에 의한 예를 행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 국민들이 행하고 있는 관혼 상제의 모든 례는 비록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원형은 주자가례라고 하겠다.

 

제사의 대상과 그 종류. 제례의 대상은 크게 셋으로 구분되는데, 천신과 지기-지신, 인귀가 그것이다.

천신에는 천제와 해.달.별.바람.비등 하늘에 관계되는 모든 신이 포함되고, 지기에는 사직.산.천등 땅에 관계되는 모든 신이 포함된다. 제례는 크게 제천의례를 비롯하여 천자.제후.경.대부가 관직의 등급에 의거하여 지내는 다양한 제사와 부모와 조상께 올리는 제례의 2가지로 나뉜다.

 

제천 의례에는 천자가 야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면서 시조를 배향하는 교제사, 천자가 지신에게 제사하는 사제사, 천자가 종묘에서 천제께 제사를 올리면서 시조를 배향하는 체제사등이 있는데, 이는 모두 근본에 보답하고 시원을 돌아 보는 -報本反始국가의 대제이다.

 

교제사와 사제사는 보본반시의 정성을 주로하고, 체제사는 仁恩의 효를 근본으로 하였으니 이는 천하를 통치하는데 중요한 것이었다. 한편, 천신.지기에 관한 제사는 국가적인 제사로, 대체로 관직 등급에 따라 그 담당하는 제사가 있었다.

 

그리고 인귀에 대한 제사도 태묘와 종묘에 대한 제사, 선농, 선잠의 제사, 그리고 위대한 스승을 모시는 성균관과 향교의 석전. 석채의 제사와 서원과 묘우의 제사등은 국가적인 제사였다. 그러나 천자로 부터 서민에 이르기 까지 만인 공통의 제사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제사이다.

 

천자와 제후가 직접 그 부모와 조상에 지내는 태묘와 종묘의 제사로 부터 민간인들이 가묘에서 그 부모와 조상에 지내는 사시제-시제, 초조제, 선조제, 기일제-기제와 묘소에서 지내는 묘제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밖에 가묘가 없는 일반 서민들의 가정에서 제사를 지낼때 임시로 지방을 써 붙이고 제사를 올리는 명절 차례와 기일제사가 있다. 오늘날 천자는 물론 공.경.대부의 제도가 모두 없어지니, 그들이 지내던 제사도 따라서 없어졌다. 간혹 종묘제사, 사직제사, 선농단 제사등을 민간인들이 기구를 만들어 올릴 뿐이다.

 

물론 참다운 제사로서의 뜻은 이미 상실하였지만 그 형식 만이라도 계승하려는 뜻에서 하는 것으로 지속할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부모와 조상에 대한 제사나 위대한 스승께 올리는 제사는 아무리 시대와 제도가 변하고 바뀌어도 반드시 올려야 한다.

 

그러면 제사는 어찌하여 왔는가?

 

원래 고대에 제사를 지낸 목적은 크게 세가지가 있었다. 예기에 보면 제례에는 기가 있었고 보가 있고 유피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기는 복을 기원하는 것이요, 보는 복을 받고 보답하는 것이요, 유피는 화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례의 본래 목적은 첫째 기복, 둘째 보답, 셋째 피화라 할 수있다.

그러나 기복과 피화는 같은 욕구의 양면일 뿐이요, 보답, 보본은 입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정성이니, 위의 세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면 기복, 피화하려는 욕구와 은혜에 대해 보답, 보본하려는 정성으로 나누어 볼 수있다.

 

전자를 사사로움이라 하면, 후자는 치우침 없이 공평한 공변됨이라 볼 수있으며, 전자는 국가적인 제레행사인 반면 후자는 국민의 제례이다. 즉 우리 국민의 전통적인 제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없이 입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일 뿐이다.

 

성인의 제상에는 생식을 올린다. 제사를 지낼때 제상의 차림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생식이요, 또 하나는 익은 음식이다. 국가의 큰제사나 성인 또는 영웅호걸의 제사에는 생식을 올리고, 일반인의 제사에는 익은 음식을 올린다.

 

생식을 올리는 가장큰 제례에는 12변(밤. 대추. 개암. 마름. 호도. 녹포. 대구포. 소금. 흰떡. 검은떡. 기주떡. 인절미)과 12두(부추김치. 죽순김치. 무우김치. 미나리 김치. 사슴고기젓. 물고기젓. 토끼고기젓. 쇠고기장조림. 천엽. 돼지겨드랑이 고기. 경단. 부꾸미)를 비롯,쌀. 기장, 수수, 피등과 같은 곡식이나 소, 돼지, 양의 생고기 등 생식을 주로 하였으나 전부 생식은 아니고 떡, 익힌 내장고기와 같이 익은 고기도 함께 썼다.

 

일반인의 제례에는 익은 음식을 주로 올리는데, 제례의 종류와 시대에 따라 제수의 종류는 조금씩 다르다. 800여년전 전에 편찬된 주자가례의 설찬도를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제례상을 각각 따로 차리도록 되어 있다.

 

한분의 상차림을 소개하면, 신위 앞 첫째 줄의 서쪽에서 부터 밥, 술잔, 시저, 식초, 국을 놓고, 둘째 줄에 국수, 고기, 간적, 물고기, 떡 셋째줄에는 포와 젓, 채소, 넷째 줄에는 과일 여섯 가지를 올리도록 되어 있다.

 

400여년 전에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 제의초 에는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제례상을 각각 차리도록 되어 있는데, 신위 앞 첫째 줄의 서쪽에서 부터 시저, 밥, 술잔, 국, 초채, 둘째 줄에 국수, 고기, 적, 물고기, 떡, 셋째 줄에는 탕 다섯가지, 넷째 줄에는 포, 숙채, 간장, 젓, 침채, 다섯째 줄에 과일 다섯가지를 올리도록 되어 있다.

 

200여년 전인 사례편람의 시제 때 올리는 진찬도를 보면 상 하나만 차리는데, 신위 앞 첫째 줄의 서쪽에서 부터 밥, 술잔, 시저, 식초, 국, 둘째 줄에 국수, 고기, 적, 물고기, 떡, 셋째 줄에 포, 채소, 간장, 침채, 젓, 식혜, 넷째 줄에 과일 네가지를 올리도록 되어 있다.

 

이상에서 볼때 주자가례에 비하여 율곡 선생의 제의초에 나타난 상차림이 다양하면서도 번잡하지않아 합리적인 반면, 도암의 사례편람에서는 시제에 탕도 없이 지나치게 간소하게 차리도록 되어 있음을 알수있다.

 

시대가 변하여도 변함없이 올려지는 기본적인 제수는 밥, 국, 술, 초간장, 국수, 고기, 적, 물고기, 떡, 포, 채소(침채, 숙채), 젓(육젓, 어젓), 과일등이다. 과일의 가지 수는 시대에 따라 4.5.6가지로 각기 다르나, 없으면 적게 놓을 수도 있고, 많으면 더 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과일 이라고 하였을 뿐 과일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기본적인 과일은 대추, 밤, 감또는 곶감, 배, 사과의 다섯 가지였다. 제례 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정결하게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는 것이다.

 

제수음식에 머리카락 하나, 비듬 하나만 들어 가도 신은 흠향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에, 최대한 정결하게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만들어 신께 바쳤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음식 문화를 위생적으로 발전시켜 가는데, 제례음식이 기여한바 크다고 할 것이다.

 

또한 제례를 지낸 음식은 저장하여 두면 안되고, 즉시 많은 사람이 나누어 먹어야 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제례 후에는 음식을 모두 골고루 나누어 먹었으므로, 우리 민족의 영양보충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본다. 인류 화합과 일가 화친의 깊은 뜻 그러면 제사의 의의는 과연 무엇일까?

 

예기에 보면 "대체로 사람을 다스리는 도는 예보다 급한 것이 없고, 예에는 오경이 있는데, 제사 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대저 제사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 밖으로 부터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생겨 가운데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마음으로 두려워 하면서, 예를 받드나니 현명한 사람이어야 능히 제사의 의를 다한다.

 

현명한 이가 제사를 올리면 반드시 복을 받게 되나니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 아니다. 복이란 비란 뜻이니, 비란 백가지 모든 것이 순하게 됨을 이름하는 것이다" 하였다. 제례란 어떤 기구나 기복, 기원의 욕심이 있어서 하는 것이아니라, 효자가 아무것도 바라는 욕구나 욕심이 없이 오직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물로서 받드는 자손된 도리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제사를 바르게 올리면 복을 받게 되나니 여기서 복이란 세상에서 말하는 속된 복이 아니라 모든 일이 순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선왕이 제천의식을 중시한 것은 제천을 통하여 천하는 하나의 가정이요, 천하의 모든 인류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천하일체의식을 고취하여, 전 인류가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는 정신을 선양하여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리기 위한 교화의 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공자가 체제사를 중시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리고 부모와 조상의 제사를 통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 자매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며 일가친척간에 화목하여 가족애, 종족애, 인류애로 확대하게 하였으니, 제사의 의의는 매우 숭고하다고 할 것이다.

 

제례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크게는 모든 인류의 화합을 도모하고 작게는 효도의 연장선에서 일가의 화친을 이루게하는 것이 제례의 본래의 뜻인 것이다.

 

조준하 교수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