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운 이원우 선생 자찬 묘지문
(翠雲 李元雨 先生 自撰 墓誌文)
아주 먼 옛날에 우리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비로소 표암(瓢巖)으로 내려 오셨으니 이름은 알평(謁平)이라고 하는 이분을 상조(上祖)라 한다. 이때부터 가문이 번창하여 우리나라에 큰 씨족(氏族)으로 울렸다.
고려말기에 이르러 알평 시조(始祖) 15세孫 핵(翮 : 아호 열헌-悅軒)은 문하평리(門下評理)라는 벼슬을 지냈고, 핵의 둘째아들 진[瑱: 호는 동암(東庵)]은 백가서(百家書)를 통달하였으며 시(時)로 유명하였고 벼슬은 검교정승(檢校政丞) 임해군(臨海君)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定)으로 고려사 열전에 행적이 기록되었다.
세상에서 유명한 선조(先祖)가 알평 시조 17세손 제현(齊賢), 호는 익재(益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성균시(成均試) 장원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을 거쳐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익재선조의 아들 달존(達尊)은 아호가 운와(雲窩)이고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으로 임해군(臨海君)에 추봉(追封) 되었다.
알평시조 21세손 희[(暿), 호는 청호(淸湖)]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경상도 도백(道伯)으로 지방시찰중 4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청호공(淸湖公)께서 낳은 분 중 문환(文煥)은 벼슬이 부제학이며 부제학께서 낳은분은 이름이 상(詳)이고 벼슬은 예빈사(禮賓寺) 부정(副正)이다.
부정 상(詳)선조의 증손자 반기(磻埼)의 아호는 호암(煳巖)인데 을사(乙巳)1545년 사화(士禍)가 시작되자 영암고을 녹문에 내려오신 것이 인연이 되어 자손이 거주하게 되었다.
호암공(湖巖公)께서 낳은 분 중 인걸(仁傑)은 아호가 월재(月齋)인데 무과(武科)로 선전관(宣傳官)에 천거되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싸움터에서 순절하시니 행주와 금산 두곳 사당에 배향하였다.
월재 인걸의 아들 희관(希觀-아호 녹은)은 주남(柱南)을 낳으셨는데 아호는 망호정(望湖亭)인데 숨어살면서 학문을 강론하였고 뜻과 행실이 맑고 명망이 당세에 높았기에 큰 현인(賢人)과 유명한 관리 모두가 큰 인물로 추앙하였으니 나의 9세조 되는 분이다.
그 위대한 명성은 영암을 빛나게 하였기에 호남에서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가는 유가(儒家)로 칭송하였다.
나의 증조부는 진황(鎭璜, 아호 사물재-四勿齋)이고, 진황의 아들 규호(圭浩 1821~1889년)공이 나의 할아버지이다. 알평 시조로 부터 36세손이다.
아호는 취벽(醉碧)인데 성균 진사(成均進士)에 합격한 뒤 고종(高宗) 을유년에 대부태릉참봉(大夫泰陵參奉)에 발령되었다. 아버지 이름은 종국(鍾國 1856-1893) 아호는 일삼재(日三齋)이며, 어머니의 성은 반남박씨이니 제승(齊承)의 따님으로 가정안 법도에 이미 익숙하였고 아버지의 법도에 부응하여 드디어 정음(正音)을 얻었고 두 아들과 두 딸을 길렀으니 나는 막내아들이다.
나는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나 3세에 고아가 되어 어머니의 힘에 의해 양육되었고 조금 성장하여서는 작은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이미 성장함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실올 같은 잔약한 몸으로 일상생활에 몰두하였기에 오직 의복과 음식만 알 따름이다.
속례(俗例)에 의해 불러주는 별도의 아호(雅號)는 나 같은 사람으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으나 상서(尙書-고려때 벼슬인데 이조때 판서와 같음)인 박기양(朴箕陽)씨가 나와 위양(渭陽-외숙 또는 외조부를 말함)의 친의가 있다 하여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면서 취운(翠雲)이라고 지어 이 두 글자를 손수 써 주셨기 때문에 그 명령에 따를 것을 노력한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한가지 일도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없지만 장수를 누리고 만년을 잘 보낸 편이니 간혹 다행이라고 생각도 해 보았다. 최근 나의 사후(死後)를 미리 헤아려 보니 자손들이 거짓말을 엮어 나의 묘비문을 큰 학자에게 받아 묘역을 화려하게 꾸밀것이 염려되기 때문에 이제 나 자신이 나의 묘비문을 사실대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신묘(辛卯:1891)년이 이제 몇 년이나 되었을까 어느덧 허무한 일자춘몽이었어 그해 8월 7일은 내가 비로소 태어난 날이었다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여 저 푸른 하늘만 바라보았어. 슬프도다, 외로운 이몸, 창고에 쌀 한 알처럼 살아 있었지 형체와 모습은 작고 또 조그만 하여 신장이 오척(五尺)도 못되었네.
마음과 뜻은 거칠면서도 옹졸하였고 지혜와 생각은 얕으면서도 거칠었어. 가난한 가정에서 어머니를 봉양하는 날 밭갈이하고 나물 캐느라 바쁘기만 하였어. 자신을 성찰하였건만 인격은 이루지 못했고 학과(學課)를 폐지하였으니 문장을 이루지 못했네.
큰형님은 항상 밖에 있었기에 한 베게 한 이불에서 잠자리를 오래도록 못했다네.
우체국을 매도하고 서원(書院)을 세운 것은 의식생활의 방향을 겨우 알았을 때였으며 토지를 매입하여 문호(門戶)를 결성한 건 고향을 보호하고 싶었음이야.
내 비록 외롭고 숨이 헐떡거리지만 가슴속에 한마디 창자가 있어 별다른 의지할 곳 없어서 산업(産業)을 나홀로 전담을 하였지 그리하여 잊을수 없는 뜻이 있어 취벽당(翠碧堂) 곁에서 거처를 하였네.
익재(益齋) 할아버지의 얼을 생각하면서 망호(望湖) 할아버지의 집터를 마음에 새겨 두었어, 바라보았건만 마침내 미처 가기 어려워서 형 생각에 매번 높은 언덕을 올랐다오.
형님이 한약을 마셔야 할 날에 이르러서는 하던 일 거둬치우고 병상(病床)에 누웠네. 복약생활 반년을 경과하였건만 마침내 형을 잃은 초상을 만났어.
또다시 마음과 힘을 다하여 이 몸이 형을 대신 종가(宗家)를 도왔다네. 선조님 묘소마다 석물을 갖추고 묘소를 점지하여 양례(襄禮) 모실 때를 다시 생각하였어.
시와 서를 자손들에게 가르쳤고 효도하고 우애하는 정신을 가문에 심어 놓았지.
손님들은 강당 방에 가득하였고 서책은 책궤 안에 쌓였네. 재(齋)나라와 노(魯)나라 선비들이 이를 귀중하게 여겼는데 (재. 노는 선비가 많은 곳) 진(秦)나라와 초(楚)나라 사람들이 다시 무슨 방해가 있어(진과 초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일컬음) 밭갈이를 하는데 오직 즐거움만 있을 뿐 근면과 검소 이것이 좋은 거야.
선인(先人)의 뜻을 이어 서술한다 하였건만 지금까지 시작도 못했다오.
월재(月齋) 할아버지를 추가 배향하는 날 영호사(靈湖柌)에 광영이 거듭있을 것 같기에 유론(儒論)을 일으켜 의식을 거행하고 분향하고 제물을 영원히 올린다네.
공작(公酌)인 집터와 서책 등을 다시 옛날처럼 갖추고 상세히 살펴보았어.
곧은 정신은 사곡(私曲)을 바로 잡았고 유순한 말솜씨로 강강(强剛)한 사람을 제제하였지.
어 글어 지고 게으른 사람을 좋은 쪽으로 돌아오게 하여 고향에서 떳떳함을 습관으로 삼게했네.
기미가 보이면 흑과 백을 구분하였고 세상을 알기 위해 염(炎)과 량(凉)을 살폈어. 외국에서 들어온 이게 무슨 물건일가 영화와 굴욕에 뜻을 끊어 버렸네.
몸을 가리는 데는 무명배가 마땅하고 뱃속을 채우는 데는 좁쌀이면 만족해. 밤마다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세면을 하고 의복을 바르게 입었지.
사람들을 접견할 때는 충신(忠信)을 주장하였고 내입으로 발언한건 경솔이 잊은 적이 없었네. 운둔 생활을 이렇게도 즐거워 내 뜻대로 자연 속을 거닐었네 구름과 숲 얽혀있는 서호(西湖)위쪽이요 소나무와 대나무 푸른 월출산 남쪽 일세 사람들에게 족히 이야기할 것 없고 이내몸 건강을 보살폈을 뿐이야.
늙으면 죽는 건 오직 하늘의 이치인데 어찌 만수무강만 누려야 하나. 불변의 이치를 볼 것 같으면 팽전(彭佺)등도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오.
죽음이 임박함을 누구가 느끼지 못할 것인가 슬픔과 한탄 때문에 역시 중심을 못잡겠어. 흰 닭 꿈은 사씨(Ꝥ氏-晋나라 사람으로 그해에 자기가 죽을 것을 알았다는 고사)를 놀라게 하였고, 옹거[(雍渠):거문고를 잘 탄 사람으로 그가 거문고을 타면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의 거문고 소리는 맹상군(孟嘗君)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네.
길고 짧음을 어찌 꼭 설명할 것인가 온갖 일을 망양지탄(亡羊之嘆-학문의 길이 다방면이어서 진리를 깨닫기가 어려움의 한탄함을 비유한말)으로 여겨야지 나의 말을 선량하다고 하지 마라라.
일평생 재앙을 꾸미지는 않았어, 어버이께 받은 이몸 온전히 가지고 가니 상처 내는 불효는 겨우 면했네.
묘비 문이란 진실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천만년 내 무덤 앞에 진실대로 표시하리라.
상사(上舍)이신 박종렴(朴鍾廉)씨께서 큰딸을 내 아내로 허락하셨어. 금슬(琴瑟) 좋은 부부생활 몇해였던가, 슬하에 삼남(三男)을 두었다네.
목(睦-일명 欽)이와 언(彦-일명 柏)이와 욱(煜-일명 烜)이니 이 아이들 모두다 항렬은 상자(相字)란다 (후에 龍을 더 두었음).
큰아들 목(睦)이는 기씨(奇氏)가문에 장가들어 이미 여러 아이를 낳았다네. 성희(性熙), 두희(斗熙,) 천희(天熙), 현희(鉉熙), 인희(寅熙)는 첫째에게서 태어난 형제요. 태희(兌熙), 경희(庚熙), 주현(周炫)은 둘째가 낳았어 셋째는 치형(致炯)이를 두었지.
나 세상 떠나간뒤 천만가지 오이 넝쿨처럼 번창하길 오직 바랄뿐.
나의 모든 후손들아 읽어보고 혹시라도 비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출처 : 취운일기(翠雲日記)
↑취운 이원우선생 영정 (1891-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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