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취운 이원우 서유록(翠雲李元雨西遊錄)

야촌(1) 2009. 11. 26. 13:48

■ 취운 이원우 서유록(翠雲 李元雨 西遊錄)

 

낭주(朗州)고을 망호리(望湖里)는 우리 선조가 대대로 거주한 마을이다. 호남의 남단인 이곳은 내가 50평생을 살면서 드나들며 보고 들은 것이 날마다 호남 경치가 아닌 것이 없었다. 월출산 바위돌은 빠트린 것 없이 그 많은 것을 세어 보았으며 덕진호(德津湖)는 깊고 얕음과 길이와 넓이를 빠짐없이 측량하였으니 어찌 붓을 다시 잡을 것인가.

 

관동지방과 관서지방을 관람하지 않았기에 지나간 해에는 관동지방 유람 계획을 세웠고 금년에는 해서(海西)지방 여행 계획을 세웠는데 사람들이 간혹 나를 지나친 방락객으로 지적하지 않을가 싶은데 그들이 어찌 나의 마음을 안다고 하리요, 나는 기특한 경치를 좋아서가 아니라 그 지방 물과 토양, 풍속을 보고 사람들을 접촉해 본 뒤에 마음과 뜻이 넓어지고 생각이 커지기 때문이다.

 

  나의 보고 들음을 호남에서 멈추어 마침내 샘속에 개구리처럼 보이는 하늘만 쳐다 보는 사람이 될 것인가. 집안 일이 한가로운 틈을 이용하여 봄 옷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바람을 쏘이며 목욕하기가 매우 마땅하였다. 날자를 계산하여 경비를 준비하고 여행 도구를 쌓아 소동(小僮-어린아이)에게 여장을 짊어지도록 하고 차편으로 서쪽을 향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은 여러번 다녀간 길이기에 더 이상의 기록은 필요하지 않다.

 

◎ 눌노리(訥老里)

다음날 일찍이 문산역에서 내려 동쪽을 향하여 20리 남짓 걸어가 눌노리(訥老里)를 물어 보았다. 이 마을은 우리 선조 초은공(樵隱公-이름은 友夏:磻琦선조의 조부)과 눌헌공(訥軒公-이름은 思鈞)께서 거주 하셨기 때문에 눌노리라고 하였다.   

 

그뒤 문간공(文簡公) 성(成)선생께서 이곳에 집을 짓고 거주하였으니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말씀이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 한 것이다. 이제 우리 이씨는 고향을 지키며 사는 자손은 한사람도 없고 성씨는 아직까지 옛터를 지키고 있으니 느낌이 더욱 간절하다.

 

마을 사람에게 우리 선조의 옛터를 물어 보았지만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 5백년 사이에 세월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일가. 서글픈 느낌을 견디지 못해 감히 그리는 시 한편을 쓰다.

 

- 訪先世居址訥老里-방선세거지 눌 노리) -

  (선조께서 거주했던 눌 노리를 찾아감)

 

선조께서 사시는 곳 찾아 천리 길 달려오니

계산(溪山)만 보일 뿐 옛터는 보이지 않구나

선조께서 남긴 흔적 어느 곳에서 찾아볼까

옛날 풍수지리(堪輿-감여)를 마을 분들이 전하 누나

 

※ 눌 노리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에 소재함.

 

◎ 도리촌(挑李村)

구렁을 두루 살펴보고 억지로 발길을 돌리려 하니 발걸음이 더디기만 하였다.

더딘 발걸음으로 장단(長湍)역을 향하여 정승 오천 상공(梧川相公)의 옛 마을을 방문하니 산수는 특별한 것은 없고 다만 농촌 마을뿐이니 저 동산(東山)과 녹야(綠野)에 비유할 때 과연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는가. 오천상공(梧川相公)께서 만년에 한(漢)나라 찬후(酇候)인 통하(筩何)가 궁벽한 곳을 취택한 것처럼 그러하신 것이다.

 

장차 우봉(牛峯)을 향하여 가다가 도착하지 못하고 해가 저물어 길가 주점에서 유숙을 하고 다음날 12시경 도리촌(挑李村)에 도착, 선조 익재 선생의 묘소를 성배(省拜)하고 비석을 살펴보며 벌송(邱木-무덤가에 있는 墓木)을 만져 보니 어렴풋이 선령께서 오르내리신 것 같고 말씀이 들린 덧 하니 서글픈 느낌이 들어 감히 나의 정을 담아 시 한편을 쓰다.

 

- 拜謁先祖益齋先生墓-배알선조익재선생묘, 도리촌) -

  (선조 익재선생의 묘를 찾아 성묘함)

 

묘소는 이미 6백년을 경과하였건만,

체백이 강녕하여 아직까지 걱정없어,

이 못난 후손 이제 와서 성묘를 하니,

무덤에 풀 푸르고 푸려 저절로 느낌이 드는구나.

 

위쪽에 네 봉분이 있으니 열헌공(悅軒公-翮), 동암공(東庵公-瑱), 송암공(松巖公-世基), 상서공(尙書公-簻)의 묘소라고 하는데 분별할 수가 없으니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차례대로 절을 올리고 곧바로 도산원(道山院)에 도착했다. 도산원은 익재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곳인데 훼손된뒤 폐허가 되었으니 그리움만 간절할 뿐이며 묘막(墓幕)에 들어가 유숙을 하였다.

 

다음날 개풍군 조문리를 찾아 가는데 서북쪽으로 거리가 약 30리가 된다. 이 마을에는 우리 16대조 제학공(提學公-文煥)과 15대조 부정공(副正公-詳) 두분의 묘소가 있다. 제학공(提學公)의 종손 상순(相舜)이 현재까지 묘소아래 살면서 수호(守護)하기 때문에 먼저 종가(宗家)를 찾아 상순을 만나보고 세의(世誼-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를 다지며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상순과 더불어 찾아가 선조 묘소에 절을 하고 이어 선산 경계를 둘러보고 종가에 돌아와 제사 절차를 상세히 물어보며 그 동안 쌓인 정분을 털어 놓았다.

 

◎ 만월대(滿月臺)

다음날 걸어서 개성땅을 들어가니 고려의 옛 수도 서울이다. 뒤에는 송악산이 꿈뜰꿈뜰하여 마치 용이 서려 있는 듯 범이 쭈구리고 앉아 있는 듯 하여 모인 기운 이에 이르르니 수도 서울이라고 하기가 마땅하다.

 

동쪽과 남쪽에는 성곽이 있고 서쪽에는 토성이 있으며 사이 사이에는 옛날 축성의 흔적이 남아 감싸고, 중심부에는 만월대(滿月臺) 옛터가 있으니 곧 궁궐과는 내외를 이루고 있었다. 전각은 보이지 않고 다만 남문만 옛 모습 그대로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제도가 매우 소박하여 들보에는 무늬를 새기지 않았고 주추돌은 부정(斧釘)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크지도 않고 높지도 않으니 어찌면 그 규모가 이처럼 검박(儉朴-검소하고 질박함)하다는 것인가.

 

개성(開城)에서 허탈한 느낌(開城曠感)

만월대(滿月臺)앞에 봄풀이 풀렸으니

만호(萬戶)가 연기에 쌓여 희미하게 보여

삼국통일 오늘날 어디에 있나

송악산 천년세월에 흰 새만 나는 구나

 

동쪽에는 문충동(文忠洞)이 있으니 익재 선조 문충공 께서 거주하셨기 때문에 뒷날 사람들이 마을 이름을 문충동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나 선조의 건물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다만 유허비(遺墟碑)만 있으니 이곳이 어쩌면 그 당시의 지역이 아닌가 싶다. 비문을 읽어보는 중 얼굴에서 땀이 흐르는 줄도 알지 못했으며 오래동안 서성거리다가 서쪽을 바라보니 충평(忠平) 홍정헌(洪靜軒-이름은 권)선생의 취의비각(取義碑閣)이 있다. 

 

◎ 선죽교(善竹橋)

고려사를 고찰하면 이곳은 서화문(西華門) 밖에 위치 하였다고 했다. 동남쪽에는 선죽교(善竹橋)가 있으니 본래이름은 탁타교(槖駝橋)라고 하였다. 국운이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옮겨 갈 때 포은(圃隱) 정몽주선생이 이곳에서 순절하신뒤 석교(石橋)위에 피 흔적이 어른어른 남아 있었고 석교 아래 모래에 충신의 피가 물들여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석교 왼쪽에 죽림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석교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 선죽교에서(善竹橋) -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심어놓은 이 땅에

충신의 핏자국 옛날보다 오히려 새롭구나

선죽(善竹)의 근본 뿌리 마침내 썩지 않아

맑은 바람은 나약한 천만인(千萬人)을 자립하게 해

 

선죽교 서쪽에 녹사공(錄事公)인 김소(金炤)의 동순비(同殉碑)가 있는데 아직까지 축축한 기운이 있기 때문에 그 비를 읍비(泣碑)라고 일컬은다. 그 서쪽에 있는 숭양서원(崧陽書院)은 정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니 고려 5백년 정신 명맥을 이곳에서 이어올만 하다.

 

남문 밖에서 유숙을 하고 다음날 남문안을 들어가니 모두다 인삼밭이다. 죽림을 엮어 울타리를 막았으며 띠풀로 덮고 시렁을 맺어 집집마다 인삼 가꾸는 것으로 농업을 삼았으니 의식 생활은 밭가리 농사보다 더 만족한데 하물며 기름을 짜는 것으로 부업을 삼고 있으니 이른바 유포(油布-기름과 찰흙을 먹인 천), 유채(油彩), 유지(油紙-기름 종이), 유대(油帒)등이 모두다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다.

 

인심이 견고하여 타지방 생산품을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제작을 하여 사용을 하니 상술이

발전되어 재원이 가득하였다.

 

◎ 박연폭포(朴淵瀑布)

다음날 동문밖 박연폭포를 찾아 갔는데 송악산 동쪽 골짜기 몇백자 되는 절벽에서 곧바로 쏟아져 내리는데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았고 우뢰소리가 끊는 물소리 같아 상쾌한 기운이 골짜기에 가득찬 것 같았다. 오래동안 머물러 있으니 봄 옷이 얇은 것 같아서 두어잔 술을 마시고 시 한편을 지었다.

 

- 박연폭포를 향해 가면서(向朴淵瀑布-향박연폭포) -

 

하얀 물결 가운데 푸른산이 서 있으니

긴 냇물을 벽에 걸어 두었는듯 흘러 내리는 듯 해

땅을 파는 우뢰소리가 만인(萬人)의 귀를 놀래게 하니

이곳에 도착한 유람객 문득 술잔을 던져 버리네

 

돌길이 우들 투들하여 미투리가 모두 구멍이 나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어 동구밖 주점에서 유숙을 하고 다음날 바로 개성에 도착하였다. 또 다시 성(城)을 따라 두루 밟고 만월대를 올라가 옛날을 그리는 시 한편을 읊었다.

 

-만월대를 올라가서(登滿月臺) -

 

오백년 전에 세워진 만월대를 올라보니

길손들 풀길 밟으며 술잔을 마시네

사람들을 향하여 고려때 일을 물어보니

보리 욱어진 궁궐터에 몇 번이나 비 내렸을가

 

◎ 백천역

서서히 걸어 가는 길을 되돌아 왔으며, 다음날 차를 타고 토성(土城)을 출발하여 예성강을 지내어 백천역에서 내려 여관에 여장을 풀고 온천에 들어가 목욕을 마친뒤 온수를 마시었다.

 

토질은 찰흙이면서도 비옥하여 곡식을 심은데 좋았기에 밥맛이 더욱 좋았다. 산은 적고 들은 많아 닭 우는 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서로 들리며 사람들의 풍속은 근검하니 우리나라 농향을 센다면 반드시 해서(海西)에서 1번이나 2번이라고 할 것이다.

 

◎ 연백군(延白郡)

연백군(延白郡)은 서해(西海)가에 위치하여 토산품이 풍부하니 굴합, 게, 해태, 석어, 도태, 장어등속을 이고 지고 연락부절하여 온갖 물건이 모두 갖추어졌다. 오직 부족한 것은 불땔 나무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연탄이 생산되어 연탄이 없는 곳이 없다.

 

금전을 허비하지 않고 각각 자기가 사는 곳에서 밭가리 곡식을 수확하고 겨울에 연탄을 채취해 부엌에서 밥을 지어 먹으니 그 화력이 나무보다 배나 강하다. 방을 따뜻하게 하고 밥을 익히는 일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능히 못할 것인가. 하늘이 마음먹고 백성들에게 후한 복을 주었다는 것을 알겠다. 다음날 자동차를 타고 해주에 도착하였다.

 

해주는 비록 광활하지는 못하지만 평탄한 지경을 끼고 있어 한 고을의 수도가 될만하다. 두루 걸어 다녀 보니 시가지는 조밀하여 인물이 많으며 습관과 풍속은 고집이 세기로 팔도에서 최고이다.

 

◎ 해주의 석담구곡(石潭九曲)

다음날 석담구곡(石潭九曲)을 찾아가기 위해 차례대로 근원을 따라 들어가니 산봉우리는 휘 둘러 솟아있고 못 물은 맑기만 하다. 그 가운데 정사(精舍)와 강당(講堂)과 천석(泉石)이 있다. 이 모두가 분명하고 깨끗한 것이 꼭 어젯날 손질한 것 같으니 문성공(文成公) 율곡 이이(李珥)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다.

 

구곡의 발원하는 곳에 도착하여 물가에서 얼굴을 씻고 옷깃을 제치니 서늘한 느낌이 마치 눈 위에 서 있는듯하여 정신이 저절로 마음속에서 생겨난 덧 하다. 선생께서 생존 하던 그 당시 가까이 모시고 글을 익히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시를 지어 느낌을 담았다.

 

-석담구곡을 찾아가서(訪石潭九曲) -

참 근원 정맥(正脉)이 마침내 다 하지 않아

돌 아래 흐르는 물 굽이굽이 맑구나

경포대 속에 산 얼굴은 깨끗이 씨선 것 같아서

하늘 가운데 달빛 유난히도 분명하다

 

바람을 쏘이며 목욕을 하고 하루 종일 돌아갈 것을 잊고 있다가 비서(小僮)의 재촉하는 아룀으로 인하여 구곡을 떠나오니 저녁은 이미 어둠이 들어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어 길가 주점에서 유숙을 하였다. 다음날 자동차를 타고 용당포에 도착하였다.

 

◎ 용당포(龍塘浦)

용당포(龍塘浦)는 바다가에 위치한 곳으로 육지와 교통이 좋으며 어물과 소금이 산처럼 쌓여 있고 선박이 즐비하게 서 있다. 해서인(海西人)들의 풍속은 고향에 들어오면 농사를 짓고 집안을 떠나면 장사를 하기 때문에 이익을 내는 것이 가장 높다.

 

용당포 여관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해주로 되돌아 와 점심을 먹은 뒤 옹진으로 가서 그곳 생활 정도를 살펴보니 3면이 비옥한 전답이다. 비옥한 밭은 벼농사가 마땅하고 습지에는 출(秫:찰조)을 심은 것이 마땅하며 1면은 바다를 끼고 있는데 해산물이 풍부하여 아침 저녁으로 시장에 들어가 장사를 하기 때문에 의식 수준이 평등하였다.

 

◎ 용호도(龍湖島)

다음날 용호도(龍湖島)에 들어 갔는데 이 섬은 큰 시장이다. 끌어온 물은 큰 못을 이루었고 못 위에 시렁을 설치해 집을 짓고 그 가운데는 수산물 시험장을 열어 놓았다. 수백종 어물을 모아 두었는데 모두가 생선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 생선류가 3백이고 조개류가 3백이라고 하더니 진실로 이와 같은가 싶다.

 

다음날 배편으로 돌아 와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12시경에 장연군(長淵郡)이 이르러 불타산(佛陀山)을 바라보니 부처님 머리와 같았다. 다음날 자동차편으로 송화군(松禾郡)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오후에 은율군(殷栗郡)에 도착하였다.

 

◎ 해서(海西)의 구월산(九月山)

은율군 동남쪽에 있는 구월산(九月山)은 해서(海西)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바라보니 울둑불둑 높이 솟아 마치 구름과도 같고 그림과도 같아 산 이름을 물어 보았으나 확실히 아는자가 있지 않았다.

 

다음날 안악(安岳)에 도착하니 지세가 평온하고 들 빛은 아득하기에 이곳에서 유숙을 하고 그 다음날은 신천(信川)에 이러느니 보는 느낌이 한 결 같이 이전날 경과할 때와 같았다. 또 하룻밤 자고 재령(載寧)고을에 도착하였고, 이어서 사리원역에 도착하여 보니 봉산고을이다.

 

사리원역의 규모를 상세히 살펴보니 해산물과 육산품이 모두 이곳으로 모이기 때문에 창고가 즐비하고 차량이 복잡하니 과연 남쪽 지방에 비유할 바가 아니다.

 

◎ 평양, 기자묘(箕子廟)

다음날 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하니 산수가 명랑하고 시내가 아름다우면서도 기묘하니 옛날 2천년간 우리나라 수도 서울이라고 하겠다. 대동문 안에 여관을 정하여 여관 주인과 더불어 먼저 기자묘(箕子廟)에 가서 봉심(奉審-왕명을 받들어 능이나 종묘를 보살핌)하고 배례를 올렸으며 또 기자 능에 가서 바라보며 배례를 올린뒤 여관주인에게 물어 가로되 기자(箕子)께서 동국(東國)으로 오셔서 만주(滿洲)의 평양에 거주 하셨다는데 능과 묘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느냐 하니 그가 사학(史學)에 밝지 못하기 때문에 분명한 답변이 없었다.

 

-평양에서 옛날을 회상함(平壤懷古) -

동쪽으로 뻗어 내린 금수강산 삼천리

아름다운 문화유산 이 한곳 평양 일세

물어보자 너 제비야 어느날 날아왔지

옛 기자성(箕子城)에 버들가지 가득하게 늘어젔구 나

 

◎ 모란봉과 을밀대(乙密臺)

다음날 모란봉에 올랐는데 봉우리의 생김새가 활짝핀 모란 꽃송이와 같으며 높지도 않고 험난하지도 않아 몽실 몽실하여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모란봉에서 내려와 을밀대를 찾으니 을밀대는 욱어진 숲속에 있어 매우 정교하고 깨끗하여 어느때 을밀(乙密)이라는 신선이 이곳을 지나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비서를 불러 도시락을 열고 술을 따라 마시니 조금뒤에 취기가 훈훈하였다. 그리하여 부

루에 올라가 옛날 사람들의 시와 요즘분들의 시를 두루 읽어보고 산수를 살펴보니 경치가 기특한 장관이었다.

 

석양에 여관에 돌아와 주인을 불러 감홍로주(甘紅露酒)를 사오게 하여 마시니 비록 달콤하고 화끈 하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향이 없기 때문에 물어 보기를 내가 들은 바로는 감홍로술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데 향기가 이정도란 말인가 하니 주인이 답변하기를 지금엔 술에 대한 제도가 엄격하기 때문에 다만 이름만 빌려 비진 것이니 어찌 옛날 비진 술과 같을 것이냐고 하였다.

 

저녁을 먹은 뒤 비서를 불러 군밤을 사 오라고 했더니 밤이 소저(小樗)의 씨처럼 매우 감미로운데 이 지역 토산품이다.

 

◎ 연광정(練光亭)

다음날 연광정(練光亭)으로 향하여 갔는데 정자의 4면에 철조망을 처 오르 내릴 수가 없었다. 비록 올라가 보지는 못했지만 4면을 둘러보니 강수(江水)가 마치 비단을 펴놓은 것 같았으며 밝은 모래빛이 어른어른하여 붓을 가져오라 하여 즉석에서 시 한편을 지었다.

 

-연광정에 올라가서(登練光亭) -

대동강 물 물빛이 비단처럼 아름다운데

안개 빛 100리 요 모래 빛 10리 로 세

그 가운데 정자 있어 먼 곳 까지 보이니

평양성 아침비가 집집마다 내리 누나

 

-연광정에서(練光亭) - 

※ 이시는  다른 여행 때 지은 詩

 

대동강 물이 맑은 빛을 펼쳐 놓은 듯

안개 빛 바라보니 한백 리 아득하다.

 

높다란 외로운 정자 모래위에 서있는데

남쪽 가 역촌(驛村) 나무마다 푸른 빛 보 이 누나

 

여관에 돌아와 냉면을 시켰는데 이 냉면은 토산(土産)인 보리라서 감미로움이 입맛에 알맞아 배가 부른 줄도 깨닫지 못하였다.

 

오후에 저자거리를 나오니 남자들 가운데 죽립(竹笠)을 쓴 자들이 절반이고 여자들은 머리를 올리고 수건으로 덮지 아니한 분이 없었으며 그들의 말씀 소리는 어눌한 것도 같고 어눌하지 않은 것도 같으며 성정은 지나치게 강직하니 이들을 북방지강(北方之强)이라고 이른다.

 

◎ 묘향산(태백산)

다음날 차를 타고 신안(新安)고을에 이르러 북선행(北線行)으로 바꿔 타고 영변역에 내려 묘향산 역사를 물으니 묘향산은 단군이 비로소 내려온 지역이라 하여 일명 태백산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석굴이 산 중턱에 있고 석굴 앞에는 단군 석상(石像)이 있는데 몸집이 큼직하고 두터운 얼굴과 넓은귀가 머리 높이 달렸으니 모스빙꽃갈도 아니요. 모자도 아니며 삿갓도 아니고 관(冠)도 아니니 어느 때 제작한 것인지 상세한 기록이 없다. 배례를 올린 뒤 시 한편을 읊어 쓰기를 마치다.

 

-단군석상에 배례를 올리고서(奉拜檀君石像-봉배단군석상) -

하늘의 원기(元氣)가 참 정신을 내렸기에

우리나라 시조로 나와 밝은 빛 열어놓았어

사천년 지난 역사를 곰곰 생각하니

황하 수 밝은 빛을 어느 날 다시 볼가

 

◎ 영변(寧邊)

산에서 내려와 산 아래 주점에서 유숙을 하고 다음날 영변(寧邊)으로 향하여 약산동대(藥山桐坮)를 찾았다.

 

동대(東坮)는 약산(藥山) 동남쪽 중턱에 있는데 둥글지 않고 모나며 기울지 않고 평편하여 위에는 5-60명이 앉을만 하고 좌우에는 석간수가 흐르며 앞뒤에는 산봉우리가 뾰족 뾰족하니 어렴풋이 공중에 떠 있는 듯 하다.

 

때문에 악부(樂府)를 살펴보면 약수동대곡을 기재하고 있다. 동대를 올라가니 가슴이 툭 트인 듯 상쾌하고 암목이 열린 듯 하다. 음률을 알 것 같아서 동대곡 1장을 읊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본래 가사를 모르기 때문에 동대곡을 대신하여 시 한편을 지었다.

 

-약산에 있는 동대에 올라가서(登藥山東臺-등약산동대) -

 

약산 남쪽 언덕에 동대 높이 솟아나

창공을 날을 듯 한데 속세는 보이지 않아

피리소리에 귀 먹을 것 같았는지 선학(仙鶴)은 멀리 갔으니

아이 불러 술을 부어 석잔을 거뜬히 마셨어

 

◎ 평양 사람의 생활

산에서 내려와 마을 주점에서 유숙하고 지방 풍속을 살펴보기 위해 차편을 이용하지 않고 도보로 3-40리를 걸어 오니 산은 많고 들은 적은데 수전(水田)이 더욱 적어 거주하는 사람 역시 드물었다.

 

농작물을 물어보니 흑맥(黑麥), 황량(黃粱-차지지 않고 메진 조), 겉보리, 옥수수등 이것이 의토(宜土)이고 쌀은 금옥처럼 귀하여 항상 거칠은 채소밥을 먹으며 그들의 의복은 면포는 보이지 않고 삼배와 갈건(葛巾-갈포로 만든 두건)이 많은 편이다.

 

생산품은 청석과 돼지가죽, 너구리 등이고, 그곳에서 생산된 약 재료는 황잠, 백지, 금은

갈근이며 그들의 주택은 두형(斗形)처럼 모난데 흙과 돌로 쌓았다. 거처하는 건물과 의식이 순고하고 한결같은 근면, 검소로 모두가 굶주린 사람이 없으니 반드시 토지가 비옥하다 척박하다는 것을 의론할 것인가. 근면이 의식 생활에 근원인 것이니 근면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 신의주

하행동(下杏洞) 역전에서 투숙을 하고, 다음날 차를 타고 안주(安州)에 이르러 의주선(義州線) 열차를 바꿔 타고 정주(定州)와 선천(先天)과 철산(鐵山)역을 지나 신의주에서 하차 하니 구의주 까지는 40리 거리로 조선과 만주 두 나라 경계이다.

 

지역이 활짝 열려 시가지는 바둑판과 같고 인구도 많으며 기차역의 규모가 매우 커 곡물과 철물, 목재와 석탄, 석유 기타 섬유, 피혁 등이 언덕처럼 쌓여 있어 모두가 서로 교환하는 장소가 되기 때문에 경찰들의 감시가 아주 엄격하였다.

 

노동자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들의 임금이 비록 높지만 건강과 안전이 도리어 고향에서 땀을 흘려 밭 가리 하는 농부들의 노고만 같지 않다. 조선과 중국의 경계 전부를 관광하기로 한다면 하루 이틀로는 불가하기 때문에 한쪽에 있는 숙박 집을 잠자리로 정하였다.

 

밤에는 저녁밥을 먹고 베개를 베고 편안히 잠을 자고 낮에는 이곳 저곳을 오가면서 시내에서 영업하는 분들의 규모를 보았고 야외에서 밭가리 하는 제도를 보았으며 풍속을 물어보고 금지사항을 문의하니 들은 바가 더 많았다.

 

◎ 압록강 철교

이와 같이 압록강 철교 가에 나가 그들의 지혜를 계산하여 배우고 재력을 산출해 보니 좁은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철교 하나도 오히려 어려운데 더구나 다리를 세 개나 준공하였다는 것인가.

 

다음날 안동고을 첫 번째 강물을 건너가서 동쪽 서쪽 산천이 다르고 인물이 같지 않으며 풍속이 맞지 않아 거처와 음식, 언어, 접대 등이 과연 내가 보았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건축과 밭 가리 등등은 호남에 비교한다면 10배나 부지런한 편이니 호남 사람 가운데 게으른 자와 실업자로 하여금 이들의 삶을 보고 당연히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연이어 5일간 유숙을 하고, 차를 타고 봉천고을로 향하였다.

 

◎ 중국, 봉천

봉천(奉天)고을은 본래 청(淸)나라 심도(瀋都)로 산천이 웅장하고 지대가 평탄하여 남북으로 도로가 개통되었는가 하면 동서로는 아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이전에 도독(都督)이 거처하던 집은 높이가 산악과 같고 성시(城市) 안팎에 몇 만호

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5일 동안 유숙을 한뒤 자동차를 임차하여 남쪽으로 100리 가량 나가니 만리장성이 있는데 옛날 진시황이 쌓은 것이다.

 

◎ 만리장성

요동까지 거리는 매우 멀지 않으며 조(洮)에 도착하여 성(城)의 유래를 문의하고 축성된 규모를 보니 높이는 900여척(餘尺)이 되고 두께는 10수(數)리가 되며 성(城)위에는 여기 저기 시가(市街)통로가 있고 성(城)밑 대석(臺石)은 돌이 아니라 바위인 듯 하고 바위가 아니라 산(山)으로 보인다.

 

내가 진(秦)나라 사서(史書)를 읽을 때 신편(神鞭)이라는 설명을 믿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서 보고 진시황의 편석법(鞭石法)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온 세계에서 이와 같은 공사가 다시 있을까 하여 시를 지었다.

 

-진시황 만리장성 올라가서 -

(登秦皇萬里長城-등진황만리장성) 

 

위세는 당당하여 하늘을 대지를 듯

그 당시 돌을 옮기는 건 귀신이 잡아 당겼어

귀신의 은공(恩功)을 빌려 이처럼 쌓았으니

진나라 유적으로 지금까지 전하 누나

 

도로에서 올라 갈 사닥다리가 없어 오르고 싶은 뜻은 있었으나 오르지 못하고 성(城)아래에서 투숙을 하고 다음날 봉천여관으로 돌아와 다시 생각을 해보니 비록 두루 살펴 볼 수는 없지만 6천리 길 남북만주를 어찌 가히 헛되이 자나 갈 것인가 하고 10일 동안에 남쪽 계관(鷄冠)에서부터 북쪽 공주령(公主嶺)에 이르기까지 차편과 도보로 번갈아 가면서 오는데 보이는 것이 황야와 평원 아닌 곳이 없다.

 

3백년간 황폐한 나머지 수림이 울창하고 마른 뿌리는 흙이 되었고 썩은 잎은 재가 되어 전체가 비옥하다. 그 지방 사람들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만일 농사를 경작한다면 노력을 절반만 하더라도 공(功)은 배(倍)가 되어 곡식 한승(一升:한되-열홉)을 심으면 한석(一石:한섬-열말)을 수확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옥토를 하늘은 왜 우리에게 주지 않고 흉노로 하여금 경작하도록 하여 마침내 마적들의 소굴이 되었으니 누가 크게 아쉬워하지 않을 것인가. 오직 이것 뿐만 아니라 지세(地勢)의 신령하고 아름다움을 고찰하면 우순(虞舜)께서 거처한 곳이라고 하며 원(元)나라 청(淸)나라 기지였다고 한다.   

 

이들 나라의 역사는 분명한 근거가 있지만 역산(歷山)과 뢰택(雷澤)은 문의할 곳이 없으니 매우 개탄스러워 애석할 일이다. 만일 성인(聖人)이 다시 태어나 풍속을 변동하고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위엄을 보인다면 저 오랑캐 역시 인간이니 당연히 귀화(歸化)할 것이다.

 

여장을 꾸려 돌아오는데 1박 2일을 달려와 수색역에 내려 여관에서 유숙을 하였다.

 

◎ 행주산성

다음날 행주(幸州)에 있는 기공사(紀功祠)를 찾아가 봉심(奉審)을 하였다. 기공사(紀功祠)는 권률(雅號는 揖翠軒이고 시호는 忠莊公)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우리 선조 월재공(月齋公-仁傑)도 모셔져 있다.

 

지금은 철폐되어 폐허가 되었지만 임진왜란을 상상하면서 전사했던 당시의 느낌, 그리고 추모하는 마음은 가슴 가득하다.

 

위판(位板)을 묻은 단(壇)아래서 바라보며 절을 올리고 잠시 머물러 있다가 돌아와 열차를 타고 서울과 대전을 경과하여 영산 포에 도착하였다. 자동차를 불러 타고 영암에 내려 집에 돌아오니 5월 9일 아침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내가 우리나라 3천리 서쪽을 유람하고 돌아 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이와 궁금증을 물어본 자(者) 아주 많았다. 어찌 혀의 힘을 허비하면서 일일이 설명을 할 것인가. 이 한편의 기록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니 다시 무슨 설명이 필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