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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성군 이운용 묘비명[재령이씨]

야촌(1) 2009. 8. 7. 23:55

택당 선생 집 제10권 / 비명(碑銘)

 

식성군 이공의 묘비명[息城君李公墓碑銘] 병서(幷序)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 식성군(息城君) 이공(李公) 휘(諱) 운룡(雲龍)의 묘소는 청도군(淸道郡) 법귀산(法龜山) 선영(先塋)의 아래에 있다.

 

공이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난 때에 덕수(德水) 출신 이식(李植)은 국론(國論)을 취집하고 가첩(家牒)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며 명(銘)하는 바이다.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왜적이 처음 난리를 일으켰을 때 영남(嶺南) 일로(一路)가 먼저 무너졌다. 

 

이에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이 바야흐로 배[船]를 버리고 달아나려 하자, 당시 옥포 만호(玉浦萬戶)로 있던 공이 항거하며 말하기를, “사군(使君)은 국가로부터 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으니, 의리로 볼 때 자신의 관할 지역을 사수(死守)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지역은 바로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 즉 전라도와 충청도임)의 요충(要衝)에 해당하니, 이곳이 무너지면 양호도 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지금 우리 무리가 비록 피폐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병력을 끌어 모아 지킬 수가 있고 또 호남의 수군(水軍)도 온전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군대를 정돈한 다음 견내량(見乃梁)을 차단하여 적이 거제(巨濟)를 지나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면, 남방의 사태를 안정시킬 여지는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공은 지금 여기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려 하는가.” 하였다.

 

그러자 원균이 성을 내며 말하기를, “호남의 군대를 당신이 청해 올 수 있겠는가.”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군이 나에게 명을 내린다면, 내가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율포 만호(栗浦萬戶) 이영남(李英男)이 평소부터 그쪽 군대를 잘 알고 있으니, 그에게 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자, 원균이 그 말을 따랐다.

 

공이 즉시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거제(巨濟)로 가서 현령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왜적을 토벌하겠다고 하늘에 맹세한 뒤 바다로 나가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영남이 호남에 가서 계획을 이야기하자,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이 과연 군대를 이끌고 나아왔다. 

 

그런데 원균은 일단 사신을 보내 놓고 나서도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을 걱정한 나머지 부대를 인솔하고 남해 바다 속으로 항해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호남의 군대를 만나게 되었으므로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며 돌아왔다.

 

이해 5월 10일에 공이 군대를 모아 옥포 앞바다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에 왜적이 달아나 해안으로 올라가니, 적선(敵船) 50척을 모두 불사르고 돌아왔다. 또 영등포 앞바다의 전투에서도 10여 척의 적선을 불태웠다.

 

이날 밤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몽진(蒙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사들이 모두 울었고 호남의 군대도 돌아갔다. 

이에 원균이 또 도망치려 하자 공이 강력하게 항의하여 만류하였으며, 독자적으로 병력을 규합한 뒤 육지와 바다를 왕래하면서 적의 군세(軍勢)를 꺾어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호남의 군대와 연합한 뒤 사천(泗川)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을 향해 진격해서 대포(大砲)를 쏘아 누선(樓船)을 박살내자 왜적이 크게 무너졌다. 이때 호남의 우수사(右水使) 이억기(李億祺)도 와서 모였으므로 군세(軍勢)가 조금 떨쳐지기 시작하였다.

 

6월에 진해(鎭海)의 왜적을 공격하였다. 왜적이 사면을 에워싼 가운데 적의 대추(大酋)가 기와집이 들어선 누선(樓船)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깃발과 돛대 등 화려한 장식들이 현란하게 바다를 비추었으므로 이를 보는 자들이 현혹될 정도였다.

 

이에 공이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하루 종일 육박전을 벌인 끝에 그 누선(樓船)을 격파하자, 왜적들이 창황한 나머지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날이 저물면서 사졸(士卒)들이 피곤한 기색을 보였으나, 공이 더욱 급하게 독전(督戰)하면서, 쇠줄로 적선을 끌어당겨 바다 한 가운데로 나오게 한 뒤 뒤집어 엎었다. 

 

이렇게 적을 크게 깨뜨린 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작전을 중지하였다. 7월에 적선 수백 척이 견내량(見乃梁)을 넘어 오려 하였는데, 군세(軍勢)가 예전보다 훨씬 성대하였다. 공이 부대 장병과 계책을 정한 뒤 접전(接戰)을 하다가 거짓 패한 척하고 물러나 외양(外洋)으로 끌어내고 나서 합격(合擊)을 하니, 대포의 화염으로 바다가 끓어오르면서 왜적이 크게 섬멸되어 파도가 온통 붉은 빛으로 변하였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전투를 벌여 적선 30척을 깨뜨렸다. 이로부터는 왜적이 감히 내양(內洋)에 들어오지 못했으므로 양호(兩湖)의 운송 길이 막히지 않게 되었다. 이때 원균(元均)은 노량(露梁)에 정박해 있기도 하고 남해(南海)로 떠나기도 하면서 오직 호남의 군대가 진퇴(進退)하는 것만을 구경할 뿐이었다. 

 

그리고 선봉 부대를 배치할 때에는 오로지 공 등을 앞세웠는데, 공 등이 전승(戰勝)을 거두기만 하면 그때마다 번번이 전리품(戰利品)을 거두어들이면서 자신의 전공(戰功)으로 조정에 계문(啓聞)하곤 하였다.

 

또 남해 현감(南海縣監) 기효근(奇孝謹)이 배를 이끌고 도망쳤는데, 오로지 주육(酒肉)을 가지고 원균에게 아첨을 떨었으므로 원균이 늘 그를 감싸주었다. 하지만 공은 이런 일 모두에 대해서 개의(介意)하지 않았다. 이순신이 이 때문에 원균을 싫어하고 공을 훌륭하게 여겼다.

 

가을에 가덕포(加德浦)로 나아가 진(陣)을 친 다음 마침내 부산(釜山)의 왜적에게 육박해 들어갔는데, 적이 진영 속에만 웅크리고 있을 뿐 감히 나와 접전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웅천 현감(熊川縣監)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이순신이 이때 비로소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가 되고 나서 공의 전공을 열거하여 체부(體府)에 보고한 뒤 장차 공을 천거하여 자신의 후임자로 삼으려 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은상(恩賞)을 받고 품계(品階)가 통정(通政)으로 올랐다. 병신년(1596, 선조 29)에 좌수사(左水使)로 옮겨 제수를 받은 뒤 염포(?浦)에 진을 설치하고 왜적에게 시달린 백성들을 불러 모아 안정시켰으며 전함(戰艦)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였다.

 

이때 왜장(倭將) 청정(淸政)이 탁성(卓姓)을 가진 부장(副將)을 파견하여 공에게 예물을 증정하였으며, 또 역자(譯者)에게 묻기를, “명장(名將) 한 분이 우도(右道)에서 옮겨 왔다고 들었는데, 이분이 바로 그분인가?”하면서,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정유년(1597, 선조 30) 여름에 원균이 전투에 패해 죽고 제포(諸浦)의 수비가 무너지자 적이 마침내 양호(兩湖)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공이 조정의 명을 받들고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이동하여 영천(永川) 창암(蒼巖) 들판에서 접전을 벌였는데, 적이 이 때문에 동쪽으로 향하지를 못하였다.

 

겨울에 중국 군대가 도산(道山)을 포위하자, 공이 대왕암(大王巖)에서 배를 인솔하고 나아와 협격(挾擊)하였는데, 중국 군대가 퇴각하였으므로 공도 물러 나왔다. 이듬해 가을에 중국 군대가 재차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때 공은 왜적을 산채로 잡아 그로부터 관백(關伯)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있었으므로, 군대를 정비한 뒤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왜적을 추격하였다.

 

그러고 나서 군대를 돌려 부산(釜山)으로 돌아와 수영(水營)을 복구하고 백성을 모아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한편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군량도 넉넉하게 비축해 놓았다. 겨울에 탄핵을 받고 체직(遞職)되었다.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이 막하(幕下)에 불러들인 뒤 일이 있을 때마다 공에게 자문을 구해 결정하곤 하였으며, 공을 남도 주인(南道主人)이라고 일컬으면서 중하게 대하였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곧바로 좌수사(左水使)에 복직되었다. 이에 부세(賦稅)를 거두고 무비(武備)를 정돈하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여 영진(營鎭)의 면모를 한층 새롭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부인(母夫人)의 병세(病勢)가 위독해졌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달려가 간호를 하였다. 

 

그러자 통제사(統制使) 유형(柳珩)이 진(鎭)을 버리고 갔다고 탄핵을 하였으므로, 신문을 받고 서생포(西生浦)로 장류(杖流)되고 말았는데, 모부인이 결국 회생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모두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 곧 이어 방환(放還)되어 모친상을 마쳤다.

 

을사년(1605, 선조 38)에 녹훈(錄勳)됨과 동시에 군(君)에 봉해지고 법 규정에 따라 은상(恩賞)을 하사받았으며,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 포도대장(捕盜大將), 화기도감제조(火器都監提調)를 겸하였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공이 건의한 여러 가지 계책이 많이 채택되었다. 

 

그 뒤 얼마 있다가 통제사(統制使)로 나갔는데, 임기가 만료되지 않아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정미년(1607, 선조 40)에 홀호(忽胡 홀자온(忽刺溫) 부족)가 변방을 침입하자, 공을 기용하여 함경도 병마사(咸鏡道兵馬使)로 삼으면서 처음으로 육군대장(陸軍大將)의 직임을 부여하였다.

 

공이 이에 그곳의 풍속에 따라 동요시키지 않고 어루만져 제어하는 한편, 특별 부대의 기병(騎兵)을 창설하고 갑산(甲山)의 성곽을 수선하자 변방의 상황이 크게 안정되었다. 임기를 채우고 나서 돌아와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경술년(1610, 광해군 2)에 또 탄핵을 받고 체직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종기를 앓으며 오래도록 낫지 않다가 7월 2일에 이르러 생을 마치니, 수(壽)가 49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관례에 따라 제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그 뒤 10월 14일에 예장(禮葬)을 하였는데, 조야(朝野)에서 모두 공이 일찍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본래 신라(新羅)의 원신(元臣)인 이 알평(李謁平)의 후예이다. 고려(高麗) 초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우칭(禹偁)이 부마(駙馬)로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졌는데, 이로부터 재령 이씨가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후세에 이르러 청도(淸道)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하는 벌족(閥族)이 되었다. 

 

증조부 모(某)는 제용감 정(濟用監正)이고, 조부 모는 부령 부사(副寧府使)이고, 부친 모는 남해 현령(南海縣令)이었는데, 3세(世) 모두 무과(武科)를 통해 벼슬길에 올랐으며, 특히 부령과 남해는 대를 이어 무과에 장원을 하였다.

 

모친 이씨(李氏)가 가정(嘉靖) 임술년(1562, 명종 17) 9월 1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광릉(廣陵) 이춘남(李春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엄(儼)은 전 평택 현감(平澤縣監)이고 딸은 박위(朴瑋)에게 출가하였다. 엄은 현감 김덕망(金德望)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두었는데 어리다.

 

공은 어린 나이에 모친을 잃었는데, 그럼에도 예법대로 행하면서 거애(擧哀)를 극진히 할 줄을 알았다. 일단 성장해서는 스승 밑에서 학업에 힘을 쏟아 향리의 칭찬이 대단하였다. 공이 비록 무과를 통해 벼슬길에 나서기는 하였지만, 시간이 한가할 때면 마치 유생처럼 서책과 서한(書翰)을 가까이 하곤 하였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후덕스러워 평소의 생활을 보면 신실(信實)한 장자(長者)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일단 변란이 일어나 절조를 세워야 할 상황을 맞게 되면, 신채(神采)가 우뚝 비범하게 드러나면서 언론을 높이 떨치고 일어났으며, 일단 사태를 파악하여 뜻을 결정한 뒤에는 죽음만 있을 뿐 일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요새를 책임진 장수의 신분으로서, 영남과 호남의 군대가 연합작전을 펼칠 수 있게 주선하였고, 강한 왜적들 사이를 출입하면서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에 원균과 이순신 사이에 크게 틈이 벌어졌을 때, 조정에서 친하게 지내게 하려고 애를 썼으나 끝내 화해를 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독 공만은 두 사람 사이에서 공정한 마음가짐으로 처신을 하면서 누구의 편도 들지를 않았으므로 두 사람 모두 공을 중하게 여겼다. 원균이 당초에 공의 계책을 귀담아 들었을 때에는 싸움에서 패하지 않을 수가 있었는데, 급기야 공이 좌수사(左水使)로 옮기고 나서는 원균이 마침내 패몰(敗沒)하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더더욱 이 때문에 공의 공적이 두 장수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건대, 공은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도 않고 높은 자리로 진출할 욕심도 내지 않은 채 외로운 처지에서 홀로 높은 절조를 견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언관(言官)에게 시달림을 당하기도 하면서, 그 훈작(勳爵)과 직질(職秩)이 겨우 효근(孝謹) 정도와 같게 되었을 뿐이었으므로, 식자들이 이를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살펴보건대, 임진(壬辰)ㆍ정유(丁酉)의 왜란에서 왜적을 토벌한 병장들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공에게 비길 만큼 공상(功賞)을 보유하고 시종일관 온전히 해 나가면서 아름다운 명성을 지니게 된 이들은 겨우 한두 명에 불과할 정도이다.

 

그러고 보면 충의(忠義)와 신양(信讓)의 인사에게 결국 보답이 돌아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또한 알 수가 있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멋대로 호기 부리는 이 용기가 있다 하고 / 有驕豪以爲勇
속임수 부리는 이 지혜롭다 하는 세상 / 有譎?以爲智
공은 홀로 그렇게 하지를 않고 / 公獨不然
누차 공적 세워 높은 지위 올랐어라 / 累功以崇位
저들 모두 위태한 시대 안일하게 보냈지만 / 彼皆安其危
이분만은 그 명성 부끄럽지 않았나니 / 此獨名不愧
범처럼 용맹스러운 무신들이여 / 凡百虎臣
나의 이 명을 눈 여겨 볼지어다 / 我銘是視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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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息城君李公墓碑銘 幷序

 

效忠仗義宣武功臣,嘉善大夫三道水軍統制使。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息城君李公諱雲龍之墓。在淸道郡法龜山先塋之下。後二十年。德水李植。採國論徵家牒。敍以銘之曰。壬辰春。倭初發難。嶺南一路先潰。右水使元均。方棄船遁。公時爲玉浦萬戶。抗言曰。使君受國重寄。義當守死封內。此地乃兩湖要衝。無此地則無兩湖也。今吾衆雖敝。猶可保聚。湖南水軍完。可請濟師。遏截見乃梁。使賊不得過巨濟以西。則南方事尙可爲。今公捨此欲安之。均怒曰。湖師爾可請來。公曰。使君命某。安敢辭。但栗浦萬戶李英男。素識彼帥。可使也。均從之。公卽與永登浦萬戶禹致績詣巨濟。與縣令金俊民誓天討賊。下海瞭候。英男至湖南。左水使李舜臣果引兵來。均旣遣使。猶懼不濟。引所部。向南海洋中。遇湖師。慙而還。是年五月初十日。公會兵玉浦洋擊賊。賊走登岸。燒其船五十艘。又戰於永登洋。燒十餘艘。是夕。傳報 大駕西狩。一軍皆泣。湖師歸。均又欲遁。公力諫止。獨糾兵往來水陸。以遏賊勢。未幾。復會湖師。進擊泗川賊。發大砲破其樓船。賊大奔。湖南右水使李億祺亦來會。兵勢稍振。六月。擊鎭海賊。賊四面合圍。大酋坐瓦屋樓船。幡幢帆綷。絢彩照海。觀者眩惑。公與致績。終日搏戰。破其樓船。賊衆蒼皇。溺水死者無算。日昏。士卒倦。公促戰益急。周鐵索掣賊船。至洋中覆之。賊大敗。到曉乃止。七月。賊數百艘。欲踰見乃梁。兵勢尤張。公謀於所部。接鋒佯退。引至外洋合擊之。砲火沸海。賊衆大殲。波濤爲赤。又戰于安骨浦。破三十艘。自是賊不敢入內洋。兩湖運路無壅。時元均或泊露梁。或往南海。惟視湖師進退。專以公等置前列。及公等戰勝。輒來收其賊資。勘功 啓聞。南海縣監奇孝謹。引船先走。專以酒肉㗖均。均常佑之。公皆不以介意。李舜臣由此惡均而賢公。秋。進陣加德浦。遂薄釜山賊。賊據寨不敢戰。明年。遷熊川縣監。舜臣始爲水軍統制使。列其功於體府。且欲擧而自代。乙未。賞加通政階。丙申。移拜左水使。屯鹽浦。招集陷賊民丁。大修戰艦。倭將淸政。遣卓姓副將致饋遺。且問譯者曰。聞一名將自右道移來。此其是耶。意甚憚之。丁酉夏。元均敗死。諸浦失守。賊遂入兩湖。公承 朝命。舍舟趨陸。戰于永川蒼巖之野。賊因此不得東。冬。天兵圍道山。公自大王巖進舟挾擊。天兵退。公亦退。明年秋。天兵再擧。公捕賊生口。先知關伯已死。整兵追擊歸賊。回兵釜山。復舊水營。募民設屯。修築城池。軍食亦饒。冬。被劾遞。體察使李德馨辟致幕下。每事咨決。稱爲南道主人。旋復左水使。益務征繕。營鎭益新。未幾。聞母夫人疾革。亟往省之。統制使柳珩。劾其棄鎭。被追究杖流西生浦。母夫人果不起。人皆冤之。尋放還終喪。乙巳。錄勳封君。 賜賚如法。兼都摠府副摠管,捕盜大將,火器提調。加備邊司堂上。設施方略。多見採用。俄出統制使。秩未滿。被劾遞。丁未。忽胡侵邊。起公咸鏡道兵馬使。始任陸軍大將。因俗撫馭。創別隊騎兵。修甲山城。邊情大安。秩滿。還拜忠淸水使。明年庚戌。又被劾遞還家。病腫久不治。七月二日卒。壽四十九。訃聞。 贈祭如例。十月十四日。禮葬。朝野咸惜其早終。公本新羅元臣李謁平之胄。高麗初。門下侍中禹偁。以駙馬封載寧君。於是有載寧李氏。後世徙家淸道。世有官閥。曾祖某。濟用僉正。祖某。富寧府使。考某。南海縣令。三世皆以武進。富寧,南海。世魁武科。妣李氏。嘉靖壬戌九月十六日。生公。公娶廣陵李春男女。生一男一女。男儼。前平澤縣監。女適朴瑋。儼娶縣監金德望女。有女幼。公幼失恃。能知執禮致哀。旣長。從師力學。甚得鄕譽。雖從武擧閑。時輒親書冊書翰如儒生。天資和厚。平居。恂恂然長者。及莅變臨節。神采峯穎。言論風發。決機定志。有死無貳。故能以一障之任。合從兩帥。出入強寇間。每戰輒勝。始元均與李舜臣搆大却。朝廷從而比之。終不能和解。獨公平心處兩間。無所左右。故二人皆重之。均初聽用公得不敗。及公移左。均遂敗。人以此益知公之功。不在兩帥下矣。惟其不伐功不干進。孤起介立。以此或爲言官所困。而勳秩纔與孝謹等伍。有識恨焉。然由今日。歷數壬丁之際討倭名將。非不多。其能保功賞全終始。休有令聞。如公比者。僅一二數。則忠義信讓之報。可覩也。銘曰。

有驕豪以爲勇。有譎誑以爲智。公獨不然。累功以崇位。彼皆安其危。此獨名不愧。凡百虎臣。我銘是視。 <끝> 

 

택당집 > 澤堂先生集卷之十 / 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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効忠仗義宣武功臣。嘉善大夫。三道水軍統制使息城君。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李公墓誌銘。幷序

 

손기양 찬(孫起陽 撰)

 

公諱雲龍字景見。本新羅元臣李謁平之後。高麗初。門下侍中禹儞以駙馬封載寧君。於是貫以載寧。其後世徙居淸道。世有官閥。曾祖英元濟用僉正。祖友富寧府使。考夢祥南海縣令。三世皆以武進。妣密陽卞氏。以嘉靖壬戌九月十六日生公。幼而雋異。在髫齔。已屹然如成人。早失所怙。而能知執禮致哀。旣長從塾師。力學通經史。萬曆乙酉。投筆捷武擧。丁亥九月除宣傳官。時西厓柳公成龍判兵銓。啓以不擇邊將。關防踈虞。請以年少武弁。才兼文武。他日可堪大任者。先授邊將。試可後不次陞用。公得在其選。己丑正月。除玉浦萬戶。旣莅任。撫愛軍卒。修繕器械。能名藉甚。及瓜軍民控于監司水使。遂以仍任。壬辰變初。釜山諸城相繼陷沒。水使元均欲棄陣遁去。公慷慨抗言曰令公荷國厚恩。受此重寄。當誓心勠力。死守勿去。此地乃湖南之保障。此而不守。是無湖南也。無湖南則其能國乎。願公一衆人心力。堅守疆埸。事若不濟。死亦無愧。今計湖南舟師尙完。公若飛一紙於湖南。則彼必來援。兩師合力。遮截巨濟。則賊必不敢踰見乃梁。公何遽若是。均怒曰湖南舟師。君可請來。公曰死不敢辭。但吾與李舜臣。雖有一時共事之誼。而栗浦權管李英男素相善可遣也。乃手書帖付英男發去。均猶懼不濟。移船向南海。公獨與永登萬戶禹致績入巨濟。見主守金俊民。三人相與誓天討賊。遂下海至見乃梁。以待援師。翌日均果與湖師偕到松密浦。盖其走路遇援師而還也。厥明兩師到玉浦洋。遇賊奮擊。賊不能支。舍舟而陸。燒碎四五十艘。盡收其器仗。又戰永登洋。燒破十餘艘。乃五月初七日也。其夕有大駕西狩報。一軍號泣散去。均又欲遁去。公責以忠義。極力援止。倡合殘師。往來於泗川固城之間。水陸遮截。使賊不敢西向。均駐泊于露梁。惟以湖師去就爲進退之計。未幾湖師復來。合進于昆陽前洋。遇零賊輒擊破之。至泗川洋。賊多設帳幕。幡幢眩耀。公身先督戰。擒賊酋而奪其馬。至唐浦洋。賊於大船上起層樓。擁以紅綃帳。我師憚不敢進。公促櫓先登。以火炮正中層樓。賊酋登岸走。公於船上連射。殺三賊。明日湖南右水使李億祺率師來會海上。兵勢益振。六月初五日。三師進至鎭海洋。賊船處處簇擁。起層樓上作瓦屋者三艦。粉碧照耀。旗幟帆檣。極其焜晃。令人神?。公與禹致績督諸船俱進。終日力戰。夕賊氣挫欲遁去。我師以地字炮中其層樓。三艦皆碎之。賊衆蒼黃赴水死者甚衆。日將曛。諸船皆欲退。公急呼禹致績曰諸船雖退。吾等不可棄去。以鐵索綴賊船。以火砲焚之。賊汲水救不得。滿船嗷嗷。終夜有聲。溺死者過半。所獲賊物金銀兵仗。不可勝數。是戰也。公四被賊鎗。皆中甲上。故得無傷。七月初十日。賊船百餘艘。欲踰見乃梁。兵勢尤張甚。我師望見皆有懼色。公議于李舜臣。乍接鋒佯退。引至外洋。公曰死生安危。在此一擧。舜臣曰敢不効死。但賊氣甚盛。觀埶進退。公曰我决一死。先犯賊船。公可繼援。卽回船放火砲。中賊船。賊之先鋒少挫。於是湖師乘勝殊死戰。砲聲震天。烟焰蔽海。殺賊數萬人。其溺燒死者亦萬計。海水爲之盡赤。起事以後。是役爲最。越六日又戰于安骨浦。破樓船三十餘艘。自是賊皆登陸遁去。無復揚舲于內洋。巨濟以北稍得安靖。兩湖運路無壅。公之力爲多。是時元均每戰以公等爲前行。及戰捷。輒自收賊資首級。勘功啓聞。南海縣令奇孝謹引船先走。公請論以軍法。均常右之。公曾不以此介意。八月進陣于加德洋。賊之自釜山往來洛江者。見我兵盛。皆捨舟據城不敢動。遂進至釜山洋。賊皆陸而不海。終無闘志。九月師還于昌善島。董造戰船。終歲無賊聲。癸巳三月。公遘疾劇。三師諸將日來問疾。兩道軍人無不悶泣。其得士卒心如此。四月爲熊川縣監。九月體相李公元翼。廵到列陣。問于李統制舜臣曰諸將誰可代公者。舜臣曰其功其人。惟有李某可屬。體相卽召見而慰諭之。乙未四月。陞通政。丙申正月。除東萊縣令右道水陸使。啓留之。俄拜慶尙左水使。四月赴任于包伊浦。六月西生浦之賊撤去。進陣于塩浦。引出附賊人民五百餘戶。用造戰船。丁酉五月。淸正再猘入西生浦。公卽遣人問訊。賊問譯者曰聞一名將自右海來此。此眞是耶。譯者答曰此其副也。淸正哂之。俄以元帥節制。移軍于包伊浦。是年七月。閑山敗績。海師孤弱。元帥令捨舟陸戰。公與權應銖戰于永川倉巖之野敗之。安康以北。得免淸正之禍。十二月楊經理等壓淸正于蔚山。公自延日整舟師。進戰于大王巖。天兵退。公亦退駐于東洋。戊戌秋。唐將再到東京。公以邏船捕賊四生口。知秀吉之已死。十一月。賊皆撤去。公追至釜山洋。尾擊賊船。日以數十計。遂入水營舊城。以息疲兵。己亥重刱營舍。撫集散亡。募民設屯。軍食稍饒。庚子八月風變。公先知海候。令屬鎭之有戰船者。促曳上陸。未幾諸浦舟船多敗壞。而公之所管獨完。九月唐將撤兵歸。公移駐釜山洋。築舊城。冬爲麾下將所誣遆職。辛丑漢陰李公德馨體察嶺南。以公諳熟海路。引爲幕將。咨决事務。因與周觀海上。悉詢傍海營壘及海賊往來之衝。我師遮遏之勢。稱公爲海門主人。盖器之也。俄而啓以爲左水使。公辭不獲。再受鉞。壬寅修繕釜山城。改作軍營及城上門樓。壁壘精彩一變。九月母夫人病革。奔省于淸道。統制使柳珩劾以擅棄陣。十月有拿命。十一月杖流于西生浦。及出獄。母夫人㐫訃至。千里奔哭。旋往配所。人皆甚柳而寃公。癸卯二月。塟先妣于法貴山。先是麾下將金汝礪等上書訟寃。而憲府不報。是年八月赦還。冬奉移先考塟。合窆于法貴山。乙巳正月終制。二月赴朝。策勳封息城君。仍拜都捴府副捴管兼備邊司堂上左捕盜大將火器都監提調。時南北不靖。國家多事。公在備局。遙度賊情。條陳方略。多所裨益。時論韙之。九月有統制之命。仗鉞三載。軍政畢擧。丁未六月。爲當塗所構罷。十月以北塵甚惡。用備局薦除咸鏡南兵使。時北方軍務多缺。戰備蕩然。公除去煩苛。悉從簡易。軍卒之持戰馬者减番。有膽力者聚作別隊。營軍之騎馬者。初不滿千。卽成四千。精銳步卒。亦五百餘。甲山城塹湮壞已久。公因舊鑿築。隍堞重新。又創北靑東南門樓。軍聲大振。非復曩日之凋瘵。己酉冬秩滿。卽拜忠淸水使。又被誣遞。庚戌五月患癰癤。以七月初二日卒。享年纔四十九。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其年十月十四日。葬于法貴山某向之原。從先壠也。公雖家世業武。而夙喜儒學。天姿和厚。恂恂謙退。曾不與羣帥較功爭能。隱然有大樹公之風。而及其莅變臨危。神采英毅。乘機决策。奮不顧身。能以一障之任。合從兩帥。出入強寇間。每戰輒勝。故兩帥皆重之。均之初不僨師以聽公。而及公移左。均遂敗。論者益知公之功焉。惟其不伐其功。不媚權貴。孤起介立。困于譏讒。及至錄勳陞秩。反與奇孝謹等爲伍。可嘅也已。雖然歷數壬丁名將。能以功名自終而令聞如公比者。殆不可多得。則豈非公忠厚退讓之報。有以致之耶。公娶李春男女。乃廣陵著族。男儼有文學。曾中漢城解額。娶光州金氏。禮賓寺參奉德望之女也。長女適朴瑋。生一男幼。儼以某最爲公知。索以墓誌。公之德之勳。非某所敢揄揚。而事契旣重。累辭不獲命。謹次其大槩而係以銘。銘曰。

瓢巖之神佐羅祖。中移載寧享茅土。尙書上將再振聲。世積厥德篤生英。四葉武烈到公發。徂玆海孽亂靡遏。人爭棄甲勢破竹。公提一艦身許國。主帥將去以義激。簡書星馳請援師。倡所與同涕幾揮。層樓畫舫觸之碎。蔽海蠻帆焚又潰。見乃以西豁氛埃。兩湖之完業重恢。沮遏方張繄誰功。元李之勳出于公。凌煙遺像列英雄。鰲山三傑但文彩。誰似干城國以賴。勳名未艾遽嬰痾。有德無年吁柰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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