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상촌 신흠 신도비명(象村申欽神道碑銘)

야촌(1) 2009. 6. 23. 22:24

문정공 상촌 신흠 신도비(文貞公象村申欽神道碑)

 

[시 대]  조선

[연 대]  1699년(숙종25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시도지정문화재 - 경기도기념물 제 145호

[크 기]  높이 215cm, 너비 94cm, 두께 208m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산12-1

[서 체]  해서

[찬자/서자/각자]  이정구(李廷龜) . 심열(沈悅)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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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년(숙종 25년)에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에 건립된 신흠(申欽)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이정구(李廷龜)이고, 서자는 심열(沈悅)이며 제액(題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로썼다.

 

비문에 의하면 신흠(1566∼1628)의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으로,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고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기수(麒壽)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 서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 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 하는 것은 불가하다.”

고하였다.

 

이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 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병조좌랑 등을 역임한 후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 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도 활약했다.

 

1594년에는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1599년에는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되기도 하였다.

 

160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상호군(上護軍)·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인 까닭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의 가죄(加罪)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으며1621년에 사면되었다.1623년(인조 원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 되었다.

 

같은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고,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죽었다.1651년(효종 2) 인조묘정에 배향 되었고,강원도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상촌집(象村集)』·『야언(野言)』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는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 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중기 선조~인조대의 정국 속에 자리했던 신흠의행적과 가계 및 성품을 알 수있을뿐만 아니라 당시 붕당정치의 동향도 살필 수 있는 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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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領議政) 증시(贈諡) 문정(文貞) 신공(申公) 신도비 명 병서

 

숭정(崇禎) 원년(1628, 인조 6) 4월에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전성(塡星)이 태미성(太微星)을 범하였으니 상상(上相)이 액운을 당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해 6월 무오에 이르러 영의정 상촌(象村) 신공(申公)이 성남(城南)의 자택에서 질환으로 졸(卒)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상(上)이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보지 않은 것이 사흘이었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영의정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 충성을 다해 국사를 도왔다.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이 좋은 재상을 잃었으니, 내가 몹시 놀랍고 애통하다. 상장(喪葬)의 비용을 유사(有司)로 하여금 예식(禮式)에 의거하여 하사하게 하라.”

 

하고, 중사(中使)를 보내 부의(賻儀)를 전달하고 도승지(都承旨)를 보내 상주(喪主)를 조문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그리고 왕세자가 궁료(宮僚)를 거느리고 외당(外堂)에서 거애(擧哀)했으며, 얼마 뒤 상차(喪次)에 가서 예법대로 조곡(弔哭)하였다.

 

이에 종백(宗伯)이 예(禮)를 맡고 사도(司徒)가 장례를 맡고 서사(庶司)가 호상(護喪)하여 그해 9월 13일 광주(廣州) 치소(治所) 동쪽 을향(乙向)의 둔덕에 예장(禮葬)하였다. 그리고 태학사(太學士) 장공 유(張公維)가 공의 사행(事行)을 모아 행장을 짓고 역명(易名)의 은전을 내려 줄 것을 청하자 상이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숭종(崇終)의 예(禮)가 완비되었다.

 

공의 윤자(胤子) 도위공(都尉公)이 공의 자서(自敍)를 손수 쓰고 또 공의 세계(世系)와 관서(官序)를 서술하여 묘표(墓表)에 새겼다. 그리고 대총재(大冢宰) 이공 수광(李公睟光)에게 묘지(墓誌)를 받아 광중(壙中)에 묻은 다음 제학(提學)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서 상복을 입고 맨발로 걸어 우리 집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선친의 벗으로는 공만 계시니, 감히 공의 일언(一言)을 받아서 우리 선친의 사적을 길이 세상에 전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아, 공의 자서와 그 글을 도위공이 손수 쓴 것이 이미 태사공(太史公) 부자(父子)의 임종 유촉과 같으니, 공의 사적을 길이 전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찌 변변찮은 나의 글을 받아야 공의 사적을 세상에 길이 전할 수 있으리오. 도리어 내가 공의 비명(碑銘)을 기록하는 이 기회 덕분에 이름을 세상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행장을 살펴보면, 공은 휘는 흠(欽)이고 자는 경숙(敬叔)이다. 신씨(申氏)는 보계(譜系)가 처음에는 곡성현(谷城縣)에서 나왔다.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에 이르러,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평산(平山)을 식읍으로 받으니 드디어 평산을 관향으로 쓰게 되고 대대로 관작(官爵)이 이어졌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휘 효(曉)란 분이 있었는데 정언(正言)으로서 간언을 하다가 임금과 뜻이 맞지 않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81세에 운명하였다. 이분이 바로 공의 5대조(五代祖)이다.

 

고조 휘 자계(自繼)는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이고, 증조 휘 세경(世卿)은 사직서 영(社稷署令) 증 이조 판서(吏曹判書)이고, 조부 휘 영(瑛)은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시호는 이간(夷簡)이고 증 좌찬성(左贊成)이다.

 

부친 휘 승서(承緖)는 일찍 성균관에 들어갔고 벼슬이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에 이르렀으며, 증직(贈職)이 누차 올라 영의정에 이르렀다. 모친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좌참찬(左參贊) 기수(麒壽)의 따님으로, 병인년(1566, 명종21) 정월에 큰 별이 품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 이튿날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용모를 지녔고 눈이 샛별처럼 빛났으며, 어릴 때 노는 것도 범상치가 않았다.

7세에 대부인(大夫人)이 송도(松都)에서 운명하였고 오래지 않아 부친 의정공(議政公)이 또 세상을 떠났는데, 곡읍(哭泣)하는 것이며 상주로서 예(禮)를 갖추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외조부 참찬공(參贊公)이 공을 데려다 기르면서 처음으로 글을 가르쳤는데 총명이 초절(超絶)하여 굳이 과정을 정해 독책하지 않아도 문리가 날로 향상되었다. 공의 외가에는 예전부터 장서가 많았다.

 

공은 방 안에서 고요히 책을 보며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본 뒤에는 상위(象緯)ㆍ율력(律曆)ㆍ산수(算數)ㆍ의술(醫術)ㆍ점복(占卜)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독서의 범위를 넓혀 명성이 크게 알려지니,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많이 내방(來訪)하였다.

 

15세에 청강(淸江) 이공(李公) 휘 제신(濟臣)의 사위가 되었다. 청강은 《주역(周易)》에 밝기로 이름났다.

공이 가르침을 청하여 강독이 겨우 몇 괘(卦)에 이르자 청강이 경탄하며 말하기를,

“노부(老夫)가 사석(師席)을 감당할 수 없다.” 하였다.

 

17, 8세에 장옥(場屋)에 나가 매번 높은 성적으로 뽑히니, 동류들이 감히 따를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삼사(三司)가 율곡(栗谷) 문성공(文成公)을 논핵하는 것이 매우 준엄하였다.

 

공의 외삼촌 송응개(宋應漑)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으면서 탄핵하는 글을 공에게 보여 주었다.

공이 그 글을 보고 말하기를,

“율곡은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분인데 이처럼 공척(攻斥)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송응개는 잠자코 있었고 종자제(從子弟)들이

“공이 율곡의 편을 든다고 이미 비방하는 여론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을유년(1585)에 진사(進士) 제삼명, 생원(生員) 제 팔 명으로 뽑혔고, 병술년(1586)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재명(才名)을 크게 떨쳤으나 집정(執政)이 지난날의 일에 앙심을 품고 공을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임명하였고 이어 경원 훈도(慶源訓導)로 좌천시켰다.

 

그리고 조금 뒤에 광주(廣州)로 자리를 옮겼고 이어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에 제수되었다.

공은 낮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만나는 처지에 따라 언제나 편안한 모습을 보였고 조금도 얼굴빛이나 말로 불평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마저 한 해를 넘기고 파면되어 한강 가의 집에서 독서하며 시사(時事)에 간여하지 않았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사국(史局)에 선임되었고 봉교(奉敎)로 승진하였으며 감찰(監察)로 예천(例遷)하였다. 그리고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었으며, 모종의 일로 파면되었다.

 

임진년(1592)에 왜적이 도성에까지 쳐들어오자 권신(權臣)이 공을 사지(死地)에 떠밀어 놓고자 양재도 찰방(良才道察訪)에 제수하였다. 공은 임명을 받은 날로 부임하니,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대군을 거느리고 뒤따라 이르렀다.

 

공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신립의 군대를 따라 조령(鳥嶺)에 이르렀다.

신립이 패전하자 공은 피신하여 강도(江都)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행재(行在)에 가려 하였다.

 

이때 마침 상국(相國) 정철(鄭澈)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양호(兩湖)의 군사를 통솔하고 있다가 공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병무(兵務)를 모두 위임하니, 처리할 문서가 많고 송사(訟事)가 시끄러웠다.

 

공은 글씨를 잘 쓰고 실무에 익숙한 관리 열 명을 뽑아 일제히 구두로 보고하게 하고 귀로 듣고 손으로 판결하니 모두 적절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시행과 중지 등 조처가 제때를 넘기지 않아 모든 일이 잘 처리되니, 상국이 탄복하였다. 관군과 의병의 사이가 좋지 않기에 공이 글을 지어 효유(曉諭)하니, 의병 쪽 부로(父老)들은 감격하고 관군 쪽의 사나운 장수들은 두려워하여 생각을 바꾸었다.

 

계사년(1593, 선조 26) 봄, 지평(持平)으로 소명을 받고 영유(永柔)의 행궁(行宮)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고 곧바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이때 중국 군사가 나라 안에 가득하고 군사(軍事)의 급보가 빗발치고 있던 터라 자문(咨文)ㆍ주문(奏文)과 같은 공문이 늘 산적하여 있었는데, 공은 좌우로 수응(酬應)하는 것이 민첩하여 성상의 뜻에 맞았다.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칙명(勅命)을 받들고 오자 원접사(遠接使)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공을 종사(從事)로 뽑았다. 갑오년(1594)에는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체포되어 선묘(宣廟)가 친국(親鞫)하였는데 공이 문사랑(問事郞)이 되어 심문하는 것이 상세하고 민첩하니, 선묘가 눈짓으로 국문을 맡겼다. 그리하여 옥사(獄事)가 완결되자 공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송강(松江) 정공(鄭公)이 너무 강직한 성품 때문에 시류(時流)들의 미움을 받아 오다가 몰세(沒世)한 뒤에도 비난을 받고 있었다. 동료가 모종의 일로 송강을 추론(追論)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송강 쪽의 사류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이에 공은 사실을 들어서 자핵(自劾)하였고, 체직되어 사성(司成)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 주청사 서장관(奏請使書狀官)으로 선임되었고 다시 군기시 정(軍器寺正)에 제수되었으며, 어사(御史)로 함경도를 순안(巡按)하면서 폐단과 불법을 적발하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소생하였다. 이에 정부가 천거하여 사인(舍人)에 제수하고 다시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공을 종사(從事)로 선임하였다. 호서(湖西)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거병하여 모반했다가 이내 패전하여 주살되었다. 도원수가 그 잔당을 섬멸하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위협을 받아 따른 것은 죄를 다스리지 않는 법입니다.” 하였다.

 

이에 도원수가 크게 깨닫고 즉시 공을 보내 조정에 보고하니, 상(上)이 윤허하는 한편 공에게 죄상을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단지 죄가 심한 자 7명만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관대하게 처벌하니, 군민(軍民)이 크게 안도하였다.

 

얼마 뒤 평산(平山)ㆍ양주(楊州)의 수령에 제수되었으나 대신(大臣)이 사명(辭命)을 맡아야 한다는 이유로 번번이 계청(啓請)하여 조정에 머물러 두었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시강원 겸필선(侍講院兼弼善)을 겸임하고 천거를 받고 옥당(玉堂)에 들어가 교리(校理), 응교(應敎)가 되었다.

 

기해년(1599)에 사인(舍人), 교리로 자리를 옮기고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체직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고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임하였다.

 

경자 년(1600)에 도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 구례(舊例)에 승선(承宣)은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를 겸임할 수 없게 되어 있었는데 대신이 특별히 청하여 체직하지 말게 하였다. 이때부터 누차 제수될 때마다 겸대(兼帶)하여 이조ㆍ예조ㆍ병조의 참의(參議)ㆍ참지(參知)를 역임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 34)에 부제학(副提學)에 제수되었다. 상이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고경(古經) 《주역》을 등사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등사하여 차자(箚子)와 함께 올리면서 임금이 하늘의 뜻을 본받아 강건하게 실행하는 도리를 자세히 진달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상이 또 《춘추(春秋)》 삼전(三傳)을 찬집하여 한 질로 간행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춘추》에서 복수를 중시하는 대의(大義)를 강조하니, 상이 특별히 승질(陞秩)을 명하여 가납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였다.

 

임인년(1602)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고, 계묘년(1603)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임하고 다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다.

 

모두 다섯 번 부제학이 되고 한 번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는데,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동국(東國)의 시문(詩文)을 선집(選集)할 때와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주역》을 교정하게 할 때 공이 모두 참여하였다.

 

을사년(1605)에 도승지(都承旨)로부터 품계가 올라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제수되었다.

병오년(1606, 선조 39)에 주량(朱梁)이 조사(詔使)로 올 때 공이 의주 영위사(義州迎慰使)로 갔고, 조정에 돌아오자 특명으로 《황화집(皇華集)》 서(序)를 지었다.

 

얼마 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제수되니, 사람들은 ‘공은 유아(儒雅)로 무사(武事)를 익히지 않았다.’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공의 모든 조처가 타당하여 책상에는 남은 문서가 없고 문에는 사사로운 청탁이 끊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병으로 체직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어떤 사람이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선조(宣祖)의 아버지 이초(李岧)을 추숭(追崇)하길 청하니, 간사한 재상이 상에게 아첨하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공의 뜻을 물었다.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이에 대해서는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어찌 이론을 낼 수 있겠는가.”

하니, 물은 사람이 기색이 저상되어 떠났고, 그 일이 중지되었다.

 

무신년(1608)에 경기관찰사를 겸임하였다. 선조(宣祖)가 승하(昇遐)하자 공이 예문관 제학으로서 소명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이 일로 특별히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판윤(判尹), 지의금부(知義禁府)에 제수되었다.

 

임해(臨海 이진(李珒)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공이 거듭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기유년(1609)에 예조판서에 제수되고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갔다. 복명(復命)하고 다시 예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세자책봉(世子冊封)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이유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노비를 하사받았다.

 

광해가 장차 신궁(新宮)에 옮겨 갈 때 사도(邪道)를 써서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시켜 경(經)을 외우게 하려 했는데, 공이

“왕자(王者)는 불경(不經)한 일을 해서 후세에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며 힘써 간쟁하여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상 항복(李相 恒福)과 함께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수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사형수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옥중에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을 끼고 역모(逆謀)했다고 거짓으로 고변(告變)했다.

 

이에 죄안(罪案)을 만들어 옥사가 이루어지자 연흥부원군은 사사(賜死)되고 그의 두 아들과 사위 한 명까지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초사(招辭)가 조정 사대부들에게 미치자 조야(朝野)가 놀라 두려워하였다.

 

당초에 선조(宣祖)가 재신(宰臣) 일곱 명에게 유교(遺敎)를 내리기를,

“사생(死生)은 운명에 달린 것이니, 성인도 면치 못한 것이다. 다만 대군(大君)이 아직 어리고 장성하지 않았으니, 제공들은 애호(愛護)하고 부지해 주길 바란다. 감히 이 일을 부탁하노라.”

하였으니, 성심(聖心)에 이런 변고가 있을 줄 미리 알았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흉도(兇徒)가 유교칠신(遺敎七臣)이 즉시 해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논죄하여 공의 성명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다. 또 정협(鄭浹)이란 자가 체포되었는데 간사한 자들이 음밀(陰密)히 그를 유혹하여 마구 무고한 사람들의 이름을 끌어넣으니, 조정의 공경(公卿)들이 줄줄이 금옥(禁獄)에 들어갔다.

 

공은 심문을 받으면서 말이 매우 이치에 맞고 솔직하니, 공을 미워하는 자들도 가해하지는 못하였다.

공은 석방되어 나와 김포(金浦)의 선영 아래로 돌아가서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유식(遊息)할 곳으로 삼았다. 집에는 감지와(坎止窩)란 이름을 붙이고 방 안에는 서사(書史)를 쌓아 놓고 이치를 탐구하며 자적(自適)하였다.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이이첨 등이 자전(慈殿)을 폐출할 음모를 꾸며 영창대군을 죽이고 연흥부원군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한 다음 드디어 유교칠신에게 죄를 씌웠다. 금부(禁府) 나졸이 공을 압송하여 춘천(春川)으로 찬축(竄逐)하였다.

 

공은 배소(配所)에 이르러 우거하는 집에 여암(旅菴)이란 이름을 붙였다. 공은 적거(謫居) 5년 동안 호정(戶庭)을 밟지 않았다. 신유 년(1621)에 석방되어 김포로 돌아왔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봄, 우리 상이 거의(擧義)하여 반정(反正)하고 금고(禁錮)의 명부에 든 이름을 씻어 없애고 원로들을 모두 조정에 불러들였다. 공은 조정에 들어가자 즉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고 양관(兩館)의 대제학을 겸임하였는데, 인물의 전형이 공명(公明)하여 조정의 관직이 면모를 일신하였다.

 

7월에 우의정(右議政)에 제수되었다. 때마침 변옥(變獄)을 보고한 일이 있었다. 상이 공을 불러 옥사에 관해 물으니, 공이 ‘새로 즉위하신 때 응당 형벌보다 덕화(德化)를 우선해야 한다.’라는 것을 힘써 진달하니, 상이 가납하여 마침내 옥사가 무마되었다.

 

이에 석방된 사람이 공의 집에 찾아와 사례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위했을 뿐이오. 어찌 그대를 위해 했겠소.” 하였다.

 

겨울에 차자를 올려 치도(治道)를 논하고, 일찍 세자(世子)를 세울 것을 청하는 한편 〈원춘사잠(元春四箴)〉을 바치니, 그 글에서

“조정에서 집무할 때나 한가히 거처할 때나 학문에 힘쓰고 건도(乾道)를 본받으라.〔臨朝燕居 進學體乾〕”

하였다. 이에 상이 가상히 여기고 선온(宣醞)하고 표범 가죽을 하사하였다.

 

갑자년(1624)에 역적 이괄(李适)이 거병(擧兵)하여 모반을 일으키니, 상이 공에게 따로 자전(慈殿)을 호위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갈 것을 명하였다. 공이 청대(請對)하여 분조(分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힘써 진달하여 마침내 상이 자전과 함께 공주(公州)로 행행(行幸)하였다.

 

난리가 평정되고 조정에 돌아와 상이 호종(扈從)했던 신하들을 책훈(策勳)하고자 하니, 공이 불가하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이름이 누차 역적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백관들이 합문(閤門)에 엎드려 멀리 찬축(竄逐)하여 앙화의 싹을 미리 막을 것을 주청하였으나 상이 차마 윤허하지 못하였다.

 

공이 동료 재상에게 말하기를,

“조정에서 의논하여 국법을 집행하는 것도 불가한 것은 아니나 지친(至親)을 용서하는 것도 성덕(盛德)이 됩니다.”

하니, 찬성(贊成) 이귀(李貴)가 공석(公席)에서 공을 욕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하관(下官)이 대신을 모욕하여 국가의 체통을 손상하였다’라는 것을 말하고 즉시 병을 이유로 사퇴를 청하였다.

 

상이 그 현장에 있던 두 재신(宰臣)을 불러 사실을 물으니, 자세히 대답하지 않았다. 상이 몹시 질책하는 하교를 내리고 이귀와 두 재신을 체직하고 누차 사신을 보내 공을 위로하고 만류하였다.

 

이에 공이 다시 차자를 올려 세 신하에 대한 견책을 중지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세 신하를 모두 서용(敍用)하였으니, 역시 공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사헌부가 범법(犯法)한 자전(慈殿)의 하인을 구금하여 심문하자 상이 대관(臺官)을 모두 체직하고자 하였다.

 

또 옥당(玉堂)이 한 재신을 논핵하자 상이 편당에서 나온 논의가 아닌가 의심하여 모두 찬축하려 하였다.

이에 공이 경우에 따라 차자로 문제를 거론하니, 상이 모두 공의 뜻을 따랐다.

 

을축년(1625)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졸(卒)하자 상이 자식의 도리로 삼년상(三年喪)을 하고자 하고 또 친히 상주(喪主)가 되고자 하였다. 공이 동료 재상과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엎드려 힘써 간쟁(諫爭)하니, 상이 모두 예신(禮臣)의 의론에 따랐다.

 

병인년(1626, 인조 4)의 별시(別試)에 공이 고관(考官)이 되어 시험을 관장하게 되었다.

공의 아들과 손자가 모두 향시(鄕試)에 합격했던 터라 시험에 응시하므로 공은 인혐(引嫌)하여 고사(固辭)하니, 상이

“전시(殿試)에는 친혐(親嫌)이 없다.”

라고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마지못해 시험장에 들어가 성적을 매겼으나 가타부타 견해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과거의 방(榜)이 나붙자 공의 아들 익전(翊全)과 손자 면(冕)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을 뽑았다고 하였는데, 마침 한 고관의 아들이 시한(時限)을 넘겨 답장을 낸 것이 문제가 되자 대관(臺官)이 근거 없는 의론을 가지고 고관을 모두 파면하고 일방(一榜)의 합격을 모두 취소할 것을 청하니, 사람들이 모두 억울한 일이라 하였다.

 

이에 공이 세 차례 차자를 올려 면직(免職)을 청하니, 상이 재차 승지를 보내 수찰(手札)로 전유(傳諭)하기를,

“경이 입조(立朝)한 지 40년 동안 한 점 조그만 하자도 없었다. 이제 내가 만약 경의 뜻에 따른다면 사람들은 내가 경을 의심한다고 할 것이고 경이 만약 시종 사퇴하고자 하면 사람들은 경이 나에게 유감이 있다고 할 터이니, 모쪼록 나의 뜻을 잘 헤아리라.”하였다.

 

그러나 공이 더욱 강경하게 사퇴를 청하자 상이 마지못해 재상의 자리에서 해임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제수하였다. 공이 진정(陳情)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묘년(1627)에 노적(奴賊)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났다. 공은 좌의정 겸 세자부(左議政兼世子傅)로서 세자를 모시고 분조(分朝)하여 전주(全州)로 갔다. 가는 도중에 재차 차자를 올려 적을 토벌하는 데 편의(便宜)한 계책을 진달하니, 모두 비답이 내렸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협심하여 세자를 보호하는 한편 군민(軍民)의 폐해와 고충을 조목조목 상주(上奏)하여 고쳐진 것이 많으니, 양호(兩湖)의 민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3월에 세자를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니, 상이 선온(宣醞)하고 구마(廏馬)와 고비(臯比)를 하사하였다.

 

4월에 호가(扈駕)하여 환도(還都)하였다. 당시 적의 남은 무리들이 의주(義州)에 머물러 주둔하고 있었다.

공이 건의하기를,

“적이 우리 국경 안에 남아 있는데 장수와 사졸들은 머뭇거리고 있으니, 부원수(副元帥) 이하를 책려(策勵)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뒤를 추격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 약속을 어긴 것을 책망하소서.”

하니, 적이 우리의 말을 따라 군사를 거두고 돌아갔다.

 

이에 공은 ‘다른 지역의 곡식을 옮겨 유민(遺民)을 구휼하고 곡식 종자와 논밭을 갈 소를 지급하여 변방의 백성들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게 해 주는 한편, 팔도에 영장(營將)을 설치하여 속오군(束伍軍)을 조련하고 안주(安州), 황주(黃州) 두 고을의 성곽과 무기를 보수함으로써 기필코 지킬 계책을 삼을 것’을 건청(建請)하였다.

 

7월에 영의정, 세자사(世子師)로 승진하였다. 병란이 끝난 뒤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물자가 모두 바닥났다. 공이 ‘관직에 있는 자들이 저마다 포(布)를 내어 군수(軍需)를 돕고 서포(絮布)를 내어 서도(西道) 백성들 중 옷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여 많은 백성들이 그로써 살 수 있었다.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의하여 난(亂)을 일으키려 했는데 공이 그 실상을 얼핏 듣고 비국(備局)에 앉아 두 대장을 급히 부르고 성 밖에 군사를 숨겼다가 기회를 틈타 체포하고 심문하니, 형벌을 받은 자가 50여 명이었다.

 

죄수들의 공초(供招)가 구름처럼 많이 쌓였으나 공은 신속하게 판결하였는데, 마치 현장을 생생히 본 것처럼 터럭만큼의 의심스러운 것이 없었다. 이에 중외(中外)의 백성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옥사가 끝나자 상이 명하여 녹공(錄功)이 추관(推官)들에게까지 미쳤으나 공과 동료 재상은 굳이 사양하고 단지 안마(鞍馬)만 받았다. 무릇 조청(朝請)이 있을 때면 반드시 백료(百僚)들보다 먼저 입궐하였다.

 

비국의 모임에는 늘 아침 일찍 갔으며, 말하기를,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인신(人臣)이 신명(身命)을 바쳐야 할 따름이다.”하였다.

 

공이 등창을 앓을 때 마침 노적(虜賊) 사신이 관사(館舍)에 와 있었는데 그들의 요구에 따라 응접하는 것이 모두 국가의 큰 이해에 관계되었다. 공이 애써 병든 몸을 이끌고 나가 임무를 보고 가마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비국의 낭관(郞官)이 상의 하교를 받고 공의 의견을 받으러 왔는데 공이 입으로 몇 줄을 불러 시자(侍者)로 하여금 쓰게 하고는 그만 기운이 곤핍(困乏)하여 소리가 목구멍에서 가물거리며 말하기를,

“노적 사신은 갔는가? 한재(旱災)가 이와 같으니, 우리들의 죄이다. 내가 죽어 하늘이 비를 내린다면 여한이 없다.”하고는 그만 일어나지 못하니, 춘추가 63세이다.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고려 때의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이고 절도사(節度使) 증 영의정 제신(濟臣)의 따님으로, 공과 동년생(同年生)이다. 15세에 공에게 시집와서 부도(婦道)를 잘 지키고 집안을 잘 꾸리니, 종족이 칭찬하였다.

 

성품은 청렴하고 개결(介潔)하여 불의(不義)한 것은 터럭만큼도 취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재물을 빌려 주면 부인은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 엄친(嚴親)을 섬길 때에 이런 일이 없었고 자라서는 지아비를 엄친과 같이 섬기고 있으니, 어찌 이익 때문에 우리 집안 범절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하였다.

 

자신이 쓰는 물품은 매우 검약하여 좋은 비단은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고, 자녀가 혹 그런 옷을 지어 바치면 즉시 상자에 넣고는

“옷이 사람보다 아름다운 것을 나는 본래 좋아하지 않는다.”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 5)에 공이 화를 당하자 부인은 죄수처럼 머리는 산발하고 얼굴은 검은색을 띤 채 뜰에서 거적을 깔고 잤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에 모후(母后)를 폐위하자는 정청(庭請)이 있고, 이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아들 도위공이 거취를 묻자 부인이 말하기를,

“내 비록 근심스럽고 두렵긴 하지만 어찌 너로 하여금 불의(不義)한 일을 하게 할 수 있겠느냐.”

하였으니, 그 대의(大誼)에 통달한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이 늘 말하기를,

“내가 세상일에 서툰 사람으로서 검약하게 살며 큰 오점이 없을 수 있었던 것은 내조 덕분이다.”하였다.

 

부인은 계해년(1623, 광해군 15) 정월에 김포(金浦)의 집에서 졸(卒)하니, 향년 58세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뒤 묘소를 옮겨 광주(廣州)의 새로 터를 잡은 산,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모두 2남 5녀를 두었다.

 

장남 익성(翊聖)은 정숙옹주(貞淑翁主)를 아내로 맞아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고, 둘째 익전(翊全)은 현감(縣監) 조창원(趙昌遠)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다. 장녀는 현감 박호(朴濠)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문과에 급제하고 좌랑(佐郞)인 조계원(趙啓遠)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는 전적(典籍) 박의(朴漪)에게 출가하였고, 넷째는 시직(侍直) 강문성(姜文星)에게 출가하였고, 다섯째는 참봉 이욱(李旭)에게 출가하였다.

 

동양위는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면(冕)은 생원이며 장원(壯元)하였고, 둘째는 승(昇)이고, 셋째는 경(炅)이고, 넷째는 최(最)이고, 다섯째는 향(晑)이다. 장녀는 홍명하(洪命夏)에게 출가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익전은 1남을 낳았다.

 

박호는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세모(世模), 세해(世楷)이며, 장녀는 이수인(李壽仁)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임일유(林一儒)에게 출가하였다. 조계원은 3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석(晉錫), 귀석(龜錫), 희석(禧錫)이며, 딸은 어리다.

 

박의는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강문생은 3녀를 낳고 이욱은 2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증손은 남녀 모두 약간 명이다.

 

공은 천자(天資)가 초매(超邁)하고 기도(器度)가 화아(華雅)하였으며 성품은 침중 간결(簡潔)하고 영준(英俊) 조숙하였다. 어릴 때 부모를 잃어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었으나 스스로 성현의 서책에서 스승을 얻어 공부하였다.

 

평거(平居)에는 엄연(儼然)하여 경(敬)으로써 자신을 다스렸으며,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가묘(家廟)에 배알한 다음 옷자락을 여미고 단정히 앉았다. 그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고 명성을 가까이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며, 훈고(訓詁)와 전주(箋註)에 얽매이지 않았다.

 

특히 정 백자(程伯子 정호(程顥))와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의 풍모를 흠모하였다. 만년에 폐축(廢逐)되어서는 더욱 세상일을 멀리하고 경전(經傳)에 침잠하였다. 《경세서(經世書)》를 읽다가 홀연 개오(開悟)하여 혼자서 《선천관규(先天管窺)》를 지었는데 후일에 《소자전서(邵子全書)》를 얻어 맞추어 보았더니 어긋남이 없었으니, 성명(性命)의 이치에 있어서는 홀로 터득한 정밀한 조예가 이와 같았다.

 

인물 감식(鑑識)이 밝고 통투(通透)하기가 당세에 초절(超絶)하여 사람에 있어서는 좀처럼 허여하는 이가 드물었으며, 속무(俗務)에 힘쓰고 세리(勢利)를 좇는 자를 보면 더러운 물건을 보듯이 멀리하였다.

 

그러나 흉금이 시원스럽고 성부(城府)가 없어 남의 과오를 마음속에 담아 둔 적이 없었다.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터놓고 반갑게 대화를 나누었으며, 한번 벗으로 사귀면 종신토록 의리를 변치 않았다. 동기간의 우애와 친족에 대한 애정은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과부가 된 누님과 30년 동안 함께 살면서 어머니처럼 섬겨 가정에서 헐뜯는 말이 없었다.

왕실과 혼인을 맺고부터는 늘 더욱 근외(謹畏)하였다. 도위공이 친영(親迎)할 때 옛집이 비좁고 누추하였다. 그래서 해관(該官)이 관례에 따라 수선(修繕)해 주겠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집이 비록 허름하지만 족히 행례(行禮)할 수 있다.”

하고, 끝내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았다. 침실이 기울어질 지경이 되어 가인(家人)이 수리할 것을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국사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집을 돌보겠는가.”하였다.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기욕(嗜慾)이 전혀 없었으며 가사(家事)로 마음을 쓴 적이 없어 산나물 반찬에 거친 현미밥을 먹었으나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남의 집에 인사하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공무를 마치고 퇴근하여 문을 닫고 집 안에 있으면 쓸쓸한 한 한사(寒士)일 뿐이었다.

 

환난을 만나서는 조리(操履)를 더욱 견고히 했고, 현달해서는 분수에 넘쳐서 화를 초래함을 더욱 경계했고, 경악(經幄)에서는 부주(敷奏)가 명쾌했고, 묘당(廟堂)에서는 정사에 힘을 써서 조정의 과오를 보면 언제나 기탄없이 생각을 다 말했고 좋은 계책을 얻으면 반드시 건청(建請)하여 시행하도록 했다.

 

인재를 사랑하여 장려하고 도와준 사람이 많았으며,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힘써 단점을 덮어 주었다. 늘 말하기를,

“전한(前漢)이 융성한 까닭은 기풍이 돈독하여 남의 과오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데 있다.”

하였다. 또 함부로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법을 본받으면 그것으로도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하였다.

 

이런 까닭에 반정(反正) 당초에 어진 인재가 조정에 가득하여 거침없는 의론을 내며 서로 기세가 맞부딪쳤으나 공이 그 사이에서 화락하고 조용한 풍모로 잘 조정하여 대체(大體)를 지키는 데 힘쓰고 작은 이익을 노려 일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무릇 일을 시행할 때는 반드시 충후(忠厚)에 근본을 두고 과격한 주장을 억눌러 사론(士論)이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하였으며, 공은 묵묵히 교화의 추기(樞機)를 잡아 부박(浮薄)한 시속(時俗)을 진정시켰다.

 

이에 어진 이들은 든든히 믿는 바가 있어 기개를 더하고 어질지 못한 이들은 꺼리는 바가 있어 자취를 거두었으니, 공의 재상으로서의 사업은 참으로 훌륭하다 하겠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인재는 세상에 드물게 나오고, 나오더라도 지우(知遇)를 입지 못하고, 지우을 입더라도 쓰이지 못하고, 쓰이더라도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늘이 공에게 재능을 부여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묘(宣廟) 때 지우를 입었으나 재능을 끝까지 다 쓰지 못한 것도 하늘의 뜻이었고, 혼조(昏朝)에는 운수가 막혔다가 성명(聖明)의 시대에 다시 지우를 입은 것도 하늘의 뜻이었다.

 

또한 깊은 지우를 입고 전적인 신임을 받으며 쓰였으나 수명을 길게 주지 않아 오래 쓰이지 못하게 한 것도 하늘의 뜻이다. 이는 실로 사민(斯民)의 불행으로 고금에 모두 한스러운 일이니, 어찌 붕우들만이 사사로이 통탄할 뿐이겠는가.

 

공의 문장은 육경(六經)에 근본 하였고 붓을 잡으면 즉시 글을 이루어 전혀 구상하지 않은 것 같으나 노성(老成)하고 전중(典重)하여 조금의 하자도 없었다. 사람들은 공의 문(文)이 시(詩)보다 낫다고들 한다.

 

그러나 시는 더욱 충담(沖澹)하고 아취가 있어 전혀 고인의 시를 모방한 흔적이 없으니, 역시 시가 문보다 낫다고도 한다. 요컨대 공의 시와 문은 모두 양한(兩漢)의 경지에 이르러 그대로 한 대가(大家)인 것이다.

 

공은 젊을 때에는 현헌(玄軒)이란 호를 썼고, 또 상촌(象村)이란 호를 썼고, 만년에는 현옹(玄翁)이란 호를 썼고, 전리(田里)로 돌아간 뒤에는 방옹(放翁)이라 일컬었고, 적소(謫所)에서는 여암(旅菴)이란 편액을 걸었다. 백사(白沙) 이 상공(李相公)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글을 짓고 〈현옹자서(玄翁自敍)〉라 명명하였으니, 공의 심사(心事)는 대략 여기에 담겨 있다.

 

저술로는 《상촌집(象村集)》 33책, 《화도시(和陶詩)》 3책, 《구정록(求正錄)》 1책, 《선천관규(先天管窺)》 1책이 세상에 전한다. 옛날에 공이 금릉(金陵=김포의 이칭)에서 와서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문장으로 재상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제는 모두 늙었구려. 이 세상을 둘러보매 누가 지기(知己)이겠소. 나의 시는 그대가 선집(選集)하구려. 그대의 원고는 내가 서문을 쓰리다.”

하였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대가 없으면 누가 나의 글을 정리하겠소? 그러나 나는 몹시 노쇠했으니 뒤에 남아 할 일을 그대가 맡아 주구려.”하였다.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았는데 공은 이미 고인이 되고 말았으니, 내가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으리오.

 

아, 내가 불행히도 오래 살아 벗들의 명(銘)을 쓴 것이 많기에 매양 붓을 잡을 때면 한바탕 눈물을 흘리곤 하였는데, 이제 공이 먼저 나를 버리고 떠나 내가 공의 무덤에 새길 명을 짓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도리어 나의 다행일 수도 있다.

 

나는 공과 결발(結髮)할 때부터 벗으로 사귀어 백발이 될 때까지 늘 한결같았고 진퇴와 영욕도 대략 서로 같았다. 그런데 이제 또 공의 평생을 서술하니, 구원(九原)에 있는 공과 대면하여 얘기를 나누는 것만 같아 늘 공을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을 달랠 만하다. 이에 눈물을 훔치며 명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인재를 내려 보내니 / 維天降材
실로 세상에 쓰이기 위한 것 / 寔爲世庸

 

그러나 혹 현회가 다르니 / 而或顯晦
역시 만난 시대에 달렸어라 / 亦繫其逢

 

공은 모든 재능 겸비하여 / 公稟全才
우뚝이 조숙한 면모 보였지 / 卓然早成

 

문장 짓고 덕성 쌓는 공부 / 修辭立德
굳이 독책할 필요도 없었어라 / 不待課程

 

한마디 말 정도를 지키니 / 一言秉正
간사한 무리 시끄럽게 비난해 / 群咻以咈

 

먼 변방으로 공을 축출하니 / 擠之遠惡
사림의 여론이 더욱 울울했네. / 士望愈鬱

 

공의 재능을 강하에다 비유하면 / 譬彼江河
마치 그 둑을 틔워 놓은 듯이 / 若決其防

 

덕행과 정사 / 德行政事
경술과 문장 / 經術文章

 

그 어느 것이든 출중하였으니 / 隨遇拔萃
시기하는 자도 흠잡을 수 없었지 / 忌者莫疵

 

공의 맑고도 빼어난 명망은 / 淸名儁望
당시에 존중을 받아 모범이 됐어라 / 羽儀于時

 

중도에 재앙의 그물에 걸려들었으나 / 中罹禍網
곤궁한 상황에서 더욱 여유로워 / 處困益亨

 

시서를 읽으며 스스로 즐기니 / 詩書自娛
이에 그 명성 크게 떨쳤도다. / 大振厥聲

 

운수가 마침 밝은 새 시대 만나 / 運屬昌明
어진 이들이 성상을 보필할 제 / 群賢勵翼

 

공이 적소(謫所)로부터 오니 / 公來自謫
조야의 사람들이 손을 이마에 얹었고 / 朝野手額

 

이조판서와 대제학의 / 冢宰文衡
자리를 비워 두었다가 주었으며 / 虛位以授

 

이윽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 / 俄進端揆
조정의 수장이 되어서는 / 爲朝德首

 

말보다 먼저 몸소 모범을 보이니 / 不言以躬
백관들이 모두 공경하고 본받았어라 / 百僚矜式

 

정치는 관대함에 근본을 두니 / 治本寬大
백성들이 절로 그 혜택 받았고 / 民自受澤

 

밤낮으로 공무에 힘을 쓰니 / 夙夜靖共
성상께서 공의 건강을 염려하셨지 / 上憂公瘁

 

이에 공은 더욱 감격하여 / 公愈感勵
병든 몸으로 일을 보다가 / 輿疾視事

 

재직 중에 숨을 거두니 / 公歿于位
상례를 넘는 예우가 내렸어라 / 禮別故常

 

이미 문정이란 시호 받았으니 / 旣文且貞
백세에 길이 영광이로다. / 百世之光

 

사람들은 수명이 짧다 애석해하지만 / 人惜其短
나는 길이 남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노니 / 我榮其長

 

인생은 본래 한계가 있는 법 / 惟生有涯
오직 아름다운 그 명성 끝이 없어라 / 惟令聞無疆

 

[각주]

 

[주01] 전성(塡星)이 태미성(太微星)을 범하였으니 :

전성은 토성(土星)의 이칭이다. 토성이 28년 주기로 하늘을 한 바퀴 돌면서 해마다 이십팔수(二十八宿) 중의 하나의 안에 들어가서 이십팔수를 다 채워 나간다고 하여 전성이란 이름이 붙었다. 태미성은 삼공(三公)을 상징하는 삼원(三垣)의 하나로 영의정에 해당한다.

[주02] 태사공(太史公) …… 유촉 :

태사공은 서한(西漢) 때 사마천(司馬遷)의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을 가리킨다. 그가 하간(河間) 지역인 주남(周南)에서 병이 위독하여 무제(武帝)가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는 의식에 참가하지 못하여 매우 유감으로 여기면서 사마천에게 태사(太史)의 직책을 이어받아서 중국 역사의 기록을 완성할 것을 당부하였다.

 

《史記 卷130 太史公自序》 여기서는 신흠(申欽)이 쓴 현옹(玄翁)이란 그의 호에 대한 자서(自敍)를 그의 아들인 신익성(申翊聖)이 손수 베껴 쓴 사실을 두고 신익성이 신흠의 뜻과 문장을 계승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주03] 위협을 …… 법입니다 :

《서경(書經)》 〈윤정(胤征)〉에 보인다.

[주04] 주청사(奏請使) :

광해군 2년에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로 간 것을 가리킨다.

[주05] 호정(戶庭)을 밟지 않았다 :

호정은 문밖의 뜰이다. 《주역》 절괘(節卦) 초구(初九) 효사(爻辭)에 “호정을 나가지 않으면 허물이 없다.〔不出戶庭 無咎〕” 하였다. 여기서는 신흠이 왕명을 받은 죄인으로서 배소에서 매우 근신(謹愼)했음을 뜻한다.

[주06] 손을 이마에 얹었고 :

백성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매우 인망(人望)이 높은 재상을 공경함을 뜻한다.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낙양(洛陽)에 사는 15년 동안 예궐(詣闕)할 때마다 위사(衛士)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공경스럽게 바라보면서 “이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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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 贈諡文貞申公神道碑銘 幷序

 

崇禎元年四月。太史奏塡星犯太微。上相厄。至六月戊午。領議政象村申公疾卒于城南之第。訃聞。 上震悼不視朝者三日。 敎曰。領議政以 先朝舊臣。竭誠輔國。邦運不幸。失此良弼。予甚驚慟。喪葬之需。其令有司准依禮式。遣中使賻弔。遣都承旨弔其孤。遣禮官致祭。王世子率宮僚擧哀于外堂。俄又臨喪次。哭弔如禮。於是宗伯掌禮。司徒治竁。庶司庀喪。其年九月十三日。禮窆于廣州治東乙向原。太學士張公維摭公事行爲狀。請易名之典。 上賜諡曰文貞。崇終之禮備矣。公之胤子都尉公旣手書公之自敍。又詮次公世系官序。表諸墓顏。倩大冢宰李公睟光之誌。藏之幽墟。又以提學金公尙憲之狀。纍然絰杖。跣以踵門。謂廷龜曰。先君執友。獨公在耳。敢徼惠公一言。以不朽吾先子。噫。公之自敍。都尉公之手書。便是龍門太史父子臨絶之托。不朽之業。其在斯矣。寧詎待不腆之文。乃不朽公。顧余願藉公以不朽。按狀。公諱欽。字敬叔。申氏始出谷城縣。至太師壯節公崇謙。佐麗祖統合三韓。賜籍平山。遂爲平山人。世襲珪組。入我 朝。有諱曉。以正言言事不合。謝病不仕。八十一而終。寔公五代祖也。高祖諱自繼。典牲主簿贈吏曹參判。曾祖諱世卿。 社稷署令 贈吏曹判書。祖諱瑛。議政府右參贊。諡夷簡。 贈左贊成。考諱承緖。早登上庠。卒官開城府都事。累 贈領議政。妣恩津宋氏。左參贊麒壽之女。丙寅正月。夢大星入懷。翌日公生。生有異表。目如曙星。幼時嬉戲不凡。七歲。大夫人卒于松都。未幾。議政公又沒。哭泣秉禮如成人。外王父參贊公提而育之。始授書。聰儁絶人。不煩程督。文義日進。宋家故多書籍。公入室靜觀。至忘寢食。旣遍覽經傳子史。旁及象緯,律曆,算數。醫卜之書。華聞大播。名公巨卿。多來訪者。十五。委禽于淸江李公諱濟臣之門。淸江號善易。公請益。講至數卦。淸江驚歎曰。老夫不敢當師席矣。十七八。出遊場屋。每擧高選。儕流莫敢望焉。癸未。三司論栗谷文成公甚峻。公之舅宋應漑爲諫長。以彈文示公。公見謂曰。栗谷負士林重望。攻之不可如是。應漑默然。群從子弟謂公黨栗公。謗議大行。乙酉。中進士第三,生員第八名。丙戌。捷文科。才名藹蔚。而執政嗛前事。補成均學諭。仍黜爲慶源訓導。旋移廣州。又除司宰監參奉。公隨遇而安。不形色辭。逾年罷免。讀書湖莊。不預時事。己丑。選史局。陞奉敎。例遷監察。拜兵曹佐郞。坐事罷。壬辰。寇迫都城。柄臣欲擠之死。除良才察訪。公卽日莅任。巡邊使申砬領大兵踵至。公收拾散亡。隨砬軍至鳥嶺。砬敗。公間道抵江都。將西赴 行在。會鄭相國澈以都體察。視師兩湖。辟公爲從事。悉以戎務委之。案牘煩宂。庭訴紛囂。公令善書習事吏十輩。齊聲白之。耳聽手判。無不中窾。施罷不留時。事以辦治。相公歎服。官軍與義兵乖張。公製文曉之。父老感涕。悍將瞿然改圖。癸巳春。以持平赴召。入謁永柔 行宮。旋拜吏曹佐郞。 天兵滿國。羽檄交馳。咨奏文書。日累十函。公左右酬應。捷敏稱旨。行人司憲奉 勑來。遠接使李公恒福。署公從事。甲午。陞正郞。逆賊宋儒眞就捕。 宣廟親鞫。公爲問事郞。按問詳敏。 宣廟目屬之。獄完。陞執義。松江鄭公以剛方積忤於時。旣沒。猶被齮齕。同僚欲因事追論。仍網打一隊士流。公摭實自劾。遞授司成。俄充奏請書狀官。還授軍器寺正。以御史巡按咸鏡道。櫛垢爬痒。疲民賴蘇。政府薦授舍人。遷掌樂院正。都元帥權慄辟爲從事。湖西賊李夢鶴。擧兵反。旋敗誅。元帥欲盡殱餘黨。公曰。脅從罔治。帥大悟。卽遣公具聞于朝。 上允之。仍命公參按。止戮其尤者七人。餘皆疏決。軍民大安。俄授平山,楊州。大臣以掌辭命。輒啓留之。戊戌。兼侍講院弼善。薦玉堂爲校理應敎。己亥。轉舍人校理。陞典翰。擢同副承旨。遞授刑曹參議。兼承文院副提調。庚子。還右副。舊例。承宣不得兼承文提調。大臣特請勿遞。自是屢拜皆仍帶。歷吏,禮,兵參議,參知。辛丑。拜副提學。 上命本館謄寫古經周易。公竝箚進。備陳人君體天行健之道。 上優納。又命纂春秋三傳。合成一編。公又進箚。申以春秋大復讐之義。 特命陞秩示嘉奬。壬寅。拜禮曹參判。癸卯。兼藝文提學, 世子左副賓客同知春秋館事。再爲兵曹參判。五爲副提學。一爲大司成。 命詞臣選東國詩文。 命儒臣校正周易。公皆與焉。乙巳。自都承旨加階。拜漢城府判尹。丙午。朱梁 詔使之來。爲義州迎慰使。還 特命撰皇華集序。俄拜兵曹判書。人謂公儒雅不習武事。公能注措得宜。案無留牘。門絶私謁。人皆歎服。病遞。拜禮曹判書。有人上疏請追崇德興大院君。倖相欲媚上。使人來餂公意。公正色曰。此有先儒定論。豈容異議。問者色沮去。事得寢。戊申。兼京畿觀察使。 宣祖禮陟。以藝文提學。徵撰哀冊文。特加正憲。拜判尹知義禁府。臨海獄起。公再爲憲長。皆不拜。己酉。拜禮曹判書。以奏請使如京。復命還拜禮曹判書。以封典得完。加階崇政。賜臧獲。光海將御新宮。用左道。以童男女誦經。公以爲王者不宜作不經事以示後。力諍乃止。與李相恒福同修 宣廟實錄。癸丑。死囚朴應犀受嗾於爾瞻。從獄中告延興府院君金悌男挾永昌大君謀逆。鍛鍊成獄。下延興獄賜死。竝殺其二子一壻。辭逮薦紳。朝野震駴。初。 宣廟遺敎宰臣七人若曰。死生有命聖人之所不免。但大君幼稚。未及見長成。願諸公愛護扶持。敢以此托之。蓋 聖心知有此變也。至是。兇徒論七臣不卽辨明。削公仕版。又有鄭浹者被逮。奸人陰訹亂引名。公卿相繼就理。公置對辭甚順直。嫉公者亦不能加害。釋出歸金浦先壟下。鑿池種樹。爲遊息之所。以坎止名窩。左右書史。探賾自適。丙辰。爾瞻等謀危 慈殿。旣殺永昌。又追戮延興屍。遂加罪七臣。緹騎押公竄春川。公至配。名其寓曰旅菴。居謫五年。不履戶庭。辛酉。宥還金浦。癸亥春。我 上擧義反正。湔滌錮籍。悉召耆喆。公入朝。卽拜大冢宰。兼兩館大提學。銓注公明。位著一新。七月。拜右議政。屬有上變獄。 上趣起公。詢以獄事。公力陳新化之日。當先德後刑。 上嘉納。竟悉疏釋。見宥者踵門謝。公曰。吾爲國耳。豈爲若耶。冬。上箚論治道。仍請早建儲貳。且獻元春四箴曰。臨朝燕居。進學體乾。 上嘉之。宣醞賜豹皮。甲子。賊适擧兵叛。 上命公扈衛慈殿。分入江都。公請對。力陳不可分朝之意。遂俱幸公州。還都。欲策勳羈靮諸臣。公言其不可。乃止。仁城君珙累出賊口。百僚伏閤。請逬竄杜禍萌。 上不忍許。公謂僚相曰。庭議執憲非不可。容貸至親。亦盛德事。贊成李貴罵公公座中。公上箚言下官辱大臣。虧傷國體。卽移病乞退。 上召問參聞二宰臣。對不悉。 上下敎切責。竝遞三臣職。屢遣使慰留公。公復上箚。請寢三臣之譴。未久竝敍。亦徇公意也。憲府拘詰 慈殿下人之犯法者。 上命盡遞臺官。又玉堂論一宰臣。 上疑其黨論。將竝竄。公隨事箚論。 上皆從之。乙丑。連珠府夫人卒。上欲行三年喪。又欲自主喪。公與僚相。率百官。守闕力諍。竝用禮臣議。丙寅。別擧公掌試。公之子若孫。俱發解。公引嫌固辭。 上以殿試無親嫌。不許。公黽勉入院考校。無所可否。拆號。公子翊全,孫冕與焉。俱稱得人。適考官之子有違限製呈者。臺官因浮議。請罷考官。竝罷一榜。人皆冤之。公三上箚乞免。 上再遣承旨。諭以手札曰。卿立朝四十年。無一點些疵。今若副卿意。則人謂予疑卿。卿若終始求退。則人謂卿於予有憾。須體予意。公請去逾力。 上勉從解相。授判中樞府事。公陳情乞歸田。未 允。丁卯。奴賊之變急起。公左議政兼 世子傅。奉 世子分朝。至全州。行中再上箚。陳討賊便宜。俱報聞。與都體察使李公元翼協心保護。條上軍民弊瘼。多所蠲革。兩湖人心大悅。三月。陪 世子入江都。 上宣醞 賜廏馬皐比。四月。扈 駕還都。時賊餘衆。留屯義州。公建言賊在我境。將士逗遛。請策勵副元帥以下。嚴兵躡後。且發間使。責以負約。賊遂聽命撤還。建請移粟。賑救遺民。給種穀耕牛。使之奠居。設營將於八路。俾專操鍊束伍。修安,黃二州城械。爲必守計。七月。進領議政,世子師。兵後公私赤立。公請在官者各出布以助軍需。出絮袍。分給西民之無衣者。民多全活。柳孝立等謀作亂。公微聞其狀。坐備局急招二大將。伏軍城外。伺捕按問。服刑者五十餘人。諸囚供辭。絲棼雲委。公斷決風生。若燭照數計。一毫涉疑。悉傅生議。中外快之。獄畢。 上命錄功。竝及推官。公與僚相力辭。秪拜鞍馬之 賜。凡有朝請。必先百僚。備局之會。鎭日晨往曰。國事至此。人臣盡瘁而已。其病疽也。屬虜使在館。需索策應。皆關大利害。公力疾視事輿還。備局郞以 上敎收議。公口號數行。令侍者書之。困乏。聲在喉間曰。虜使還否。旱災如此。吾等之罪。吾死而天雨。則無恨矣。仍不起。春秋六十三。夫人全義李氏。高麗太師棹之後。節度使 贈領議政濟臣之女。與公同年生。十五歸公。能執婦道理家事。宗黨稱之。性廉介。非其義一毫不取。人或以貨款者。則曰吾少而事嚴君無此事。長而事君子如嚴君。何可以利故。重垢吾家範。自奉儉約。綺紈錦繡。不近於身。子女有製進者。卽篋之曰。服美於人。吾自不樂。癸丑之禍。囚首墨面。寢苫於庭。戊午。廷請廢 母后。不從者以死劫之。都尉公問去就。夫人曰。吾雖憂畏。豈可令汝爲不義。其通大誼如此。公每言吾之得成拙約。無大點汚者。內相之助云。癸亥正月。卒于金浦莊。壽五十八。公沒之後。移祔于廣州新卜之山公之墓左。凡擧二男五女。長卽翊聖。尙貞淑翁主。封東陽尉。次翊全。娶縣監趙昌遠女。女長適縣監朴濠。次適文科佐郞趙啓遠。次適典籍朴漪。次適侍直姜文星。次適參奉李旭。東陽生五男四女。曰冕。生員壯元。次昪,次炅,次最,次晑。女適洪命夏。餘幼。翊全生一男。朴濠生二男二女。男世模,世楷。女長適李壽仁。次適林一儒。趙啓遠生三男三女。男晉錫,龜錫,禧錫。女幼。朴漪生一男。幼。姜文星生三女。李旭生二男。皆幼。曾孫男女。共若而人。公天資超邁。器度華雅。莊重簡潔。英儁夙成。少孤無資受之益。而能自得師於聖賢書中。平居儼然。以敬自治。每日晨起盥櫛謁家廟。整襟端坐。學務爲己。恥於近名。不拘拘於訓誥箋註。而尤慕程伯子,邵堯夫之風。晩年廢逐。益刊落世事。沈潛經傳。讀經世書。忽然開悟。自著先天管窺。後得邵子全書。參證無差謬。其於性命之理。精詣獨得如此。鑑識明透。標擧絶世。於人鮮許可。見有營俗務逐勢利者。若將浼然。而胸次爽朗無城府。未嘗腹藏人過。遇可人。輒傾心開款。一定交。終身不貳。友愛敦睦出至誠。寡姊同居三十年。事之如母。家庭無間言。自以連婚宮掖。恒加謹畏。都尉親迎時。舊第隘陋。該官請依例繕修。公曰。廬雖弊。足以行禮。終不易一椽。寢廡傾塌。家人請治。公曰。國事未定。何以家爲。恬於貧約。絶無嗜欲。未嘗以家事經心。山蔬佐脫粟。亦不爲苦。不喜與人造請。公退杜門。蕭然一寒士也。遇患難益堅操履。處貴顯尤戒滿盈。在 經幄敷奏明剴。居廟堂訏謨密勿。見 朝廷過擧。輒盡言不諱。得一善策。必建請而行之。愛惜人才。多所奬進。有不能者。專務掩覆。常曰。前漢之興隆。在於風流篤厚。恥言人過。又不喜紛更曰。法 祖宗。亦足治耳。以故鼎革之初。材賢滿朝。論議橫生。氣勢頡頑。而公能雍容其間。善爲調劑。務持大體。不欲規小利以起事。凡所設張。必本於忠厚。裁抑過激。不使士論乖隔。默斡化樞。坐鎭浮俗。賢者有所恃而增氣。不賢者有所憚而斂迹。公之相業。可謂韙矣。余觀自古經濟之才不世出。出而不遇。遇而不用。用而不久者多。天之賦公才。實非偶然。遇於 宣廟而用未究。天也。窒於昏朝而復遇於 聖際。天也。亦旣遇之深而用之專。而嗇其年而使不久者。天也。此實斯民之不幸。古今之所同恨。豈獨友朋之私慟也哉。公之文章。本於六經。操筆立成。渙若不思。而老成典重。絶無瑕點。人謂文勝詩。詩尤沖澹有趣。絶摹擬洗蹊徑。亦云詩勝文。要之兩臻其美。居然一大家也。少號玄軒。又號象村。晩號玄翁。歸田稱放翁。在謫扁旅菴。聞白沙李相公之逝。悼之爲文。命曰玄翁。自敍公之心事。略寓於此云。所著有象村集三十三冊,和陶詩三冊,求正錄一冊,先天管窺一冊。行于世。昔公來自金陵。一日謂余曰。我輩以文章致位宰相。今俱老矣。俯仰人世。誰知己者。吾詩子選。子稿吾序。余謂微子。孰定吾文。顧余衰甚。後死之責。子其任之。言猶在耳。已成千古。烏能使余不悲。噫。余不幸久不死。銘諸友多矣。每一把筆。爲之一涕。孰謂今日公先捨我。而我乃銘公墓也。抑余幸也。與公結髮論交。白首如初。進退榮辱。亦略相同。而今又敍公平生。隔九原如對面譚。庶以慰余之長思。遂攬涕而爲之銘。銘曰。

維天降材。寔爲世庸。而或顯晦。亦繫其逢。公稟全才。卓然早成。修辭立德。不待課程。一言秉正。群咻以咈。擠之遠惡。士望愈鬱。譬彼江河。若決其防。德行政事。經術文章。隨遇拔萃。忌者莫疵。淸名儁望。羽儀于時。中罹禍網。處困益亨。詩書自娛。大振厥聲。運屬 昌明。群賢勵翼。公來自謫。朝野手額。冢宰文衡。虛位以授。俄進端揆。爲朝德首。不言以躬。百僚矜式。治本寬大。民自受澤。夙夜靖共。上憂公瘁。公愈感勵。輿疾視事。公歿于位。禮別故常。旣文且貞。百世之光。人惜其短。我榮其長。惟生有涯。惟令聞無疆。

 

자료>월사집 제44권 / 신도비명 하(神道碑銘下)

 

 

↑문정공 상촌 신흠 묘

 

↑문정공 상촌 신흠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