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정창손 신도비명(鄭昌孫神道碑銘)

야촌(1) 2009. 6. 23. 23:49

■정창손 신도비명(鄭昌孫神道碑銘)

[시 대]  조선
[연 대]  1623년(인조1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기타문화재 - 문화재자료 제 85호
[크 기]  높이 186cm, 너비 73cm, 두께 25cm
[소 재 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427~2
[서 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서거정(徐居正) . 심열(沈悅) . 미상

 

●개 관
1623년(인조1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에 세워진 정창손(鄭昌孫)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본래 정창손의 집현전문하인 서거정이 1488년(성종 19년) 찬술하여 세웠으나 갑자사화 때 정창손이 부관 참시되어 비석도 파쇄(破碎)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정창손이 신원(伸寃)되자 그의 외5대손인 이원익(李元翼)의 주선으로 내외후손들이 비용을 내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비문은 사가정(四佳停) 서거정(徐居正)이 찬술하였고 뒷면의 추기(追記)는 한준겸(韓浚謙)이 지었다. 글씨는 심열(沈悅)이 썼다.

 

정창손(1402~1487년)은 본관이 동래(東萊)이고 중추원사(中樞院使) 흠지(欽之)의 아들이다.
1426년(세종 8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집현전저작랑(集賢殿著作郞)으로 들어가 세종과 함께 집현전에서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과 편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면서『고려전사(高麗全史)』․『치평요람(治平要覽)』등의 편찬에 관여하였다.

 

또한 1452년(문종 2년) 예문제학(藝文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서『세종실록(世宗實錄)』․『문종실록(文宗實錄)』을 찬술하였다. 정창손은 세종의 한글제정을 반대하였고 세종의 불교숭상에 반대하는소(疏)를 올린바가 있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고 한다.


1453년 세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참여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책록 되었고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 모의를 고변하여 우의정에 올랐다. 특히 세조와의관계가 친밀 하였다.

 

성종 대에도 고령의 나이에 정원(政院)에 나아가 서무를 참결(參決)하였다.
1472년(성종 3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영의정에 올랐다.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당시 연산군 생모 폐출논의에 참여한 죄로 부관참시(副棺斬屍)를 당하였다.

 

비문에는 서거정이 찬술한 본래의 부분으로 정창손의 선조내력과 그의 관력과 성품이 자세히 적혀있고 가족과 자손의 상황이 장황하게 기술되어있다. 그리고 추기로 그의 외6대손 한준겸이 파손된 비문에 추가하여 추기를 쓰게 된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

세종대에서 성종대 까지 집현전에서문화사업에 참여하면서 세종과 충돌도 있었고 세조의 정난에 참여절의 파에게 비난도 받았지만 조선왕조초기의 파란만장한 정치적 역정을 지낸 인물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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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손신도비명(鄭昌孫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수충경절 좌익정난 익대순성 명량경제 좌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봉원부원군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사 증시충정 정공 신도비명 병서

성신(星神)과 악신(岳神)의 정령한 기운이 사람에게 모여 세상에 이름을 떨친 호걸스런 인재가 된다. 기성[箕宿]의 정기를 받아 부열(傅說)이 태어나 상나라의 훌륭한 재상이 된 것과 숭악(嵩岳)의 정령을 받아 신백이 태어나 주나라의 훌륭한 재상이 된 것이 그 예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예를 찾을 수 있으니 봉원부원군 정충정공은 다섯 임금을 정성껏 보필하여 그 성대한 공명과 훈열이 부열과 신백에 백중하다고 할 수 있으니 참으로 훌륭하구나.

 

공의 이름은 창손이고 자는 효중이다. 증조는 이름이 양생이며 품계는 중대광으로 봉원군에 봉해졌다.

조부는 이름이 부(符)이며 품계는 가선대부로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이름이 흠지이며 품계는 자헌대부로 중추원사를 역임하고 시호는 문경공이며 순충적덕 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내산부원군에 증직되었다. 모친 정경부인 최 씨는 전주의 명망 있는 집안인 형조전서 병례의 딸로 홍무 임오년 3월 10일 갑오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기국과 도량이 보통 아이들과는 판이하였다.

자라서 학문을 하면서는 박문강기(博聞强記)하여 시(詩)와 서(書)를 즐겨 읽고 문장을 잘하였다.

 

계묘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선덕 병오 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직되었다가 곧 집현전 저작랑에 제수되었고 이후 박사와 수찬을 역임하고 교리에 이르렀다. 여러 자리를 역임하는 동안 경연 지제교의 관직은 항상 겸하였다.

 

세종께서 집현전을 세워 임원 20인을 두었는데 모두 당대의 문학지사로 충원하여 고문에 응하게 하고 윤음(綸音)을 맡아 짓게 하여 화전을 활보하고 왕의 사랑을 가까이에서 받으니 당시 사람들이 영주(瀛洲)에 간 것에 비유하였다.


세종이 일찍이 『자치통감』에 마음을 두었는데 그 주석(註釋)이 미진하고 구두(句讀)마저 분명하지 않았으므로 문사들에게 훈의를 찬술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 선발된 문사들은 모두 재주와 학식에 빼어난 학자들이었다. 과를 나누어 책임지고 완성하도록 하여 번잡한 것은 삭제하고 간략한 것은 보충하여 정리하면서 저마다 자신의 재능을 다하였는데, 찬수(纂修)하는 데 있어서 공(公)의 공(功)이 으뜸이었다.

 

기미년에 상을 당하였으며 복을 마친 뒤 사섬시 령에 제수되었고 집현전 응교에 올라 경연과 춘추관을 겸임하였다. 또 문사들을 집현전에 모이게 하여 위로는 당우(唐虞) 3대로부터 아래로는 송원 및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성제(聖帝), 명왕(明王), 명신(名臣), 석보(碩輔)들의 좋은 정치와 좋은 교화로 후세에 법이 될 만한 것을 가려 뽑아 책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수백 권의 책자로서 이름을 『치평요람』이라 하였다.

 

이 책의 찬수(撰修)에 있어서도 공의 공이 가장 컸다.

세종 말년에 세종의 건강이 좋지 않아 문종이 동궁에 있으면서 정사를 보게 되었는데 당시 조정의 대신들로서 말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봉장(封章)을 올려 주달(奏達)하여야 하였다.

 

이때 공은 문열공 이계전과 더불어 집현전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봉장을 올려 시정의 득실을 극론하였는데 같은 반열에 있는 한두 사람이 만류하면서  “예로부터 일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를 입기 마련이다.

 

하물며 시종은 덕의를 강론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임금을 섬겨 보도(輔道)할 따름이지 간쟁하는 것은 그 직분이 아니다”라 하였으나 공과 문 열 공은 크게 웃으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생각이 있는데 일을 논하는데 있어 실패와 명예는 고사하고 입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한 부끄러움은 없다”고 말하고는 마침내 하료들을 거느리고 항소를 올려 수십여 차례 극간하니 세종은 이를 가상하게 여겼다.

 

을 축년 사헌부집의에 발탁되었는데 강개하고 꿋꿋하여 알고서 말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이에 앞서 공의 백씨 정절 공 갑손이 사헌부의장으로 있으면서 부정을 척결하고 깨끗한 정치를 선양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바른 도를 지켰고 풍채 또한 늠름하여 사람들은 독 격골(獨擊骨)로 일컬어진 옛날의 왕 소에 비유하였는데 지금 공 또한 단정한 용모로 조정에 나와서 강직하고 진실하며 곧은 것이 그대로 그 형의 기풍을 갖고 있어 한때의 공론이 대단하였다.

 

병인년 언사(言事)로 군기부 정으로 좌천되었으나 곧 예문관으로 옮겼고 정묘년 복시에 등제하자 집현전 직제학 겸 경연춘추관에 제수되었다. 무진년 5월에는 부제학으로 발탁되었으며 관직(館職)은 전과 같았다.

 

세종이 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찬수하게 하였는데 이때 공은 편수관으로서 편차를 전담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책을 올리기도 전에 세종이 승하하였고 문종이 사국(史局)에 명하여 편찬을 마치게 하였는데 공은 더욱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경오년 승정원 좌부승지에 발탁되어 예조지사를 겸하였고 얼마 후 우승지로 전보되어 왕명을 공정하게 출납하였다. 8월에 『고려전사』를 올렸으며 안마(鞍馬)와 옷감 안팎을 하사받았다. 신미년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고 가선대부에 올라 사헌부의 기강을 크게 떨쳤다.

 

일을 논하는 것이 이치에 맞고 정확하였으며 권문세가의 탄핵도 기피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꺼려하여 ‘이전의 서슬 퍼렇던 정중승이 이제 다시 사헌부의 장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세자좌부빈객을 겸임하였다가 임신년에 예문제학 동지춘추관사로 옮겨 세종실록과 문종실록을 찬수하여 안마를 하사받았다.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왕이 보위에 올라 권간들이 정사를 장악하여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웠는데도 공은 조정을 받들고 정도를 지켰다. 계유년 10월 세조가 국가의 위란을 평정한 뒤에 “이런 때를 당하여 강직하고 성실하며 간정함이 정모만한 자가 없다”고 좌우에 말하고는 이조판서에 발탁하고 품계를 자헌으로 올렸다.

 

공은 뛰어난 안목과 식견으로 인물을 정확하게 분변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성품 또한 청렴하여 비록 권세는 혁혁하게 높았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집은 조용하였으며 청탁과 뇌물을 용납하지 않아 사림이 탄복하였다. 을해년에 세조가 즉위하면서 ‘정부대신은 마땅히 독서인 중에서 옛일에 밝고 대체(大體)를 가진 자를 등용해야 한다’고 하고는 공을 의정부 좌찬성에 발탁하여 이조 판서를 겸하게 하고 좌익공신 3등으로 책훈하여 봉원군에 봉하였다.


병자년 6월 성삼문 등이 역모를 꾸미자 공은 그 기미를 알고 세조에게 고변(告變)하였다. 이때 역당들은 굳게 결합하여 화란이 조석에 임박했는데, 공이 이를 소탕하면서 조그만 움과 싹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이로써 책훈되어 좌익 2등으로 올라가고 보국숭록대부 봉원부원군 겸 성균관 대사성 세자이사를 더했으니 대개 문형을 맡은 것이다. 10월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에 발탁되고, 정축년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대부인은 여든이 넘은 고령이었는데 공이 정성껏 봉양하였다. 한겨울과 한여름에도 아침과 저녁으로 문안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조알(朝謁)의 여가에 반드시 관대를 갖춘 채 곁에서 모시어 흐뭇하고 기쁘게 하여 드려 대부인께서 편안한 얼굴로 웃은 뒤에야 물러났으니 온 나라가 공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무인년 모친의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할 정도로 몹시 슬퍼하였는데 세조가 근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위로하였으며 상례를 넘는 부의(賻儀)를 하사하고 특별히 하루 동안 정조시(停朝市)하도록 하였다. 이전에 부인(婦人)들의 상에는 정조시한 예가 없었는데 이는 공을 중히 여겨 특별히 은전을 베푼 것이다.

 

장례를 마치고는 여묘하면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왕이 관리를 보내어 위로하고 “나이 쉰을 넘으면 기력이 점차 쇠약해지니 부디 여묘를 하지 말라”고 훈유하였다. 세조가 평안도를 순행할 즈음 공을 기복출사(起復出仕)시켜 영의정으로 삼고 서울을 지키게 하였다.

 

공이 전(篆)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도승지 조석문을 보내어 타일렀지만 공이 굳이 사양하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어찰을 내렸다.  “나에게 있어서 경은 마치 양손과 같다. 가령 한손이 잘못되는 경우 성한 손이 다른 것을 잡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양손으로 들어야 할 경우, 잘못된 손은 이를 스스로 잡기가 불안한 것이니 어찌 몸에 근심을 미치게 해서야 되겠는가? 대의가 이와 같은즉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만약 공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가서 기복출사하게 할 것이니 그대는 이를 체득하라.” 그러나 공이 여전히 관직에 나아가지 않자 얼마 후 순행을 정지하였다.


경진 년 복을 마치자 왕이 내전으로 불러들여 온후하고 정중한 말로 위로하고는 옷 한 벌을 내리고 봉원부원군에 봉하였다. 신사 년에 의정부영사 예문춘추관영사세자사에 제수되었고 임오년 5월에는 일로 인해 여산 군에 유배되었으나 곧 소환되어 다시 봉원부원군에 봉작되었다.

 

을 유년에 여러 유신들에게 명하여 사서오경을 각각 나누어 구결을 붙이게 하였는데 공은 상서를 배당받아 해박한 의론으로 전대의 선비들이 아직 밝히지 못한 것을 많이 파헤쳤다. 무자 년에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 등이 난을 일으키려다 처형되고 공은 정란익대공신에 책훈(策勳)되었다.

 

우리전하께서 즉위하자 공은 오랜 덕망과 학식을 갖춘 노인으로서 날마다 승정원에 나아가 서무를 참작하여 결재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원상(院相)이라 하였으며 영경연사를 겸하였다.

 

신묘 년에는 좌리공신을 하사하였는데, 70세의 고령을 이유로 치사(致仕)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진년에는 근신을 보내 궤장을 하사하였고, 을미년에는 의정부 영의정을 제수하였다.

 

이로써 공은 세 차례에 걸쳐 수상이 되었으니 벼슬아치와 사대부들이 서로 조정에서 경하하며
“선인(善人)이 다시 재상이 되었다”고 하였다. 공은 과분한 예우라 하여 여러 차례 사직하였지만 왕은
“삼공과 같은 중임은 경과 같은 노성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고 하고는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묘당에서 정사를 돌볼 때 의관을 정제하고 홀을 바르게 들고서는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으니 마치 산과 같이 우뚝하였다. 나이 또한 아흔을 바라보니 비록 조정에 원로구신이 있다 하더라도 공과 비길만한 이가 없어 사람들은 공을 송나라의 승상 문언박에 비교하곤 하였다. 을사년 굳이 사양하자 부원군에 봉하였다.

 

정미 년에 병석에 누우니 왕이 약재를 내리고 내의를 보내 진료하게 하며 병세에 대해 묻기를 그치지 않았다. 무진년 정월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 86세였다. 왕은 크게 슬퍼하여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고 소찬(素饌)을 올리게 하였으며 3일 동안 철조시(撤朝市)하게 하고는 중사(中使)를 보내 조문하였다.

 

왕은 “봉원군의 집은 평소 청빈하였다. 장례를 지내는데 부족한 물건은 물목을 갖추어 즉시 아뢰어 결례가 없도록 하라.”고 하고는 부의를 배로 하사하였다. 태상시에서는 시호를 충정이라 바꾸었다.

 

공의 부음을 듣고 사림들은“어진 재상이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통곡하며 슬퍼하지 않는 자 없었고 심지어는 우동(牛童)과 마졸(馬卒)까지도 탄식하며 애석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은 성품이 엄격하고 고매하였고 또 청렴하고 정직하였다.

 

학문에 해박하였고 문장 또한 전아(典雅)하였고, 필법도 뛰어나 한 시대의 으뜸이 되었다.

평생토록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이 신하로서는 최고에 이르렀지만 집에서 지내는 것은 쓸쓸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서는 일을 분명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여 남이 주는 것을 일체 받지 않았고 청탁 또한 받아주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이 요구하지 못하였다. 형제간에는 우애하고 친구들에게는 신의가 두터웠으며 친척이나 친구들의 상장(喪葬)이나 혼사 때 돕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람을 항상 공손하게 대하였으며 아무리 지위가 낮은 선비가 찾아오더라도 반드시 문밖까지 나가서 맞이하고 환송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천성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세조는 공을 매우 신임하여 일찍이 “나는 경을 숙부와 다름없이 공경한다”고 말하였다.

 

공이 왕에게 잔을 올리면 왕은 반드시 용모를 바로 하고 어좌에서 내려와 “이는 임금과 신하의 대의(大義)가 아니라 사사로운 예(禮)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자리에 있는 여러 신하들을 선유(宣諭)하였다.

 

공이 술을 잘하지 못하였으므로 자리에 단술을 마련하여 반드시 친히 맛을 본 후에야 내려주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이 어려워지게 되자 더러는 절을 하지 말고 대전에 오르게 하였으니, 왕이 공을 이와 같이 예를 높여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공이 조정에 나아간 62년, 이 동안에 과거를 주관한 것이 수십 회였고, 전형(銓衡)을 맡은 것이 4년이며, 세 번이나 수상의 직을 맡아 국가의 대소사에 관계한 것이 30여년이었다.

 

공은 은혜를 입어 높은 벼슬에 있을 때도 항상 처신을 삼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몸을 지켰으니 공명과 복록이 그 만큼 성대한 예는 고금을 통해 견줄 자가 없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공을 도덕의 으뜸이라고 일컬었다.

 

배필은 청풍군 부인 정씨로서 승녕부 소윤 윤지의 따님이다. 3남3녀를 낳았는데 장자 개는 첨지중추이며 다음은 칭이니 역시 첨지중추이며, 다음 괄 은을 유과에 합격하여 의정부 우찬성으로 있다.

 

딸로서 장녀는 상락부원군 김질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학 최 직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첨정 조윤벽에게 출가하였다. 장남 첨지공은 군사 홍서종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 주함은 주부로 있으며, 다음 계함은 사정으로 있고, 장녀는 사과 이극문에게 출가하였으며 차녀는 효력부위 윤 검에게 출가하였다.


차남인 첨지공은 사용 최계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으나 자식은 없고 3남인 찬성공은 부사 이 긴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1남을 두니 종 보로서 지금 봉사로 있고, 딸은 셋이니 장녀는 참봉 이익희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직장 심형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참봉 윤첩에게 출가하였다.

 

상락부원군은 5남을 두었는데 의동은 첨주요, 예동은 주부이며 지동은 첨정이고 성동은 현감으로 있고 이동은 사과로 있다. 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종실 부림군 식에게 출가하였다.

 

첨정은 2남을 두었는데 영과 규이며 규는 생원으로 있다. 딸로서 장녀는 생원 이시찬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군수 여승감에게 출가하였으며 3녀는 유학 박형성에게 출가하였고 4녀는 통사랑 이장원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이밖에 증손 현손이 70여명이다.

 

이해 4월 임신 일에 광주의 서쪽 방이동에 계좌정향의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부인은 공보다 먼저 돌아가 묘소는 서쪽 둥성이에 있는데 공의 묘소와는 거리가 불과 百여보이다.

 

다음해인 무신년 정월 유족들이 신도비를 세우고자 명을 거정에게 청하였는데,
아! 거정이 어찌 차마 명을 할 수 있으랴!

 

거정은 무오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정축년에는 복시에 올랐는데 모두 공의 문하에서였다.

공이 집현전에 있을 때는 거정이 말석에 참여하여 모신 것이 여러 해였으며 또 공이 세 번 묘당에 들어갔는데 거정은 그때 세 번 참찬이 되고 두 번 찬성이 되어 공의 다음 자리를 욕되게 한 것이 또한 10년이었다.

 

이 하찮은 사람이 중후한 공의 덕에 의지하여 서여라도 얻어 들으면서 감복하고 경모 하였는데 이제 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어 다시는 의지하고 우러를 곳이 없으니 아! 슬프도다.

명하노니,

하늘과 땅이 기운을 모우고 규성과 벽성이 찬란히 빛나도다.공께서 이 정기를 받아 태어나니, 공 또한 빛났어라!


광풍인 듯 제월인 듯 가슴속은 확 트이고, 태산처럼 북두처럼 그 모습이 우뚝하다.

일찍부터 이름 떨쳐 풍 호 운룡 하였도다.

 

다섯 임금 내리 섬겨 천년 두고 드문 조운헌대 사관 두루 거쳐
금마 옥당 드나들며 의정 수규 세 번이요 인각 도상 네 차례라.

 

정책 짜내 돕고 받쳐 경륜이요 보불이라.
질러내고 이뤄주고 건설에다 시행에다 어디엔들 아니 되리!

 

때에 맞춰 알맞도록 원로대신 따져 보면 문언박이 그 분이요.
공명으로 시와 종이 곽 분양의 무리로세,

 

봉황 일러 상서라면 거북 아닌 신이었소백성에겐 주석이요 조정에는 염매로세,

하늘은 왜 아니 남겨 산이 문득 무너졌나.

 

인물 비록 갔다지만 덕업 어찌 삭으리까.
그 충에다 그 정이라 시뢰 가장 소명 토다.

 

울 울창 창 저 광릉에 현궁 있어 우뚝하고

높다랗게 비가 서니 넘실넘실 기리소서.

 

삼가 살피 건데 위 충정공의 신도비는 달성군 서공 거정이 서와 명을 하고
흥문관 부교리 김공 수동이 서와 전을 한 것이 홍치 무신년이다.

 

연산군 갑자년에 선릉폐비 때의 사건을 들쳐 내어 이때 조정에 있었던 대신 종신들은 생사를 막론하고 모두 극형에 처하였는데 공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때 공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18년이었는데도 화가 구천에까지 미쳐 묘도와 의물도 아울러 파쇄를 입었으니 아! 참혹하도다.

 

중종께서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이를 애석히 여겨 유명의 억울함을 신월 하도록 하여 빠짐없이 다 갖추도록 하였는데 유독 신도비만은 재건되지 못하였으니 길손들이나 초동목동들까지도 이를 보고 탄식하였다.

 

금년 봄에 이르러서야 공의 외五대손 영의정 이공 원익이 유배에서 풀려 다시 정승으로 등용되자 정사를 바르게 펴면서 여가에 생각하기를,  “공의 훈명과 사업의 빛남은 우리 동방에서 으뜸인데 백년이 지나도록 신도에 이를 알리는 근거가 없으니 자손인 자로서 어찌 이마에 땀이 솟지 않으랴!

 

달성의 비문이 원고에 살려있으니 다시 돌에 새겨 영원토록 세상에 남기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고 하고는 좌참찬 이시언, 관찰사 심 열, 병조참판 신경진, 이조참판 최명길, 동부승지 김자점 및 준겸에게 지수하여 역사를 일으키자 지금 동추로 있는 이신의가 일찍이 해주목사로 있을 때 이 일을 위하여 베어낸 돌을 강으로 운송하고 전 군수 이승형이 성심으로 일을 돌봄으로 마침내 이 역의 책임을 맡겼다.


이들은 모두 공의 외 후손들이며, 또 동성의 손인 경창이 묘소의 아래에 살고 있어 실제 감독을 맡았으니 이는 모두 수상이 그렇게 한 것이다. 내외의 후속들로서 출세한 자들에게는 각기 전백을 내게 하여 비용을 충당하고 또 심공은 해자를 잘 쓰므로 글을 부탁하여 돌에 새기었고 준겸으로 하여금 이 일의 본말을 위와 같이 기록하게 하였다.

 

화가 지난 후 묘소를 옮겨 다시 정하였는데 역시 계좌정향의 언덕이다.외 6대손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한준겸은 글을 짓고,  외 6대손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경기도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개성유수 도순찰사 심열은 글을 쓰고 아울러 전액을 하다.


국역 : 이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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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鄭昌孫 神道碑銘

有明朝鮮國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有明朝鮮國輸忠勁節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蓬原府院君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事 贈諡忠貞鄭公神道碑銘幷序


星嶽精英之氣鍾於人而爲命世豪傑之才盖箕宿之精降而爲傳說爲啇良弼嵩岳之靈降而爲申伯爲周賢佐求之於今蓬原鄭忠貞公弼亮五朝功名勲烈之盛可以伯仲於傳申掎歟盛哉公諱昌孫字孝仲皇曾祖諱良生重大匡蓬原君皇祖諱符嘉善大夫漢城府尹 贈議政府左賛成皇考諱欽之資憲大夫中樞院事諡文景公 贈純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萊山府院君皇妣貞敬大夫人崔氏全州望族刑曹典書丙禮之女以洪武壬午三月甲午生公生而器度與凡兒逈異及長就學博聞强記嗜詩書能文章癸卯中司馬試宣德丙午中第補承文院正字俄遷授集賢殿著作郞歷博士修撰轉至校理皆帶 經筵知製 敎 世宗設集賢殿置員二十人玅選一時文學之士充之備顧問演綸綍高步花磗昵承膚眷時人擬之登瀛洲 世宗嘗留意於資治通鑑謂其箋釋未盡句讀不明命文士撰訓義皆才學識鑑之士分科責成繙閱紬復各盡所長而纂修之功公實居多己未丁內憂服闋授司贍寺令陞集賢殿應校帶 經筵春秋館又命文士聚於集賢殿撰 上自唐虞三代下至宋元及我東國 聖帶 明王名臣碩輔善政善敎可爲後世法者編爲巨帙凡數百卷名曰治平要覽纂修之功公亦君多 世宗末年稍違豫 文宗在東邸視事朝官言事者必 上封章乃達時公與李文烈公季甸在集賢殿屢封章極論時政得失有一二同列止之曰自古善論事者終必陷禍況侍從講論德義啓沃輔道而已至於諫諍非職公與文烈大笑曰人各有心論事之敗之榮不如舍嘿之恥之深遂率下僚抗疏拯陳餘數十上 世宗嘉之乙丑擢司憲府執義慷慨骨骾知無不言前此公之伯氏貞節公甲孫長憲府激渴揚淸直道不撓風節凛然人比之獨擊鶻今公正色立朝謇諤亮直有乃只風一時物論多之丙寅以言事遷左爲軍器副正移直藝文館丁卯中覆試授集賢殿直提學兼 經筵春秋館戊辰五月擢副提學館職如舊 世宗命臣鄭麟趾等撰修高麗史公以編修官專掌編次不幸書未進 御而陟遐文宗命史局畢撰公益勤不怠庚午擢授承文院左副承旨兼知禮曹事轉至右出納惟允八月進高麗全史 賜鞍馬表裡辛未拜司憲府大司憲階嘉善大振臺綱論事切至不避權貴人皆畏憚曰前日博擊鄭中丞今復爲憲長矣兼 世子左副賓客壬申遷藝文提學同知春秋館撰 世宗文宗實錄 賜鞍馬 顯陵陟遐幼冲在位權奸用事國勢疑危公奉公守正癸酉十月 世祖炳幾靖亂謂左右曰當今之時直亮簡正無如鄭某者擢爲吏曹判書陞資憲公之藻鑑淸識甄別品題皆得其宜性又廉潔雖權勢赫然而門庭蕭索門節不到士林嘆服乙亥 世祖即位謂政府大臣宜用讀書稽古持大體者擢公爲議政府左賛成兼判吏曹策勲佐翼功臣三等封蓬原君丙子六月成三問等潜謀不軌公知其謀 上變當是時逆黨盤結禍難之作不朝則夕賴公剪除無有孽芽於其間者策勲陞佐翼二等加輔國崇祿大夫蓬原府院君兼 成均館大司成 世子貳師盖典文衡也十日擢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丁丑陞爲左時大夫人年高九衰公至誠榮養雖降冬盛暑不廢定者朝謁之暇必具冠帶陪侍左右歡欣怡悅大夫人平反一笑然後退一國皆稱其孝戊寅丁憂▨毀過節 世祖遺近臣吊慰賻 贈有加特停朝市一日前此婦人無停朝之例此所以重公示異恩也及葬慮墓不至私第 上遣官慰諭五十後氣力漸衰愼勿慮墓 世祖將 巡幸平安道起復爲領議政留守京都 上箋辭不 允又遣都承旨曹錫文慰解之公固辭 御札曰子之於卿猶左右手假如此問多誤一乎否安手執他而有所接物則否手其能自以爲不安而貽患於身乎大義如此不必多言若不得則將率百官親往起復良相體此公猶不就職俄停 巡幸庚辰服闋 上引入內殿天語溫諄丁寧疑至 賜衣一襲 封蓬原府院君辛巳拜領議政府事領藝文春秋館事 世子師壬午五月以事謫礪山郡未幾召還復 封蓬原府院君乙酉命 諸儒分授四書五經定口訣公受尙書議論通暢多接前儒所未發戊子 睿宗即位南怡等構亂伏誅策勲定難翊戴功臣我 殿下即祚以公宿德耆艾日仕政院參決庶務謂之院相兼領 經筵辛卯 賜佐理功臣尋以七十乞致仕不 允壬辰遣臣 賜几杖乙未拜議政府領議政至是公三爲首相紳士大夫相與慶於朝曰善人復相矣公以盛滿屢乞辭上曰三公之重非如卿老成無以鎭之不 允公居廟堂垂紳正笏不動▨色屹如山嶽年俯九衰朝廷耆舊無出其右者人比之宋丞相文彥博云乙巳固辭 封府院君丁未遘疾 上命賜藥餌遣內醫診視問訊不絶正月戊辰卒于正寢享年八十有六 上震悼墮淚良久進素饌輟朝市三日遣中使臨吊 上曰蓬原家素淸貧凡喪葬所乏具由輒聞母使有缺賻贈倍加太常易名忠貞聞公之卒士林莫不痛悼曰賢宰相亡矣至於牛童馬卒莫不嘆惜公資性簡嚴高邁廉公正直學問䛀博文章典雅筆法妙絕爲一代之冠平生不事產業雖位拯人臣居家索然居官履事明白正大贈遺無所受請謁不得行人不敢干以私友於兄弟信於朋友親戚故舊喪葬婚姻無不賑邱接人以恭雖下士之賤有來僕者必於門外送迎天性然也 世祖深加春淫嘗曰予之敬卿無異叔父公如進爵 上必改容下 御座曰此非君臣大義乃展私禮也仍 宣諭在座群臣公性不能酒座上爲設醴必 親嘗賜之至年深難於趨拜或命拜上殿 其尊禮敬重如此公立朝六十二年主試圍者數十掌銓衡者四年三爲首相係國家輕重者三十餘年居寵恩危克全終始功名福祿之盛今古無比擧國皆稱道德之首配淸風郡夫人鄭氏承寧府少尹持之女生三男三女男長曰价僉知中樞次曰偁僉知中樞次曰佸中乙酉科爲議政府右賛成女長適上洛府院君金礩次適幼學崔直次適僉正趙允璧僉知娶郡事洪瑞從之女生二男二女長奏咸主簿次啓咸司正女長適司果李克文次適効力副尉尹儉次僉知娶司勇崔季謙之女無子賛成娶府使李緊之女生一男曰宗輔奉事女三長適參奉李益禧次適直長沈浻次適參奉尹堞上洛生五男曰義童僉樞曰禮童主簿曰智童僉正曰誠童縣監曰利童司果女一適宗室富林君湜崔直生一男曰淄縣令女適部將尹超僉正生二男曰瑛曰珪生員女長適生員李詩讃次適郡守呂承堪次適幼學朴亨性次適通仕郞李長源餘幼曾玄孫七十有餘人是年四月壬申葬于廣州之西芳梯洞癸坐丁向之原夫人先公卒塋域在西崗相距不過百餘步旣葬明年戊申正月諸孤欲立神道碑索銘於居正嗚呼居正尙忍銘諸居正中戊午進士登丁丑覆試皆出公門下公之在集賢殿居正叨參席末者數年及公之三入廟堂居正三爲參賛再爲賛成忝僚貳者亦將十年攀附驥尾於公之德之風獲聞緒餘服膺景慕今則山頹梁壞無復可仰嗚呼衰哉銘曰天地絪縕奎壁晶熒 公乃梃生公又蜚英 光風霽月豁乎心胷 泰山北斗巍乎儀容 早際昌辰風虎雲龍 歷事 五朝千載奇逢 踐揚臺館登僉步王 三長巖廊四圖閣 訏謨賛衰經綸黼黻 以亭以毒乃設乃施 何適不可時借而宜 耆舊老成潞國其人 功名終始汾陽其倫 曰鳳其祥匪龜而神 人思柱石國倚塩梅 何天不憗遽爾山頹 魏鑑雖亡灘礪可倚 曰忠曰貞昭哉諡誄 有欝廣陵有截玄宮 有崇者碑有聲渢渢謹按忠貞公神道碑達城徐公居正序若銘弘文館副校理金公壽童書並篆實弘治戊申所建也泊燕山甲子追仇 宣陵廢妣時事大臣從臣無論存沒俱還極典公亦與焉於是公之下世已十有八年矣禍及泉壤墓道儀物並被破碎嗚呼慘矣 中廟龍興首命矜錄凡可以洗幽明之寃者無所不用其極而獨神道碑未克再建行旅樵牧指點嗟歎而已今年春公之外五代孫領議政李公元翼初自謫中復起爲相鼎革之餘逆爲公之勲名事業輝暎吾東而百年▨周神道無徵爲厥予孫者寧不於顁▨有沘達城之文旣載元稿重謀入石以刻垂永不亦可乎左參賛李公時彥觀察使沈公悅兵曹參判申公景禛吏曹參議崔君嗚吉同副承旨金君自點曁浚謙同蒙▨▨指授以起其役今同樞李公愼儀曾宰首陽爲是事伐石輪干江以前郡守李君升亨幹事▨誠擧是役付之是俱爲公之外裔又有姓孫慶昌居在墓下貴主監蕫皆首▨相急之經紀焉內外諸孫官甚盛各捐錢帛以爲之費且沈公善書楷字遂▨筆刊石仍令浚謙記其寧如右經禍之後改卜新塋亦癸坐丁向之原外 六 代 孫 輔 國 崇 祿 大 夫 領 敦 寧 府 事 西 平 府 院 君 韓 浚 謙 撰外六代孫正憲大夫知中樞府事兼京畿道觀察使兵馬水軍節度事開城留守都巡察使 沈悅書并篆 <끝>

 

 

정창손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