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조광조선생 신도비(趙光祖 先生 神道碑)

야촌(1) 2009. 6. 20. 20:49

文正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幷序。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동지경연성균관사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문정공 정암조선생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 嘉善大夫 司憲府大司憲 兼同知經筵成均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文正公 靜庵趙先生神道碑命 幷序)


노수신(盧守慎) 撰


융경(隆慶) 무진년(1568), 금상(今上)의 원년(금상은 宣祖大王을 가리킴)에, 정암 선생(靜菴先生)께 영의정을 추증하시고, 이듬해 이름을 바꾸어(諡號를 말함), 도덕이 있고 들은 것이 넓으며 올바른 도리로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뜻을 취하여 ‘문정(文正)’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그 언행을 기록하게 하고 서원(書院)과 사우(祠宇)를 세우게 하셨다

대개 그것은 천심(天心)을 나타내고 인기(人紀)를 붙들어서 혁혁하게 사람의 이목에 비춰준 것이다.

이로써 이래서 한 나라의 선비들이 안정되게 되었다.

 

그 후 11년 만에 진신(搢紳, 사대부)과 포의(布衣, 벼슬하지 않은 이)들이 모두 그 묘도에 비석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서로 이끌고 와서 나 수신에게 비명(碑銘)을 위촉하였다.

 

정히 효릉(孝陵, 文宗의 능호)께서 칭상(稱賞)하던 바와 같이 제생(諸生)의 바른 학문은 선왕이 가르치신 은택의 뜻에 근본 한 것이니, 이 거사(擧事)를 누가 옳다 하지 않겠는가!

 

나 같은 말학(末學)의 소견이 얕고 말이 약한 이가 족히 써 고명한 이를 제대로 잘 나타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고 가기를 서너 번 하다가 마침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삼가 상고(詳考)하건대 조씨(趙氏)는 본래 한양사람이다. 휘 지수(之壽)라는 분이 있어서 고려의 첨의중서(僉議中書)가 되시고, 휘 휘(暉)를 낳으시니 쌍성총관(雙城摠管)이셨다.

 

총관이 휘 양기(良琪)를 낳으셨는데, 이 분이 총관 직을 습직하셔서, 나이 13살에 김방경(金方慶)의 부원수(副元帥)로써 원 나라 장수를 따라서 일본 병을 토벌해 공을 세우니, 조서(詔書)하여 금포(錦袍)와 옥대(玉帶)를 하사하였다.

 

아들은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휘 돈(暾)이요, 손자는 좌정승(左政丞) 한산 백(漢山伯)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 양렬공(襄烈公)이니, 휘는 인벽(仁璧)이시다. 이 분은 힘을 다하여 등주(登洲)의 12성을 능히 회복하시고, 서쪽으로 국경을 침입하는 것을 수복하셨다.

 

그 후세에 휘 온(溫)은 본조의 개국공신·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책록 되어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을 봉하고, 시(諡)는 양절(良節)이다. 휘 육(育)은 의영고사(義盈庫使)로서 증(贈) 이조참판이시고, 휘 충손(衷孫)은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서 증 예조판서이시다.

 

휘 원강(元綱)은 사헌부감찰로서 증 이조참판이신데, 여흥 민씨(麗興 閔氏) 현감 휘 의(誼)의 문(門)에 장가 가셔서, 성화(成化) 임인(1482)년 8월 10일에 선생을 나으셨다.

 

공은 용모가 청수(淸秀)하고 단정하여 그 놀고 희롱하는 일이나 일상의 행동거지가 곧 성인(成人)의 거동 및 법도와 같으셨다. 남의 비위(非違)를 보시면 곧 능히 그를 넌지시 타일러 그치게 하셨다.

 

자라서는 스스로 독서할 줄을 알아서 강개하게 큰 뜻을 지녔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친구 간에 신뢰 있는 것이 모두가 자연으로부터 나오셨다.

 

홍치(弘治) 을묘 년(1495년) 겨울에 참판 공께서 어천찰방(魚川察訪)이 되셨는데, 무오년(1498년) 가을에 한훤선생(寒暄先生=김굉필을 말함)께서 희천(熙川)으로 귀양 가시니, 선생께서 아버님을 따라서 갔다가, 드디어 한훤선생을 추종하면서 학문하는 대방(大方)을 들었다.

 

오랜 뒤에 돌아올 때 한훤선생이 전송하며 말하기를
“우리의 도가 동쪽으로 왔도다.”
라고 하셨다.

 

이로부터 도를 독실하게 믿고 민첩하게 탐구해서 세속의 습기를 씻은 듯이 탈피하셨다.

경신년(1500년) 여름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산소 아래서 시묘를 사실 적에, 다닐 때는 반드시 산소를 도시고 앉으면 반드시 봉분을 대하셨다.

 

당시에는 ?문공가례(文公家禮)? 가 세상에 시행하지 않았으나 선생만은 한결 같이 이 법을 존수(尊守)하셨다. 복제(服制)가 끝나매 초가집 서너 칸을 그 곁에 지어두고 사모하는 곳을 삼으셨다.

 

대부인(大夫人)을 섬기시면서 여가마다 학문을 해서 일찍이 잠깐이라도 떠나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자못 방해하고 저해하는 놈이 있어서 지목하기를,
“미친 자다”,
혹은
“화의 태동이다”
라고 하기 까지 되어, 친지들이 모두 더불어 사귀지 아니하였으나, 그렇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셨다.

 

병인년(1506년)에 처음으로 그 도를 이름 내어 사류(士類)들을 지도하였다. 오로지 한 방안에 도서(圖書)를 두었을 뿐이고, 거자업(擧子業=과거)에 대해서는 애당초 생각을 두지 아니하셨다.

 

정덕(正德) 경오년(1510년) 봄에 사마시(司馬試)를 응시하매, 시험관이 보고서 놀라 감탄하며 장원으로 정하였다. 여름에 천마산(天磨山), 성거산(聖居山)에 올랐는데. 경치 좋은 곳을 만나시면, 천천히 거닐며 시를 읊으면서 숙연히 진세(塵世)를 벗어난 듯한 생각을 가지시었다.

 

혹은 절에 거처하시며 올연(兀然)히 이소인(泥塑人)과 같았다. 괴로운 것을 참고 담박한 식사를 승려와 더불어 같이 하시고, 반드시 자시(子時)가 되어야 잠자리에 드시었다.

 

신미년(1511년 중종 6) 겨울에 상을 당하셨다. 을해 년(1515년) 봄에는 지평(砥平)의 용문사(龍門寺)에서 사셨다. 그 여름에 성균관의 천거로 특별히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를 주시자,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늘 이 시대는 옛날 시대가 아니다. 차라리 과거(科擧)로 말미암아서 도를 행해야 할 것이다. 헛된 명예가 드러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한다.”
하고 하셨다.

 

8월에 임금께서 대성전(大成殿)을 알현하고 선비에게 책문으로 시험할 때 제2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을 제수하셨다. 옮겨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시었다. 11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발탁되셨다.

 

이해 봄에 장경황후(章敬皇后)가 돌아가시자, 가을에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과 순창군수(淳昌郡守) 김정(金淨)이 같이 상소해서 신씨(愼氏)를 복위할 것을 청하자, 대간(臺諫)이 국문할 것을 청하여, 당국에 보내서 혼신(魂薪,=죄지은 사람이 신역으로 대가를 바치도록 하는 제도)을 시키자는 의론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이르러 선생께서 가장 먼저 말씀하기를
“대간의 직분은 언로를 맡은 것이므로, 먼저 스스로 언로를 두절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여, 대간들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왕께서 그들에게 체임(遞任)을 명하였다. 얼마 뒤에 선생께서도 또한 체임되어 전적이 되시었다.

 

병자년(1516년 중종 14) 봄에 호조·예조·공조의 삼조(三曹) 좌랑(佐郞)을 역임하시고 좀 있다가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뽑혀 들어갔다. 임금을 대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한사람이라도 뜻을 얻지 못한 이가 있으면 저자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라는 존재는 백성을 위해서 마련된 것입니다. 진실로 이 뜻을 알진대 낮이나 밤이나 백성으로서 마음을 삼으신다면, 다스려지고 평화스러운 상태는 기약할 수가 있습니다.”
라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노여워함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경고로써 보여주고, 형세를 타서 진보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것을 보여주어 반성하고 노력하게 합니다. 오직 천명이란 항상됨이 없는 것이오니, 심히 가히 두려워 할 만합니다.”
라고 하셨다.

 

정축년(1517년) 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으시고 교리(校理)에 나가셨다.

계(啓)하여 말씀하시기를,
“풍속이 인순(因循)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은 나쁜 것을 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마땅히 시기를 따라서 상량(商量)하여 고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고쳐서, 서로 더불어 보고 느끼게 하며 넉넉히 유도하게 하여야 하옵니다.”
라고 하셨다.

 

가을에 응교(應敎)에 승진하시고 전한(典翰)에 승진되셨다. 사면하기를 청하여 말씀하기를,
“소신(小臣)이 학문에 뜻을 두고서 성취하지 못 했사옵 기에, 바라옵건대 벽지의 고을을 5·6년간 맡기셔서 학문에도 겸하여 힘을 쓸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부디 거두어 받아들여 주시면, 바야흐로 두 가지가 다 온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셨다.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겨울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진급되셨다.무인년(1519년) 봄에 부제학(副題學)으로 승진되셨다. 이 무렵 말에서 떨어져서 낙상을 하였는데, 사실을 보고해서 올리자, 보내신 의원과 문안하는 중사가 길에 연속되었다. 계(啓)하여 말씀하기를,
“김종직(金宗直)은 유자(儒者)인지라 비록 그 당시에 대유(大儒)로서 크게 베풂을 얻지는 못했지만, 뒤에 많은 이가 풍화(風化)를 듣고서 일어난 것은 그의 공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나라의 원기(元氣)가 되어야 하거늘, 이승건(李承健)이 화를 조작함으로부터 날마다 쇠퇴하여져서, 이제 그 기운이 이른 봄의 풀이 적은 서리에도 곧 시드는 것과 같게 되었습니다.

 

어찌 열 가지 착한 것을 버리고서 한 가지에 과실을 제기하여야 하겠습니까?

종사(宗社)의 편안하고 위태로운 것은 모두 이로부터 비롯합니다.”
라고 하셨다.

 

여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겼다. 계를 올려 말씀하시기를,
“학자가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것도 또한 어렵고, 잠깐 나와서 벼슬할 적에 일을 임하면 어그러짐이 많습니다. 하물며 인군(人君)은 구중궁궐에서 모든 기무(機務)를 맡아 보시므로, 정신이 흔들리고 뜻을 빼앗기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심하고 생각해야 할 바입니다.”
라고 하셨다.

 

조정에서 논의하기를,

“도덕을 강론하여 임금을 돕고 기르는 일은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라고 하여, 수일이 못 되서 도로 전직(前職)으로 돌아가셨다.

 

이때에 대과(大科)를 베풀고자 하매 선생께서 계를 올려 말씀하시기를,
“임금께서 정치에 뜻을 두었는데도 효과가 나지 않는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능히 이것을 행하신다면 인재를 얻지 못하는 것은 걱정이 없사옵니다.”
라고 하였다. 뒤에 과연 선비를 제대로 얻었다고들 하였다.

 

가을에 삼사(三司)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할 것을 청한지 여러 달이 되었다. 이에 선생께서 직접 상소하셨다. 그 뜻에 대략 말씀하기를
“이 교(敎)를 받드는 것은 비록 여염집 백성이라 하더라도 임금 된 자가 진실로 마땅히 예를 밝히고 의를 보여서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거늘 도리어 관청을 두어서 받들게 해서, 이것을 공경하기를 마땅히 흠향(歆享)하여야 할 귀신과 같이 하여 기도하기를 음울하고 번거롭게 하고 음귀(陰鬼)가 간악한 조화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의 올바른 법에 따라 영(令)이 없는 것이니, 아래 백성들이 무엇을 법(法)받겠사옵니까?

어찌해서 굳은 결단성을 아껴서 모두들의 심정에 의혹과 침울한 마음을 갖게 하시나이까?”
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동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청함을 얻지 못하면 물러날 수가 없다.”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자 대간(臺諫)들은 모두 퇴청하였는데도, 옥당(玉堂)에서 굳게 버텨서 허락을 받으셨다.

 

또 회령(會寧) 번호(藩胡)인 속고 내(速古乃)가 몰래 깊은 산중 사람들과 결탁해서 갑산(甲山) 경계를 노략질 하니, 방어사(防禦使)를 보내어 몰래 엿보았다가 사로잡을 것을 의론하고자, 임금은 정청(政廳)에 임하시고 장수와 재상들이 두루 모셨는데, 선생이 밖에서 달려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군사를 부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은 은혜와 위엄을 펴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포첨사(滿浦僉使) 허혼(許混)이 오랑캐를 엄습해서 잡았다 하여 성종(成宗)께서 특별히 허혼을 처벌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렇거늘 이제 조그마한 오랑캐를 분하게 생각해서 대장을 명하여 도적과 같은 꾀를 행해서 나라의 체통을 크게 손상시키려 하시다니, 신은 실상 부끄럽게 여기나이다.”


임금께서도 급히 영을 내려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자 좌우가 다투어 말하기를
“군사에는 기법(奇法)과 정법(正法)이 있사오니, 그러할 수가 없다.”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다 이루어진 계책을 저해하였다.”
고 말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그런 비난을 물리치셨다.

 

이 달에 특별히 계질(階秩)을 높여서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임시키시니, 그 말을 듣고 힘껏 사양하였으나, 임금께서는 돌보심이 더욱 융성하셨다. 겨울에 임금께서 불시에 어강(御講)을 베푸셔서,

“마음을 잡으면 성(聖)이 되고 놓으면 광인(狂人)이 된다.”
는 것을 주제로 삼으셨다.

 

공이 대하여 말씀하기를,
“마음에 감응함이 있으면 일이 주(主)가 되어서 어지럽지 않는 듯한 것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외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에 도리어 더욱 혼란을 느낍니다. 잡아 두어 보존하는 것이란 한 곳에 집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반드시 매양 착한 생각을 지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정제하고 한결같이 하여 항상 각성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다.

 

하루는 임금께서 선생께 명하여 계(戒)를 지으라 하시니, 이에 「계심잠(戒心箴)」을 지어서 바치시었다.

그 서(序)에 말하기를,

“임금의 한 마음은 하늘의 큰 이치를 체(體)받아서 천지의 기운과 만물의 이치가 모두 내 마음에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의 기후와 한 물건의 성품이라도, 그 가히 내 법도에 순응하지 아니하고 어그러지거나 간사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욕심에 가려서 신령스럽고 신묘한 것이 침체되고 정과 사사로움에 질곡을 받아 능히 소통하지 못하니, 천리가 어두워지고 기도 또한 막혀서 떳떳한 윤리가 무너지며 만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하물며 아름다운 소리와 색태와 냄새와 맛의 유혹이 날마다 앞에 나열되고, 형세도 높고 높아서 또한 교만하기 쉬운 경우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셨다.

 

다시 옮겨져서 사헌부 대사헌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시었는데, 사양하고 성균(成均)을 겸하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하셨다. 또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보임하시니 사양하여 말씀하기를,
“보양하는 책임은 모름지기 노성(老成)하고 후덕한 이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신은 결코 이 이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기묘년(1519년) 봄에 김우증(金友曾)이라는 자가 사림을 무함하고 훼방한 일로 조정에서 심문을 하게 되었는데, 양사(兩司)에서는 선생께서 몸소 힐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일로 논난(論難)하여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府事)로 체임되었다.

 

얼마 안 가서 다시 부제학이 되셨다. 여름에 동지성균관사를 겸임하셨는데, 정부의 계가 있어서 다시 대사헌이 되셨다. 10월에 양사가 정국공신에 함부로 등록된 자를 삭제할 것을 청했는데, 선생께서도 또한 극진히 논하며 말씀하기를,
“성희안(成希顔)이 유자광(柳子光)에게 위임하였기 때문에 극형의 죄에 해당할 자들이 많이 끼어 있습니다.

 

위에서 이(利)의 근원을 한 번 열어 그것이 국가의 고질로 되면, 이만 있는 것을 알고 의(義)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어, 아마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11월 11일에 윤허를 얻었다. 계속하여, 공훈에 따라 품계를 함부로 가자(加資)한 것을 체직하자고 청하였으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일에 군신(群臣)들이 녹건(錄件)을 가지고서 어전에 나아가 개정하였다.

 

이날 밤 이고(二鼓, 二更)에 심정(沈貞)·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이 신무문(神武門)에 들어가서 변을 고해 올려 말하기를,
“조(趙)아무개가 그 당과 더불어 불법을 꾀하여 홀연 영추문(迎秋門)으로 들어왔기에, 이미 여러 관원들을 잡아 대정(大廷)에다가 매어 두었습니다.”
고 하였다.

 

사건이 예측할 수가 없게 될 무렵, 수상 정광필(鄭光弼) 공이 입대하기를 청하여, 눈물을 흘리며 죽여서는 안 된다고 임금님의 옷깃을 붙들고 호소하였다. 이에 가까스로 금부(禁府)에 하옥시킬 수가 있었고 모두 귀양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서생마다 울고 불며 거리마다 슬퍼하였다. 선생께서 능성(綾城)에 가셔서 북쪽 담을 헐어버리게 하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대궐을 연모하는 생각을 달래었다.

 

12월 20일에 하명(下命, 死藥을 내림)이 이르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으시고 사자(使者)에게 죄명을 물으니 대답이 없었다. 이에 친한 친구들에게 두루 편지를 썼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선인(先人)의 무덤 아래 묻게 하라.”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군(人君)을 사랑하길 아버지와 같이 하니, 하늘과 태양이 단충(丹衷)을 비춰주네.”
라고 하셨다. 드디어 졸하시니, 나이 38세이셨다.

 

휘는 광조(光祖)요. 자는 효직(孝直)이시다. 명년에 용인현(龍仁縣) 심곡리(深谷里)에 장사지냈다.
정사년(1541년 중종 36) 11월 24일 부인의 장사에 의하여, 서쪽 수백 보 쯤 되는 곳에 옮기셨다.

 

부인은 첨사(僉使) 이윤형(二允泂)의 따님이시다. 정숙하고 정성스럽고 공경하고 삼가시며, 능히 군자의 교훈을 지키셨다. 아들 정(定)은 현감 권흡(權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이 죽었다.

 

용(容)은 문천 군수(文川郡守)인데 대호군(大護軍) 이경(李鏡)의 따님에게 장가들어서 두 사위를 두었다.

사위 가운데 좌랑 허감(許鑑)은 다들 윤(昀)을 낳았고, 진사 홍원(洪遠)은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당제(堂弟) 희안(希顔)의 아들 순남(舜男)으로서 후사를 삼았다.

 

아아! 우리 동방의 호걸이 대를 이어 계속해 일어났으되, 공명과 절의에 국한이 되거나 훈고(訓詁)와 사장(司章)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이학(理學)을 한다고 이름 하는 이가 있더라도, 연마하고 궁리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고서 또한 헛되고 먼데에 관계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경공(文敬公)이 나타남에 이르러서는, 선학들이 창도한 것을 선생께서 실상 이를 이어받아 확대시키셨다. 그 학문은 자기 몸을 살피고 사욕을 극복하는 것을 앞세우시고, 공경의 태도를 지키고 정일(靜一)을 위주로 함을 요점으로 삼으셔서, 침잠하고 각려하며 정(精)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서, 능히 도를 몸에 체득하고 덕을 이루어서 성인의 정성(精誠)을 얻으셨다.

 

의관과 용모와 보고 듣는 것과 말하고 움직이는 것으로 말하면, 지나간 현철(賢哲)들을 모범으로 삼으셨다.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높이시고, 모든 경전을 발휘하셨다. 늦게는 주역(周易) 배우기를 좋아하셔서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


집에 들어와서는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부모의 뜻을 승순하셔서 곡진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셨다.

상사(喪事)에는 슬픔을 극진히 하고 제사에는 공경을 극진히 해서 한 결같이 예에 구차히 하지 않으셨다.

 

안과 밖을 절연(截然)하게 하시고 인(仁)과 신(信)을 행하셨다. 외부에 나아가서는 사람을 접하시매 그 재품(才稟)에 따라서 하시고, 품조(品藻, 즉 평가)는 그 기국과 지식에 따라 취하셨다.

 

이단을 배척해서 경상(經常)의 도리로 되돌리고자 하셨다. 남들은 그 즐거워하시고 평이하게 여기심을 볼 수가 있었지만, 스스로는 검소하고 간략함을 준봉하였다. 일찍이 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왕실에 있어서 자연히 가사(家事)에는 미치지 못하겠소.”
라고 하셨다.

 

이때를 당해서 임금께서 유술(儒術)을 숭상하시어 옛 도의를 사모하시어, 선생을 의지해서 정치를 하셨다.

선생께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품고 알아주는 이를 만난 것을 감격스레 여기시어 요순의 도로서 자기의 책임을 삼았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인군의 마음은 정치를 내는 근본입니다. 근본이 바른 연후에 정치가 서고 교화가 성취됩니다.”

라고 하셨다. 경연에서 강론의 일을 담당할 때마다 그 전날 저녁에 단정히 앉아서 글을 숙독하였는데, 마치 임금님이 곁에 계시는 것과 같이 하셨다.

 

새벽에 이르러 옷을 갈아입으시고 나아가서는 숙연히 대좌해서 반드시 임금께서 감동하기를 바라셨다.

치도(治道)를 개진하시고 사리를 명백히 하셔서, 성(性)과 정(情)의 선악이나 의(義)와 이(利)의 분변이나 하늘과 사람, 왕도와 패도의 선하고 사특(邪慝)한 분변으로부터, 학문을 높이고 변방을 방비하는 허실과 제사의 예를 다하고 국가를 흥기시키고 조상의 업적을 계승하는 득실에 있어서도 마음을 기울이고 베풀지 않음이 없으셨다.

 

날이 저무는데도 피로를 잊으시어, 임금께서도 반드시 마음을 전일하게 해서 송연(竦然)하게 들으시고, 잘 한다고 칭찬한 바가 많으셨다. 심지어 백관들은 눈을 부비며 바라보고 모든 백성들은 머리에 손을 얹고 훈취(薰醉)되어 상상하고 기대를 가져서, 거의 선생의 법도가 차차로 실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거늘 제공(諸公)들은 너무 빨리 하고자 하는 데로 기울어지고 연소한 이들은 덩달아 움직여, 옛 신하들로서 실권을 잡지 못한 자들은 원망이 골수에 박혀서 밤낮으로 기회만 엿보았다. 그래서 선생께서도 진실로 일찍이 그 기미를 보시고서 떠나고자 한지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신상(申鏛) 공과 이자(李耔) 공과 권벌(權橃) 공과 더불어 두 사이를 조정하여 실패가 없도록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일시(一時)에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비위(非違)에 의지한다.”
라고 해서 탄핵을 하려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슬프고 또한 괴이하도다.

 

다만 추대되고 권력의 끝에 붙어서 세력을 잡았던 한때의 높은 훈신들은 도리어 깊이 탐색하여 죄과를 논하되, 자기의 일에 대해서는 크게 올곧기를 경계하지 않았다. 어찌 선생께서 스스로 떠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아시고, 사악한 것을 막지 않으면 정도(正道)가 시행될 수 없다 여기셔서, 드디어 모든 힘을 다 들여서 주저 없이 격파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논평하는 자들의 말대로,
“갑자기 등용되어서 융화하여 통찰하고 실적을 쌓을 수가 없었고, 일찍이 돌아가셔서 교화를 베풀고 입언(立言)을 할 수가 없었다.”
하는 것이었던가?

 

아아! 가히 슬퍼할 만하고 가히 답답해 할 만하도다. 어찌 우리 도의 원통함을 면하겠는가?오직 우리 중종(中宗)께서 환연(渙然)히 은혜를 베풀어 유지(遺旨)를 남기시고 인조(仁祖)께서 인하여 그 관직을 회복하시고, 명종(明宗)께서 또 유념을 하여 보살펴 주시니, 능히 오늘날에 더욱 훌륭하게 될 수 있었고 또 장차 공자님 사당에 배향하게 되었다.

 

이제 위학(僞學)을 금하지 않더라도 정맥(正脈)이 의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백성들을 계몽시켜 사랑하고 미워할 바를 알게 되어 차차로 능히 분발하고 그 무언가 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누구의 공으로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그러나 네 임금께서 이것을 시종 돌보아 주지 않았더라면 누가 능히 이렇게까지 이르게 하였겠는가?

대개 대현(大賢)의 덕은 당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요, 글의 논술이란 마지못한 데에서 있게 되는 법이다.

 

가령 만일 덕에 나아간 것이 더욱 밝고 글로 지은 것이 더욱 많았더라면 다시 후학에게 유감 되고 의심할 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로 자신이 조정에 서질 못했고 조금 베풀어 한 바가 무언가 일을 할 수 있으리란 것의 조짐만 되었다면, 뒤에 군신들이 어떻게 본받아서, 간사하고 바른 것을 살피고, 흥하고 망하는 것의 원인을 따져, 이 도가 당금(當今)에 행할 수 있는 것인가를 볼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것이 하늘의 뜻인가 보다.

이에 명(銘)에 이르기를,

 

하느님이 독실하게 이어주고 열어주셔서,

질박함으로 되돌려 파괴의 뒤에 거두셨네.

 

정기의 모임이 남달라서 유례가 없을 정도라,

순전(純全)하고 순연(純然)하셔 마장(魔障)에서 벗어나셨다.

 

양심을 지니어서 망녕 됨이 없으시고,

그 마음을 보존하여 불편부당(不偏不黨) 하셨도다.

 

마음이 오로지 활발하여

팔황(八荒)을 구역으로 삼아 출입하매
만민을 다스리는 정치를 조물주의 도치(陶治)와 같이

보아당시는 한때 소강(小康)을 이루었다.

 

장차 국가의 큰 계책이 성공하려 할 무렵

널리 인재를 맞이하심에 처음으로 복응(服膺)하였으니,

기상은 금슬로서 조화한 듯 하셨네.

 

바라보면 신선과 같은 풍모에

경상(經常)의 도리를 지켜 계옥(啓沃)하시고,

법률을 지켜서 독려하셨다.

 

단단(斷斷=정성이 한결같은 모양)하게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옛 것에 근거하여 새 것을 도모해서,

왕도를 행하시고 백성을 안정시키니

백성들은 바람을 받은 풀처럼 교화되었다.

 

진실로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물욕의 가리움을 오로지 제거하였기에,

나에게 아무 병이 없었건만,

 

소인들은 물여우처럼 모래 뿜어 쏘아대고,

무리들이 이를 갈아 대었다.

 

꺼진 재가 다시 탔나니,

군주의 기색을 살피고

 

혹은 세도가의 눈치를 엿보아서

어찌하면 이간하고 어찌하면 허물할까

지나 깨나 모의했네.

 

하지만 공은 순리대로 살아가고

죽음도 편안하게 여겨

 

오로지 마음은 단충(丹衷)이어서

밝고 맑은 한수(漢水)이고

빛나는 샘과 같았도다.

 

오는 이도 있고 가는 이도 있어

끊임없이 이어져 잊지도 아니하고

어기지도 아니하니,

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는 하도다.

 

역대의 임금들이 은혜를 베푸시고

모든 선비들이 보호하고 호위하여,

아직도 그 덕이 전하는 바가 있네.

 

공(功)은 비록 고작 두어 해 동안에

깊었지만은

택은 백세토록 흘러서 내려가리라.

 

더욱더 그 온전한 덕을 볼 수 있기에

나는 어둑어둑한 이들에게 이렇게 고하노라.

 

두려워하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어질고 현명한 이를 반드시 믿어다오.

 

아아! 슬프도다!

성공하고 패하는 건

결국 하늘에 맡겨둘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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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經筵成均館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文正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幷序。

 

隆慶戊辰今 上之元年。 贈靜庵先生領議政。越明年。易名爲道德博聞。以正服之。曰文正。旣又 命錄其言行。聽建書院祠。蓋其表著天心。扶持人紀。赫赫照人耳目。於是。一邦之爲士子者定。後十有一年。縉紳韋布。咸以其墓道闕顯刻。相率來屬于守愼。正 孝陵所賞諸生正學。本先王敎澤之意。孰不良是斯擧。其如末學。見膚語綿。不足以侔高狀明。凡往返三四。終不可得而辭焉。則謹按。趙氏本漢陽人。有諱之壽。爲高麗僉議中事。生諱暉。雙城摠管。摠管生諱良琪。襲職。年十三。副金方慶從元將。討日本有功。詔錫之錦袍玉帶。子龍城府院君諱暾。孫左政丞漢山伯,龍源府院君襄烈公諱仁壁。戮力克復。登州十二城。又收西邊侵彊。歷諱溫。錄本朝開國定社佐命功臣。漢川府院君諡良節。諱育。義盈庫使。贈吏曹參判。諱衷孫。成均館司藝。贈禮曹判書。至諱元綱。司憲府監察。贈吏曹參判。聘驪興閔氏縣監諱誼門。成化壬寅八月十日。先生生。淵秀端潔。其嬉戱擧止。卽成人儀度。見人非違。輒能諷止之。比長。自知讀書。慷慨有大志。孝友慈諒。皆出自然。弘治乙卯冬。參判公爲魚川察訪。戊午秋。寒暄先生謫熙川。先生旣趨庭。遂往從之遊。得聞爲學大方。久而歸。目送之曰。吾道東矣。自是篤信敏求。脫世習灑如也。庚申夏。服斬。廬于塋下。行必繞塋。坐必對墳。時文公家禮不行。獨一遵之。制除。架茅宇數間其側。爲永思地。事大夫人。餘力學文。未嘗須臾離。然頗有謗詆。至指爲狂爲禍胎。知故皆莫與交。不少撓。丙寅。始鳴其道。陶成士類。但一室圖書。於擧子業。初不經意。正德庚午春。試司馬。考官得之驚嗟。定爲魁。夏。登天磨聖居。遇懽適處。緩步微吟。蕭然有出塵之想。或寓蓮社。兀若泥塑人。攻苦食淡。與禪共之。惟子時在寢。辛未冬。宅恤。乙亥春。栖砥平之龍門寺。夏因成均館薦。特授造紙署司紙嘆曰。今之時非古之時也。寧由科第以行道。虛譽的然。吾恥也。八月。 上謁聖策士。中第二名。除成均館典籍。遷司憲府監察。十一月。擢司諫院正言。是年春。 章敬上仙。秋。潭陽府使朴祥淳昌郡守金凈同疏。乞復愼氏。臺諫請鞫。致于理止鬼薪論。至是。先生首言臺諫職主言路。先自杜絶。不可相容。請罷。命遞。已而先生亦遞爲典籍。丙子春。歷戶,禮,工三曹佐郞。俄選爲弘文館副修撰。入對。言伊尹言。一夫不獲。若撻于市。君臣。爲民而設者也。誠知此義。日夜以民爲心。治平可期。又言天怒有二。作孼不悟。必示以譴告之。乘勢不進。亦示之使警察加勉。惟命無常。甚可畏也。丁丑春。 賜暇讀書。進校理。 啓言俗喜因循。人安汚染。宜隨時商量。可改必改。俾相與觀感。而優游以導之。秋。進應敎。進典翰請免曰。小臣志學未就。願調僻郡五六年。得兼用力於學。幸復收用。方可兩全。不許。冬進直提學。戊寅春。進副提學。馬墜移告醫問交道。 啓言金宗直儒者。縱其時大儒不得大施。後多聞風而而者。此其功也。善人爲國元氣。自李承健搆禍。日以耗喪。今其氣如早春之草。微霜便痿。其可棄十善。而擧一失乎。宗社安危。皆自此始矣。夏。遷承政院同副承旨。 啓言學者閑居工夫亦難。乍出而仕。臨事多舛。況人主九重萬機易以搖奪。此是惕念處。朝議以爲論思輔養。非此人不可。不數日。還前職。時欲設大科。先生 啓言自 上志治未效。爲不得人才也。信能行此。不患不得。後果稱得士。秋。三司請革昭格署累月。先生手疏。略曰。玆敎之奉。雖在閭氓。作元后者。固當明禮視義俾迪正方。乃反置司述醮。敬之如當享之神。祝禱幽繁。陰鬼釀奸。是乃后猷無令。下民焉式。何惜毅斷。以疑鬱群情。仍語同僚曰。今日。不得請不得退至暮。臺諫皆退。玉堂爭之兪。又以會寧藩胡速古乃。陰連深處。掠甲山界。議遣防禦使。潛伺捕梟。 上臨軒。將相環侍。先生自外至曰。禦戎安民。貴布恩威。滿浦僉使許混。襲擒獵虜。成宗特誅混。今忿小醜。 命大將行盜賊之謀。以重傷國體。臣實羞之。 上遽令更議。左右競言兵有奇正。不可因或言沮成筭。 上却之。是月。特進秩。尋兼同知成均館事。聳而力辭。 睿眷愈隆。冬。 上不時御講。以操舍聖狂爲言。對曰。心有感則事爲主。有似不亂。常人。未接物時。轉覺紛擾。操存。不是著於一處。亦不必每存善念。只得整齊虛一。常惺惺之謂也。一日。 上命先生述戒。乃作戒心箴以獻。其序曰。人君一心。體天之大。理氣皆包在吾心運用之中。一日之候。一物之性。其可不順吾度。使之乖戾邪枉耶。然人心有欲。靈妙者沈焉。梏於情私。不能流通。天理晦冥。氣亦否屯。彝倫斁而萬物不遂。況聲色臭味之誘。日湊於前。而勢之高亢。又易驕與。遷司憲府大司憲。兼同知 經筵事。請辭兼成均。許之。又充元子保養官。辭曰。保養之任。須責老成厚德。臣決不敢當此名。不許。己卯春。金友曾誣毁士林。事發廷訊。兩司以先生不欲窮詰。論。遞爲同知中樞府事。未幾。復爲副提學。夏。兼同知成均館事。用政府 啓。復爲大司憲。十月。兩司請削靖國功臣濫錄者。先生亦極論。以爲成希顔委柳子光。故當極典者。多參在上。利源一開。爲國家膏盲之疾。知有利而不知有義。殆必有不忍說之事。十一月十一日。蒙 允。繼請褫因功濫資。不納。十五日。群臣將錄。詣 榻前改正。是夜二鼓。沈貞,南衮,洪景舟等。入神武門上變曰。趙某與其黨。謀不軌。旋由延秋以入。旣掩逮多官繫大庭。事且不測。首相鄭公光弼請對。言淚俱發。至於牽裾。得下禁府。盡行竄逐。庠塾號哭。衢塗霑灑。先生責綾城。抉墻北望。以紓戀 闕之思。十二月二十日。後命至。沐浴更衣。請使者罪名。不應。乃編作親友書。有曰。吾必從先人兆。又曰。愛君如愛父。白日照丹衷。遂卒。壽三十八。諱光祖。字孝直。明年。葬龍仁縣深谷里。嘉靖丁巳十一月二十四日。因葬夫人。遷之西數十許步。夫人。僉使李允泂女。貞恪敬愼。克守君子之訓。男定。娶縣監權恰女。夙逝。容。文川郡守。娶大護軍李鏡女。有二壻。佐郞許鑑。生子昀。進士。洪遠生二女。幼。以堂弟希顔子舜男後。嗚呼。吾東方豪傑迭興。局於功名節義。溺於訓詁詞章。至或號爲理學者。非極於鑽硏。亦涉於虛遠而已。及文敬公出。先覺倡道。先生實承而擴之。其學。以省身克己爲先。持敬主靜爲要。沈潛刻厲。精思力踐。能體道成德。得聖人之誠。若衣冠容貌視聽言動。繄往哲是範。尊小學近思而發揮于諸經傳。晩好學易不暫輟。入則服勞承順。靡不曲盡。喪致哀。祭致敬。一於禮不苟。內外截然。而仁信行焉。出則接引因其材稟。品藻取其器識。排闢務欲反經。人見其樂易。自奉以淸約。嘗謂夫人曰。我心王室。自不及家。當是時。 上尙儒術。慕古誼。倚先生爲治。先生抱負經濟。感激遭際。以堯舜之道爲己任。謂君心出治之本。本正然後政立而敎達。每當講前夕。端書熟讀如在 上傍。至曉。易服而進。肅然對越。冀必感動於 上開陳治道。別白事宜。自性情善惡義利之辨。天人王伯淑慝之分。與夫崇學備邊之虛實。祭祀興繼之得失。莫不傾倒羅列。日昃忘倦。 上必專心竦聽。多所稱善。以至百僚拭眼。齊民手額。皆得熏醉。想望庶幾先王法度以次而擧。奈諸公近於欲速。年少從而鼓之。舊臣居散地者。怨恚入骨。昏晨覘釁。而先生固已早見其幾。欲去久矣。常與申公鏛,李公耔權公橃。欲調適兩間。不至敗闕。而一時有以爲依違。至擬擧劾。吁亦異矣。第推戴攀附一代高勳。顧探論已事。不戒大貞。豈先生自知不得去。不塞不流。遂悉力擊破之不顧也與。抑談者以爲驟用。無以融徹蓄積。早終。無以設敎立言。吁。其可悼可愍。詎免爲吾道之冤。惟我 中廟有渙恩遺旨。 仁廟因而復其官。 明廟又撫而有之。式克至于今日休。且將祀諸孔庭。僞學無禁。正脈有托。用牖斯民。知所愛惡。稍稍能舊發有爲。是孰使之然。然非四 朝有以終始之。又孰能與於此。大抵大賢之德。具體於初。論述之書。在不得已。借如進德益邵。著書益多。無復疑憾于後學。苟身不立於朝。少有所施爲爲之兆也。後之君臣。何所鑑法。得以審邪正。原興喪。見此道爲當今之可行。或者其天意夫。銘曰。
天篤繼開。反樸收坏。鍾異于鮮。粹然離障。存以無妄。保厥不偏。惟心之活。八荒在闥。一視陶甄。時汔小休。將升大猷。首膺廣延。明于雪日。調以琴瑟。望之神仙。執經以沃。持憲以督。斷斷拱筵。據舊圖新。行王定民。風動化宣。亶聰旣達。惟茅斯拔。則莫我瘨。有含其沙。荐磨羣牙。坑灰復燃。廼瞻容色。或伺鼻息。曷貳曷騫。存順沒安。一念如丹。昭漢炳泉。有來有歸。不忘不違。在後在前。 列聖攸惠。諸儒是衛。尙克有傳。功深數歲。澤流百世。益見其全。我告伊昧。無懼無悔。必信仁賢。嗚呼嘻噫。厥有成敗。竟歸之天。

자료>穌齋先生文集卷之十

 

 

↑정암 조광조 선생 영정

 

 

 

 

 

↑정암 조광조 신도비

 

↑정암 조광조 선생 묘/사진 출처 : 청죽림

 

[시 대] 조선

[연 대] 1579년(선조12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시도지정문화재 - 경기도기념물 제 169호

[크 기] 높이 243cm, 너비 93cm, 두께 34cm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125(지번 주소 : 상현동 산 55-1)

[서 체] 해서

[찬자/서자/각자] 이이명(李頤命) / 노수신(盧守愼) / 미상

 

●개 관

조광조(1482∼1519년)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이다. 김굉필, 정여창(鄭汝昌), 이황(李滉)과 함께 동방4현(東方四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519년(중종 14년) 정국공신(靖國功臣)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하게 청하다가 훈구파인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을사서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고, 이어사사(賜死)되었다.

 

그의 지치 주의적(至治主義的) 도학정신(道學精神)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 이이(李珥)등 많은후학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선조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여러서원에 제향 되었다.

 

비문의 찬자인 노수신(盧守愼)은 선조 때의 명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본관은 충주(忠州)이고, 호는 소재(蘇齋)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퇴계(退溪) 이황과 토론하였다. 양명학을공부하여주자학자들의공격을받았다. 휴정대사(休靜大師)와도 친교가 있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