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이산해(李山海) 신도비명(神道碑銘)

야촌(1) 2009. 4. 26. 01:30

이산해(李山海) 신도비명(神道碑銘)

 

◈ 시대 : 조선

◈ 연대 : 1819년(순조19년)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높이 325cm, 너비 75cm, 두께 31cm

◈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채제공(蔡濟恭) / 한호(韓濩) / 미상

◈개관

이 비는 1819년(순조 19년) 충청남도 예산에 건립된 이산해신도비(李山海神道碑)로, 채제공(蔡濟恭)이 비문을 지었고, 한호(韓濩)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이산해(李山海 : 1539~1609)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여수(汝受)이고, 호는 아계(鵝溪)이다.

1561년(명종 l6년) 문과에 급제하여, 1578년(선조 11) 대사간에 이르렀다. 1590년(선조 23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 백의(白衣)로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에 귀양 갔다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복관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600년(선조 33년) 영의정에 재임되어,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정에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다시 북인(北人)에 속하였다가 마지막에는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었다. 저서로는 『아계유고』가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유명조선광국(有明朝鮮光國) 평난공신(平難功臣) 영의정(領議政)

아성부원군(鵞城府院君) 시(諡) 문란(文籣) 이공 신도비(李公 神道碑)

 

번암 채재공 찬(樊巖 蔡濟恭 撰)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수충공성익모광국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輸忠貢誠翼謨光國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아성부원군(鵞城府院君) 시(諡) 문란(文籣) 아계(鵞溪)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 병서(幷序)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춘추관 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원임(原任)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채제공(蔡濟恭)은 비문을 짓고,


전액(篆額)은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고, 작은 글씨는 석봉(石峯) 한호(韓護)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나 제공(濟恭)은 우리 영고(英考 : 영조를 말함)를 섬기며 가까이서 모신 것이 몇 해가 되었다.

영조(英祖) 임금과 모시는 신하들이 선조(宣祖) 임금 때의 인물을 논하면서 매번 말하기를, “아계(鵝溪)는 실로 국조(國朝)의 명인(名人)이다.”라고 하였으니, 아계는 돌아가신 상국(相國) 이공(李公)의 호(號)이다.

 

공(公)은 선조 임금과 뜻이 맞아 지위(地位)는 비록 도상상(都上相 영의정)이었으나 당시 붕당(朋黨)이 비로소 나뉘기 시작할 때였으므로 시기하는 자들이 없는 사실을 꾸며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공공연하게 방자히 헐뜯으며 말하기를 ‘천하 후세(天下後世)를 어지럽힐 자이다.’라고 하였었다.

 

그러나 성군(聖君)이신 영조 임금께서 옛 신하를 논평(論評)하면 금 저울(金秤)처럼 정확하였는데, 번번이 공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를 호칭할 때에는 “명인이다. 명인이다.”라고 하였다. 아! 공은 태어나면서는 성조(聖祖)를 만났고 죽어서는 신손(神孫)을 만났으니, 하늘의 뜻이요 사람의 일이 아닐 것이니 또한 성대하지 않은가?


공의 휘(諱)는 산해(山海)요, 자(字)는 여수(汝受)이며, 한산(韓山) 사람이다. 고려(高麗) 말엽에 문효공(文孝公)인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문정공(文靖公)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父子)가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천하(天下)에 소문이 났다.

 

목은의 막내아들인 이종선(李種善)은 우리 조정(朝廷)을 섬겼으며 시호(諡號)가 양경(良景)이고, 그의 아들 이계전(李季甸)은 한성부원군(韓城府院君)으로 시호가 문렬(文烈)인데, 이 분들이 바로 공의 6세조(世祖)와 5세조이다.

 

고조(高祖)는 휘가 우(堣)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냈고, 증조(曾祖)는 휘가 장윤(長潤)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할아버지는 휘가 치중(穉中)으로, 연산군(燕山君) 갑자년(연산군 4, 1504년)에 화(禍)를 당하여 해도(海島)에 유배(流配)되었는데, 중종(中宗)이 반정(反正)했을 때에 비로소 용서를 받았으며, 사망할 때의 벼슬은 판관(判官)이었다.

 

아버지는 휘가 지번(之蕃)으로, 호는 성암(省菴)이고 벼슬은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냈다.

어머니 의령(宜寧) 남씨(南氏)는 현령(縣令)인 남수(南脩)의 따님으로, 공의 생모(生母)가 된다.


공이 인신(人臣) 중에서 가장 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자, 아버지는 의정부 영의정(考議政府領議政)과 한천부원군(韓川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부(曾祖父)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됨을 얻었다.

 

아버지 성암과 그의 아우인 토정공(土亭公)은 모두 그 시대의 현인(賢人)으로 덕(德)을 쌓아서 드러내었는데, 공의 몸에서 그것이 발현되었다. 그가 처음에 태어났을 때에 토정공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가 세속적인 아이들과 서로 다를 것이라고 점쳤었다.

 

자라서 돌이 지나자 스스로 글자를 해독할 수가 있어서 세 갈래로 갈라진 당파창(鏜鈀槍)을 메고 당(堂) 아래를 지나는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산자(山字)다.”라고 말하였다.

 

성암공이 황 고산(黃孤山)의 초서(草書)를 얻어 벽에 붙여놓고 즐겼는데,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종이가 약간 헐고 더럽혀져 있었다. 괴이하게 여기며 그 이유를 묻자, 유모(乳母)가 말하기를,

“아이가 저를 잡아끌기에 안아서 얼굴빛을 보니 기뻐하며 손가락으로 아래 위를 그어대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에 종이와 붓을 찾아서 곧 쓰게 하니 한 획도 어긋남이 없었으니, 그 일을 신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5세가 되어서 토정공이 그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기특하게 여겨서 태극도(太極圖)』를 가르쳤는데, 한 마디의 말로 곧 천지 음양(天地陰陽)의 이치를 알아서 『태극도』를 가리키면서 따져 묻고 비난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 밥 먹는 것을 잊었으므로 토정공이 혹시라도 몸이 상할까 염려하여 그가 읽는 것을 그치도록 하였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운자(韻字)을 불러주고 시를 짓게 하였는데 운자에 따라 거침없이 시를 짓기를,

 

“밥이 더디 되어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배움이 더디면 어떻겠으며, 배가 고파도 고민스러운데 하물며 마음이 고프면 어떠하랴? 집은 가난해도 오히려 마음을 치료할 약은 있는 법이니 모름지기 영대(靈臺)에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려야 하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토정공이 그를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6세가 되어서 큰 글자를 쓰기 위해 붓을 손에 쥐고는 비틀비틀 걸으며 귀신과 같이 붓을 휘두르며 글자를 이루었는데, 글자체가 자연스럽고 빼어나게 웅장하였다.

 

그래서 한때를 풍미하던 명공(名公)과 대인(大人)들이 날마다 문에 나아와 글씨를 요청하였으므로 수레와 말들이 줄을 지어 가득하였다. 명종(明宗) 임금께서 그의 명성(名聲)을 듣고 나아와 병풍(屛風)을 쓰라고 명하였는데, 공은 병풍 위를 걷거나 달음질치면서 글씨를 썼다.

 

그러므로 명종 임금께서 특별히 그의 발자국을 찍어서 표시하라고 명하였다. 뒷날 성암공이 그의 명성이 너무 어린 나이에 알려진 것을 염려하여 그를 데리고 동작강(銅雀江)의 사정(舍亭)으로 옮겨갔다.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과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그리고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이 호당(湖堂 독서당)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서 ‘동호독서당 도가봉래산(東湖讀書堂道家蓬萊山)’이라는 10자의 큰 글자를 써주기를 요청하여 큰 병풍을 만들어 귀하게 보관하였다.

 

11세가 되어서 비로소 과장(科場)의 나갔는데, 시험관(試驗官)이 공이 지은 글을 보고는 놀라 말하기를,

“어찌 왕 자안(王子安 : 왕발(王勃))이 지은 「등왕각서(滕王閣序)」의 ‘가을 물은 푸른 하늘과 한 빛이다.(秋水共長天一色)’라고 한 글 아래 둘 수 있겠는가?”

라고 하고는, 그것을 뽑아서 장원(壯元)에 두었다. 그리고 시권(試券)을 갈라서 나누어 가지고 갔다.


무오년(명종 13, 1558년)에는 상상(上庠 : 성균관)에 들어갔고, 경신년(명종 15, 1560년)에는 명종 임금께서 시행한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한 선비들 중에서 공은 장원을 차지하였으므로 신유년(명종 16, 1561년)의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하였고, 괴원(槐院 :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다.

 

다음해에는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로 뽑혀 들어갔는데, 다음 날에 명종 임금께서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경복궁(景福宮)’이라는 3자의 큰 글자를 쓰도록 하였다. 계해년(명종 18, 1563년)에는 저작(著作)으로 승직(陞職)하였고, 한 차례 유능한 젊은 선비를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 들어가 공부하게 하는 기회도 얻었다.

 

그때에 홍문관에서 악한 일을 꾀한 우두머리 윤원형(尹元衡)의 죄를 성토하였는데, 차자(箚子)의 문장들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같은 반열(班列)들이 목을 움츠렸다.


갑자년(명종 19, 1564년)에 박사(博士), 수찬(修撰), 정언(正言)에 임명되었고, 이때부터는 계속해서 옥서(玉署 : 홍문관)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중국의 사신들이 연이어 나왔으므로 조정(朝廷)에서는 문학(文學)을 두루 갖춘 사람을 가려서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게 하였는데, 그 일에 공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

 

한림 검토(翰林檢討) 허국(許國)과 급사중(給事中) 위시량(魏時亮)이 조칙(詔勅)을 받들고 이르러 공이 주선(周旋)하여 응대(應對)하는 것을 보고 역관(譯官)에게 이르기를, “우리 무리의 이번 걸음이 헛되지 않았으니, 동국(東國 : 조선)에는 참으로 인물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이조(吏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과 사인(舍人),홍문관의 응교(應敎)와 전한(典翰)과 직제학(直提學),상의원 정(尙衣院正), 지제교(知製敎), 교서관(校書館)의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가서 특별히 예문관(藝文館)의 응교(應敎)를 겸직(兼職)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매우 정밀하게 가려 뽑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있지 않던 일이었다. 경오년(선조 3, 1570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직되었고, 이조 참의(吏曹參議) · 대사헌(大司諫) · 부제학(副提學)에 천전(遷轉)되었다.

 

을해년(선조 8, 1575년)에는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다. 이전에 성암공이 어버이를 위하여 넓적다리 살을 벤 일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고 쇠약해지자 그것이 병의 빌미가 되어 5년 동안을 병환(病患) 가운데 있었다.

 

공은 그 사이 미원(薇垣 : 사간원), 옥서, 은대(銀臺 : 승정원)와 이조, 예조(禮曹), 공조(工曹), 형조(刑曹) 네 개의 조(曹)에서 참의(參議)로 임명되었던 적은 계산할 수가 없을 지경이나 모두 부친의 병을 구호(救護)하기 위하여 사직(辭職)하였다.

 

그리고 의지(意志)와 약물(藥物)을 반드시 극진히 갖추고 탕제(湯劑)는 반드시 손수 달였으며, 띠를 풀지 않았고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였으므로 보는 사람이 감탄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슬픔으로 몸을 훼손하여 거의 온전한 데가 없었으나 묘소(墓所) 근처에 여막(廬幕)을 짓고서 삼년상(三年喪)을 마쳤다.

 

상복(喪服)을 벗고 나서 연이어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과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제수되었고, 그 사이에는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다.


기묘년(선조 12, 1579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특별히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고, 또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옮겨져 1년 동안 있다가 정경(正卿)의 자리에 올라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신사년(선조 14, 1581년)에는 도헌(都憲 :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그 일로 사람을 보내 방문하게 하여 말하기를,

“공은 나라의 두터운 은전(恩典)을 받았으니 나라의 운세(運勢)가 위급한 이때에 마땅히 직분을 다하여 임금께 보답하는 것이 마땅할 터인데, 어째서 병을 끌어대어 선비들의 바람을 저버리려고 하는가?”

라고 하였다.

 

공은 이 말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이미 시사(視事)를 보고 분별하였으며, 진퇴(進退)를 결정함에 한결 같이 공(公)을 기준하였고, 비록 귀한 자리나 요직(要職)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인 일을 부탁하지 못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공에게 비답(批答)을 내려 이르기를,

“경(卿)이 이조 판서가 된 뒤, 문 밖에 새 그물(雀羅)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 찾는 사람이 드물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장차 경에게 보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의 벗이 정사(政事)를 하여 사람의 뜻이 다소 든든해졌으니, 세도(世道)를 구원할 수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루는 김효원(金孝元)을 사간(司諫)에 의망(擬望)하였는데, 선조 임금께서 이르기를,

“조정을 시끄럽게 만든 사람이 바로 효원 이 사람이다. 낮은 서관(庶官)이나 낭료(郞僚)의 벼슬에 비의(備擬)하면 족할 것인데, 어찌하여 아간(亞諫)에 곧바로 의망할 수가 있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소장(疏章)을 올려 힘써 효원의 등용할만한 정상(情狀)에 대해 진달(進達)하였고,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도 옥당(玉堂)으로서 또한 그렇게 말하였다. 이해에 대부인(大夫人 모친)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상례(喪禮)를 집행하는 것이 전에 있었던 부친의 상례와 같이하여 또 묘소 근처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선조 임금께서 그가 청빈(淸貧)함을 진념(軫念)하시어 관청(官廳)에서 제수(祭需)을 보내주도록 명하였고, 또 방백(方伯)에게 쌀과 콩을 내려주도록 명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특별히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승직되었고, 이조 · 예조 · 병조의 세 조(曹)의 판서(判書)를 거쳤으며, 지경연사(知經筵事)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대(兼帶)하였다.

 

갑신년(선조 17, 1584년)에는 다시 총재(冢宰 : 이조 판서)의 자리를 주었고,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을 겸하게 하였다. 이때는 동서(東西)의 분당(分黨)이 대대적으로 시작될 때여서 주인으로 들어갔다가 종[奴]이 되어 나왔으며 국론(國論)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바야흐로 공에게 마음을 붙이시고 희망을 거니, 공이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이에 이르기를, “공은 사사로움이 없으므로 내가 평소에 이런 이유 때문에 공의 손을 빌리려고 하는 것이다.

 

지극한 뜻으로 찾아낸다면 초야(草野)에 유현(遺賢)이 없을 것이고, 엄정한 낯빛으로 격양한다면 조정에 요행으로 지위에 오른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동암(東巖) 이발(李潑),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월천(月川) 조목(趙穆),송와(松窩) 이기(李墍)와 같은 이들을 모두 추천하였으니, 비록 다른 의견을 가져서 서로 기꺼워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관리(官吏)의 선발이 공평하다는 것으로 말하면 모두가 그 일에 공보다 앞설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상국(相國)인 정지연(鄭芝衍)의 병세가 위중하자 선조 임금께서 승지(承旨)를 보내어 그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천거(薦擧)하도록 하니, 정지연이 대답하기를,

“이산해는 문학(文學)과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으로 일찍이 삼공(三公)과 사보(四輔)의 명망(名望)이 있었습니다. 젊어서는 좋고 싫음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화평한 복(福)이 있었으니, 크게 등용할 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문성공이 성상(聖上)을 위해서 말하기를,

“신(臣)은 산해와 젊어서부터 우의(友誼)가 좋았으므로 그의 장점을 모두 알 수가 있습니다.

 

신과 산해로 하여금 맡은 관직에서 일을 다스리게 한다면 서로 미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나 전관(銓官)을 맡아서 인재(人才)를 가리는 일은 신이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선조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산해는 뛰어난 재주가 있으나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일찍이 덕(德)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문학과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도 세속을 진압할만한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라고 하여, 대답하기를,

“신도 평소에 마음으로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전조(銓曹)를 맡아서는 지극히 공평하여서 거의 벼슬길을 깨끗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전형으로서 조화롭게 하는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자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연이은 올린 소장에서 사직(辭職)하려는 뜻이 매우 간절하였으나 선조 임금께서 번번이 별유(別諭)를 내렸다.

 

심지어 말하기를,

“비록 10년이 지나더라도 체직(遞職)하지 않겠다.”

라고 하고는, 후사(喉司 승정원)는 사직 단자(辭職單子)를 봉입(捧入)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대관(輪對官) 김응생(金應生)이 나아와 말하기를,

“한 사람이 오랫동안 정사(政事)의 권한을 가지면 권세가 커질까봐 두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매우 노하여 친히 글을 지어서 내렸는데 그 대략(大略)에 이르기를

“이제 저 이판(吏判)의 사람됨은 덕과 재주가 두텁고 빼어나며 기량(器量)이 크고도 아름답고 충성과 절개(節槪)는 우선 놓아두고 논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용모(容貌)와 기상(氣像)에 대해서만 거론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말을 신중히 하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여 한 덩어리의 진실한 기운이 혼연히 가슴 속에 가득 쌓여서 한 점도 거짓으로 꾸미거나 궤변(詭辯)하는 모습이 없었으니, 사납고 거만한 사람은 그가 공손함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하며 교묘하게 속이는 사람은 그가 정성을 바치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이는 바로 상고(上古) 시대의 인물이지 동방(東方) 가운데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비록 진(晉) 나라의 혜제(惠帝)로 하여금 그에 대해 논의하는 일을 감당하게 하더라도 눈을 들어 한번 보면 그가 군자(君子)라고 일컬을 만한 사람임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의견대로 조정의 정사(政事)를 멋대로 하는 일은 비록 상을 주더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매번 멀리서 바라보고 일찍이 공경스런 마음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어서 인주(人主)의 그릇되고 편벽(偏僻)된 마음이 자연히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가운데에서 남이 알지 못하게 변하였으니, 참으로 군자 중의 군자라고 일컬을 만한 사람인 것이다.

 

저 응생(應生)이란 자가 나의 뜻을 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여 이에 머리를 쳐들고 혀를 놀려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이간질하였으니, 그가 한 행위는 개가 태양을 보고 짖는 것과 다름이 없다. 정당(鼎鐺)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어찌하여 이판이 우리 사직(社稷)을 위한 신하인 것을 듣지 못한 것인가?

 

지난해에는 경안(慶安)이 유성룡을 참소(讒訴)하고 올해는 응생이 이산해를 참소하니, 이 두 신하는 바로 나라의 으뜸으로 기둥과 주춧돌이 되는 신하이다. 그런데 청승(靑蠅 금파리)이 서로 어지럽히니,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라고 하니, 공이 차자를 올려 김응생을 구원하였다.

 

뒷날에 정사에 임하여 여러 차례 그 사람을 의망하니, 선조 임금께서 공에게 이르기를,

“저 사람은 경을 해치고자 하였는데 경은 도리어 저 사람을 등용하려고 하니,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은 미칠 수가 없도다.”

라고 하였다.

 

김우옹(金宇顒)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성상(聖上)께서 이산해를 의지하고 신임하시니 뭇 소인배(小人輩)들이 온갖 방법으로 그를 밀어내려고 합니다. 지난번 김응생의 말로 보더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응생이 어찌 그 혼자 준비했겠습니까?”

라고 하여, 선조 임금께서 이르기를,

“정철(鄭澈)이 그를 부추긴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러한가?”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이제 정철의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말이 그럴 만도 합니다.”

라고 하였다.

 

무자년(선조 21, 1588년)에는 좌의정(左議政)과 우의정(右議政)의 자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

수규(首揆 : 영의정)인 소재(蘇齋) 노공(盧公)이 일찍이 공과 서애(西厓) 유공(柳公)을 추천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먼저 공을 복상(卜相)하여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함께 기뻐하며 말하기를,

“정승(政丞)이 된 것이 늦었다.”

라고 하였다.

 

이해에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封)해졌는데, 대체로 종가(宗家)의 혈통을 고친 전후(前後)의 주문(奏文)이 모두 공이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았을 때에 조사하여 처단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기축년(선조 22, 1589년)에는 좌의정에 승직되었고, 얼마 안 되어서 상경(上相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이 일어났는데, 국청 대신(鞫廳大臣)인 정철이 해를 넘기면서 단련(鍛鍊)하니 최영경(崔永慶), 정개청(鄭介淸)과 같은 명류(名流) 등 여러 사람들이 또한 옥(獄)에서 죽었다.

 

이때에 치우친 의논을 주장하는 자들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고 하여 이에 말하기를,

“김면(金沔)과 정개청 등은 바로 공이 전석(銓席)에 있을 때에 임금께 이들의 학문과 행실을 아뢰어서 수용(收用)했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 모두 체포되었으니 공이 혼자서만 면할 수는 없다.”

라 하고, 또 말하기를,

“공과 상국(相國) 정언신(鄭彦信)이 옥사(獄事)를 뒤집을 것을 모의하였다.”

라고 하고는,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였다.

 

정철이 더욱 급박하게 일을 진행한 것은 그의 뜻이 실로 공에게 있었던 것이다.

또 광주(光州)의 흉악한 사람 정암수(丁巖壽)를 사주(使嗾)하여 도리에 어긋난 소장(疏章)을 올리게 하니, 공이 성(城) 밖으로 나가서 임금의 명령을 기다렸다.

 

선조 임금께서 이르기를,

“어제 경이 성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서 마음이 어지간히 놀랐었다.

그 뒤에 소장을 보고서 광주의 간악한 적당(賊黨) 몇 사람이 슬그머니 조정을 배척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경의 충성스럽고 신중함, 너그럽고 두터운 마음은 도량(度量)이 만곡(萬斛)을 실을 수 있는 선박(船舶)과 같고 옛 대신(大臣)의 풍도(風度)가 있다. 유성룡의 학문은 순정(純正)하고 나랏일에 온 마음을 다하였다.

 

내가 이 두 사람은 이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요,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된다는 것을 밝히 알고 있다.

 

그래서 평소에 본래 깊이 의지하였는데 이제 간악한 사람들이 나라의 역변(逆變)을 편승(便乘)하여 장차 두 사람을 쳐서 제거하려는 것은 나를 마치 어린애처럼 보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놀리려 하는 것이니, 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들을 사주한 간악한 사람들을 잡아내서 마음을 풀어보려고 하니, 경은 마땅히 대죄(待罪)하지 말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라.”

라고 하였다.

 

이때에 공은 감히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 마침 병세가 심하여 비록 베개머리맡이지만 매번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선비들이 많이 죽은 것은 허물 때문이 아니요. 원기(元氣)가 깎여서 그러한 것이니, 나라에서 그 일을 어찌하겠는가?”

라고 하며 여러 차례 질병을 이유로 사직(辭職)하니, 선조 임금께서 그를 더욱 높이고 총애하였다.

 

하루는 안옥(按獄)하는 재신(宰臣)들이 중서성(中書城 : 의정부)에 모였는데 공에게 말하기를,

“영남(嶺南)에서 옥사를 가리켜 ~마멸~ 하는 일종의 논의가 있으니, 마땅히 속히 주상(主上)께 아뢰어 알려야 합니다.”

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나는 듣지 못하였소.”

라고 말하고, 이어서 그들과 함께 그 의견에 대해 변론하여 마침내 그 논의를 그치게 하였다.

 

경인년(선조 23, 1590년)에는 평난공신(平難功臣)에 녹훈되었으나 공의 뜻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사기(士氣)가 꺾여서 패역한 상소가 계속되니, 선조 임금께서 윤음(綸音)을 내려 이르기를,

“인심이 어그러지고 무너져서 암수(巖壽) 무리 몇 사람이 상소하여 조정의 신하를 배척하며, 유독 우상(右相) 정철 이하 몇 사람만을 찬양하면서 스스로 곧다고 여겨 도리어 그 정상을 환히 드러냈으니, 웃을 일이다.”

라고 하였다.

 

당인(黨人)이 온갖 방법으로 공을 흔들었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자 또 공이 김공량(金公諒)과 한통속이 되어 궁궐에 연줄을 대었다고 말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옛말에, ‘나에게 만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하늘이 버리시리라.’고 하였으니, 옳은 말이다.”

라고 하였다.

 

신묘년(선조 24, 1591년) 봄에 상공인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이 굽은 것을 펴고 사특한 것을 억누르려는 논의를 창도하였다.

 

이때에 부제학(副提學) 김성일(金誠一)이 처사(處士) 최영경(崔永慶)이 무고(誣告)를 당한 정상(情狀)을 첫머리에 말하였고, 대사헌(大司憲) 이원익(李元翼)은 정철이 허물이 없는 자를 억울하게 죽인 죄에 대하여 거론하였다.

 

그래서 선조 임금께서 정철을 강계부(江界府)에 찬배(竄配)하니, 당인이 사안(事案)을 번복시키기 위해 공이 지시하여 시킨 일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원수들이 공을 미워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이때에 섬의 오랑캐 평수길(平秀吉)이 평의지(平義智)를 보내서 우리나라에 통신사(通信使)를 요구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은 편부(便否)에 따라 말하는 것이 제각기 달랐다.

 

공과 윤두수(尹斗壽)가 천조(天朝 명나라)에 주문(奏聞)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였으므로 마침내 성절사(聖節使) 김응남(金應南)의 일행에게 자못 상세하게 그 일을 주문하게 하였다.

 

성절사 일행이 도착하니, 천조에서는 유구국(琉球國)의 주문으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사사로이 일본(日本)과 우호 관계를 맺은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러나 주본(奏本)을 살펴보고 나서는 비로소 그 실정(實情)을 환히 알 수 있었고, 그 뒤 천조에서 대규모로 군대를 파견하였으니, 나라를 보존한 것은 실로 이 일을 힘입었던 것이다.


임진년(선조 25, 1952년)에 왜구(倭寇)가 크게 쳐들어오자, 오랫동안 태평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싸움을 몰랐기 때문에 여러 고을이 산산이 무너지니 흉봉(兇鋒)이 장차 국도(國都)에 접근하여 도달할 상황이 되었다. 조정의 의론이 어떤 이는 도성(都城)을 지키자는 쪽으로 말하고, 어떤 이는 북관(北關)으로 옮겨 피난하자는 쪽으로 말하였다.

 

공이 확실하게 단정하여 의견을 말하기를,

“적(賊)의 기세는 감당할 수가 없고 더군다나 상국(上國)은 부모(父母)처럼 섬기는 나라이니, 반드시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여 다급한 상황을 알린다면 비로소 길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 임금께서도 이 말을 옳게 여겼다. 그리고 또 하교하기를,

“사태가 급박하니 국본(國本)을 책봉(冊封)하는 것이 마침 옳을 것이니, 누구에게 맡겨 감무(監務)하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라고 하였다.

 

당시에 곤전(坤殿 중전)은 아들이 없었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신하된 자가 관여할만한 일이 아니며 다만 성상(聖上)의 생각에 달려있는 것이니, 속히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곧바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광해군(光海君)을 책봉하여 세자(世子)로 삼으니, 백관(百官)들이 비로소 절하고 하례(賀禮)하였다. 왜적이 이미 재를 넘었다고 보고하자, 다음날 새벽에 선조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였고, 공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호종(扈從)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왜적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니, 사람들은 감히 흉봉에 맞서려하지 못하였고 민심(民心)은 공만을 믿었다. 급작스럽게 큰 계획을 정하고 또 장차 천조에 달려가서 하소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개성(開城)에 도착하니 당인이 기회를 틈타 독기를 뻗치고자 하여, 양사(兩司)가 공이 파천을 앞장서서 주장한 것을 탄핵하였으므로 유 문충공(柳文忠公)과 함께 파직(罷職)되었다.

 

백의(白衣)의 신분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평양(平壤)에 도착하니, 또 중률(重律)로써 공을 처벌해주기를 청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부득이 평해군(平海郡)에 부처(付處)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소견(召見)하여 하유(下諭)하기를,

“중론(衆論)이 매우 어지러우나 조정할 겨를이 없도다. 아! 경은 잠시 쉬는 것이 좋겠다.”

라고 하였다.

 

을미년(선조 28, 1595년)에는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상신으로서 선조 임금에게 아뢰기를,

“임진년의 난리는 행조(行朝)에서 은밀히 상국을 가까이하고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해 황제의 위엄을 의지하여 도성을 회복한 것이니, 이것은 실로 이산해가 뭇사람들의 시끄러운 훼방을 마음에 두지 않고 급작스럽게 큰 계획을 정한 힘에 의해서 된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나라를 잘못되게 한 것으로 여기니,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습니까?”

라고 하니, 선조 임금께서 말하기를,

“이산해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니, 내가 석늑(石勒)의 난리 때에 평양(平陽)으로 피신했던 진(晉) 나라의 회제(懷帝)와 민제(愍帝), 그리고 금인(金人)에 납치되는 곤욕을 당했던 송(宋) 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과 같은 신세가 된 지 오래되었다. 그를 석방하여 돌려보내라.”

라고 하였다.

 

마침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임명되었고, 얼마 안 되어 특지(特旨)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공은 조정에 들어와서 나라를 회복시킬 계책은 인심을 수습하는데 있고, 인심을 수습하는 것은 원통하게 옥사를 당한 사람을 신원(伸冤)해주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영의정 서애(西厓) 유공(柳公)과 좌의정 두암(斗巖) 김공(金公)이 계속해서 공의 말과 같이 진달하였으니, 세상에서 공이 조정에 돌아와서 힘을 쓴 것이 많다고 여겼다.


정유년(선조 30, 1597년)에 왜적이 재차 난리를 일으켰다. 당시의 의론이 모두 일본과 강화(講和)하여 묶어둘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은 오늘의 국세(國勢)가 임진년의 난리 때와 달라서 만약 한 걸음이라도 도성을 나간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므로 오로지 전투에 뜻을 두는 것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이윽고 명나라 군대가 적을 격퇴(擊退)하니, 공은 명령을 받들고 수안(遂安)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돌아왔다. 황조(皇朝)의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일본 역사책에 연도(年度)를 기록한 아래에 황조의 연호(年號)를 쓴 것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참소(讒訴)하여 명나라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리하여 온 조정이 허둥대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춘추(春秋)』의 노 은공(魯隱公) 원년(元年) 아래에 주 평왕(周平王) 49년이라고 썼으니, 이를 끌어다가 근거를 삼으면 됩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 임금께서 장차 사신(使臣)을 보내서 무고(誣告)를 변론하려고 하였는데, 대사간(大司諫) 남이공(南以恭)이 정승 서애 유성룡을 탄핵하니 유성룡이 사행(使行)을 청하지 않았다. 마침내 유성룡으로 하여금 파직되어 남쪽으로 돌아가게 하니, 공이 세도(世道)가 더욱 험난하고 인심이 쉽게 현혹되는 것을 탄식하였다.

 

그러나 정승 서애 유성룡의 문생(門生)들은 공이 그 일에 참여한 것으로 의심하여 공을 심하게 허물하였다.

그러나 공은 묵묵히 스스로 분수로 여겨서 기미를 바깥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기해년(선조 32, 1599년) 겨울에 거듭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홍여순(洪汝諄)이 권세와 간사(奸邪)를 부리는 것이 심했는데, 공과 함께 승직되기를 바랐으나 공이 그의 간사함을 미워하여 끝내 재상(宰相)에 뽑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홍여순이 크게 원망하여 상변(上變)해서 그를 모함하려고 하였는데, 선조 임금께서 공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음을 통촉하시어 단지 관직만을 파하고 돌려보냈다. 신축년(선조 34, 1601년)에는 중추부(中樞府)에 제수되고 예전과 같이 부원군(府院君)을 겸하였다.

 

공은 강촌(江村)에서 문을 닫아걸고 농촌의 노인들과 서로 머리를 숙여 인사하니 사람들은 그가 귀한 사람인 것을 알지 못하였다. 무신년(선조 41, 1608년)에 공의 나이가 70이었으므로 여러 차례 상소하여 걸해(乞骸)하였으나 선조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수상(首相) 유영경(柳永慶)이 동궁(東宮)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한 죄를 논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서로 경탈(傾奪)하여 심지어 공이 아들을 영외(嶺外)로 보내 정인홍과 서로 내통한다고까지 말하니, 화(禍)의 기미가 언제 닥칠지 모를 정도로 다급하였다.

 

그러나 공은 태연하게 동요하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들어앉아 있었으므로 문생(門生)과 예전에 알던 관리들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오직 백사(白沙) 이공(李公)이 분명하게 말하기를,

“공이 유영경을 구원하지 않은 일은 있지만 유영경이 죽이지 않은 것만은 명백하다. 이것은 천고(千古)의 공안(公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해에 선조 임금께서 뭇 신하를 버리고 사망하시니, 공은 세상에 보기 드물게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은 자로서 달이 지나도록 소리 높여 우니 심신이 점점 쇠약해져 위태롭게 목숨을 이어갔다.

 

중손(仲孫)인 한림(翰林) 이구(李久)가 다음해 기유년(광해군 1, 1609년) 봄에 불행히도 젊은 나이로 사망하니, 공이 날로 상심하여 병이 더욱 위독해졌다. 내의(內醫)와 승선(承宣)이 문안하기 위해 분주히 길을 오갔으나 마침내 이해 8월 23일에 도성의 세 들어 머물던 집에서 사망하였다.

 

이때에 큰 별이 낮에 떨어지고 한 줄기 빛이 땅을 비추자 도성 사람들이 놀라 분주하였다. 11월에 예산현(禮山縣) 동대지동(東大枝洞) 간향(艮向)을 등지고 있는 언덕에 부인의 무덤을 옮겨 합장(合葬)하였다.


공이 조정에 서서 벼슬한 지 40여 년 동안 일찍이 재주와 지혜가 있다고 해서 남에게 과시하지 않았으며, 말은 어눌한 듯해도 풍류(風流)와 운치(韻致)는 온화하였고 동작은 더딘 듯하였으나 화기(和氣)는 넘쳐났다.

 

매번 조정에 나아갈 때면 높은 관(冠)을 쓰고 큰 띠를 찼는데 바라보면 마치 신인(神人)과 같았으며, 발을 내딛을 때면 땅에서 두어 치쯤 떨어져 허공을 걷는 듯하였으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그가 어렸을 때에 토정공이 그의 아름다운 자질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만약 배워서 채운다면 상지(上智)에 버금가는 아이가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성암공이 일찍이 생각을 깊이 간직하고 스스로 지킬 것을 권면하고 타일렀는데, 공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평상시에 거짓 없고 진실하며 조심스럽고 중후하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큰일에 임하여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은연중 어떤 상황이라도 용감하게 나아가는 기개가 있었다.

 

두암(斗巖)이 공을 칭찬하기를,

“지극히 부드러운 가운데 지극히 강한 기운을 품고 있으니, 이는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동서(東西)로 갈라진 뒤로부터 항상 말하기를,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근본 할 것이다. 기축년(선조 22, 1589년) 이전에는 동인(東人)이 반드시 옳지는 않았고, 기축년(선조 22, 1589년) 이후에는 서인(西人)이 그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사람들에게 고하고 이 말을 조정에서 부르짖으니 한 줄기 맑은 의론이 이에 힘입어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공이 살아서는 시기를 당하고 죽어서는 모함을 당한 것도 애당초 이 말에서 연유하였다.

 

평생 동안 집안일을 몰라 일찍이 기와 한 장을 덮어보지도 않았고 밭 한 두둑도 가꾸지 않았다.

집을 빌려서 살고 앉는 자리에 완전한 방석이 없어서 손님이 오면 말안장의 깔개를 깔기도 하였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새는 곳을 막기도 하였다.

 

아들 석루공(石樓公)이 공이 노년에 일상생활하기에 불편한 것을 민망하게 여겨 대략 집 한 채를 지으려고 하였는데, 말하기를,

“짓지 말라. 이대로 나의 타고난 성품을 온전히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벼슬을 그만 두고 한가로이 거처할 때에는 말 한 필에 종 하나를 데리고 산과 물을 찾아다니며 세속의 일에서 벗어나 태연자약(泰然自若)하였으며, 흥(興)이 일어날 때에는 번번이 시(詩)로 나타내었다. 글을 읽을 때에는 열 줄씩을 한꺼번에 읽었으나 잊어버리지를 않았으며 글 읽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명나라가 일본 정벌을 감행하여 나라에 수레가 가득하였을 때에는 장관(將官)과 병졸들조차도 말하기를,

“외국의 인삼(人蔘)이나 담비가 보배가 아니라 이 상공(李相公)의 시를 얻는 것이 만금(萬金)보다 더 귀한 보배이다.”라고 하였다.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도 말하기를,

“그의 시문(詩文)은 공중누각(空中樓閣)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며, 공이 공부를 하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은 세속적인 말로 간주하였다.”

라고 하였다.

 

평소에 저술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전란(戰亂) 중에 모두 잃어버리고 약간의 저서만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공이 일찍이 제갈량(諸葛亮)의 ‘신(臣)이 죽고 난 뒤에 곡식 창고에 남아있는 곡식이 있거나 재물 창고에 남아있는 비단이 있게 함으로써 폐하(陛下)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 말을 외우며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이것이면 족하다.”

라고 하였다.

 

서거(逝去)한 날에 집안에 소량의 양식도 없어 공(公)과 사(私)로 부의(賻儀)를 받은 뒤에야 염(斂)을 하고 입관(入棺)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 붕당(朋黨)이 생긴 이래로 비방과 칭찬이 모두 증오와 애정에서 나온 것이니 하나도 믿을 것은 못되지만 이른바 야승(野乘)과 패설(稗說)에 따라서 조술(祖述)하여 허위와 진실을 지껄여서 온 세상에 퍼져 진짜 역사인 것처럼 하였다.

 

공이 김공량과 한통속이라고 한 것으로 말을 하면,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주도한 자의 당여(黨與)가 몹시 막강하여 공을 매우 원수처럼 여겼으나 선조 임금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예우하여 공을 어떻게 할 수가 없자 음흉한 사람과 내통했다는 밝히기 어려운 말로 공을 더럽히려고 했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공이 ‘내가 그런 짓을 했다면 하늘이 싫어할 것이다.’라는 말로 평상시 거처할 때에 스스로 맹세했던 것은 자기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남이공(南以恭)이 유 문충(柳文忠)을 탄핵한 일로 말을 하면, 이 일에 어찌 공이 관여하였겠는가?

설령 공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남이공도 어찌 남의 지시를 받아서 탄핵을 하겠는가?

 

선조 임금께서 무신년(선조 41, 1608년)에 승하(昇遐)하고 공이 기유년(광해군 1, 1609년)에 사망하였는데, 6개월을 병석(病席)에 있으면서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한 사실은 한음공(漢陰公)이 지은 공의 묘지명(墓誌銘)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도 ‘『선조실록(宣廟實錄)』의 기록은 공이 선조 임금을 무함한 기록이다.’라는 말을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싣기까지 하였다. 『국조보감』은 매우 막중한 것인데도 이러한 거짓말로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는 온 세상을 잘못되게 하였으니, 무릇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영조 임금께서 국조(國朝)의 명인(名人)이라는 사실을 알고 외부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개인적인 미움에서 나온 것으로 치부하였으니 공에게 어찌 손상을 입히겠는가?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공으로 하여금 의주(義州)로 호종하게 했던 서애(西厓)와 백사(白沙) 등 여러 공들은 적의 예봉(銳鋒)을 꺾을 수 있는 계책으로 명나라로부터 존중을 받아 반드시 크게 괄목(刮目)할만한 업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발이 묶여 하나의 계책도 내지 못하였으니, 당론(黨論)이 사람을 해치고 나라를 해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부인 조씨(趙氏)는 좌참찬(左參贊) 조언수(趙彦秀)의 딸로, 공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 한 번도 사적인 일로 공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다. 몸종이 남의 뇌물을 받아 몰래 전달한 적이 있었는데 부인이 발끈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내가 늙었구나. 이런 말이 어찌하여 귀에 들어오는가?”

라고 하고는, 그 서찰(書札)을 불태우고 몸종을 매질하였다. 가난하면서도 베풀기를 좋아하여 녹봉(祿俸)이 문에 들어오면 자루를 가지고 오는 자가 줄을 이었다.

 

제사 때면 반드시 몸소 제물을 마련하되, 추위나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제(子弟)들이 딸과 며느리로 하여금 대신하게 할 것을 청하면, 말하기를,

“내가 제물을 마련하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 내가 스스로 정성을 다하더라도 몸을 상하지는 않는다.”

라고 하였다.

 

향년(享年) 63세에 사망하였으니, 4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이경백(李慶伯)은 19세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의 두 시험에 모두 합격하였고, 20세에 알성시(謁聖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선발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요절(夭折)하였다.

 

그 다음 이경전(李慶全)은 좌참찬을 지냈고, 계승하여 한평군(韓平君)에 봉해졌으며, 호가 석루(石樓)이다.

그 다음 이경신(李慶伸)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나 일찍 사망하였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한양군(韓陽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그 다음 이경유(李慶愈)는 일찍 죽었다. 큰딸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이상홍(李尙弘)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에게 출가하였으나 임진년(선조 25, 1592년)의 난리 때에 정조(貞操)를 지키기 위해 죽어서 정려(旌閭)되었다.

 

그 다음은 헌납(獻納) 유성(柳惺)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참판(參判) 안응형(安應亨)에게 출가하였다.

이경전은 5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이후(李厚)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그 다음 이구(李久)는 18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의 초시(初試)와 회시(會試)에서 장원(壯元)을 하였고, 20세에 문과에서 장원하여 한림에 천거되었으나 형인 이후와 함께 모두 일찍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 다음 이부(李阜)는 진사로 이이첨(李爾瞻)을 벨 것을 청한 자이나 과거(科擧) 보는 일을 그만 두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 다음 이유(李卣)는 문장(文章)에 능하였고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하였으나 일찍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 다음 이무(李袤)는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호가 과암(果菴)이다.

 

장녀는 이조 참판(吏曹參判) 조수익(趙壽益)의 측실(側室)로 출가하여 아들 조취(趙就)를 낳았는데, 진사로 벼슬은 사과(司果)에 그쳤다. 이경신의 딸은 좌랑(佐郎) 이탁(李琢)에게 출가하였고, 서자(庶子)인 이우(李佑)가 있었는데 이괄(李适)의 난리를 당하여 인성군(麟城君)에 봉해졌다.

 

이상홍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지화(李志和)는 세자익위사 사어(世子翊衛司司禦)이고, 이지강(李志剛), 이지천(李志賤)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다.

 

장녀는 지평(持平) 임숙영(任叔英)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현령(縣令) 최행(崔行)에게 출가하였으며, 그 다음은 판관(判官) 정시망(鄭時望)에게 출가하였다. 이덕형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이여규(李如圭)는 판결사(判決事)를 지냈고, 이여벽(李如璧)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이여황(李如璜)은 승지(承旨)를 지냈다.

 

딸은 부사(府使) 정기숭(鄭基崇)에게 출가하였다. 유성의 아들은 유정헌(柳廷憲)이고, 딸은 배시중(裴時中)에게 출가하였다. 안응형은 3남을 두었는데, 안헌기(安獻奇)는 군수(郡守)를 지냈고, 안헌규(安獻規)는 정랑을 지냈으며, 안헌징(安獻徵)은 감사(監司)를 지냈다.

 

증손(曾孫)과 현손(玄孫) 이하는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오직 벼슬에 올라 자취를 드러낸 자로서, 증손인 이연빈(李寅賓)은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을 거쳤으나 벼슬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그쳤다.


현손인 이운근(李雲根)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이동근(李東根)은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을 지냈으며, 이석근(李石根)은 감역(監役)을 지냈고, 이도근(李道根)은 교관(敎官)을 지냈으며, 이효근(李孝根)은 문과에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지냈으나 벼슬은 정언(正言)에 그쳤다.

 

5대손(代孫)인 이덕운(李德運)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 주서(翰林院注書)를 지냈으나 벼슬은 정랑에 그쳤으며, 서자인 이재운(李載運)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6대손인 이건(李謇)은 참봉을 지냈고, 7대손인 이수일(李秀逸)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文科承政院承旨)를 지냈다.

 

이수하(李秀夏)는 문과에 급제한 전(前)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이고, 이봉서(李鳳舒)는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냈다. 8대손인 이경명(李景溟)은 문과의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옥당을 거친 전 승지이고, 이왕명(李柱溟)은 전 도사(都事)이다.


지금 묘비명(墓碑銘)을 요청한 자는 이정명(李鼎溟)으로, 내가 감히 늙음을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그를 위하여 명문(銘文)을 쓰노라.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비 내리고 구름 나오니 하늘이 동쪽 땅을 돌아보았네.
가정(稼亭)과 목은(牧隱)의 신령(神靈)이 있어 신동(神童)을 안아서 보내주었네.


일찌감치 조정에 이름을 드날리고 병풍(屛風) 글씨는 임금 마음 움직였네.
홍문관과 독서당(讀書堂)에서는 즐겁고 화평하게 일상적인 관리 생활을 하였으나
나아가 전관(銓官)의 직임을 맡게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의 뜻을 펴게 되었네.


순정한 식견으로 사리를 밝게 살피니 뭇 인재(人才)가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있게 되었네.
성상(聖上)께서 정승의 자리 내려주셨으나 문 앞에는 청탁하는 사람 얼씬도 하지 않았네.


“경(卿)은 나를 도와 내[川]를 건널 때 노[楫]가 되도록 하라.” 하였네.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있을 때 공의 계책에 도움 받아 우리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대동강(大同江)을 건넜으니 공의 과감한 결단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가 될 수 있었겠는가?


망극한 당인(黨人)들이 기회를 틈타 살모사 같은 독기를 뿜었으나
진(晉) 나라의 회제(懷帝) · 민제(愍帝)와 송(宋) 나라의 휘종(徽宗) · 흠종(欽宗)을
성상께서 거론하여 죄 없음을 밝혀주셨네.


공이 귀양지에서 돌아와 백발 재상(宰相)이 되어
억울한 옥사(獄事)를 통렬하게 비판하니 저 당인들이 원수처럼 여기었네.


간사한 무리들이 없는 일을 날조하여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백 년이 지나 성명(聖明)하신 영조(英祖)께서 나오시니
영원히 무함(誣陷)이 풀리고 영광이 저승에까지 미치었네.


만일 사람들이 믿지 않거든 내가 새긴 이 명문(銘文) 보게 할 지어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기묘년(1819년, 순조 19) 10월 일에 세우다.

 

국역 : 노효경

--------------------------------------------------------------------------------------------------------------------------------------

 

[원문]

[頭篆]有明朝鮮光國平難功臣領議政鵞城府院君諡文籣李公神道碑

 

有明朝鮮國輸忠貢誠翼謨光國推忠奮義協策平難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春秋館觀?監事 世子師鵞城府院君諡文籣鵞溪李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監事原任 奎章閣提學蔡濟恭撰.

額集文正公許穆篆 小字集石峯韓護書

 

濟恭事我 英考昵侍者數矣 英考與臣鄰論 宣廟世人物 每曰鵞溪實國朝名人 宣廟世人物每曰鵞溪實國朝名人鵞溪故相國李公號也公契合 宣廟位雖都上相時値朋黨始分媢嫉者揑無謂有公肆訾嗷謂可以眩天下後世而以 英考之聖評論舊臣金秤靡差輙於公不名稱其號曰名人名人嗚呼公之生而遭 聖祖歿而遇 神孫天也非人也不亦盛矣乎公諱山海字汝受韓山人也麗季文孝公稼亭穀文靖公牧隱穡父子以文章名聞天下牧隱之季子曰種善事我 朝諡良景子曰季甸韓城府院君諡文烈寔爲公五世六世高祖諱堣成均館大司成曾祖諱長潤縣監祖諱穉中燕山甲子禍流海島及 中廟改玉始宥之卒官判官考諱之蕃號省菴官內資寺正妣宜寧南氏縣令脩之女實生公公貴極人臣得 贈考議政府領議政韓川府院君祖考議政府左贊成曾祖考吏曹判書韓原君妣貞敬夫人省菴與弟土亭公皆當世賢者畜德而發發在公身其始生土亭公聞呱呱聲已占其不類世俗兒甫踰朞自能解字人有荷三齒鈀過堂下者遽曰山字也省菴公得黃孤山草書貼諸壁愛玩一日出外還紙頗痕汚恠詰之姆曰兒引姆抱看色欣然指劃下上而然矣公乃索紙筆便書一畵無錯誤人莫不神異之五歲土亭公奇其聰慧敎以太極圖一語便知天地陰陽之理能指圖發難嘗讀書忘食土亭公念或致傷使輟讀待食呼以韻應口對曰食遲猶悶况學遲腹飢猶悶况心飢家貧尙有療心藥須待靈臺月出時土亭公益奇之六歲書大字握筆蹣跚如神化中揮灑字體自然奇崛一時名公鉅人日造門求之車馬爲之駢闐 明廟聞其名命書進屛風公步走屛上以書 特命書其足跡以眎後省菴公慮其聲名太率移銅雀江亭退陶李先生林錦湖亨秀朴嘯皐承任自湖堂乘舟下請書東湖讀書堂道家蓬萊山十大字作大障以珍藏十一歲始出遊塲屋考官見公作驚曰何遽在王子安秋水長天之下擢置魁割試券分去戊午登上庠兩試庚申 明廟謁聖試士公占魁直赴辛酉 殿試分隷槐院薦爲史局明年入弘文選爲正字次日 明廟召使前書景福宮三大字癸亥陞著作 賜暇湖堂時本館討元惡尹元衡罪箚辭皆出公手同烈縮頸甲子博士脩撰正言自是連拜玉署當是時華使聯翩朝廷擇文學備具者爲遠接從事莫先公翰林檢討許國給事中魏時亮奉 詔至見公周旋應對謂舌官曰吾輩今行不虛東國成有人矣拜吏曹佐郎正郎政府檢詳舍人弘文館應敎典翰直提學尙衣院正知製 敎校書校理無何特兼藝文應敎此極選之不常有也庚午陞同副承旨轉吏曹參議大司諫副提學乙亥遭父艱前時省菴公爲親癠割股年衰病爲崇彌淹五載公以其間爲薇垣玉署銀臺吏禮工刑四曹參議者不可計而皆以救護辭志物必備極湯劑必手煎不解帶全廢食觀者感歎至是哀毀幾不全廬于墓以終三載服闋連長玉署銀臺間爲國子長己卯晋嘉善特拜大司憲又移兵曹參判居一年晋正卿拜刑曹判書辛巳由都憲移拜吏曹判書公謝以病李文成公珥委訪曰公受國厚恩當此國勢危急宜盡職以報君何爲引疾以孤士望公有感斯言旣視事鑑別進退一以公雖貴要不敢干以私 宣廟賜公批有曰聞卿爲吏判門外雀羅可設予將以報卿李文成歎曰吾友爲政差强人意可以救得世道一日擬金孝元司諫 上曰致朝廷不靖者孝元是也備庶官郎僚足矣何可直擬亞諫於是公陳疏力陳孝元可用狀柳文忠公成龍以玉堂亦言之是歲丁大夫人憂執禮如前喪又廬墓終三年 宣廟軫其淸寒命官給祭需又命方伯賜米豆者數制除 特陞議政府右贊成歷吏禮兵三曹判書兼帶者知 經筵判義禁弘文提學知成均甲申復授冡宰兼兩館大提學時東西分黨始盛入主出奴國論靡定 上方屬意於公公累辭不獲則乃曰公無私吾所以平素藉手於是極意搜剔則野無遺賢正色激揚則朝無倖位若金東岡宇顒金鶴峯誠一李東巖潑鄭困齋介淸趙月川穆李松窩墍皆所薦剡雖異議之不相悅者談銓衡公平咸以爲莫公先也先是鄭相國芝衍病劇 上遣承旨使擧所知以自代對曰李某文學器度早有公輔望矣少無好惡之偏當有和平之福可大用李文成爲 上言曰臣與某自少友善可悉其所長使臣與某當官理事無不可相及而至於秉銓擇人臣知其不及矣 上曰李某有才華而不矜能予嘗以爲有德之人文學德量可鎭流俗卿意何如對曰臣亦平日心許而秉銓極公平庶可淸仕路也公以銓衡造化之地不欲久居聯章辞甚懇 上輒下別諭至曰雖十年不遞命喉司勿捧辞單金應生者以輪臺官進曰一人久秉政柄恐權重 上怒甚親製宸翰以降其略曰今夫吏判之爲人也其厚德宏才大器雅量精忠苦節姑置而勿論只就其容貌氣像以爲之論可乎言若不出口身若不勝衣一團眞實之氣渾然充積於中無一點矯飾詭辨之態暴慢者足以致其恭巧僞者足以獻其誠是乃上古人物非東方中人也雖使晋惠帝當之擧目一見決知其君子人也任已見專朝政雖賞之不爲矣予每望見未嘗不起敬人主非僻之心自然暗化於不言不動之中誠可謂君子中之君子人也彼應生者不知予意之所在乃仰首撓舌熒惑離間跡其所爲與吠日者無異鼎鐺尙有耳豈不聞吏判爲吾社稷臣乎往年慶安譖柳成龍今年應生譖李山海玆二臣者乃邦家之楨柱石之臣而靑蠅交亂至於此極抑何故也公上箚救應生後臨政屢擬其人 上謂公曰彼欲害卿卿反用彼德量不可及金公宇顒奏經筵曰 聖上倚任李某羣小百計擠之以頃日金應生之言觀之亦可知矣應生豈渠獨辦乎 上曰聞鄭澈嗾之然乎對曰今觀澈用心則人言恐或然也戊子左右相俱曠首揆蘇齋盧公嘗推轂公及西厓柳公至是先卜公拜議政府右議同朝咸喜曰作相晩矣是歲錄光國勳封鵞城府院君盖改 宗系前後奏文皆公掌文衡時所勘斷也己丑陞左議政無何拜上相時鄭汝立逆獄起鞫廳大臣鄭澈歷歲鍜鍊一隊名流如崔永慶鄭介淸諸人亦死於獄於是執偏議者欲以一綱擠異己乃謂金鄭介淸等即公在銓席所褒 啓學行而收用者今皆被逮公不可獨免又謂公與鄭相國彦信謀反獄請鞫鄭益急實在公又嗾光州凶人丁巖壽投呈悖疏公出郊坰胥命上若曰昨聞卿出心驚駭後見疏章知有光州奸賊數人陰斥朝廷卿忠愼寬厚量如萬斛之舡有古大臣之風柳成龍學問純正盡心國事予明知此兩人是國家柱石爲士林領袖平日素所倚重而今奸人乘國有釁將擊去兩人視予爲嬰兒欲弄於掌股之間不勝憤痛欲得其指嗾之奸人而甘心焉寧有過中之擧不暇他顧也卿宜勿待罪放懷安心於是公不敢不承 命而時適病甚雖枕上每口語曰士多死非辜元氣斵矣國其若之何屢以疾辞 上益尊寵之一日按獄之宰會中書謂公曰嶺南有一種論指獄事爲虗宜速啓知公答謂我未聞矣仍與之辨其議遂寢庚寅錄平難勳非公志也自是士氣沮悖疏續至 上降綸音若曰人心卒敗巖壽輩數人疏斥朝臣獨贊右相鄭澈以下數人自以爲直而反露其情狀可哂也黨人百般撓公不能得則又謂公締結金公諒攀緣官禁公咲曰語云余所否者天厭之者是歟辛卯春公與斗巖金相公應南倡伸枉抑邪之論於是副提學金公誠一首言處士崔永慶被誣狀大司憲李公元翼論鄭澈枉殺不辜罪 上命竄澈江界府黨人以反案謂公所指使仇疾公益甚時島夷平秀吉遣義智求通信我國朝議言便不便各殊公與尹公斗壽力言不可不奏聞 天朝遂於聖節使金應南之行奏其事頗詳至則 天朝因琉球國奏疑我國私好日本及覽奏本始得燭其實其後 天朝大發兵國以存者實賴此也壬辰倭大入寇昇平日久民不知兵列郡瓦解凶鋒將傳國都廷議或曰守都城便或曰移避北關便公斷然議曰賊勢不可當况上國父母之邦必西狩告急始有路 上是之又敎曰事急矣册國本方可委以監務誰可者時 坤殿未有子公對曰此非人臣所可與但在 聖念願亟降 宸斷 上即命有司册光海君爲世子百僚纔拜賀報賊已踰嶺矣翌曉 上西行公奉 廟社主扈行當是時蛇豕長驅人莫敢攖鋒民心有所恃者公倉猝定大計又將以奔訴天朝也至開城黨人欲乘機逞毒兩司初公之首倡去鄕與柳文忠並罷職以白衣扈 駕到平壤又請以重律 上不得已命付處平海郡召見踰曰衆論擾甚調劑有未遑噫卿可少休矣乙未鄭藥圃琢以相臣白 上曰壬辰之亂 行朝密邇 上國聯翩乞援伏 皇威而恢國者此實李某不顧衆噪定大計於倉卒之力到今論以誤國寧有是耶 上曰非李某予爲懷愍徽欽久矣其放還遂拜領敦寧未幾兼大提學特旨也公入朝倡言恢復之策在收拾人心收拾人心莫如急伸寃獄首相西厓柳公左相斗巖金公繼陳之如公言世以爲公之還朝之力爲多丁酉倭再動時議皆主講和覊縻公以爲今日之勢異於壬辰若出城一步事無可爲莫如專意於戰俄而天兵却退賊公承 命徃遂安行宮奉 廟社主以還 皇朝主事丁應泰以倭史紀年下書 皇朝年號讒搆本國聞於 帝擧朝遑汲公議曰魯隱公元年下書周平王四十九年援以爲據 上將遣使辨誣大司諫南以恭抨厓相不請行竟使罷官南歸公歎世道益險人心易惑而厓相門生反疑公與知咎公甚公默默自靖無幾微見於外焉己亥冬重拜領議政時洪汝諄以權壬張甚望公同陟公疾其奸終不許甌卜汝諄大嗛上變欲陷之 上燭公無他只罷官歸辛丑敍拜樞府兼府院君如舊公閉戶江村與田叟野夫相問訊人不知其爲貴人戊申公年七十累疏乞骸 上不許時仁弘疏論首相柳永慶謀危 東宮之罪朝議相傾至謂公送子嶺外與仁弘相通禍機朝暮且急公夷然不爲動杜門却掃門生故吏亦不得見其面惟白沙李公明言曰公之不救柳則有之不殺柳則明矣斯可謂千古公案矣是歲宣廟棄羣臣公以不世知遇歷月號痛精力漸危綴仲孫翰林久以翌年己酉春不幸短命公日疚懷疾益篤內醫承宣致問交於道竟以是年八月二十三日卒于京師僦舍有大星晝隕芒燭地都人奔走驚駭十二月禮葬于禮山縣東大枝洞負艮之原遷夫人葬而祔焉公立朝四十九年未嘗以才智先人言若訥而風韻溫然體若遲而和氣盎然每當趨朝峩冠大帶望若神人靴蹀之間去地數寸若步虛然人異之方其幼少土亭公稱其資質之美曰若使學而充之便是上智亞矣省菴公嘗勉諭以崇深自持公克受庭訓平居恂恂謹厚然一朝臨大事決大疑隱然有千萬人吾徃之意斗巖稱公曰至柔之中蘊至剛之氣非人所可及云自夫朝論乖刺常曰亡國必本於是矣己丑之前東人未必盡是己丑之後西人有不得辭其責者以是告于人以是倡于朝一脉淸議賴以扶持然公之生而見嫉死而揑無亦未始不由於此也平生不識家人産業未嘗謀一屋之覆一壠之植僦屋以居坐無完茵客至或藉馬韉天雨以席蔽漏子石樓公憫公衰境不能適興居欲略構一舍則曰毋以全吾素性其解務閒居匹馬單僕徃來山水間澹然於事物之外有時遣興輙形於詩而已讀書十行俱下未有遺忘而亦未見其咿唔也當 天朝經理東征軒盖滿國雖將官卒伍至謂異國蔘貂非寶得李相公詩筆其寶不啻如百貝河西金先生亦以爲公之詩文比如空中樓閣出自天分若着工讀書則是塵土語矣平日所著述甚多盡失於兵火有若干卷行於世公嘗誦諸葛亮臣死之後不使倉有餘粟廩有餘帛以負階下之語曰人臣事君斯亦足矣捐館之日家無甔石待公私賻贈然後始歛棺焉公歿後庶孫佑爲适幕下屢夢佑使告變亦異矣嗚呼朋黨以來毀譽皆出憎愛一無足取信而所謂野乘稗錄從以祖述喙喙幻眞布諸一世有若信史者然若公之締結金公諒云者孰不知其主己丑獄者黨與甚盛仇視公殊甚而 宣廟禮遇終始靡替無如公何則乃以交通幽陰人所難明之說欲汚衊公耳公之以天厭之天厭之自誓於燕居之中者非所以暴其心者耶南以恭之抨柳文忠此何與於公也設令公有是心南亦豈被人指使而爲之者耶至若 宣廟昇遐在戊申公之卒在己酉而病淹六朔口不能語昭載於漢陰公所著公之誌乃以 宣廟實錄謂公之誣筆至登於 國朝寶鑑寶鑑是何等至重而以此衛言上而欺 君上下而誤一世可慨也已雖然 英考旣知爲國朝名人在外啾喧之專屬私惡者顧何捐於公也所可恨者使公執靮龍灣如西厓白沙諸公其所折衝樽

見重 天朝必有大可觀者而顧乃纍蟄東海上不得出一謀猷黨論之害人國乃至斯歟夫人楊州趙氏左參贊彦秀之女公之秉政一不以私事累公有侍婢受人苞苴而潛達焉夫人拂然曰吾衰矣此言奚入於耳也火其書笞其婢貧而好施與俸祿入門持槖者相續祭祀必躬饌無問寒暑子弟請使女婦替勞焉則曰吾不執饌猶不祭我自盡誠不爲傷也享年六十三而卒有四男四女男長慶伯十九生進兩試二十擢謁聖文科入南床極選不幸夭次慶全左參贊襲封韓平君號石樓次慶伸魁進士早折 贈吏曹判書韓陽君次慶愈殤女長適弘文校理李尙弘次適領議政文翼公李德馨烈死壬辰亂旌閭次適獻納柳惺次適參判安應亨慶全五男一女男長厚文科吏曹正郎次久十八魁生進初會二十魁文科薦爲翰林與兄厚皆早夭次阜十九進士即請斬李爾瞻者廢擧不出次卣能文章善草隷早夭次袤禮曹判書號果庵女適吏曹參判趙壽益側室男就進士滫司果慶伸一女適佐郎李琢有庶子曰佑値适亂封麟城君李尙弘三男三女志和翊衛司禦志剛志賤漢城左尹女適持平任叔英次縣令崔行次判官鄭時望李德馨三男一女圭判決事如璧縣監如璜承旨女適府使鄭基崇柳惺男廷憲女適裴時中安應亨三男獻奇郡守獻規正郎獻徵監司益玄以下多不盡錄惟發迹登仕者曾孫寅賓文科歷玉堂正僉中樞玄孫雲根縣監東根文科講院文學石根監役道根敎官孝根文科講院說書上正言五代孫德運文科翰注止正郎庶載運參奉六代孫謇參奉七代孫秀逸文科承政院承旨秀夏文科前漢城左尹鳳舒文科典籍八代孫景溟文科重試歷玉堂前承旨柱溟前都事今之乞銘者鼎溟濟恭不敢以老耄辭謹爲之銘銘曰


雨降雲出天眷于東稼牧有鬼抱送神童

揚于廷彩動 人主玉署湖常晏晏平步晋秉銓衡方始展布淸鑑懸鐿羣材躍鱗 華袞天降羅崔之門卿惟相子俾楫于川國有危難所賴公策奉我 廟社浿江之沙微公果斷國奚以國黨人內極乘機虺毒懷愍徽欽聖諭明晢公歸自海皓首黃閣痛說獄濫彼哉仇視奸喙揑無何所不至百年之後 英考聖明誣消萬代榮及九京人如不信視我刻銘


崇禎紀元後四己卯十月 日立.

 

 

 

 

 

↑아계 이산해 영정(鵝溪李山海 影幀)

 

↑아계 이산해 묘(鵝溪李山海 墓)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방산리(방산저수지 안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