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西溪 李得胤 墓碣銘.行狀) - 익재공후 한당공파

야촌(1) 2009. 4. 24. 20:19

■ 괴산군수 이공 묘갈명(槐山郡守李公墓碣銘) /26世

 

백헌(白軒) 이경석 찬(李景奭 撰)

[1595년(선조 28)∼1671년(현종 12)]

 

서계(西溪)는 고(故) 괴산군수(槐山郡守) 이공(李公)의 호이다.

공이 하세한지 二十七년(1657, 효종 8) 되던 해에 그의 손자 만헌(萬憲)이 고(故) 승지(承旨) 변군(卞君=故右承旨卞時益을 말함)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墓碣銘)을 나에게 청하였다. 누차 왔는데 뜻은 더욱 간곡하였다.

 

내가 병이 들어서 오랫 동안 글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서울에서 머물고 있었으니 내가 어찌 느끼는 바가 없겠는가? 또 내가 계해년(인조 원년)는 겨울에 예문관(藝文館)에 한자리를 더럽히고 있어서 일찌기 공의 상소문을 본적이 있다. 상세하게 기록할수는 없으나 대개 오음[五音: 궁(宮)。상(商)。각(角)。치(緻)。우(羽)]을 가지고 사람을 관찰할수 있다는 것이다.

 

음이 그 조화를 상실했을때, 변란이 생긴다는 이론이었다. 과연 얼마 안가서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어켰다.

내가 마음으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변군(卞君=卞時益)은 공의 문인으로서 나에게 공의 평생 도학의 깊이를 말해 주었다. 내가 흔연히 사모하여 한번 찾아가서 그 교화를 얻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러니 지금 감히 사양할수가 없다. 그 가장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公)의 이름은 득윤(得胤)이고, 자는 극흠(克欽)이다. 경주(慶州) 사람이니 신라(新羅)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 공의 시조다.

 

고려(高麗)때 익재(益齋)선생 제현(齊賢)이 그의 구대조(九代祖)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윤인(尹仁), 창평현령(昌平縣令) 공린(公麟),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곤(鯤)은 차례로 공의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부(祖父)가 된다.

 

아버지의 이름은 잠(潛)이요. 진사(進士)다. 성균관(成均館)의 추천으로 영숭전[永崇殿=조천(祧遷)한 대왕을 모신 궁] 참봉(參奉)과 동몽교관(童蒙敎官=어린이를 가르치기 위해 각 군현에 둔 벼슬)을 제수(除授) 받았으나 다 취임하지 않았다.

 

선비(先妣) 강씨(姜氏)는 장사랑(將仕郞=從九品) 응청(應淸)의 따님이고, 정당문학(政堂文學) 회백(淮伯)의 후손이다.

공이 가정(嘉靖=명나라 세종의 연호) 계축(癸丑, 1553, 명종 8) 윤 3월 30일에 출생하였다. 젖 먹을 때 부터 의젓하여 깊고 무거운 기상이 있었다. 취학하여 공부하매 번거로이 가르치지 않고 스스로 노력하여 능히 익혔다.

 

교관공(敎官公=아버지를 가리킴)이 크게 기이하게 생각하여 큰 선비가 되리라고 기대 하였다.

성장함에 이르러 경전(經典)을 읽어 대의(大義=큰의리)를 강구하여 밝혔다. 을해(乙亥, 1575 선조 8)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3년 동안 여막에서 제도(制道)를 지키고 제사를 받들어 한결같이 예(禮)에 따랐다.

묘 아래에 조그만한 집을 짓고 추원(追遠)이라는 편액(扁額)을 써 붙였다. 대개 계절에 따라 향화(香火)를 받들자는 것이었다.

 

나이 二十이 넘어서 서이와기[徐頤窩起=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으로 자는 시하(待可), 호는 이와(頤窩), 또는 고청(孤靑) 그는 처음에 단학(禪學=불교의 선(禪)에 관한 학문)을 좋아하였으나 二十세때,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만나 보고 비로소 유학(儒學)에 힘썼다]의 문하에 집지(執贄=취학)하여 대학(大學),심경(心經),주역(周易). 계몽(啓蒙)등의 서적을 토론하고 물러가서 더욱 스스로 노력하였다.

 

「후일에 유학으로 이름 날 사람은 반듯이 이 사람이다」고 하였다. 박수암(朴守菴-수암은 호) 지화(枝華; 1513 - 1592)가 주역에 밝다는 말을 듣고 가서 질의 하였더니 공이 의심나는 것은 수암(守菴)도 또 응대하지 못했다. 학자들이 자주 칭찬하여 말하기를「세상에 주역을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만 오로지 정밀하고 투철하기는 이 아무개 뿐이다」고 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 공리을 떠난 자기 자신을 올바른 사람을 만들기 위한 학문)에 뜻을 독실히 하고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는 조촐히 여기지 않았다. 무자년(1588, 선조 21)에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과거에 응하여 진사에 급제하였다.

부모를 위하여 한 것이었다.

 

정유년(1597, 선조 30) 정월에 학문과 행실로 추천받아 희릉(禧陵: 中宗의 제1 계비 章敬王后 尹氏의 릉) 참봉(參奉: 從九品)을 제수 받았으나 올라가서 사은(謝恩)만 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3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 하기를 부친상 때와 같이하였다. 선세 때부터 청주에 살아서 선영곁 작은 시냇가에 정사(精舍: 학문을 가르치려고 마련한 집)를 하나 짓고 이에 인연하여 스스로의 호를 지었다.

 

재(齋)의 이름은 완역(玩易: 주역을 좋아한다는 뜻) 이라고 하고 시내 이름은 불사(不舍: 계속하여 쉬지 않는다는 뜻) 라고 명명하였다. 드디어 문을 닫고 독서하여 세속의 속된 일과는 인연을 끊었다. 경자년(1600, 선조 33)에 발탁되어 왕자사부[王子師傅: 왕자의 스승. 그중 세자의 스승은 세자사부라 한다. 속칭 산림(山林)이라고도 한다]를 제수 받았다.

 

선조가 특별히 말(斗)을 내려 보내어 명소(命召) 했기 때문에 공이 부득이하여 올라가서 사은하고 장계를 올려 해임해 주기를 요망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왕자를 가르치는데 엄격하면서도 근신하였다. 권학(勸學: 학문을 힘써 배울 것을 권함)의 잠언(箴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훈계가 되는 짧은 말) 을 써서 면려(勉勵: 어떤 일을 애써서 하다 )하였다. 선조(宣祖)가 심히 가상하게 여겼다.

 

임인년(1602, 선조 35)에 기한이 차서 형조좌랑(刑曹佐郞-正六品)으로 전임되었다. 이어 병으로 돌아왔다.

계묘년(1603, 선조 36)에 공조와 형조의 정랑(正郞-正五品)을 제수 받았으나 다 병으로 사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빈부(儀賓府=부마궁) 도사(都事-從五品)를 제수 받았다. 사은하고 곧 돌아왔다.

 

갑진년(1604 선조 37)에 의성현령(義城縣令-從五品)으로 발령이 났다. 공이 여러 차례 은명을 사양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부임하였다. 정치는 인과(仁)과 사랑을 제일 목표로 하고 자기 자신을 규율하는데 청렴하고 결백하게 하였다.

어사가 사실대로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선조가 의복 한 벌을 하사하여 표창의 뜻을 표하였다.

 

3년 동안 거곳에 있다가 뜻에 맞지 않는 데가 있어서 인끈을 풀고 돌아왔다. 백성들이 사모하여 마지 않았다.

광해(光海) 때에 국사가 매일 틀려 돌아가서 공이 곧 옥화대(玉花臺)로 이사하였으니 바로 서계(西溪) 동쪽 수십리 지점이다.

 

시내와 산이 구비 구비 돌아서 무이(武夷: 주자가 살던곳. 무이九曲이 있다)와 흡사하였다.

드디어 구곡(九曲)으로 이름을 짓고 제5곡에다 수간짜리 집을 얽어 당(堂)은 춘풍(春風)이라고 하였고, 헌(軒)은 추월(秋月)이라고 하였다.

 

좌우에다 도서를 넣어 놓고 의리를 탐구하여 늙음이 장차 이르려 함도 깨닫지 못하였다.

세상과는 족적을 끊고 오직 김 사계(金沙溪)와 서신 왕복으로 태극도(太極圖)와 주역을 논난(論難: 어떤 대상이나 소재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서로 다르게 주장하며 다툼) 하였다. 읍(邑)에 선정(先正: 현인)의 서원(書院)이 있는데 여러 선비들이 공을 추대하여 원장으로 삼았다.

 

공이 그들을 위하여 학규(學規: 규칙)를 마련하여 선비들을 가르쳤다. 만약 학문의 방법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심지를 밝게하여 기질을 바루어서 본연의 성(性)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신해년(1611, 光海 3)에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성종 22)∼1553(명종 8)] 선생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연산군 7)∼1570(선조 3)]선생을 무고하고 헐뜯었으므로 성균관 유생들이 정인홍의 명단을 청금록(靑衿錄=조선 시대,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 있던 유생의 명부)에서 제명하였다.

 

광해가 주모자를 금고(禁錮, 공민권 박탈로 벼슬을 못하게 하는것)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서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사기가 한번 꺾이면 공론이 없어지고 나라의 명맥이 끊어질 것이다」고 하여 三南(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에 통문을 내었다. 정인홍(鄭仁弘)의 무리들이 한 때 쏘아주려 하였으나 마침내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이이첨[李爾瞻, 1560(명종 15)∼1623(인조 1)]이 폐모론을 고취하여 성균관에 있는 그 무리들을 사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조선 선조의 계비)의 죄상을 수죄(數罪=범죄 행위를 하나하나 들추어 열거함)하여, 사방에 통고하였다.

 

공이 그 글을 보고 차마 똑바로 볼수가 없어서「사람들이 국모없는 나라에서 구차하게 살수있는가?」고 하며 바로 그것을 불살러 없애도록 하였다. 이를 보는 사람들이 얼굴빛이 변했으나 공은 털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계해(1623, 인조 원년)에 반정(反正)되자 공을 유일(遺逸=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 관직에 등용되지 않은사람)로 추천하여 재차 지평(持平-司憲府 正五品)에 망(望)을 두었다가 공조정랑(工曹正郞-正五品)을 제수하였다.

 

공이 병으로 곧 취임하지 못했다. 특히 말을 타고 오라는 명령이 내렸다(이런 경우에는 말을 보내줌) 공이 들것에 메여서 입궐하여 사은 숙배하였다. 상소문을 올려서 관직에서 물러갈 것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어 명소 받아 입시하여 반복 진계한 것은 사람의 근본 즉 천성을 함축하여 양성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상감이 경청하고 쌀과 콩을 내리도록 하되 그 정도가 사계(沙溪=金長生)와 똑 같이 하였다.

공이 사은하고 그 기회에 다시 소장(疎壯)을 올려 전번의 소장의 뜻을 부연했다. 더욱 더 상세하고 구체적이었다.

 

상감 께서 가상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가을에 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토목과 영선을 맡아보던 관아의 從四品벼슬)으로 전임되었다. 어찬(御饌= 수라상 또는 수라상과 똑 같은 정도의 식사)을 내렸다. 특별한 대우이다.

 

공이 마음에 감격하였으나 병으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또 장계를 올려서 해임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또 해와 달과 별의 삼재(三才)가 운동에 있어서 그 상궤(常軌)를 벗어났음을 아뢰었다. 말이 대단히 절실하였다.

 

상감께서 비답을 내려 말씀하기를「내가 즉위함으로서 인연하여 천지의 변이 거듭 일어나니 내심 스스로 두려워하는 바로서 할바를 알지 못하겠다. 전후에 걸친 진술은 마땅히 명심하고 생각할것이니 모름지기 가지 말고 머물러서 나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라」고 하였다.

 

공이 고향에 돌아간지 3개월이 넘었는데도 직책을 해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도목정사(都目政事)를 위에서 친히 결정하여 괴산군수(槐山郡守-從四品)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그 이튿날 상감께서 이조의 관리 오윤겸[吳允謙,1559(명종 14)∼1636(인조 14)]. 최명깅[崔鳴吉, 1586(선조 19)∼1647(인조 25)]등에 말씀하시기를「이득윤이 선조(先朝: 먼저 조정)에 공로가 있었고 또 청렴하고 근신함으로써 이름이 있으니 내가 표창하려 하였으니 아직까지 이루지 못하였다. 一품계 더 가자하는 것이 어떠한가?」고 하였다.

 

오윤겸(吳允謙) 등이 산림(山林)에서 독서하는 선비는 본래 유자(儒者)로서 이름이 있는 것이니 성교(聖敎)가 마땅하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있어서 특히 통정(通政=문신의 정3품 상계(上階)의 품계명)의 품계를 가자하여 군수(郡守)에 임명하였다.

 

공이 사은하고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마침 이괄(李适)의 난리를 당했다. 의리상 사직하기도 어려워서 괴산군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본뜻은 아니었다. 제일 먼저 백성의 병폐를 물어서 상소로 임금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쌓인 폐단을 일소하였다.

 

이에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 혜택을 입었다. 흩어진 백성들이 다시 모여 들었다. 풍화를 두텁게 하기위하여는 향약(鄕約=조선 시대,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 규약)을 명백히 하였고 소년 교육의 권장을 위하여는 도훈장(都訓長= 훈장을 총 감독하는 훈장)을 두었다.

 

백성의 풍속이 점점 변하였는데 겨우 일년만에 사직하고 돌아갔다.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그 덕을기렸다.

정묘년(1627, 인조 5) 난리(丁卯胡亂을 말함) 때는 공의 연세가 이미 높아서 행재(行在= 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곳)에 가 볼수가 없어서 고을사람들과 상의하여 군중을 모집하여 가지고 달려가서 문안하려 하였는데 난리가 진압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만 두었다. 어가(御駕: 예전에, 임금이 타는 수레를 이르던 말)도 돌아왔다.

 

공이 병을 부축 받아 성안에 들어가 장계로 자기의 사정을 열거하고 또 상수(象數= 주역의 이치를 해석한 편 이름)로써 다스리고 어지러운 이치를 밝히고 자강(自强: 스스로 힘써 나가는 뜻)하는 도리로 종결지어 아뢰었다. 위에서 넉넉한 비답을 내렸다.

 

기사년(己巳= 1629, 인조 7) 계동(季冬= 음력 12월)에 감기로 여러달을 지났다. 옆에서 모두 침을 맞아 보라고 하였으나 공이 듣지않고 말하기를「한번 죽는 것은 떳떳한 이치다. 성현도 면치못하는 일인데 황차 내가 나이 임박하였으니 의술에 의하여 삶을 구하는 것은 구차하지 않으냐?」라고 하였다.

 

장차 역책(易簀=현인의 죽음)하려 할때 부녀는 다 내 보내고 금침을 반듯이 하고 좌우의 부축하는 사람을 물리치고 편안한 자세로 마치었다. 때는 숭정(崇禎, 1630) 5월 28일 이니 수 78세였다. 하세했다는 말을 듣고 그날 마을사람들이 모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혹은 며칠씩 고기를 먹지 않고 소(素: 고기를 먹지않고 채식함)하는 사람도 있었다. 친구들과 문인들이 상에 임하여 일을 처리하고 예로써 염습하였다. 이해 8월 25일에 선영 서편 오향(午向)의 자리에 안장하였다. 공의 유명에 따른 것이다.

 

이에 앞서 공이 일찌기 옥화동(玉華洞)에 자리를 잡아 놓았다. 병세가 위중하게 되매 자제들에게 말하기를「내가 차마 선영을 멀리 떠날 수가 없다」고 하여 여기에다 장사 지내도록 한 것이다. 남에게 빌려준 서적은 자제들에게 다 기록하여 돌려 오도록하였다. 자제 홍유(弘有)가 하고 싶은 말씀은 없느냐고 여쭸더니 아무런 다른 말이 없었다.

 

다만 목구멍 사이에서 작은 소리로 형제가 가난하여 같이 살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계씨(季氏) 통례(通禮: 조선시대 국가의 의례(儀禮)를 관장하였던 관서의 正三品 벼슬) 광윤(光胤)이 멀리 영남에 살았다. 하세하기 전에 완역재(玩易齋) 동쪽 산 기슭에서 큰 돌이 홀연히 스스로 굴러 떨어져 그 소리가 꼭 우뢰와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공이 하세할 징조라고 하였다. 장례날에 원근에서 온 사람들이 수백명이 되었다.

전에 다스렸던 고을 사람들이 모두 쌀과 베를 부의로 가지고 왔다. 여러 선비들이 의견이 동일하여 서로 존봉하여 서원에 봉안하여 제향지냈다.

 

공의 천품이 순후하고 효성과 우애는 선천적인 것이었다. 친기(親忌: 부모의 제사) 때는 반드시 십일 동안을 재계(齊戒)하고 소(素: 고기를 먹지않고 채식함)하였다. 애통하는 것이 초종[初終-초상이 난 때로부터 졸곡(卒哭)까지의 기간]때 성복(成服)하기 전과 같았다.

 

닭이 울 무렵이면 의관을 정제하고 사당에 예하였다. 삭망(朔望=상중에 있는 집에서, 죽은 이에게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지내는 제사) 차례와 출입할때 고알(告謁: 나간다고 고하고 다녀왔다고 가서 뵙는것)을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폐하지 않았다.

 

백모(伯母) 열녀(烈女) 나씨(羅氏)가 후사가 없어서 뒷 일을 공에께 부탁하였다. 공이 그 백모가 살아서 계실 동안 섬기고 또 사후에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것이 어머니나 다름이 없었다. 형제와 자매에게 전답을 분제하고 비복을 나눌 때도 자기는 하찮은 것을 취하였다.

 

의복과 음식은 검소함을 숭상 하였다. 친구들에게는 급함을 도와 주었으며, 혼례나 장례 때에는 힘껏 도와 주었다. 평거하고 있을 때에는 장중하고 간목(簡黙: 근신하여 침묵하다) 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는 즐겁고 온화하였으며, 사람들이 정치를 옳으니 그르니 하며, 남을 기니 짧으니 하면 곧 정색하고 대꾸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탄복하였다. 남의 착한 것을 보면 기뻐서 찬양해 주고, 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깨우쳐서 바루어 주었다.

 

학문은 연원(淵源=사물이나 일 따위의 근원)이 있고, 사색하고 분석하는 공을 쌓았다. 서실에서 정좌하여 하루 종일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경전(經典=유학의 성현이 남긴 글을 이르는 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특히 주역에 힘을 다하여 주역이 전하여 지지 않는 것을 깊이 한탄하였다.

 

일찌기 말하기를「주역에 과목만 업을 삼으면 입으로 정전(程傳: 정자가 주역을 해석한 전)을 말하되 의리에 어둡고 점치기를 취하는 사람들은 본의(本義: 朱子가 주역을 해석한 편의 이름」는 버리고 상수(象數= 주역의 象과 數)에만 빠지니 체(體=본체)와 용(用=작용)이 서로 어긋나서 길흉(吉凶)이 도시 뒤범벅이 되어 맞지 않는다. 그러한 방법으로 인(仁). 의(義). 중(中=중도). 정(正)에 맞기를 바라니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고 하였다.

 

공이 항상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해석을 탐구하고 또 혼자 그 오묘한 뜻을 터득하였다.

미래사를 예언하면 후에 마땅히 뉘우친다. 하여 부절(符節)이 맞지 않는것 같이 하였다.

 

선조가 바야흐로 주역을 강론하려 하였는데 주석(주를넣어 풀이하다)이 잘못 전하여진 것이 많았으므로 교정국을 설치하고 당시의 주역에 밝은 학자를 선발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공이 제일 책임자로 선발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 하였다.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從五品)가 되었을때, 대관[臺官: 사헌부의 지평(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대사헌(大司憲)을 통 털어서 일켣는 말]이 너무 급진적인 승직이라고 논박하였다.

 

상감께서 주역을 교정했음으로써 승진시켜 주는것이라고 답하였더니 대관(臺官들이 잠잠했다.  공이 생각하기를「산야의 천한 인생이 누차 왕은을 그릇되게 받아서 대관(臺官)들의 논박이 나오자 그것을 이와 같이 뒤덮어 주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리요. 하고 드디어 행장을 재촉하여 사은했던 것이다.

 

선조가 특히 내선(內膳=내섬시 : 二品이상의 관원과 왜인, 여진인을 접대하기 위한 주방을 맡아 보았던 관아)에서 마련한 음식을 내렸다. 그 이튿날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진실은 이와 같다. 공이 본래 부터 산수를 좋아하였다.

 

독서하는 틈에 산수 간을 거닐어 두 가지 좋아하는 것을 얻어서(二樂: 이요로 발음한다. 락(樂)은 좋아한다는 뜻이다.

공자의 말씀에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知者樂水). 라고 논어에 있다.

 

산도 좋아하고 물도 좋아한다는 뜻이다.) 시부로 나타냈다. 서계(西溪)와 옥화(玉華)에 각각 육(六) 수의 노래가 있으니 대개 도산 十二곡을 본뜬것이다. 거문고 한채를 마련하여 때때로 팅겨서 한가한 취미를 부쳤다. 일만가지 생각이 담담하여 세상에 뜻이 없는것 같았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어쩔수 없는 바가 있어서 혹은 강개한 나머지 눈물이 흐를때도 있었다.

평일 저술한 것은 멋대로 흩어질 대로 맡겨 두어서 약간 권만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의 이름은 덕윤(德胤)인데, 지금이름으로 고친 것은 촉휘(觸諱: 임금의 이름이나 선조의 이름과 한자라도 같으면 그것을 피한다. 즉 꺼리는 바에 저촉된다는 뜻) 되는 바 있어서 피하여 그렇게 한것이다.

 

공의 초취는 파평윤씨인데 창신교위(彰信校尉-從五品 武官 품계) 환(渙)의 따님이다.

공보다 五十一年 앞서서 하세하였다. 재취는 옥구장씨(沃溝張氏)니 습독관(習讀官-훈련원의 從九品 무관직) 징(徵)의 따님이다. 명에 가로되

 

일찍 부터 스승에 따라서 놀아 / 早從師游。

힘써서 경서를 연구하였네. / 力究經籍。

 

더우기 주역에 깊은 바 있어 / 尤深於易。

스승에게 안 배우고 혼자 알았네. / 不師而得。

 

시국이 혼란하여 숨어 살았으니 / 時昏而遯。

그 행실만은 높고 높도다. / 其行則危

성군이 일어나서 세상 밝으니 / 聖作而顯。

 

예로써 소명을 내리셨도다. / 禮以徵之。

지닌바 많으나 펴지 못하고 / 蘊而未施。

 

이에 늙음으로 돌아갔도다. / 乃以老辭。

서계와 옥화산이 / 西溪玉華。

 

물은 맑고 산은 높도다. / 水潔山崇。

즐기는 바는 다름 아니네. / 所樂非外。

 

도가 가슴속 가득 찾도다. / 道充乎中。

사람이 모두 우러러 보니 / 人皆仰止。

백세에 높은 풍도 보여 주도다. / 百代高風。

 

 

[각주]

도목 정사(都目政事) : 고려와 조선시대 해마다 6월과 12월에 관리의 성적 여하를 검토하여 해직하거나 또는 승직시키 일。

 

옮긴이 : 野村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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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槐山郡守李公墓碣銘

 

西溪。乃故槐山郡守李公之號也。公卒二十有七載。孫萬憲以故承旨卞君時益之狀。來請墓碣之文。屢蹐門而意益懇。余病矣。文久未就。則爲之留京師以待。余惡得無感。且余於癸亥冬。忝翰苑。嘗見公疏。雖未詳記。而蓋以五音察於人。人聲失其和。恐有變亂。未幾賊适反。心竊異之。卞君以公門人。爲余道公平生道學之邃。欣然慕之。而恨未得一趨下風。今不敢辭焉。謹按其狀。公諱得胤。字克欽。其先慶州人也。羅祖佐命功臣謁平公鼻祖也。麗朝益齋先生齊賢九世祖也。平安道觀察使諱尹仁。昌平縣令諱公麟。司僕寺判官諱鯤。公之三代祖也。考諱潛。進士。用太學薦。除永崇殿參奉童蒙敎官。皆不拜。妣孺人姜氏。將仕郞應淸之女。政堂文學淮伯之後。公生於嘉靖丁丑閏三月三十日。甫齔。而嶷然有凝重氣。旣學。不煩而自勤。能疆記。進士公大奇之。期以大儒。及長而讀經傳。講明大義。篤志於爲已。不喜擧子業。其強赴試場。爲老親也。戊子。中進士。乙亥。遭外艱。三年于廬。持制供祀。壹以禮。後居內憂。如前喪。就墓下搆小屋。扁其堂曰追遠。蓋爲時薦芬苾也。年逾弱冠。就正於徐頤窩起之門。討論大學,心經,周易,啓蒙等書。退而益自疆。經數年。更往請益。頤窩歎賞之。以爲他日以儒學名者。必吾子也。聞朴守菴枝華明易學。往質之公之所疑者。則守菴亦無以應對。學者亟稱之曰。世之學易者多矣。而專精通透。惟李某有焉。丁酉。授禧陵參奉。以學行也。謝恩歸家。自先世居淸州。築一精舍於先塋之側小溪之濱。其自號以此也。名齋曰玩易。川曰不舍。遂閉戶讀書。遺外塵事。庚子。擢拜王子師傅。宣廟特令馹召。公不得已趨謝。陳章乞解不許。敎王子嚴而謹。作勸學箴以勉之。宣廟甚嘉之。壬寅。官滿轉刑曹佐郞。尋引疾歸。癸卯。除工,刑二曹郞。皆以疾辭。無何。遷儀賓都事。肅謝便還。甲辰。令義城縣。公以屢虛恩命爲未安。黽勉往赴。政先仁愛。律己廉潔。御史以實聞。宣廟賜表裏以褒之。居三年。意有不樂。解紱歸。民思之不已。光海時。國事日非。公乃徙居于西溪之東。行數十里而有洞曰玉華。溪山縈回。略似武夷。遂名以九曲。營數楹於第五曲。而扁之堂曰春風。軒曰秋月。左右圖書。晨夕對卷。探討義理。不知老之將至。絶跡於世。惟與金沙溪以書往復。論難太極圖及易學焉。邑有先正書院。諸生等推公爲院長。公爲之脩院規訓章甫。如有問者。則必以明心術變氣質之道先諭焉。辛亥。太學諸生。以鄭仁弘誣詆晦齋,退溪兩先生。削名靑衿錄中。光海命錮首倡者。公聞而大驚曰。士氣一挫。則公議滅而國脈絶。乃與多士通文于三南攻仁弘。其黨欲螫之而卒無以陷焉。及爾瞻鼓廢論。嗾其徒之寄泮中者。罪狀大妃。通告四方。公見其文。不忍正視曰。人而苟活於無母之國可乎。卽令火之。見者色變。而公不動一髮。癸亥▣改玉。擧公遺逸。再擬持平。已而授工曹正郞。公以病未卽出。特命乘馹來。公舁入洛以謝。拜疏請退。不獲。尋承召入侍。反覆陳啓者。涵養本源之道也。上傾聽焉。命賜米菽。如賜沙溪。公拜疏謝。仍申前達之意。又甚詳悉。上嘉納之。秋遷繕工監正。賜之御饌。異數也。公感結於心而病不可淹。又上章乞骸。且言三才之失其常。辭甚切至。上答曰。因予忝位。天地之變疊出。竊自憂懼。罔知攸爲。前後所陳。當銘念焉。須勿久留。以副予望。公還鄕已三閱月。而命勿遞職。都目親政時。除槐山郡守。翌日。上謂銓官吳允謙,崔鳴吉等曰。曾聞李某有勞於先朝。且以廉謹名。予欲褒異之。而迄未之果。加之一資如何。允謙等以爲讀書山林。素著儒名。聖敎宜矣。於是特加通政階。爲行郡守。公爲肅謝來。而會値适變。義難辭職。仍赴槐郡。非其志也。首詢民瘼。疏達于上。積弊得除。一郡賴之。流逋還集。敦風化則明鄕約。勸蒙學則置都訓長。甿俗遂變。纔一年解歸。民樹碑以頌之。丁卯之亂。公年已高。未能馳赴行在。乃與鄕人議募聚義兵。將以犇問。聞亂定而止。車駕旋軫。公扶病入城。陳章自列。且以象數明理亂。終之以自強之道。上優批答之。己巳季冬。感疾沈綿累月。傍人請鍼藥之。而公不肯曰。一死常理也。聖賢所不免。況吾年迫。求活於醫。不亦苟乎。將易簀。屛婦女整衾枕。却左右扶者。夷然而終。乃崇禎庚午五月二十八日也。壽七十八。聞卒之日。村翁野叟莫不嗟悼。或有累日不肉者。知舊門徒莅喪經紀。斂殯以禮云。用是年八月二十五日。葬于先塋西面午之原。從公命也。先是公嘗卜地於玉華。病革。公謂子弟曰。吾不忍遠離先塋。乃令葬於斯。書籍之借諸人者。令子弟悉錄以還。子弘有請所欲言。公無他語。但於喉間微語者。兄弟貧不能同居焉。蓋公弟通禮光胤遠處南中也。未卒之前。玩易齋東山麓大石忽自崩。聲如雷。聞者以爲公卒之兆也。葬之日。遠近來會者。幾數百人。所歷郡邑人。皆賻之以米布。多士同辭相與尊奉。俎豆之于書院。公資性醇厚。孝友天得。先忌齊素必十日。祭時哀痛如袒括初。每鷄鳴。整衣冠禮家廟。朔望參奠。出入告謁。不以急遽而廢。伯母烈女羅氏無嗣續。托後事於公。生而事之。歿而葬祭。無間親母。與兄弟姊妹分析田僮也。自占其殘薄者。衣食尙朴素。周親舊之急而力濟昏喪。燕居莊而簡默。接人樂易。人有是非政長短人。則輒正色不應。人皆敬服。見人之善。喜而揚之。不善則警而正之。學有淵源。功積思辨。危坐書室。終日孜孜者。不外乎經傳。而於易學尤致力焉。深以易學之不傳爲歎。嘗言業科者口程傳而昧義理。取卜者遺本義而泥象數。體用相背。吉凶都迷。由是而求適乎仁義中正。不亦難乎。故公常參究程朱之訓。獨得微奧之義。預言事後當悔否。若符左契然。宣廟方講易。以注釋多譌誤。命設局校正。簡一時明易學者。俾管之。公首與焉。譚者榮之。其爲都事儀賓也。臺官論其驟。上以校易時有陞敍命爲答。臺議卽止。公以爲山野賤品。屢叨誤恩。臺參之發。覆燾至此。何敢偃蹇無謝。遂趣裝拜恩。宣廟特賜內膳。翌日卽歸。其眞實如此。雅好山水。佔畢之暇。倘佯乎水石之間。得之於二樂者。形諸永言。西溪玉華。俱作六歌。蓋倣陶山十二曲也。蓄一張琴。時時撫弄。以寓閑趣。萬念淡然。若無意於當世。而憂國之誠。自有不能已者。或至於慨然流涕矣。平日所著述。任他散逸。只有若干帙藏於家。公初名德胤。改今諱者。有所避也。公初娶坡平尹氏。彰信校尉渙之女。先公五十一年卒。再娶沃溝張氏。習讀官徵之女。一男夭。二女。長適士人金鎰。次適復興者。尹氏出也。三男二女。二男一女夭。一男卽弘有。用蔭除察訪。女適佐郞卞時望者。張氏出也。側出三男一女。男弘復,弘謙,弘咸。女嫁金光偉。登武科。金鎰男女各一。男曰聲運。女適金志尹。士人。佐郞男女亦各一。男曰榥。權知承文院正字。女適黃後瓊。士人。察訪娶別坐鄭霫女。生二男一女。男長萬憲。進士。次萬益。女適辛貞甲。士人。萬憲二男二女。皆幼。嫡庶孫曾男女三十餘人。銘曰。
早從師游。力究經籍。尤深於易。不師而得。時昏而遯。其行則危。聖作而顯。禮以徵之。蘊而未施。乃以老辭。西溪玉華。水潔山崇。所樂非外。道充乎中。人皆仰止。百代高風。

 


[문헌자료]

백헌집(白軒集) >白軒先生集卷之四十六 文稿> 墓碣>

西溪先生文集卷之四>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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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 卞時益 撰

 
先生諱德胤。改諱得胤。字克欽。姓李氏。係出慶州。始祖諱謁平。羅朝佐命大臣。九世祖諱齊賢。益齋先生。謚文忠公。以文章道德。大顯於麗季。厥後代有聞人。高祖諱尹仁。平安道觀察使。妣貞夫人洪氏。萬戶仲良之女。曾祖諱公麟。昌平縣令。妣淑人朴氏。六臣彭年之女。祖諱鯤。司僕寺判官。妣恭人李氏。進士葵之女。考諱潛。成均進士。用大學薦。除永崇殿參奉。童蒙敎官。皆不就。妣孺人姜氏。政堂文學淮伯之六世孫。將仕郞應淸之女。以嘉靖三十二年癸丑閏三月三十日壬辰。生先生。年甫六七。已有成人器度。始受書。不待勸勉。能勤讀強記。敎官公奇愛之曰。此兒篤志不懈。異日當爲大儒。旣長。講究經傳。便曉大義。萬曆乙亥。丁外憂。與諸弟。廬居三年。執喪奉祭。一遵朱文公家禮。卽於墓下。立數椽屋。名之曰追遠堂。以爲時薦苾芬之所。盖從墓側立祠堂之意也。年逾弱冠。聞徐頤窩起業儒篤學。卽往從之。質之以大學,心經,周易啓蒙等書。斂而還家。用工益力。數年後。更就論難。則頤窩驚歎曰。以學問名吾東者。非吾措大而誰。與朴守庵枝華。寓居近地。明於易學。先生叩問其平日未瑩處。則曰公所不知。我豈能知之。常私謂學者曰。世間志學者何限。而存心易學。透寤精微者。莫如李某云。先生常興慕古人。專於爲己之學。不屑功令之業。祗以老慈在。屈意應擧。戊子。中進士。而素志之確然者。則終無移易焉。丁酉正月。以學行被薦。拜禧陵參奉。謝恩而歸。三月。遭內艱。居喪如前。仍搆精舍於先塋側小溪東。名其齋曰翫易。川曰不舍。因以自號曰西溪。遂閉門謝事。若將終身。每鷄鳴盥櫛。整攝衣冠。先詣祠堂。焚香拜謁。退處書室。終日跪坐。俯讀仰思。至忘寢食。四書,六經及性理諸書。無不循環熟講。而尤致精於易學。恒自歎曰。吾東之易學不傳久矣。務科業者。口耳程傳。而昧昧於義理。習卜筮者。拘泥象數。而漠然於本義。故理與數岐。體與用違。雖吉凶晦吝之道。迷不知所止。况能適乎仁義中正之歸歟。乃自參商乎程傳本義。反覆乎義理象數。深造奧妙。豁然自得。至於吉凶先機之驗。有如燭照龜卜。而此則特其餘事耳。庚子六月。擢拜王子師傅。宣廟特命驛召。乃黽勉就謝。上章乞免。未蒙允許。遂盡心敎誨。以嚴見敬。又作勸學箴。以進于王子。宣廟覽之。大加稱賞。壬寅秩滿。遷刑曹佐郞。謝病還鄕。時筵中方講周易。宣廟以註易多舛訛。命設局校正。擇一時通明易學者。掌其事。先生首預其選。人以爲榮。癸卯。除工曹佐郞。尋遷刑曹。皆以疾辭。未幾。除儀賓都事。㙜官以驟陞論啓。上以校易時。有陞叙命爲敎。而不允。㙜評卽止。先生聞之。蹙然曰。吾以山野賤品。累蒙誤恩。至有臺彈。亦蒙曲庇。病不能任。業已定矣。何敢不辭聖恩乎。乃促裝趨謝。宣廟特以宮膳賜送。翌日。便還故山。甲辰。拜義城縣令。以屢虛君命。爲未安。強意赴任。爲政以廉謹仁愛爲先。御史據實以聞。宣廟賜以表裏一襲褒美之。居三年。事有不愜意者。投紱而歸。一境之民。多有去後思。光海時。時事大變。惟恐入山之不深。得一區棲息之所於西溪之東數十里玉華洞。盖玉華溪山。略似武夷。仍以九曲名焉。別搆一舍於五曲之上。扁堂曰春風。軒曰秋月。左右圖書。專精下工。前所未深契者。沛然心融而神會。不知老之將至。自屛迹以來。不欲與世相接。只與沙溪金先生。往復書尺。論辨太極圖及易學焉。一鄕推以爲書院之長。先生脩明學䂓。訓迪多士。如有摳衣請益者。則輒以開明心術變化氣質之道。善誘之。辛亥。鄭仁弘誣詆晦齋,退溪兩先生。太學諸生。削鄭儒籍。光海怒。命禁錮首倡者。多士捲堂而去。先生聞而愕然曰。是亡國之擧也。士氣一挫。不可復振。公議滅矣。國脉絶矣。卽通文于三南。痛斥仁弘。仁弘黨與大啣之。謀欲中傷。而竟未售焉。逮賊臣爾瞻。謀廢母后。嗾其徒黨之在舘學者。列數十罪。通告于中外。凶文替至。先生毅然奮髯曰。安能處無母之國而苟活耶。迫令投火。人皆危之。而先生不之動也。癸亥。仁祖反正。新化淸明。羣賢彙征。擧先生以遺逸。再擬於持平。尋拜工曹正郞。先生老且病。不卽進謝。自上特命乘馹上來。不獲已。舁病來謝。陳䟽乞退。不得請。俄而承命入侍。以涵養本源之道。縷縷陳啓。上虛心傾聽。因傳敎曰。米菽一依金長生例賜給。先生卽拜䟽稱謝。兼陳入侍時所達之意。反覆詳盡。上嘉納焉。九月。陞授繕工監僉正。別賜御饌。以示優待之意。先生感激恩私。不忍便訣。而衰病且甚。勢難久留。又呈辭退之章。仍及三才之失其常。言甚剴切。聖批有曰。近者。因予忝位。天地之變疊出。竊自憂懼。罔知攸爲。前後所陳。當銘念焉。須勿久留。暫爲往返。以副予望。先生退歸。殆過三朔。而上特命勿遞職名。至都目親政。除槐山郡守。翌日。上謂銓官吳允謙崔鳴吉曰。曾聞李德胤。有功勞於先朝。而居官亦以廉謹自律云。予有意褒異。而因循未果。玆欲用賞一資。於卿等意。如何。兩臣對曰。李德胤。讀書山林。素有儒名。聖敎及此。豈不允當。遂特加通政階。先生以肅謝來京。會有逆适之變。不敢辭職。仍赴任所。非其初志也。莅官之初。先訪民瘼。䟽陳積弊之未祛者。竟動天聽。民以蒙福。流亡還集。行鄕約法。以敦民彜。定爲都訓長。以敎蒙學。風俗頓變。人多興起者。居一年。謝病歸田。民懷其惠。嘉其淸。竪碑頌慕之。丁卯之亂。三殿去邠。而先生年垂八耋。筋力頓替。旣不得跨馬赴亂。遂與鄕人。議定義兵。指畫召募。以圖奔問之擧。會以亂定而止。大駕回鑾之後。扶病入城。控辭自列。仍陳象數理亂之說。終之以自勝之道。上深嘉而優答之。崇禎己巳十二月。始感疾。彌留累月。轉成沉痼。傍人請試鍼藥。則掉頭峻拒曰。死生常理。一遭歸盡。聖賢所不免。况吾年近耋艾。人事已盡。針藥求活。不亦苟乎。一日。命子弟。錄還他人書籍。戒勿遺失。且曰吾葬魄之所。曾卜於玉華。到今思之。遠離先塋。心所不忍。骨肉雖藏於彼。魂氣當遊於此。而况人之死也。精神已散。血脉已渴。所遺形骸。如枯木死灰耳。安得以山川之吉凶。爲禍福於子孫哉。親死之後。子孫之所當致誠者。惟祭祀爾。若葬地則用家後先兆之側。可也。翫易齋東麓。大石忽自崩。聲振如雷。先生卽扶起而坐。命子弟以識之曰。此恠底事也。厥後聞者以爲不偶然也。病革。其子弘有。泣請有所敎。但引領喉語曰。仲弟通禮光胤。迫在南中。雖欲相見。不可得也。季弟進士昌胤。其亟招來。來則握手泣訣曰。吾已至此。更無所憾。但吾兄弟貧窶之故。贅寓異鄕。不能同居湛樂。幽明之恨。曷有極哉。易簀之日。屛婦女。整衾枕。將絶。左右扶其手。命揮之。卽恬然而逝。享年七十有八。時庚午五月二十八日也。知舊門人。相與經紀殯殮如禮。至於村巷父老。亦皆咨嗟悲悼。或有累日不食肉者。用其年八月二十五日。窆于先塋西子坐之原。葬之日。遠近會客。幾數百人。所歷郡縣。皆賻送米布以助焉。先生天資醇美。志操篤實。自幼從事於斯學。專以收斂身心爲本。而一於誠敬。天人性命之微。脩己治人之道。硏精貫通。各臻其妙。至於天文地理卜筮音律曆筭兵機。靡不曲暢旁通。平居自持甚嚴。不脫上衣。儼然端拱。雖妻孥。不見其惰容焉。事親奉祭。極致誠孝。每於先忌前期一旬齊䟽。祭時哀痛。一如初喪。朔望參奠。出入告祠。雖在怱遽之時。未甞廢焉。伯母羅氏無子。托身後事於先生。先生事之如所生。及其沒也。心喪三年。斂葬祭奠。盡其誠禮。狀其行。以壽其傳。與兄弟娣妹。友愛出天。當分臧穫也。自占老弱瘠薄者。飮食衣服。專尙儉素。人所不堪。安之若性然。而聞親戚知舊之窮不克婚喪者。則必盡力助救。接人之際。謙恭樂易。而雅性簡默。未甞爲閑雜說話。聞人評論朝廷得失。守令賢否。人物長短。則輒正色不應。言者赧然敬憚。人之有善。喜必揚之。有不善。嚴加鐫䂓。使改之。雅好山水。囂然自適。讀書之暇。逍遙于溪上。心得之樂。發於歌咏。作爲西溪六歌。又作玉華六歌。合爲十二曲。極言閒居趣味。盖倣陶山十二曲之意也。又蓄儒琴。常撫弄寄興。淡然若無意於世。而傷時憂國之誠。則眷眷不已。或至於扼腕而流涕矣。平日所著。隨卽點染。不可收拾。今之所遺者。只若干帙。莊在巾衍。初娶坡平尹氏。彰信校尉渙之女。先先生五十一年沒。生一男二女。男未晬而夭。女長適士人金鎰。次適鄭復興。無嗣。後娶沃溝張氏。習讀官徵之女。生三男二女。二男一女夭。女適佐郞卞時望。男卽弘有。蔭補察訪。傍室有一女三男。女嫁武科金光偉。男曰弘復,弘謙,弘咸。金鎰生一女一男。女適士人金志尹。男曰聲運。佐郞生一女一男。女適士人黃後瓊。男曰榥。承文院副正字。察訪娶別坐鄭霫女。生一女二男。女適幼學辛貞甲。男長萬憲。進士。娶朴承彦女。生二女一男。皆幼。次萬益。娶金愼得女。內外孫曾男女。幷嫡庶見存者。三十有餘。先生之行誼實蹟。不可使泯滅而無傳。敢以耳目所覩記。撰梗槩如右。立言君子。倘賜一言以闡揚之。則不勝幸甚。門生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卞時益。謹狀。<끝>

 

 

↑괴산군수 서계 이득윤선생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