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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공(李公) 수일(守一) 묘표

야촌(1) 2009. 4. 21. 18:51

계림부원군 이공 수일 묘표

(鷄林府院君 李公 守一 墓表)

 

신독재 김집 지음(愼獨齋 金集 撰)

 

옛날 우리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시절에 큰 난리들을 진정시키고 나라를 다시 세워야 했는데, 그때마다 나라를 위해 바삐 뛰면서 힘을 보탠 신하가 한두 사람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두 시대에 걸쳐 할 일을 다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명(功名)을 세워 끝 마무리를 잘한 분으로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공(李公)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공은 휘가 수일(守一)이고 자가 계순(季純)인데, 증 영의정(贈領議政) 이난(李鸞)의 아들이자 좌의정을 지낸 정순공(靖純公) 이성중(李誠中)의 6대손이다. 공은 소년 시절 문(文)을 버리고 무(武)의 길을 택했는데, 장기(長鬐)에서부터 자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임진년(1592)의 거센 적을 막아 내다가, 급기야 수사(水使)가 되어서는 적들을 소탕하는 데에 주력하여 우리나라 왼쪽 변방의 바닷가 여러 고을이 어육(魚肉)이 되는 것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으로부터 그에 대한 포상으로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았는데, 그때 상은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정유년(1597)에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계청으로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맡았는데, 공이 부임한 뒤 번거로움을 참고 대중을 제어함으로써 큰일에나 작은 일에나 빈틈이 없도록 하였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나 군대를 동원하는 일이 모두 질서 정연하였다. 

 

적산(赤山)에서 적을 한번 물리치고 고양(高陽)에서 거듭 개가를 올리자 적들이 무서워서 끝내 성주 근처는 범접하지 못하고 피해 갔다. 남쪽의 걱정이 풀리자 이제는 또 북쪽을 맡았는데, 이때도 역시 남쪽에서 하던 그대로 북쪽을 다스려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크게 얻었다. 

 

그리고 노토(老土)를 토벌하고 마을능주(亇乙能主)를 무찌르고 수 을허(水乙許)와 교로(交老)를 섬멸함으로써 변경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을 안집 시키자 오랑캐 무리들도 겁에 질렸으므로 십 수 년 동안 적의 출현을 알리는 경보가 없었다. 

 

공은 그 후로도 그곳에 두세 번 부임해 갔고 기한이 차면 또 연기까지 했는데, 이는 그 지방 백성들의 여망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또 사이사이로 경상도와 평안도의 군정을 맡기도 했지만 가는 곳마다 치적을 남겼다. 

 

영남에서는 난리가 끝난 후 영문(營門)을 진양(晉陽)으로 옮긴 일이 있었는데, 공이 손 놀릴 사이 없이 일을 하여 백성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전에 있던 영문에 비해 조금도 손색없이 갖출 것을 다 갖추어 놓았다.

 

그리하여 관방(關防)이 마치 자물쇠로 잠가 놓은 것처럼 튼튼하게 되어 그것이 두고두고 큰 힘이 되었고, 국가에서는 공의 작질(爵秩)을 높여주고 또 습의(襲衣)를 하사하여 포상하기도 하였다. 공은 서쪽, 남쪽, 북쪽에서도 이렇게 힘써 일하였다.

 

급기야 이괄(李适)의 난이 터지자 갑자기 또 명을 받았는데, 당시 상황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고 또 안팎으로 믿을 것이 없으므로, 다만 충의(忠義)로 군대를 격려하여, 전세(戰勢)가 불리한 상황에서 북산(北山)을 먼저 점거함으로써 결국 세상에 없는 공을 세웠으니, 그 얼마나 장한 일인가. 아, 공이 한 일은 마치 조물주가 물건 만들어 내듯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갑자년(1624) 난리에 만약 공의 그 싸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거의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이 공로는 그렇게 크게 치는 데 반해, 거리도 멀고 형세 또한 느슨했던 그때 서쪽, 남쪽, 북쪽에서 한 일에 대하여는 왜 과소평가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한쪽지방의 적을 막기 위해 미연에 대비하는 일은 일시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일로서 국경 밖에 긴 성을 쌓는 격이지만, 바로 겨드랑이 밑에서 변란이 생기고 금방 서울을 삼킬 재액이 닥쳐서 국가의 존망이 하루아침에 판가름 나게 된 급박한 상황에서, 남들은 다 지켜만 보고 있는데 혼자 나섬으로써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다 기울어진 나라를 다시 안정시켰다는 것은 당(唐)의 이성(李晟)이 주자(朱泚)를 숙청했던 일보다 훨씬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은 그 공을 이룬 후에는 평복 차림으로 집에 돌아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오직 겸양한 태도로 지냈으니, 겸손하기로 유명했던 한(漢) 나라의 대수장군(大樹將軍) 풍이(馮異)와도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공이 세운 그 공로만을 가지고 공을 말할 뿐이며, 공이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모르고 있다.

 

공은 인자하고 온화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강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찰찰(察察)하게 하지 않았지만 관리들은 감히 그를 속이지 못했고, 각박하게 하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감히 죄를 범하지 못했다. 50년 동안 조정에 있으면서 지방관을 여덟 번이나 지내고 병부(兵符)를 다섯 차례나 찼지만, 집에는 사방의 벽 외에 다른 재물이 없었다.

 

나라가 있는 것만을 알았고 자신이 있는 것은 몰랐기에, 직임을 맡으면 그 직책에 최선을 다했고 일을 하면 그때마다 충절을 바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두 시대에 걸쳐 할 일을 다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공명을 세워 끝마무리를 잘한 분으로는 계림부원군뿐이다.’라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

 

공은 가정(嘉靖) 갑인년(1554)에 태어나 세상을 뜨던 해까지 79년을 살았고, 장지는 충주(忠州) 금생리(金生里) 석교(石橋)에 자좌(子坐)로 된 둔덕의 새로 잡은 자리이다. 어머니는 단양 우씨(丹陽禹氏)이고, 부인은 이씨(李氏)인데 국성(國姓)으로 장원도정(長原都正) 이귀년(李貴年)의 딸이다. 

 

아들들 가운데 맏이 이전(李淀)은 부사(府使)이고, 다음 이용(李溶)은 일찍 죽었는데 좌랑을 추증 받았으며, 다음 이완(李浣)은 무과 출신으로 참판이다. 딸들 중 맏이는 군수(郡守) 최위(崔椲)에게, 다음은 군수 한필후(韓必厚)에게, 다음은 좌랑(佐郞) 채계주(蔡繼周)에게, 다음은 승지(承旨) 이시해(李時楷)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 이재(李滓)는 역시 무과 출신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이고, 세 딸들은 정(正) 이형(李泂), 주부(主簿) 조문발(趙門發), 부사(府使) 장훈(張曛)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전의 아들은 이인석(李仁碩)과 무과 출신으로 감찰인 이인하(李仁夏)이고, 사위는 생원(生員) 홍주삼(洪柱三)이다. 

 

이완의 서자는 이인준(李仁俊), 이인걸(李仁傑), 이인척(李仁倜)이고, 한필후의 두 아들은 한여해(韓如海)와 한여두(韓如斗)이다. 도사(都事) 이성전(李誠傳)과 학생(學生) 윤민행(尹敏行)은 채계주의 사위들이고, 학생 한석현(韓碩賢)과 생원 원만리(元萬里)와 학생 정유악(鄭維岳)은 이시해의 사위들이다.

 

이재는 1남 4녀를, 이형은 5남을, 조문발은 3남 3녀를, 장훈은 2녀를 두었다. 나머지 증손들과 현손들은 쓰지 않았다.

내가 다행히도 공과 한 시대를 살아 공의 한평생에 관해 익히 들었으므로, 숨겨진 내용을 세상에 드러내 놓으려 했던 공자(孔子)의 뜻을 좇아서 갑을(甲乙) 양론을 놓고 대략 이렇게 추려 엮어 보았다.

 

[참고문헌]

◇愼獨齋先生遺稿卷之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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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愼獨齋先生遺稿卷之十

 

鷄林府院君李公墓表

 

昔我宣仁兩祖。克戡大難。再造家邦。時則有一二臣奔走效力。而考其訖庸兩朝。善處功名。有始有終者。惟鷄林府院君李公一人而已。公諱守一。字季純。贈領議政鸞之少子。左議政靖純公誠中之六代孫也。少棄文就武。發跡自長鬐始。提孤軍遏壬辰方張之賊。曁爲水使。勦捕愈力。左徼濱海諸邑。獲免魚肉。朝廷褒陞嘉善階。有不知何狀貌之敎。丁酉。李體察使元翼啓署星州牧。公至則耐煩制衆。巨細靡遺。治民用兵。條緖不紊。一却赤山賊。再捷於高陽賊。乃畏避終不敢近星界。南憂旣弛。復受北閫之任。一以治南者治之。大得軍民心。討老土剗亇乙能主。殲水乙許交老。以固圉安民。諸胡慴服。十數年間。刀斗無警。後再涖三涖。每秩滿。又加年。從民望也。間帥慶尙平安兩道。俱有聲績。時嶺南新去亂。有移營晉陽之役。公多般拮據。百度具備。無墜前制。無害民力。關防鎖鑰。永世是賴。增秩賜襲衣以褒嘉之。公之勤勞於西南北蓋如此。及至适變。倉卒受命。衆寡不敵。中外無恃。徒以忠義激厲於事去之後。先據北山。以辦不世之勳。何其偉也。噫。公之於事功。猶造化之於物。隨所遭而效績。人謂甲子之亂。微公一戰。國幾不國。功斯爲大。若西南北之宣力。地遠而勢緩。此功反小。何也。一方之軋敵。未雨而綢繆。特一時之能事。域外之長城爾。固不若變生肘腋。禍及京闕。存亡迫於朝夕。事機急於斯須。人皆觀望。我獨直前。一交兵而安國家於旣危。李晟之肅淸。無過此矣。況夫功成之後。角巾歸第。肫肫退讓。有而若無。不知古大樹如何耳。然而人皆知以已然者論公。而殊不省公之所以致此者有原。仁和有餘而剛果相濟。未嘗察也而吏不欺。未嘗刻也而民不犯。立朝五十年。入建節五佩符。而家徒四壁。知有國而不知有其身。斯其所以所在稱職。隨事效忠者也。若是而稱曰。訖庸兩朝。善處功名。有始有終者。惟鷄林李公。不亦宜乎。公生於嘉靖甲寅。距卒之年。七十有九。葬忠州金生里石橋子坐之原。新卜也。先妣丹陽禹氏。夫人李氏國姓。長原都正貴年之女也。男長淀府使。次溶早死。贈佐郞。次浣武科參判。女長適郡守崔椲。次適郡守韓必厚。佐郞蔡繼周,承旨李時楷。又其次也。側室男滓。武科僉使。女三人。適正李泂,主簿趙門發,府使張曛。淀男曰仁碩。曰仁夏武科監察。女卽生員洪柱三也。浣庶子曰仁俊,仁傑,仁倜。韓必厚二男。如海。如斗都事。李誠傳,學生尹敏行。蔡繼周女也。學生韓碩賢,生員元萬里,學生鄭維岳。李時楷女也。滓男四女。李泂五男。趙門發三男三女。張曛二女。餘曾玄未盡載。集幸廁一世。獲習公終始。略辨甲乙之說。竊自附於闡幽之遺意云。愼獨齋先生遺稿卷之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