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시발(李時發),

야촌(1) 2009. 3. 16. 14:58

■ 28世 이시발(李時發) 

 

   [생졸년] 1569년(선조 2) ~ 1626년(인조 4)

   [세계] 익재공 후(益齋公后) 오촌공파

   [문과] 선조(宣祖) 22년(158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8위(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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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본 관 : 경주(慶州)

호 : 벽오(碧梧). 후영어은(後潁漁隱)
◇자 : 양구(養久), 

시호 : 충익(忠翼)
주요저서 : 《주변록(籌邊錄)》 《벽오유고》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은 진사(進士) 대건(大建)의 아들로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다.

1589년(선조 22) 증광 문과 병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소속 되었으나 스스로 학업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덕윤(李德胤)에게 나아가 경적(經籍)을 더욱 연구한뒤 벼슬길에 나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박춘무(朴春茂)의 휘하에서 활동 하였는데, 격문과 작전계획이 대부분 그로부터 나왔으며, 천여명을 모집하여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격퇴 하였으며,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상소문(上疏文)으로, 몽진길의 선조를 환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재주를 천거하여 왕명으로 명장(明將) 낙상지(駱尙志)에게 병법을 전수 받았다. 이로부터 낙상지의 잡반관으로 활동하여 그 뒤 저작(著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전적(典籍)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 병조좌랑 겸 지제교에 임명 되고, 이어 한학교수, 승문원 검교에 천거 되었고, 얼마후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또 사간원 정언에 임명 되었다. 이어 시강원 사서로 교체되었다가 이항복의 보고로 병조좌랑에 복직 하였다.

 

1595년 명나라에서 진운홍(陳雲鴻)을 보내어 왜영(倭營)에 조유(詔諭)했는데, 그의 접반관으로 왜영을 왕래 하면서 적정을 정탐 하였다. 이어 특별히 정랑에 임명되고, 그뒤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學)의 난(難)을 평정한 공으로 장악원정에 임명되고, 그뒤 통정대부에 오르고 찬획사(贊劃使)가 되어 충주에 진을 두고 조령에 책(柵)을 설치하고 덕주산(德周山)에 성(城)을 쌓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호조 참의가 되었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사간 남이신(南以信)의 탄핵으로 파직 되었다.

 

그후 1599년(선조 32) 경주부윤에 임명되고, 1602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04년 형조참판을 거쳐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동지춘추관사를 거쳐 함경감사가 되었다. 그리고 1607년(선조 40) 예조,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혹은 체찰부사로 서북군을 총괄하였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빈전(殯殿)일을 감독하고, 승문원 제조가 되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다. 조사(詔使) 재등(再登)이 국내에 이르자 광해군이 그를 통어전사(通御前事)로, 소환하여 군국의 일을 관할하게 하고 이어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12월 다시 병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2월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었고, 이어 가의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이무렵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안변부사를 거쳐 1618년(광해 10)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홍익(鄭弘翼)과 함께 부당함을 상소하고 참여하지 않았다.

 

이 당시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청을 협공하려 하였는데 강홍립 사건이 일어나 서북 변방이 크게 동요하자 체찰사 장만(張晩)이 그를 오도찬획사(五道贊劃使)로 삼았고, 광해군은 특별히 자헌대부로 승진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비변사에서 유사당상으로 임명하기를 청하였고, 또 지의금 춘추관사를 겸하였으며, 한성부 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체찰부사로 장만과 함께 길마재에서 이괄 등을 토평하여 그 공으로 정헌대부에 올랐다.

 

그 뒤 사역원. 전생서제조. 주병도감제조(鑄兵都監提調)를 그대로 지니고 강화도의 국방요새를 관할하고 삼남도검찰사(三南都檢察使)가 되고, 이때 국경에 침입한 여진을 저지 하였고 병자호란을 예견하여 관서지방에 진영을 설치하고 군사 조련과 군사시설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병자호란의 마지막 요새였던 남한산성 또한 수축 하였으니 그의 선견지명에 훗날 모두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이덕윤의 문인으로 중국어를 잘하고 신흠. 오윤겸. 정엽. 정경세 등과 교유하였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 되었다가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국조방목, ◇국조인물고, ◇해동명신록, ◇송자대전, ◇조선금석총람,

◇청선고, ◇증보문헌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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