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려와조선관직

서얼(庶孼)에 대한소고

야촌(1) 2008. 9. 25. 19:55

■서얼, 적서구분, 허통

 

서얼(庶孼)에 대한 차별은 너무나 심했고

 

차별한 이유.

필자가 어렸을 때 옆 동네 어떤 집에서는 첩의 자식이라고 하여 제사 때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절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실부인에서 난 자식이냐 첩실에서 난 자식이냐를 놓고 차별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첩실 소생이라고 하여 다 같은 것은 아니었으니, 양인(상민)이상 신분 출신의 첩에서 난 자식인 서(庶)와 여자 종신분의 첩에서 난 자식인 얼(孼)로 구분된다.

 

고려시대나 중국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서얼에 대한 차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원인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태조 이성계가 후처에서 난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에서 비롯된다.

 

이에 태종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방석과 방석을 돕던 정도전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후에 명분을 만들기 위해 서얼금고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태종 때 우대부언(정3품) 서선이라는 사람이 정도전의 종에게 욕을 본 분풀이로 정도전이 죽고 난 후 서얼금고법을 만들자고 주장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정도전의 조상 중에 천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도전이 푸대접을 받았던 원인이었으며 이런 푸대접으로 인해 정도전은 당시 양반사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이런 불만이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는 데 적극 참여한 원인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이 규정은 양반들이 자기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경쟁자를 줄여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서얼에 대한 차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별대우를 폐지하면 정실부인에서 난 자식과 첩이 난 자식 사이에 누가 적자(嫡子)냐 하는 싸움이 일어날 것이고 벼슬길에서의 경쟁이 더 심해지며 중인층의 반발이 우려된다고 하였다.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은 인재를 얻음에 있어 출신과 관계없이 똑똑한 사람이면 된다는 점과 중국이나 고려시대에도 차별을 하지 않았다는 점, 서얼도 양반출신이라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조선 초기만 하여도 서얼에 관해서 별문제가 없었는데 성종시대에 조선시대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얼에 관한 차별대우를 명문화 시켜 조선시대 후반부까지 이 문제로 시끄러운 적이 많았다.

 

왕비가 난 아들이 없을 경우 왕의 후궁이 난 아들은 왕위를 계승하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에 비해 일반 양반 가정에서는 정실부인에게서 아들이 없고서자가 있어도, 친척집의 정실부인 소생을 데려와 양자를 삼고 대를 이었다. 이렇듯 자기 자식이지만 서얼 출신은 차별하였다.

 

또 2품 이상의 관리 자식에게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벼슬을 줄 수 있었는데 이때도 차별을 두었다.

양인 첩이 낳은 자식은 기술직, 충순위, 녹사로 들어가 정3품 당하관(통정대부, 요즈음의 2급 정도)까지 승진할 수 있으나 천인첩이 낳은 자식은 무관직을 받거나 상의원, 사옹원, 도화원 등 잡직(雜織)을 받았다.

 

차별에서 벗어나기.

 

또한 서얼 자손은 생원이나 진사시험은 물론 과거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 임진왜란 등을 겪으면서 서얼의 허용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갔는데,1625년(인조 3년)에는 허통사목(許通事目)이 제정되어 양인 첩에서 난 자식은 손자 때부터, 천인 첩에서 난 자식은 증손 때부터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양반과 양인 첩 사이에서 난 자식의 아들, 양반과 천인 첩 사이에서 난 자식의 아들이나 손자는 수시로 실시된 납속 허통책(일정량의 곡식을 내면 벼슬을 받거나 상민이 되는 제도)에 의해 허통이 가능했으므로 효종 대 이후에는 서얼금고법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고 볼 수 있다.그 후 1696년(숙종 22년)에는 서얼금고법이 폐지되어 과거응시에 제한이 없어졌다.

 

관직 임용 시 서얼을 차별하여 요직에의 등용을 막았으나 이것도 점차 무너져 1823년(순조 23년)에는 서얼도 종2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고,1851년(철종 2년)에는 승정원, 사간원 등 요직에의 등용도 가능하게 되어 사실상 서얼에 대한 차별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서얼출신들의 과거합격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 초부터 영조 때까지의 과거시험에 162명이 합격하였고 발령 시에도 대부분 비인기부서인 교서관 등에 배치되었다.또 지방관직을 줄 때도 여건이 좋지 않은 곳에 주로 발령되었다.

 

서얼들의 불만은 점차 많아져 허균의 <홍길동전>과 같은 소설이 발간되었고, 1613년(광해군 5년) 3월 문경새재(鳥嶺)에서는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범인들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응서,심전(沈銓)의 서자 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양갑, 평난공신 박충간의 서자 치의, 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경준, 박유량의 서자 치인, 서얼 허홍인 등이었다.

 

이들 7명의 서자들은 현실에 불만을 품고 한패가 되어 놀러 다니기도 하고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모임을 갖기도 하였는데 경비 조달을 위하여 강도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행동이 올바른 짓은 아니지만 그들의 가슴이 터질 듯 한 답답함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다가 영, 정조 이후 실학자들 중에는 서얼이 많았고 나라에서도 이들에 대한 불만을 완화하고자 가끔 관리로 등용하기도 하였다. 홍길동전에도 나오지만 서자나 얼자는 자기 아버지에게도 아버지라고 못하고 대감님, 영감님 등으로 불러야 했고 정실부인에게도 큰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마님 등으로 불렀으며 같은 형제, 자매지만 정실부인의 아들이나 딸에게도 도련님이라든가 아가씨라고 불러야 했다. 그러니 당사자는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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