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려와조선관직

진사(進士)

야촌(1) 2008. 8. 9. 01:33

■진사(進仕).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의 하나로 소과(小科)인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이다.
진사란 사류(士類)에 참렬(參列)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뜻으로 1438년(세종 20)부터는 이들에게 합격증서로서 백패를 주었다.

 

진사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을 뿐만 아니라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있고, 하급관원으로 등용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소과 또는 소성이라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시(詩)· 부(賦)· 송(頌) 및 시무책(時務策 : 그 시대의 중요한 정책. 시급한 일)으로서 진사를 뽑았는데, 시험과목과 선발인원이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진사 시험에 초시와 복시(覆試 : 초시 합격자가 다시 보는 과거. 즉 높은 시험)가 있었다.

 

초시의 시험과목은 경국대전에 부 1편. 고시. 명. 잠중에서 1편을 짓게 되어 있는데, 속대전에서는 부 1편만을 짓게 하였다.

 

그 선발인원은 한성시(漢城試)는 2백명, 향시는 경기에 60명, 충청·전라도에 각 90명, 경상도에 1백명, 강원. 평안도에 각 45명, 황해, 함경도에 각 35명 등 모두 7백명으로서 관찰사가 차사원(중요한 사무를 위해 중앙에서 파견하는 직원)을 보내어 시취했으나, 뒤에 향시중에서 경기 60명을 폐지하고 한성시를 두곳으로 나누어 시험보게 하였다.

 

제2차 시험인 복시는 초시합격자들을 서울에 모아 보았는데, 시험과목은 초시와 같았으며 선발인원은 백명이었다. 시험관은 경국대전에는 성균관 박사 이하의 관원과 예문관·승문원·교서관의 7품관 이하와 사헌부의 감찰이 함께 소학과 가례를 강하게 하고, 예조에서 이를 시취케 하였는데, 속대전에서는 시험장소를 두곳으로 나누고 각각 종2품관 이상 2명과 정3품관 이하 3명을 차정해서 시취케 하고, 감찰 각 1명이 시험을 감독하였다.



이렇게 해서 복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진사라 하였는데, 후기에는 소과 합격에만 만족하고 대과에 나가려고 하지 않는 기풍이 생겼다. 후기에 과거가 권문세가의 농락을 받게되면서부터 지방의 은거 거사는 거의 진사급제에만 뜻을 두게 되었고, 한편 진사가 선비의 존칭으로 보편성을 띠게되자 생원도 진사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회통, 태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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