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박바위의 유래(由來)

야촌(1) 2008. 3. 10. 16:42

■ 박 바위가 밝 바위로 표기된 연유


휘 알평 표암공(瓢巖公)께서 하강하신 곳이 금강산(金剛山=경주 동천동 소재 : 오늘날  경주 국립공원 소금강지구)의 표암(瓢巖) 입니다. 표암이라는 뜻은 "瓢"는 '표주박 표자'이고 "巖"은 '바위 암자입니다.


'표주박'이나 '박'이나 같은 의미이므로 이를 '박'이라고 하였고 '암'은 '바위'이니까 '박바위'라고 한 것입니다. 즉 '瓢巖'이 한글로 풀이하면 '박바위'인 것입니다.

그러면 '밝바위'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제가 생각 큰데 '밝바위'는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선생께서 찬한 '시조 경모비'에서 '밝바위'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압니다. 즉 노산 선생이 '瓢巖' 즉 '박바위'를 '밝바위'라고 표현한 데서 연유합니다.

 

왜 노산 선생께서 '박바위'를 '밝바위'라고 표기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단순히 비슷한 발음상의 문제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니면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으로 의도적으로 밝음이란 뜻을 부여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박바위가 맞는 표기로 봅니다.



●'박혁거세'의 '朴'씨는?


위에서 보다시피 박혁거세의 박 씨는 '밝바위'의 '밝'에서 '박'씨로 성을 정한 것이 아닙니다.

박혁거세의 탄생은 난생 설화(卵生說話)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박혁거세의 탄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신라가 형성되기 이전 진한(辰韓) 땅에는 부족사회로 사로 육촌(斯盧六村)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여섯 촌장들이 알천(謁川 : 경주 지방의 하천)에 모여 나라를 다스릴 군장(君長) 추대를 의논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습니다. 이때 갑자기 양산 기슭 나정(蘿井) 숲 사이에 서기(瑞氣)가 뻗치더니 용마(龍馬) 한 필이 크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이하게 여겨 그곳으로 몰려가 보니 말은 하늘로 올라가고 자줏빛 알 같기도 하고 박[瓢(표)] 같기도 한 것이 있어서 깨어 보았더니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습니다.

경이롭게 여겨 동천 샘에 목욕시키니 몸에서 빛살이 뿜어져 나왔는데 이때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추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며 해와 달이 청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박같이 생긴 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박(朴)>이라 하고 빛나게 혁(赫).누리 세(世)에 선거(居)다 하여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밝 바위'의 '밝'에서 '박'씨를 취한 것이 아니고 난생 설화인 '박'에서 나왔기에 '박'씨라고 한 것입니다. 

 

●중시조 소판 벼슬에 대하여...


중시조의 소판(蘇判)이라는 벼슬은 고려(高麗) 말 익재공(益齋公)의 묘지문(墓地文)에 기록된 벼슬로서.... 선대(先代)가 신라(新羅)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 거명(李居明)이라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시조 이후(始祖以後) 기록이 전하는 최초의 선조(先祖)가 되시니 중시조로 명명한 것입니다.
 

 소판공 휘 거명(蘇判公諱居明)에 대한 익재공의 묘지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소판(蘇判)’이니 신라관제(新羅官制)에 소판(蘇判) 질(秩=차례)은 유 진골(有 眞骨)이 수지(受之)라. 국역하면 벼슬은 소판이니 신라 관제에 소판의 차례 즉 품계는 오직 진골만이 갖는다.

위의 묘지문 글에서 소판이라는 벼슬 명이 나오고 소판은 진골이라 한 것이지요.
표암공(휘 알평) 시조께서는 처음에 사로 6촌의 하나인 양산 촌장이십니다.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시조에게 이씨(李氏) 성이 하사되고 6촌을 6부로 개칭하고 양산촌을 급량부라 하였으며 호칭을 대인(大人)이라 하였습니다. 법흥왕 23년(서기 526년)에 ‘문선(文宣)’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렸으며 태종 무열왕 3년(서기 739년)에 ‘은열왕(恩烈王)’에 추봉(追封)되었습니다.

조선 순조 6년(1806년)에 신라를 건국하고 박혁거세 왕을 추대한 사실(史實)을 새긴 유허비를 금강산(경주 동천동 소재) 표암봉(瓢巖峰)에 세웠으며 1925년에 표암재(瓢巖齋)를 건립하였고 1971년에 알평 시조의 묘우(廟宇)인 악강묘(嶽降廟)가 국고지원으로 건립되었고 2006년에 정부지원으로 중수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끝>

 

명문경주이씨종친회 카페

2008.03.31. 16:58

글쓴이 : 이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