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족보관련문

한산이씨(韓山李氏)

야촌(1) 2008. 2. 23. 21:30

■ 한산이씨(韓山李氏)

 

한산이씨의 관향은 오늘날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인데 백제때는 마산현으로 불리었고 고려에 이르러 한산으로 개칭(940년 태조23)되었으며, 후에 다시 한주로 승격(1175년 명종5)되었고, 조선에 들어와 한산군으로 승격(1413년 태종13),1914년, 서천군에 병합되어 후에 다시 한산면이 되었다.

 

현재는 서천군에 속한 작은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한산군으로서 주변 여러 지역의 중심지였으며 한산모시와 한산소면주로 유명 하였고, 이곳엔 한산이씨 가문이 수백년 동안 쌓아놓은 고고한 삶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고정을 통해 추적할 수 있는 한산이씨는, 고려 중엽의 1세 휘(諱) 윤경(允卿)인 권지호장(權知戶長) 호장공(戶長公)부터이며, 아마도 충남 한산 지방에서 호장직을 누대에 걸쳐 지낸 호족출신이다.

 

그리고 시조 호장공의 묘소위치는 바로 사적 60호로 지정된 해발 400 미터의 토성인 한산이씨 문중의 가장 오래된 유적지로서 백제가 멸망할 당시 종실의 복신이 왕자 풍을 모시고 끝까지 항쟁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시조이신 호장공의 묘소에 얽힌 설화에 의하면 자손들이 한산고을에서 여러대를 거쳐 호장으로 봉직할 때 하루는 동헌 마룻장이 뒤틀려있고, 마루틈으로 안개같은 기운이 스며올라서 이것을 이상히 여긴 후손이 계란을 파묻어 두었다가, 얼마 후에 꺼내보니 상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한다.

 

고로 하도 신기하여 이곳이 필시 명당일것 같아 원님몰래 밤중에 호장공을 평분으로 입장해 놓았다 한다.

그러나 묘소를 평분으로 만든 까닭으로 오랜 세월이 흐르자 묘소를 실전하게 되었는데 호장공의 24세손인 휘 승오 삼은공께서 고종 15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해 퇴락한 관부를 수리하다 발견하여, 재봉축하고 표석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한다.

 

지관들은 이 묘자리의 형세가 금닭이 알을품고있는 모양이라 하여 "금계포란형"이라 하였고, 묘소앞에는 이를 상징하는 3개의 알봉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2세 휘 인간(仁幹)공은 정조호장(正朝戶長) 벼슬을 지내셨고, 3세 휘 효진(孝進)공은 진사(進士)로 봉헌대부 비서랑(奉憲大夫 秘書郞) 벼슬에 오르셨으며, 4세 휘 창세(昌世)공은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判都判書)에 추증되셨다.

 

5세 휘 자성(自成)인 찬성공(贊成公)은 고려때에 진사 시험에 합격, 전북에서 정의대부 정읍감무(正議大夫 井邑監務) 벼슬을 했는데 당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로 부터 명망이 높아 나중에 원나라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다한다.

 

그러나, 1310년 고려 충선왕때 젊은 나이로 죽었는데 원나라에서는 봉훈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 秘書監承)으로 증직되고 고려조에서는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光政大夫 都僉議贊成事)에 추증되었다.

 

배위 흥례이씨(興禮李氏)는 고려조에서 삼한국대부인(三韓國 大夫人)으로, 중국 원나라에서 요양현군으로 추봉된 어질고 현명한 분이었고 부군 찬성공이 죽은후에도 40년 동안 홀로 아들과 손자를 극진히 보살피고 잘 가르쳤다.

 

이렇듯 한산이씨는 선대에선 지방세력의 호족 집안에 머물렀다가 명성을 비로소 떨치게된 시기는 호장공의 6세 문효공(文孝公)가정(稼亭)휘 곡(穀) (1298-1351)과 그의 외아들 7세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휘 색(穡:1328-1396)의 부자분에 연유한다.

 

●문효공 가정 곡(文孝公 稼亭 穀)

   공의 자(字)는 중보(仲父), 호(號)는 가정(稼亭)으로 5세조 찬성공(贊成公) 휘 자성(自成 : 미상 ~1310)의 세 아들 중 막내로 1298년(충렬왕24) 충남 한산에서 태어났다.

 

1310년 13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고향을 떠나 동해 바닷가 경북 영해에 도착 그 지방의 토호인 진사(進士)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의 서랑이된다.

 

그는 장인 진사 김택(족보의 직함은 鄕校大賢)의 후원으로 도평의사사 서리로 관직에 나가게 되고 1317년(충숙왕4) 20세의 나이에 성균시,즉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오른다.

 

3년뒤 1320년(충숙왕7) 9월 7일 23세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1332년(충숙왕 복위 1; 원나라 순제 원통원년) 35세때 정동행성 향시(征東行省 鄕試)에 수석으로 합격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333년 36세에는 제과(制科) 전시(殿試)에 차석(갑과 제2인)으로 급제,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했다고 전한다.

 

그후 공은 원나라의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 檢閱官)에 제수되고, 이로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게 되고, 1334년 37세때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詔書)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 試典儀副令直寶文閣)을 제수받다.

 

이듬해인 1335년 38세때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 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이때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고 있던 원나라의 요구중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것이 다름아닌 공녀제도였는데, 이는 고려의 조혼풍습까지 유발시켜 그 폐해가 말이 아니었는데 이에 공은 원나라 순제에게 간하여 공녀제도를 폐지케 하였다(공의 17대손 휘 경재(景在) 문강공(文簡公)이 세운 신도비에 공녀폐지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있음)

 

그리고 그가 40세 되던 1337년(충숙왕 복위 6) 여름에는, 본국에서 성균관제주 예문관제학 지제교(成均館提學 藝文館提學 知制敎)의 벼슬을 내려 고려 최고 유학자 반열에 오른다.

 

49세가 되던 1346년(충목왕 2)에는 밀직부사(密直副司),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 종2품), 진현관대제학(館大提學),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의 재상직에 오르고 51세인 1348년에는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光政大夫 都僉議 贊成事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郡; 정2품) 벼슬에 오르고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이듬해인 1351년(충정왕3) 54세의 나이로 서거하다.

 

그는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高麗末 성리학 정착에 공헌한바 크며. 백이정(白頤正),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등과 함께 경학(敬學)의 대가로 꼽인다.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100여편에 가까운 공의 작품들 중에서도 한국 가전체 문학의 시초인[죽부인전(竹夫人傳)]이 특히 유명하며, 그밖에 남긴 많은 시편들은 고려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그는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과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에 배향되고,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을과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배위는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으로 봉한 진사(進士:족보에는 鄕校大賢) 택(澤)의 딸, 함창김씨(咸昌金氏)로 슬하에 외아들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을 뒀다.

 

●문정공 목은 이색

   문정공 목은 이색(文靖公 牧隱 李穡)은 1328년 5월 신미일, 아버지 가정공(稼亭公)의 문과급제후 8년이 지난 31세의 나이가 되던해 외가인 경북 영덕군 영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종직의 <영해 회고시>에, "선생이 한번 나시매 사람의 상서가 되시니 이로부터 단양의 초목이 말랐도다" 란 구절이 있다.』 선생의 자(字)는 영숙(穎叔), 호(號)는 목은(牧隱)으로 두살때 외가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리고 어릴적 부터 총명과 지헤가 남달리 뛰어나 8세에 숭정산 독서당에 입문, 학문을 시작한후 1382년 고려 충혜왕 복위 2년, 14세의 나이에 성균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그리고 16세의 나이에 별장(정7품)의 벼슬을 제수 받았고,19세의 나이에 안동권씨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따님에게 장가 드시고 26세때인 공민왕 2년(1353)에 문과에 응시, 을과 1인으로 장원급제한 후 다음해인 3월에는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행성 향시에 또 장원급제,황제가 친림하는 전시에 2등으로 합격 하니 성리학의 본고장 중국천하를 놀라게 했다.단 전시에서 차석인것은 원나라 사람이 아니면 장원이 될수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공의 나이 44세 되던해 정당문학의 재상반열에 오르고 우왕 8년(1382) 11월, 55세에 판삼사사(종1품)가 되고, 우왕 11년(1385) 58세에 검교 문하시중에 올랐다.

 

우왕 14년(1388) 목은께서 환갑되는 해에,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그해 6월 8일 우왕을 폐하고 신왕을 옹립 할때 우왕의 세자인 창왕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였음으로 조민수등과 함께 6월 9일 창왕을 옹립했다.

 

그후 동년 8월7일, 공의 나이 61세에 최고의 벼슬인 문하시중에 오르고, 이성계는 그 다음 자리인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왕국을 세우려던 이성계 일파는 우왕마저 신돈의 혈육이라는 억지 누명을 씌워 창왕 2년(1390) 11월 15일 다시 창왕까지 폐위시키곤 공양왕을 세운다.

 

목은의 장남, 문양공 휘 종덕(種德:1350-1388)은 추성 익위공신 봉익대부 동지 밀직사사 벼슬을 지냈는데, 아버지 목은공 께서 창왕을 세운일로 죄가 되어, 조정에서 극형으로 국문하여 장형으로 즉매를 맞아 숨지게 하니, 이 때 문양공 나이 39세였다. 슬하에 4남을 뒀다.

 

그러나 목은께서 이성계 일파의 뜻에 따르지 않고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며 절의를 꺾지 않으시자 12월 1일에 목은과 그 차자인 휘 종학(種學) 인재공(1361-1392)을 역모로 몰아 귀양보낸 다음, 공양왕 3년(1392) 4월4일이성계는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를 죽이고 7월 17일 왕위에 올라 새왕조를 개국하니 이것이 바로 조선이다.

 

이성계 즉위 후에 근위세력인 정도전일파는 무자비한 반대세력 제거에 몰입했는데 8월 23일 목은의 둘째 아들 봉익대부 서연시독관 진현관제학 상호군 휘 종학 인재공을 장사현으로 유배되는 도중 거창 무촌현에 이르렀을 때에 정도전이 보낸 순홍종이 목 졸라 죽였다(혹은 매질을 해서 죽였다는 기록도있다) 이때 그의 나이 32세였고, 슬하에 6남을 남겼다.

 

목은의 3남 휘 종선(種善) 양경공(1368-1438)도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후에 그의 일파로 몰려 한 때 멀리 귀양살이를 갔다가 나중에야 풀려났는데 슬하에 5남을 두었다.

 

이미 고려조때 왕방, 조반등의 음모로 목은 색은 둘째 아들 휘 종학과 이숭인등, 청주옥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결국 두 아들을 먼저 앞세워 보내게 된 것이다.

 

요사이말로 구테타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그 일파는 고려 왕조 말년부터 조선 초기까지 무자비한 숙청이 한창이던때 목은이색은 소중한 아들 둘을잃고 관직 박탈, 투옥 유배생활을 마치고 낙향해서 살게 되었는데 한번은 이성계가 직접 ?아와 이렇게 청했다고 한다.

 

"나를 버리지 말아주게나". 친구의 이 말에 목은께선, "나라 안에 내가 앉을 곳이 없잖소? 망국의 대부는 그저 낙향해 있다가 죽으면 해골을 가져다 고산에 묻을 뿐이요" 라고 했다한다.

 

이색의 이같은 소나무같이 푸르르고 대나무같이 변함없는 굳은 절개는 공과 상의하여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던 야은 길재에게 써준 시, "비흥일개재막막(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네)" 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395년(태조4) 11월 24일에는 태조가 목은을 왕궁으로 직접 초빙하여 친구의 예로 융숭하게 대접하고 헤어질때 중문까지 나가 읍하며 배웅하였다고 전한다.

 

비록 이성계가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쓰러트리고 새 왕조를 세워 태조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친구였으며 과거 자신의 윗자리에 있던 목은을 끝까지 어렵게 대하며 공의 학문과 품성을 아끼는 마음에 늘 새 왕조에 입조해서 도와줄것을 회유하며 간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목은을 항상 시기하며 살해하려고 노리던 간신배와 조무라기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태조의 옹호로 무사한 적이 적지 않았는데, 아들둘과 함께 포은 정몽주 등, 많은 친구와 제자들이 고려와 함께 죽어갔지만 이성계 일파가 목은을 함부로 제거할 수 없었던 까닭은, 목은이 고려에서뿐 아니라 중국에 까지 늘리 알려진 추앙받던 그의 명성과 정치적 위치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것들을 늘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이방원과 정도전 일파는 계속 기회를 노리던 중에 태조 5년(1396)목은의나이 69세이시던 병자 5월7일, 여주 신륵사에서 피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방원과 정도전이 사자를 시켜 여강의 연자탄 제비여울에서 휴식하던 목은에게 어주라 속이고 독이들은 술과 안주를 내려보냈다. 목은에게 극독이 들은 술병을 보냈습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신륵사 승려들이 마시지 말라고 말렸으나, 목은은 명이 하늘에 달린 일인데 죽고사는것을 어찌 두려워하랴며 태조가 보냈다는 독술을 마신 후 배안에서 운명했다. 이같이 목은은 마지막까지 충성과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고매한 품격을 지키며 의연하게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이때 술병을 막았었던 대나무 잎이 강가로 떠밀려가서 대숲을 이루어 그 대쪽같은 절개를 상징하였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여주에 전해내려오고 있다. 당시 태조 이성계는 목은의 부고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선 문정이라는 시호를 내리며 3일동안 조회를 중단했고, 공의 셋째아들 양경공이 시신을 거두어 자손들과 함께 그해 11월에 한산의 가지고개에 장사지냈다.

 

다음은 목은이 돌아가신지 6백년이 되던 1996년 학술발표대회에서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목은의 우뚝한 삶을 종합 평가한 것을 실은 것이다.

"목은은 학자와 정치가, 교육자로서 큰 자취를 남겼으며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왕조교체기에 끝까지 고려에 대해 불사이군하는 충절을 지킨 충신이었고, 고려를 통틀어 산문으로는 익재 이제현 선생이고, 시인으로는 목은을 꼽았다.그가 남긴 시 6천 31수는 질적으로도 고려 최고이다(이문원 중앙대 교수)

 

"불교계의 폐단을 지적, 비판함으로써 고려를 불교사회에서 성리학사회로 전환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본격적인 성리학시대를 여는데 이바지한 당대의 유종이었다. 불교의 우수성을 함께 인정해 조선시대 일부 선비로부터 배척받았지만 목은의 사상은 전것을 이어받아 새로움을 연 것으로 목은은 당대의 선구자였다" (윤사순 고려대 교수)

 

"무신정권이래 유행한 문장해석중심의 사장학에서 벗어나 실천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리학 관점에서 사서오경을 일관적으로 해석해 한국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따라서 목은이야말로 고려말 성리학의 사회적 전파와 이론적 발전에서 결정적 역활을 수행한 성리학파의 종장으로서 그의 유학사상은 한국성리학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다" (금장태 서울대 교수)

 

"공민왕 16년 성균관이 신축된 뒤 대사성을 맡아 성리학을 크게 일으켰고 과거에서 시험관을 6차례 맡아 권근, 이숭인, 맹사성 등 고려말, 조선초의 명신, 학자 1백 32명을 배출하는 등 교육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신천식 명지대교수)

 

"집이 가난하여 아침밥을 간혹 거르기도 했는데, 하물며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명월과 청풍으로 내 집을 윤택케 한다" 라고한 목은!

 

"소년시절에 산사에서 글을 읽을 때 죽그릇속에 비친 얼굴을 대한적이 있는데 작위가 봉군에 이르러서도

 백발을 죽그릇에서 볼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하신 목은,

 

"병든 몸으로 국정을 맡아 해마다 쌀을 빌려 살아가는 궁색한 형편" 임을 전혀 숨기지 않으셨던 그 이셨기

  에 오늘날 후손들은 당당하게 목은의 몇 대손이라며 또한 말을 할수있지 않겠는가!

 

  목은은 3명의 아들과 15명의 손자를 두었고, 한산의 문헌서원, 청주의 신항서원, 장단의 임강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안동의 서산서원 등 전국 각지에서 배향되고 있다. 저서로 "목은문고" 와 "목은시고"등이 있다.

 

●목은 영정과 영당

    목은의 영정이 처음 그려진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벽상 삼한의 공신으로 공민왕 때부터 공신각 벽 위에 걸리었고, 양촌 권근 선생이 남긴 화상찬 기록으로 보아 조선 태조 4년(1396)년 이전에 이미 어떤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만은 확실하다.

 

충남 예산군 덕산에 살던 후손 기태씨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정덕갑술'이라고 적혀 있는데, 태조 4년으로부터 정덕갑술인 1514년까지는 118년이나 시간적인 격차가 난다. 그렇다면 기태씨가 소장했던 영정은 태조 4년 이전에 그려진 원본을 모사한 것이다.

 

'정덕갑술본'은 서울 제용감 뒤(지금의 수송동 영당터)에 있던 목은의 손자 휘 맹진(= 맏 아들 휘 종덕 문양

 공의 4남) 판중추공 가묘에 봉안되어 자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왔었다.

 

그러다 임진왜란때 왜장에게 약탈당해 멀리 일본 에도(=지금의 동경)까지 건너갔다.

그 후 목은의 외예손인 부산첨사 여우길이 통신사로 에도에 갔을 때 이 영정을 발견하고는 가지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1654년(효종5)에 후손 휘 단 등이 김명국 화백을 시켜 오래 되어 하반신이 없어진 구본을 바탕으로 두 본을 모사하였다. 그 중 한 본은 지금 수송동 영당에, 또 하나는 충남 한산의 문헌서원에 모시게 했다.

 

1767년(영종32)에 후손 휘 수옥 등이 한산 문헌서원의 구본을 가지고 화백 변상벽, 정선, 조영우 등으로 하여금 두 본을 모사하게 하여 하나는 수송동 영당에, 또 하나는 한산 영당에 모시게 했다. 이들 목은 영정은 최근에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제1215호)로 지정되었다.

 

1938년 후손 훈구씨가 원규, 조원씨와 더불어 새로 3본을 모사하여 한 본은 해주 영귀정 영당에, 또 한 본은 덕산 누산영당에, 나머지 한 본은 서울 수송동 영당에 모셨다.

 

목은의 영당은 서울을 비롯하여 경성, 대전, 덕산, 마전, 상주, 안동, 장단, 청주, 하동, 한산, 해주, 회양, 횡성 등, 전국 각지에 있고, 이들 영당의 화본은 대부분 수송동 영당의 영정을 모사해 간 것이다. [참고: 집주인이 약간의 수정과 에디팅을 했음]

 

●문헌서원

    문헌서원은 충청남도 지정 지방문화재 77호의 건조물로 무학대사가 예언했던 명당자리에 세워졌고 이곳엔 가정 문효공과 목은 선생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고 휘 종학 인재공과 백옥헌 휘 개 사육신, 음애공을 모셨으며 휘 종덕 문양공은 추배되셨다.

 

가정, 목은 문집 목각판은 1404년(태조4)제작한 것으로, 시 35권, 문집 20권, 상소문과 행장문을 합하여16본 55권 등, 약 820매가 충청남도 지방문화재로 보전되 있다.

 

서산서원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외7필에 소재하고 있는 원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771년(영조47)에 처음 건립되어 문정공 목은 이색과 휘 홍조 수은공을 추모하여 위패를 모셨다.

 

본 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내려오다가, 1868년(고종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62년에 후손들이 재건하였다. 서원의 건물로는 정면3칸의 숭덕사, 10칸의 명교당, 각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정면 2칸의 전사청, 정문, 신문, 15칸의 주소 등이 있다.

 

묘우인 숭덕사는 맞배지붕으로 그 안에 목은 선생을 주향으로 하여 수은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 있다.

이곳엔 목은문집 등 서적 100 여권을 소장하고 있으며, 숭덕사에 목은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신항서원

    신항서원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 120에 소재하여 있고, 청북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된 서원이다. 1570년(선조3)에 창건되어 경연, 박훈, 김정, 송인수를 봉안하다가, 1642년(인조20)에 재건하면서 한충을 추가 배향하고, 1650년(효종1)에 송상현, 이득윤을 또 추가 배향하고,1656년(효종7)에 목은 이색을 추향하여 현재 모두 9분의 선현을 봉향하고 있다.

 

처음엔 유정서원으로 불리다가,1660년(현종1)에 사액서원이 되면서 신항서원으로 개명되었다.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892년(고종 29)에 복구허가를 받아 1904년에 복구되었고, 1957년에 지방 유지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현재의 서원은 198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1간으로 된 맞배지붕의 단층 목조물로인데 전면에는 약간의 공간을 두었으며 문은 모두 4분합문을 달았고 이 밖에도 강당과 삼문, 행랑이 있다.

 

건물주위에는 석축담장을 둘렀고, 마당에는 1685년(숙종 11)에 세운 신항서원묘정비가 있다.

매년 음력 3, 9월 초 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한산이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칭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번창한 문벌집으로 조선 500년 동안, 상신 4명, 대제학 3명, 청백리 6명, 공신 12명 등을 포함하여 문과급제자 195명을 배출하였으며 500여명이 넘는 진사와 생원을 배출했다.

 

●문양공 이종덕(文襄公 李種德)

    문양공은 가정의 손자, 목은의 장자로 자는 구( 九), 호는 삼당(三堂) 혹은 현암(玄巖)이다.

어머니는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딸, 우정승(右政承) 일재(一齋) 한공(漢功)의 손녀,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사의 증손녀,선도전서(都典書) 윤길손(尹吉孫)의 외손녀 이다. 문하평리(門下評理; 종2품)를 지낸 진주(晉州) 유혜손(柳惠孫)의 사위 이기도 하다.

 

공은 1350년, 아버지 목은의 23세때 태어났는데 문양공은 가정의 장손으로 할아버지 가정께서 생존해 계실때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다. 나면서부터 총명함이 남에게 뛰어났고 성장하시자 인품이 훤칠하고 깨끗하며 직하고 커서 남에게 굽히지 않는 기운이 있었고 화려한 옷으로 몸을 꾸미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한다.

 

하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373년, 나이 24세때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 때에(우왕)추성 익위공신 동지밀직사사(종2품)의 벼슬에 올랐다. 그후 1387년 우왕 13년, 공의나이 38세때에 지밀직으로서 문하평리 이구와 함께 정조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88년, 공의 나이 39세일때 벌어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후에는 정권이 그의 일파 손아귀에 넘어가 있었는데 아버지 목은께서 창왕을 세우신 것이 죄가 되어 문양공은 극형으로 국문되었다. 장형으로 매를 맞아 39세의 나이에 죽었는데 그날은 아버지 목은 이색의 환갑 하루 전날이었다.

 

●인재공 이종학(麟齋公李種學)

    인재공은 가정의 손자, 목은의 2남으로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정1품)을 지낸 양성(陽城) 이춘부(李春富)의 사위가 된다.

 

1361년 공민왕 10년, 목은나이 34세때 태어났다.

1374년 공민왕 23년, 공의 나이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으며 1376년 우왕 2년, 공의 나이 16세에 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여 장흥고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에 이렀으며 28세때인 1388년에 우대언(右代言 : 정3품)으로 요동 정벌군이 출정하게 조병육정신에게 초례를 행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성균시를 관장하였고, 곧 승진하셔 봉익대부 첨서밀직사사(奉翊大夫 書密直司事/종2품)가 되었다.

 

1390년 공양왕 2년에 왕방, 조반등의 음모로 윤이와 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아버지 목은, 이숭인, 권근등과 함께 청주의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을때 갑자기 마른 하늘에 천둥이 치고 큰 비가 내려 청주성 안의물 깊이가 한 길이 넘고 관사와 백성들의 집도 다 떠내려가는 홍수가 났다.

 

고을 사람들은 하늘의 감응이라 말하고 태조도 이 사실을 전해듣고 이들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하는 것이라 하여 목은공, 인재공, 이숭인, 권근 등이 석방되었다. 이런 내용은 양촌 권근 선생이 지은 압각수시문에 내용이 들어있고 압각수는 바로 청주 현 중앙공원내에 있는 수령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의 별명이다.

 

이리하여 인재공은 석방된 후에 소환되었으나, 이미 새 왕조를 세울 뜻을 품었던 이성계 일파의 숙청으로 공의 나이 32세 때인 1392년에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맞아 죽고 공은 이숭인등과 함께 또 탄핵을 받아 함창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해에 조선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동문수학한 정도전이 가장 꺼려하고 두려워한 인물이 바로 인재공이였는데, 그러기에 그는 인재공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욱 죽이려고 했다. 그리하여, 정도전이 순홍종을 보내 인재공을 함창 유배지에서 살해하려 시도했어나 마침 공의 문생인 김여지가 판관으로 있었던 차여서 실패하고 8월 23일, 장사현으로 옮기는 도중에 계속 기회를 노리던 순홍종이 무촌역에서 인재공을 목졸라 죽였다한다. (혹은 매질해서 죽였다고도 기록있음))

 

공은 문장에 이름이 높았고 사실에 밝았으며 겨우 29세의 나이에 재상반열에 오르는 등, 일찍부터 조.부의 유풍을 갖췄던 비범한 인물로 성격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정의감이 강했다. 후일 신원되어 한산 문헌서원에 배향되었다. 슬하에 6남을 두었다.

 

휘 숙야 광목공은 공의 장남, 휘 숙묘 양도공은 공의 4남이 되며, 휘 훈 안소공은 손자, 휘 영은 정도공과 휘 유청 한원군(=공희공)은 증손이 된다. 저서로는 <<인재유고>>가 전한다.

 

●양경공 이종선(良景公 李種善)

   양경공은 가정의 손자, 목은의 3남으로 자는 경부(慶夫), 어머님은 정신택주(貞愼宅主) 안동권씨(安東權氏)로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 중달(仲達)의 딸, 우정승(右政承) 일재(一齋) 한공(漢功)의 손녀, 첨의평리(僉議評理) 책사의 증손녀, 선도전서(都典書) 윤길손(尹吉孫)의 외손녀다.

 

양촌(陽村)안동(安東)권근(權近)의 사위가 된다.

아버지 목은이 41세이던 1368년 공민왕 17년에 태어났다.

 

1382년 우왕 8년, 공의 나이 15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언관에 재직했고,1388년 창왕 원년, 공의 나이 21세 때, 맏인 문양공 종덕은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1392년 태조 1년, 공의 나이 25세 때에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에게 피살되자 포은의 일당으로 몰려 관직에서 박탈당하고 아버지 목은과 둘째 형, 인재공 종학과 함께 그해 4월에 멀리 귀양살이 가게되고, 7월에 공양왕이 폐위되며 조선이 들어선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교서"에 의해 아버지 목은의 직첩이 회수되고 서인으로 강등되며 인재공 또한 직첩을 잃고 곤장 1백대의 형벌을 받은 후 먼 곳으로 귀양을 또 간다.

 

한 달 후인 8월에는 둘째형 인재공이 겨우 32세의 젊은나이로 순흥종에 의해 목이 졸려 비명에 서거하게되고, 10월, 교서에 의해 아버지 목은의 유배가 해제되어 한주(한산)로 돌아오게된다.

 

이듬해인 1393년(태조2) 공의 나이 26세때에 아버지 목은께서 사면되고 편리한데로 살게끔 나라에서 교서를 내린다. 이듬해인 1394년(태조3)에 어머니 정신택주 안동권씨가 64세로 돌아가시고,1395년(태조4) 공의 나이 28세때 12월 22일, 태조가 아버지 목은을 한산백에 봉한다.

 

공은 조선 개국 후 후손의 안위를 지키라는 아버님의 유언과 새 왕조에 입교한 빙장의 권 양촌 권유로 순창 백천의 군수와 여흥부사를 지냈고 이 해에 병조참의가 되었습니다.

 

태조가 아버님 목은의 옛친구와 동료로서 목은에 대한 예를 잊지않고 끝까지 지켜주며 신의를 다한 것도 양경공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만 했던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 부합했던 것입니다.

 

1409년 태종9년, 공의 나이 42세에 좌우사간대부가 되었는데 이 때 소를 올려, 대간은 논의가 일치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일을 논의할 수 있도록 건의하여 시행 되었습니다.

 

1411년 공의 나이 44세되던 해에, 명나라의 진연이 지은 아버님 목은의 묘지명에 태조를 비방한 구절이 문제가 되자, 그것을 양경공이 진연에게 지시한 것이라 하여 동래진으로 귀양가 유배살이를 하게 된다.

그 뒤 풀려나 호조참의를 역임하고 인수부윤으로 승진되었다.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417년 공의 나이 50세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고, 이 때 구암사와의 노비속공 문제로 인하여 의금부에 하옥되다. 석방된 후 이듬해인 1418년, 세종1년에 한성부윤이 되며 다시 인수부윤을 거쳐 1421년 공의 나이 54세에 좌근동지총제가 되다.

 

1423년 공의 나이 56세에 진전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이듬해에 다시 진하사의 부사로 북경에 다녀 오다. 이 때 진하사 도총제 권화달의 문제로 인하여 직첩을 빼앗긴 뒤 외방에 부처되다. 그러나 이듬해 석방되다.

 

1426년 공의 나이 59세에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그러나 감사와의 교체 도중 호부 인수인계 일로 파직되다.이듬 해에 판한성부사를 거쳐 1428년 공의 나이 61세에 진하사로 다시 북경에 다녀오고 이듬해 선위사로 황주에 다녀 왔다.

 

또한, 가례색도감제조가 되어 전라도로 파견되어 세자빈을 책택하는 일을 관장했다.

그 뒤 개성유후사유후로 승진,1438년 공의 나이 71세에 중추원사가 되었으나 그해에 운명하다.

 

공은 일찌기 고려-조선왕조 교체기에 위의 두 형들을 비명에 잃고 목은에게 유일하게 남았던 아들로서 아버지 목은이 서거한 후에는 시신을 거두어 후손들과 장사 지내고 아버지의 방대한 저서인 목은집을 펴내는 등 집안의 어른과 장남구실을 하였다.

 

아버님 목은의 상을 당하였을 땐 3년상의 여묘살이를 하며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로 일컬어졌고 뒤에 나라에서 효자비를 세우고 정문을 내렸습니다.

 

슬하에 5남을 남겼는데 사육신 휘 개 백옥헌공은 공의 손자, 토정공 휘 지함은 공의 5대손, 아계공 휘 산해와 장정공 휘 기는 공의 6대손, 휘 병상과 문정공 휘 병태는 11대손, 효정공 휘 사관은 공의 14대손, 문간공 휘 경재는 공의 15대손, 수당 휘 남규 선생은 공의 18대손이다.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한산이씨들의 소속당파

    당파싸움이 심했던 조선중기에 한산이씨들의 소속 당파는 일반적으로 노론벌족으로 잘 알려진 집안이긴 해도, 한 마디로 딱 짤라서 노론이였다고 규정 할 수는 없다. 사실상 선조 이후로 서인의 노론과 동인의 남인으로 분열 되었기 때문이다.

 

서인의 원래 사상적 배경은 율곡 이이로부터 전승되었는데, 서인내에서 우암 송시열(=노장)과 그의 제자 윤증(소장) 및 젊은 대신들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분당되며 노론과 소론으로 당파를 이뤘다.

 

서인이란 당명은 선조 초에 외척으로 정계를 주름잡던 심의겸의 집이 서쪽 정동에 있었음에 비롯 되는데, 서인과 맞섰던 동인은 강경파의 북인과 온건파의 남인으로 또 각각 분당되어,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상공 휘 산해는 북인의 영수였다.

 

남인의 사상적 시조는 퇴계 이황으로서 아계공과 대응했던 서애 유성룡 선생은 남인의 영수였다.

동인이란 당명은 심의겸과 대항하며 왕도정치를 주장했던 김효원의 집이 동쪽 동대문 시장 부근에 있었음에 비롯된다.

 

죽마고우의 친우들 사이라도 당파가 생기면서 그 사이가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대표적 예가 율곡 이이 선생과 아계공이라 할수있다. 한 지붕 밑에서 사는 부자-형제지간이라도 정치이념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지만, 조선시대때는 당색이 대대손손 가승되어 내려져 왔었다.

 

부인들의 머리 모양이나 복장 등이 소속한 당파에 따라 각기 달랐고, 노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다리를 옆으로 비껴가며 길을 돌아 갔던 소론 사람들의 얘기는 유명하다.

 

심지어는 집안에 키우던 꽃-화초색깔도 당색에 맞췄다 하니, 같은 당파가 아니면 집안끼리 몇 백년 동안 통혼도 아예 안했다.이렇듯 당색은 사생활 깊은 곳까지 침투되어 당쟁이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당시 로서는 실권하면 목숨을 잃거나 귀양가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목은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집성촌을 이뤘던 만큼, 그 지역적 배경과 학문적 계승이 다양하여 당색도 차이가 있었다. 물론 당쟁에 뜻을 두지 않은 선조들 또한 많았다. 당쟁은 임진왜란을 초래하게 한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이다.

 

대표적인 노론 가문으로 알려진 집안들은 광산김씨, 안동김씨, 은진송씨, 청송심씨, 연안이씨, 양주조씨, 남양홍씨 등이고, 남인가문으로는 안동권씨, 의성김씨, 순흥안씨, 풍산유씨, 진성이씨 등이다.

 

출처 : 한산이씨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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