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족보관련문

가장 독창적인 족보

야촌(1) 2008. 1. 8. 18:50

■ 과학으로 푸는 우리유산 - 가장 독창적인 족보

   (국정브리핑 2004-09-29 12:02)

 

족보를 만드는 이유는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동족 의식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성은 혈족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제정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류 사회가 시작되는 원시 시대부터 유사한 관념을 갖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원시 사회야말로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 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족의 숫자도 점점 증가하고 대가 멀어질수록 서로의 유대 관계를 알 수 없게 되자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해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성을 처음으로 사용한 민족은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다.

 

초기에 성을 만드는 방법은 단순하였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지명이나 산, 강을 성으로 삼았다.

신농씨의 어머니가 강수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로, 황제의 어머니가 신수에 살았으므로 성을 신씨로, 순왕의 어머니가 요허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로 한 것 등이다.

 

우리나라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 문화를 수입한 후에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했고 신하들에게 성을 사성(賜性, 임금이 공신에게 성을 내려주는 일)했다고 적었다.

 

백제는 온조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부여씨(夫餘氏)라 했고, 신라는 박(朴),석(昔),김(金)씨의 전설이 있으며, 신하들에게 성을 ‘사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성(百姓)이란 말은 백 사람에서 성을 주었다는 유래에서 나온 말로 성을 가진다는 것은 지배층임을 의미한다. 학계에서는 고구려는 장수왕(419∼491), 백제는 근초고왕(346∼376) 때부터 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신라 진흥왕(540∼576)의 순수비에 나타나는 인명을 보면 성을 쓴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성보다는 본을 썼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성은 점차 널리 보급되어 조선 초기에는 평민, 후기에 이르러서는 천민층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이런 사정에서 더 이상, 성의 유무만으로는 신분의 고하나 가문의 지위를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의 사대부 또는 명문 가문에서는 그들의 가문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한 방법의 하나로 족보라는 시스템이 등장한 것이다.

 

●한국인의 독창적인 족보

 

족보의 연원은 본래 중국으로, '제계(帝系)'라 하여 왕실의 계통을 적은 데서 유래한다.

중국 육조 시대에 고관을 배출한 우족(右族)이나 관족(冠族)이 성립하면서 문벌과 가풍을 내세우는 족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조상의 벼슬이나 경력, 계보, 집안 사람의 임관과 승진은 물론 혼인, 교제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항을 담은 족보를 작성하는 보학이 발달했다.

 

특히 족보는 원래 공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관리의 임용에도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대에 들어서자 사적인 용도로 변모하면서 가족을 하나로 응집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족보는 중국에서 유래하였지만 우리나라로 들어와 한국인의 독창적인 족보로 탈바꿈한다.

우리나라의 성씨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성명의 구성과 개념이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 많다.

 

성과 본관은 가문을 나타내지만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한국인의 성명을 보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계대(系代)까지 나타내는데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의 독창적인 작명방법이다.

 

내용은 시조로부터 차례로 한 세대에 한 칸씩 내려쓰며, 항렬이 같으면 같은 난에 쓴다.

여기에 명(名)·자(字)·호(號)·시호(諡號)를 쓰고, 생몰 연도와 간지·월일을 쓴다.

 

관직이라든가 호를 내려 받은 사실은 물론 과거에 합격한 사실 등 개인의 경력을 기록하고 배우자의 관(貫)과 성씨 및 부와 조부의 관명과 생몰 연월일도 기록한다.

 

이 밖에도 묘지가 어디 있으며 그 형태나 방향이 어떤지도 기록한다.

뿐만 아니라 후계자가 있는지 없는지, 양자를 들인 것인지 아들을 양자로 보낸 것인지, 또는 적자와 서자, 아들과 사위를 구별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최초의 족보는 문화 유씨의 『영락보(榮樂譜)』라고 알려져 있으나 서문만 전해지고 실물은 없다. 그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성종 7년(1467)에 간행된 안동 권 씨의 족보 『성화보(成化譜)』이다.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었던 권제와 세종 때 영의정이었던 권 람 부자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족보의 서문은 서거정(徐居正)이 작성했다. 기재했으며 아들·딸(딸은 사위 이름으로 기재)의 기재 순위는 출생 순위, 즉 연령순으로 기재했다. 특히 친손을 19대손까지 기재했다면 외손도 19세손까지 기재했다.

 

반면에 조선 후기의 족보는 출생 순위와 관계없이 언제나 아들을 먼저 기재하는 '선남 후녀'이다.

이와 같이 변하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통념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족보에서 자녀를 연령순으로 기재하는 것은 인륜의 질서를 존중하기 때문이고 선남후녀의 방식은 본가, 즉 동족원을 보다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족보에서 선남 후녀의 방식을 취하기 시작한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본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족보를 보는 방법

 

족보에는 두 가지가 있다. 대동보와 파보이다.

대동보는 시조 이하 혈족의 원류와 그 자손 전체를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고 파보는 각 분파의 혈연 관계를 기록한 것이다. 이런 경우 시조로부터 분파된 파조까지의 계대는 상계라고 하여 별도로 기록한다.

 

분파란 나뭇가지를 치는 것과 같으므로 자손이 많을수록 분파가 많아진다.

분파는 어느 대에 특출한 선조가 태어나거나 딴 지방으로 옮겨 자손이 번창할 경우 그 후손들이 별개의 파로 따로 떨어져나가 형성한 것이다.

 

이럴 경우 파의 명칭은 파조의 관명이나 시호 또는 아호, 자손이 거주하는 지명을 따라서 부르는 것이 통례이다. 이를 군대로 비유하면 같은 사단일 경우 다른 사단 소속과는 사단 명을 이야기하지만 같은 사단일 경우에는 연대 혹은 대대나 중대를 밝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족보는 기록 절차가 너무 까다롭고 복잡하여 이를 보려 해도 절차를 모르기 때문에 족보를 펼치기조차 두려워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족보 보는 것을 일찍 포기한다.

쉽게 족보 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적어도 '나'가 어느 파에 속해 있는지 알면 족보를 찾아보기가 쉽다.

만약 파를 모를 경우에는 조상이 어디에 살았고 그 지방에 어느 파가 살았는지를 확인한다.

그래도 파를 모른다면 씨족 전체가 수록되어 있는 대동보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둘째,

시조로부터 몇 대인지를 확인한다. 족보는 가로로 단을 나누어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혈손은 같은 단에 가로로 배열하므로 자기 대의 단을 알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셋째,

자신의 항렬자를 알고 족보에 기록된 이름이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집에서 부르는 이름의 경우 항렬자를 넣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족보에 삽입할 때는 반드시 항렬자를 넣은 이름으로 실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세대들이 항렬자를 기피하여 한글로 작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족보 제작에 큰 혼동을 갖고 오므로 앞으로 족보 제작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족보에 적을 경우 항렬자를 따로 만들어둔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이 항렬자에 따른다는 것은 우리나라 족보와 이름을 지을 때 특이한 제도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도 같은 성이라면 본관이 어디임을 확인한 후, 본관이 같고 항렬자가 같다면 같은 시조로부터 같은 계대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곧바로 친해지는 것을 자주 경험했을 것이다.

 

특히 항렬자가 높을 경우 나이가 아무리 적더라도 존대를 받기 위해 근친의 감정을 유발하게 하는데 이것도 우리나라 족보의 특이성 때문이다.

 

●푸대접받는 족보

 

오늘날 세계의 많은 인류학자들이 한국의 족보를 연구한다.

그만큼 한국의 족보가 독특한 특성과 연구할 만한 값어치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족보의 국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오히려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족보를 푸대접한다. 심한 비유로 개의 혈통은 철저히 챙기는데 사람의 계통을 밝히고 혈통을 아는 데는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조선 시기에 족보는 양반의 소유물이었으므로 양반의 신분적 특권은 고귀한 혈통과 뛰어난 조상을 확보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일부 양반 가문에서는 왕실이나 이름난 귀족들을 시조로 두기 위해, 혹은 이들의 계보에 자신들을 접속시키기 위해 족보를 편찬하면서 본관을 바꾸거나 조상의 세계와 파계를 조작, 윤색하는 행위 즉 가짜 족보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부역을 면하기 위해 다른 집안의 족보에 자신의 이름을 삽입하는 부보(附譜)의 관행이 횡행하여 가짜 족보가 후일 정식 족보로 둔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다른 사람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여 군역에서 빠져나가자, 어떤 백성은 상민과 천민들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을 금해줄 것을 신문고를 쳐 호소하기도 했다.

 

조작의 방법도 다양했다. 당시에 만연된 모화(慕華)사상에 따라 시조를 중국과 연결시키기도 했고 고려시대에 성장한 가문들은 고려 초의 개국공신, 또는 삼한공신의 후예로 둔갑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가 전란에 휩싸이게 되어 사회 기강이 흐트러지자 이때까지 철저한 위계에 의해 구분되던 신분의 격차를 족보의 변조로 위장하려고 했고 한국전쟁이후 양반제도가 사실상 철폐되자 가짜 족보는 더욱 성행했다.

 

그러나 이제 가짜 족보는 설자리를 잃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특히 주요 정부 관원의 임명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족보에 기록된 사람들을 일일이 검증하면 가짜 족보인지를 곧바로 판독할 수 있다.

 

족보의 진정한 의미는 어느 선조가 고위직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씨족이 누구인가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바로 탄로 나는 가짜 족보로 위세를 세우던 사람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가짜 족보로 망신당하지 말라는 듯이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보학 > 족보관련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世 와 代  (0) 2008.03.25
한산이씨(韓山李氏)  (0) 2008.02.23
숭정년간(崇禎年間)을 서기로 환산  (0) 2007.07.29
일본인의 족보를 보니......  (0) 2007.05.16
숨겨진 한국사 족보서 찾다  (0) 2007.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