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벽오 이시발선생

충익공 벽오 이시발선생 묘(1569-1626)

야촌(1) 2007. 5. 26. 14:16

◇명(明)나라 지사 두사충(杜師忠)이 자리 잡은 터

◇산소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산21-3번지(지전길 36-1)

 

↑벽오 이시발선생의 부모 묘이다. 좌측은 아버지 성균진사 증 의정부 좌찬성 오촌공(1550-1574)

   이대건(李大建)묘 이고, 우측은 어머니 증 정경부인 안동 김씨묘이다.

 

오촌공(梧村公)이 1574년 돌아가셨을 당시에는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 벌영산 하에 장례를

치렀는데 1610년 3월에 벽오공 께서 직접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로 직접 이장하고,

그해 4월에 진천초평에 살집을 마련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이후 초평이씨로 불리울 만큼 후손들이 번성 하였으며, 지금의 이곳 산소는 벽오가 돌아가신

몇해 후 오촌공의 손자들에 의해 2번째 이장한 산소다.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성균진사 경주이공지묘. 증 정경부인 안동김씨 합폄.이라고 기록되 있다.

이 묘표는 1658년(효종 9)에 손자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벽오 이시발 선생(좌측)과 배위, 증 정경부인 여흥민씨 묘이다.

 

벽오공의 묘소도 1626년 별세하셨을 당시에는 청원군 옥산면 환희리 천내의 선영 아래,장례를 치렀으나 1658년

아들분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이장했다.

 

따라서 이곳 산소의 석물은 1658년(효종9)에 조성된것인데 몇년전 동자석등을 야간에 도난 당해, 지금 보이는 문인

석은 5년전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수백년된 묘지 석물을 훔쳐가는 현실이 참 딱하고 안타까운 심경 입니다.

 

↑정헌대부 형조판서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이공 시발 지묘. 증 정경부인 여흥민씨 부좌.라고 기록되 있다.

     공은 이후 다시 아들의 공적으로 영의정으로 추정되셨다.


↑이조참판 생곡공 인환(1633-1699)의 묘로, 백부인 참판공 경연에게 출계했다.

    벽오공의 손자(孫子)로 생부(生父)는 이 조판서인 춘전공(春田公) 경휘(慶徽)이다.

    사진>이산전통풍수지리연구회

 

↑조선국 가의대부 행이조참판 생곡 이공 인환지묘. 증 정부인 전주이씨. 증 정부인 청주한씨 합폄 이라 기록하고

    있다.

 

묘역의 뒷편에서 찍은 모습이다. (사진>나홀로테마여행)

 

↑벽오공의 계배(系配)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

 

↑벽오공의 계배(系配)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가까이에서 촬영)

 

↑벽오공의 계배(系配) 정경부인 고령신씨 묘이다(벽오공의 우록 묘좌(卯坐)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묘표에 정경부인 고령신씨지묘(貞敬夫人高靈申氏之墓),라고 기록되 있다.

 

↑ 좌측의 앞에 보이는 건물이 오촌공, 벽오공의 재실(쌍오재)이고 보이는 마을이 지전 마을이다. 

     옛날에는 후손들이 이 곳에 집성촌으로 살았다.

 

↑쌍오비각(雙梧碑閣): 신도비는 1658년(효종 9)에 건립한 것임(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42호).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192-11번지/본 사진은 필자가 2009년 11월 산소 성묘 때 촬영한 것

    다.

 

 

 

↑사진출처>草阿(초아)

 

↑이시발 선생 신도비 안내판/ 사진>草阿(초아)

●이시발 선생 신도비(李時發 先生 神道碑)

신도비(神道碑)란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훌륭한 벼슬아치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무덤 남동쪽, 큰 길가에 세운 석비(石碑)로, 선조, 광해군,인조에 걸쳐, 세 임금을 섬기면서 백성의 생활안정과 지방민을 평온하게 하였던 그의 공로를 찬양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쌍오비각(雙梧碑閣)내에는 벽오공의 황고(皇考), 오촌공(梧村公)의 신도비도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글을 지은이는 간이제 최립(簡易霽 崔笠)이고 글씨는 손자(孫子) 경휘(慶徽)가 쓰고 전서(비문의 앞면글씨)는 판돈령 부사 이정영이 썼다. 오촌공과 벽오공 부자(父子)분의 이 신도비는 1658년(효종 9년)에 세운 비로, 우암 송시열이 글을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판돈령 부사 이정영이 전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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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는 명(明)나라 지사 두사충(杜師忠)이 자리 잡은 터.

 

벽오공이 운명 하였을 당시에는 충북 청원군 오창면 그의 고향 황고(아버지)산소 아래로 장례를 치렀으나 몇 년 후 아들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곳으로 산소를 정한 까닭은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이 아국(我國)의 방방곡곡에 전승하며 한양으로 밀려오자, 선조는 의주(義州)로 파천 하고 끝내는 명나라에 청병 하였을 때다.

 

이때 이여송(李如松)이 6만 대군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원병 왔는데, 당시 명나라에서는 전쟁(戰爭)을 할 때, 반드시 지사(地師)를 데리고 와서 지리(산천의 형국을 오행에 부치어 길흉을 살피는것)를 살피게 한 연후에 진지를 구축 하였다. 이때 따라온 지사가 두사충(杜師忠)이다. 이여송 장군이 여기서 진(陳)을 치면 어떠냐고 두지사(杜地師)에게 물었다.

 

두지사는 무방하겠다 하여 그곳에 진을 쳤다. 그러나 그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하여 명군이 폐하고 말았다. 이여송 장군은 두지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폐전하게 되었다고 참수형(斬首形)을 집행 하려고 할 때다. 이 소식을 들은 벽오공은 곧 이장군에게 달려가서 여러모로 설득시킨 나므지 두지사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기로 합의 하였다.

 

두지사는 죽을 줄 알고 있다가 살게된 연유를 알고, 벽오공의 은혜(恩惠)를 보답하기 위하여 결초보은(結草報恩)하기로 결심 하였다. 어느날 두사충은 벽오공을 찾아가서 " 공은 나를 살려주신 은인 입니다. 소생이 배운 것은 지리밖에 없으니 좋은 기지(基址)나 결정해 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벽오공은 감사 하다고 인사 하면서 조정에 일이 있기에 동행하지 못하고 동생인 풍천공을 동행 하도록 하였다. 풍천공은 두지사를 따라서 서울서 진천 초평까지 210리길 산천을 살피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초평의 이곳에 이르렀을 때, 두타산에서 내려온 줄기며, 펼쳐진 지형의 여러 동네를 살피드니 그곳에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서울서 내려오는 동안에 본 안목(眼目)으로는 여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 합니다. 이 지역이 와우형(臥牛形)입니다. 여기에 터를 잡으시면 불농불상 300년 기지(不農不商 三百年 基地)가, 될 것이니 이곳으로 결 정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

 

그리하여 여기를 벽오공의 후손들이 영주(永住)할 기지로 삼았으며 따라서 이름난 정승, 판서들이 줄줄이 배출 되었다. 와우형(臥牛形)이란?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니 소는 풀이 있으야 한다. 그러기에 풀의, 벌판인 즉, 초평(草平)이 오늘날 까지 초평면으로 불리 워 지고 있고 공의 묘지는 소의 배 부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으며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와우형의, 소 머리인 우두(牛頭)에 쌍오정(雙梧亭 :오늘날엔 터만 남아있음)을 지었고, 그 아래 봉황대(鳳凰臺)가 있고, 봉황대 옆에 조선에서 가장 큰 사설 도서관으로 유명한 일명 만권루(萬卷樓)로 불리우는 '완위각(宛委閣)'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벽오 이시발선생은 장서에도 관심이 많아 당시 중국으로 부터 많은 도서들을 들여와 소장하기 시작하였는데, 6.25전쟁때 화재로 소실되고 현제 1,000 여권만 후손인 담헌 이하곤선생 종가에 보존하고 있으나 진천군에서 완위각을 문화재로 지정 복원하게되면 이곳에 기증하게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