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벽오 이시발선생

경주부윤 이시발 유애비(慶州府尹李時發留愛碑)

야촌(1) 2008. 3. 9. 15:42

↑경주이씨 시조의 사당인 악강묘(嶽降廟)

    ‘악강묘(嶽降廟)’는 경주이씨 시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경주 표암재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입니다.

    매년 향사때 비로소 문이 열리고 제례 행사가 열리게 됩니다.

 

좌측 뒤편에 충익공 벽오 이시발 유애비가 보인다. 좌측은 1602년(선조 35)에 처음 세운 비이고 우측이

    1786년(정조 10) 3월에 六代孫 李集星(이집성/파서 集斗의 兄)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있을 때, 다

    세운 것임.

 

↑소재지 : 경주 표암재 경내 악강묘 뒤 좌측.

 

 

 

 

ⓒblog.naver.com/우경(2022.06.30)

 

↑경주 표암재 악강표 좌측 뒷편/ⓒblog.naver.com/우경(2022.06.30)

 

↑이부윤 유애비 앞면/ⓒblog.naver.com/우경(2022.06.30)

 

↑앞면 上之十一年丙午(1786,정조) 三月日六代孫集星謹識書/ⓒblog.naver.com/우경(2022.06.30)

  (1602년 처음 수립후 184년이 지난 1786년에 새로 세운 것임)

 

↑이부윤유애비(李府尹留[遺]愛碑) 앞면./萬曆三十年(1602))三月 日立

    위 치 : 경북 경주시 동천동 산 16번지 표암재 경내의 악강묘 좌측 뒤편에 있음.

 

비의 후면(後面)에는 이집성의 유애비를 새로 만들게 된 내력이 새겨져 있습니다. 북천가에 심하게 훼손 방치되어 글씨조차 알아보기 쉽지 않아 경주부를 뒤져 옛 비문을 찾아내 비를 새로 만들고 성의 남쪽(城南)에 비각까지 지어 보존케 했다는 내용입니다. 또한 훼손된 옛 비는 새로 세운 비옆에 나란히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로 세운비 옆에 보관하였다는 옛 비는 사라지고 현재 그 소재를 알 수가 없습니다.)

 

즉 벽오 이시발의 6대손인 영천군수 이집성이 비를 세로히 세워 구(舊)비와 함께 당시 사람들의 왈래가 많은 경주의 성(城) 남쪽인 즉 징례문(徵禮門/남문)비각(碑閣) 까지 지어 보관되었졌으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왜정시대 일본의 철거에 따라 후손들이 오늘날의 경주 표암으로 옮겨졌다고 봅니다.

이때 구(舊)비를 함께 옮기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표암 유애비 곁엔 없습니다.

 

 

[전면 원문]

 

■ 이부윤유애비(李府尹留[遺]愛碑)

 

公諱時發 字養久 淸州人 系出月城 益齋之裔 己亥夏 下車治有 異績 辛丑冬 超遷爲本道兼巡察使 吁其韙哉 讚曰

공휘시발 자양구 청주인 계출월성 익재지예 기해하 하차치유 이적 신축동 초천위본도겸순찰사 우기위재 찬왈

 

政先禮敎 事必師古 修己衷文 講方急武 賦簡令便 流波賴及 再完東土 不諼基德

정선예교 사필사고수기충문 강방급무 부간령편 류파뢰급 재완동토 불훤기덕

 

萬曆三十年 三月 日立

만력삼십년 삼월 일립

 

 

[전면 국역]

 

이부윤유애비(李府尹留[遺]愛碑)

 

공(公)의 휘(諱)는 이시발[李時發 : 1569년(선조 2)∼1626년(인조 4)]이요.

자(字)는 양구(養久)요. 청주인 이니 월성(月城=慶州) 이 익재(李益齋=李齊賢을 말함)의 후손이다.

 

기해 1599년(선조 32) 여름(음력 5월)에 경주부윤(慶州府尹=지금의 경주시장)으로 부임하여 훌륭한 치적을 이루고 신축 1601년(선조 34) 겨울(음력 10월)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지금의 도지사) 겸 순찰사(巡察使=난리 때 군무를 총괄하는 관리)로, 초천(超遷=특진을 말함) 하였으니 참으로 훌륭하도다.

 

찬(讚=기리다) 하되 정치하기는 예교(禮敎)를 우선하고 일을 처리하기는 반드시 옛 일을 본 받고 몸을 다스리기는 충문(衷文)하고, 강방(講方)은 무(武)를 우선하고 조세와 명령은 간편히 하고, 유파(流波)는 뢰급(賴及= 공덕이 널리 미치는 일)하고, 고장을 온전케 하였으니 그 덕을 잊을수 없도다.

 

만력 1602년(선조 35) 3월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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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유애비(留[遺]愛碑) : 거사비(去思碑)와 마찬가지로 전임자의 공덕을 기리고 존경하며, 떠난 것을 애석하게

     기는 마음으로 백성들이 세우는 비석.

 

2. 우기위재(吁其韙哉) : 이 부윤이 초천(超遷)한 것은 경하할 일이지만 본부(本府)를 떠난 것은 애석한 일이라

    사실과 이부윤(李府尹)의 훌륭함을 나타 내는말.

 

3. 초천(超遷) : 직급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일. 당시의 직함은 가선대부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사

     찰사(嘉善大夫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大邱都護府使巡察使)이었으며, 순찰사는 전시에 임시직으로, 두

     었던 지방의 병권(兵權)을 장악하는 행정관임.

 

4. 찬(撰) : 높은 덕이나 아름다운 일을 찬양하는 일 또는 글.

 

5. 충문(衷文) : 글을 정성되고 바르게 합당하게 하는 일.

 

6. 강방(講方) : 방책을 강구 하는 일.

 

7. 유파뢰급(流波賴及) : 유파가 널리 미치듯 공덕이 널리 미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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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 원문]

 

昔在宣廟龍蛇之際 先祖碧梧公리本府 有去思碑後 一百八十餘年 集星來守永川 永慶 之傍郡也 適兼府務 因尋故

석재선묘용사지제 선조벽오공리본부 유거사비후 일백팔십여년 집성래수영천 영경 지방군야 적겸부무 인심고

 

蹟 得碑於北川路左 字 漫畵刻不可識 幸得謄本 於吏廳遺事中 更謀摹刻 而舊碑剝缺 故移竪新石於城南 而重刻

적 득비어북천 로좌 자만화각 불가식 행득등본 어이 청유사중 갱모모각 이구비박결 고이수신석이성남 이중각

 

作閣而庇之 以寓追慕 舊石仍置碑傍云爾

작각이비지 이우추모구석잉치비방운이

 

上之十一年 丙午 三月 日 六代孫 集星 謹識書

상지십일년 병오 삼월 일 육대손 집성 근지서

 

[국역]

옛날 선조조 임진왜란 때에 선조(先祖) 벽오공(碧梧公=李時發) 께서 본부(경주를 말함)에 부임하여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진지 180여년 만에 집성(集星)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부임하였는데, 영천은 영주(永州)와 경주(慶州)의 이웃에 있는 군이다. 부무(府務)를 겸하게 되어, 고적을 찾아보다가 북천로좌(北川路左)에서 비석(碑石)을 발견 하였는데 글자가 마모되고, 획각을 알아볼 수 없었다.

 

요행히 이청유사(吏廳遺事=경주관아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적) 가운데서 등본(謄本=문서의 원본 내용을 전부 그대로 베낀 서류)을 발견하여 다시 모각하려는데 구비(舊碑)는 박결(剝缺=벗겨지고 이지러짐.)한 고로 성(城)의 남쪽에 새 돌을 옮겨 다시 조각하고, 비각(碑閣)을 지어 보존하고 추모 하였다.

 

옛 비석은 새로 새운 비석 옆에 두었다. 병오 1786년 금상왕(今上王-正祖 10) 3월에 6대손 집성(集星)은 삼가 기록하고 쓰다.

 


[각주]

1.용사지제(龍蛇之際) : 임진왜란을 가리킴. 용은 우리나라(군자국)를 가리키고 뱁은 일본(소인국, 야만국)을

   킴. 군자와 소인이 뒤섞이고 군자가 소인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함.

 

2.거사비(去思碑) : 전임의 감사(監使)나 수령(守令)의 선정(善政)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우는 비석

 

3.이집성(李集星) : 1741년(영조 17)~1704년(정조 18)은 1786년 4월부터 1786년 7월 까지 영천군수로 재임하

    였음(영천군정사>1994년간 1503쪽 참조)

 

4.영경(永慶) : 영천군 옆에 있었던 영주와 경주를 말함

 

5.이청유사(吏廳遺事) : 경주부 관아에 전해오는 사적.

 

6.상지 11년 병오는 서기 1786년으로 이부윤유애비를 세운 1602년(만력 30)으로부터 184년이 됨. 진단학회편

한국사연 대표」에는 상지 11년이 정조 10년으로 되어 있으나 비문의 기록이 잘못이라고 볼수는 없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