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오 이시발(碧梧 李時發)선생의 초평(草坪) 낙향설(落鄕設)
1592년(宣祖25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때였다. 왜군(倭軍)이 아국(我國)의 방방곡곡(坊坊曲哭)에서 전승(戰勝)의 기세(氣勢)가 유난( 蹂躝)이 심(甚)하여지자 대가(大駕)는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였으며 끝내는 명(明)나라에 청병(請兵)하였다.
이때 이여송(李如松)이 6만대군을 거느리고 래원(來援)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전쟁(戰爭)을 할때 반듯이 지사(地師)를 데리고 와서 지리(地理:산천의 형국을 5행에 부치어 길흉을 살피는것)를 살피게 한 후(後) 진지(陣地)를 구축(構築)하였다.
이때 따라온 지사(地師)가 두사충(杜師忠)이다. 이여송(李如松) 장군(將軍)이 여기서 진(陳)을 치면 어떻냐고 두지사에게 물었다. 두지사는 무방(無妨)하겠다고 하여 거기서 진을쳤다. 그러나 그 전쟁(戰爭)에서 전세(戰勢)가 불리(不利)하여 명군(明軍)이 패하고 말았다.
이장군은 두지사의 잘못으로 인(因)하여 이렇게 되었다고 참수형(斬首刑)을 집행(執行)하려고 할때다. 이 소식(消息)을 전해들은 벽오공(碧梧公)은 곧 이장군에게 달려가서 여러모로 설득(說得)시킨 나므지 두지사의 사형집행을 중지(中止)하기로 합의(合議)하였다.
두지사는 죽을줄 알고 있다가 살게된 연유(緣由)를 알고 벽오공의 은혜(恩惠)를 갚기위해 결초보은(結草報恩)하기로 결심(結心)했다. 어느날 두지사는 벽오공을 찿아가서 "공(公)은 나를 살려주신 은인(恩人)입니다. 소생(小生)이, 배운것은 지리(地理)밖에 없으니 좋은 기지(基地)나 결정(決定)해 드릴려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벽오공(碧梧公)은 감사(感謝)하다고 인사 하면서 조정(朝庭)에 일이 있기에 동행하지 못하고, 아우인 풍천공(豊川公)을 동행(同行)하도록 했다. 풍천공은 두지사(杜地師)를 따라서, 서울서 초평(草坪)까지 210리 길을 산천을 살피면서 내려왔다.
여기서 두타산(頭陀山)으로 부터 내려온 줄기며 펼쳐진 동내(洞內)의 형국(形局)을 여러모로 살피면서 끝내는 거기에 앉는다. 그리곤 조용히 입을연다. "내가 서울서 내려오는 동안에 본 안목(眼目)으로는 여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 합니다.
이 지역(地域)이 와우형(臥牛形), 입니다. 여기에 터를 잡으시면 불농불상 삼백년 기지(不農不商 三百年 基地)"
가 될 것이니, 이곳으로 결정(決定)하시길 바랍니다 한다. 그리하여 여기를 벽오공 후손이(碧梧公 後孫)이 영주(永住)할 기지(基地)로 삼았다.
풍천공(豊川公)은 두지사(杜地師)를 향하여 "이곳은 형님의 기지(基地)가 될 곳이니 수고(手苦)스럽지만 우리가 정착(定着)할곳도 잡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했다. 두지사(杜地師)는 수고랄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러시면 어떤 자리를 구하십니까? 하고 묻는다. 풍천공은 " 나는 우리 후손들이 조정(朝廷)에 나가서 고관대작(高官大爵 )으로 이름을 날리느니 보다는 조용한 곳을 찾아서 학문(學問)이나 연마(鍊磨)하는 곳이면 족(足)합니다" 한다.
두지사(杜地師)는 그 말을 듣자말자 쾌(快)히 승락(承諾)하였다. 진천초평(鎭川草平)서 걷기 시작(始作)하여 산천(山川)을 여기저기 살핀다. 칠십리허(七十里許)에 이르렀다. 두지사는 여기저기 산천을 살피더니 자리에 앉는다.
"여기가 적당(適當)하다고 생각 합니다. 여기는 고관대작(高官大爵)은 아니 나지마는 부(富)는 떨어지지 않을것입니다" 하였다. 여기가 오늘날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忠北 淸原郡 南一面 高隱里)다. 풍천공(豊川公)은 한양(漢陽)에서 벼슬길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隱居)하기로 결정(決定)하였다.
풍천공 후손(後孫)은 이곳에서 대대(代代)로 관직(官職)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수사학(洙泗學:유학을 달리 이르는 말임)의 강론(講論)에 여념(餘念)이 없었다. 이 모습을 본 사림(士林)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고사은거지지(高士隱居之地)" 고사지지(高士之隱)"라고 하였다.
현제 이곳을 고은(高隱)이라고 하는것은 고사지은(高士之隱)에서 사자(士字)와 지자(之字)를 빼고 동명(洞名)을 부른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진천군 초평(鎭川郡 草坪)에 대하여 살펴 보기로 하겠다. 산형국(山形局)이 "와우형(臥牛形)" 즉(卽)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니 소는 풀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풀인 초(草)와, 벌판인 평(坪)이라는 글자를 붙이어 초평(草坪)이라고 한것이 면명(面名)이 되서 현재(現在)에 이르고 있다. 초평(草坪) 첫 동리(洞里)를 부챙(夫昌)이라고 한다. 이것은 "부창부수(夫唱婦隨)" 즉 부부간(夫婦間)에 주인(主人)이 말하면 부인(婦人)이 따른다는것, 다시말하면 선조(先祖)의 유업(遺業)을 후손(後孫)들이 잘 지키어 나가는 뜻으로 부창(夫唱)을 딴 이름이다.
와우형(臥牛形)의 우두(牛頭)에 쌍오정(雙梧亭)을 지었다. 그것은 오촌공(梧村公)과 벽오공(碧梧公) 부자분(父子分)을 추모(追慕)하는 뜻에서 오촌공의 오자(梧字)자와 벽오공의 오자(梧字)자를 따서 정자(亭子)이름을 쌍오정(雙梧亭)이라 하였으니 초평면(草坪面) 양촌후록(陽村後麓)에 있다.
회와공(晦窩公:寅燁)이 퇴노(退老)하여 초평에 낙향(落鄕)하였을때 건립(建立)하였고, 상량문(上樑文)이 지었다. 쌍오정 아래에 봉황대(鳳凰臺)를 지었다. 봉황새는 벽오동(碧梧桐)우거진 숲 속에서 울기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봉황대에 대하여 판교(板橋) 박제형(朴齊珩) 공(公)이 있기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이수삼산분계래 쌍오정하 봉황대(二水三山分界來 雙梧亭下 鳳凰臺)
차대말필금능유 인흥하여 이백배(此臺末必金陵有 引興何如李白杯)
[풀이]
두 갈래 물이 세 갈래 봉우리를 경계(境界)로 하여 이리로 모여 들었는데 쌍오정 아래 경개(景槪) 아름다운곳에 봉황대가 자리를 잡았구나. 봉황대가 반듯이 금능에 있어야 한다는 까닭은 없겠지!? 흥(興)겨울 때, 술상床)을 보니 이태백(李太白)이가 마시던 술보다 더 맛이 있는듯 하구나.
그리고 봉황대 옆에 만권루(萬券樓)를 지었다. 그것은 담헌공(澹軒公:夏坤)이 1722년(景宗2年 壬寅)에 서울서 과거(科擧)를 보려고 과거공부(科擧工夫)를 하다가 중지(中止)하고 고향(故鄕)에 돌아와서 만권9萬券)의 서적(書籍)을 쌓아놓고 날마다 학문(學文)을 딲았다.
여가(餘暇)가 있으면 후생(後生)을 잘 교도(敎道) 하기도 했다. 만권서적을 쌓은 누각(樓閣)을 만권루(萬券樓)라고 한다.
만권루에 대한 윤청파(尹靑坡) 공(公)의 시(詩)가 있기로 다음과 같이 적는다.
두타산하호계장 전자전손시복향(頭陀山下好溪庄 傳子傳孫是福鄕)
율리인인성지승 도원유로발천장(栗里因人成地勝 桃源有路發天藏)
취간림학문명기 인득서루한묵광(就看林壑文明氣 認得書樓翰墨光)
풍국장란유객취 구추금일우중양(楓菊將蘭留客醉 九秋今日又重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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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두타산(頭陀山) 아래에 자리잡은 시냇가 경치(景致)좋은 이 정자(亭子)여. 오촌공(梧村公) 후손(後孫)들은 자자손손(子子孫孫) 길이길이 이어오는 복(福)된 이 고장이여, 율리(栗里)는 여러사람들에게 찬양(讚揚)되어 오는 아름다운 고장 이루었네.
무능도원(武陵桃源:신선이 노는곳)으로 가는길이 여기 있으니, 천신(天神)이 고이 간직한곳. 아름다운 천지대자연(天地大自然)속에 밝고 아름다운 풍경(風景) 마음끝 즐기고, 서루(書樓:다락)에 쌓인 서적(書籍:책) 옛날부터 내려온 묵(墨)의 자취 더듬게 되는구나.
단풍(丹楓)이며, 국화(菊花)이며, 몇일만 지내면 지려고 하는데...때는 九月! 더구나 중양(重陽:음력九月九일), 여기서 취(醉)한 모습 흥(興)겹기도 하여라. 쌍오정(雙梧亭)이 우뚝 솟아있고 그 밑에 봉황대(鳳凰臺)가 있고, 그 옆에 만권루(萬卷樓)가 있는 아름다운 고장을 배경(背景)으로 한 초평(草坪)에서 오촌공파(梧村公派)는 영상(領相), 좌상(左相)을 배출 하였고, 팔판서(八判書)가 나왔다.
그러기에 오촌공파(梧村公派)를 경주이씨(慶州李氏)라고 하지않고, 초평이씨(草坪李氏)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초평(草坪)에 거주(居住)하는 후손(後孫)들은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지냈지마는 고은(高隱)에 거주하는 후손들은 벼슬길을 버리고, 오직 학문(學文)을 갈고 딲으며 은사(隱士)로서 대(代)를 계승(繼承) 하였다.
오촌공파 수보당시(修譜當時) 오촌공 十二代 사손(嗣孫) 이상엽(李相燁) 외우(畏友: 아끼고 존경하는 벗)의 청탁(請託)을 받고.
세정사(歲丁巳:1977년) 혹염료지절(酷炎燎之節)에
죽산후인 태봉 안형열(竹山后人 苔峰 安亨烈)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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