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윤관장군 묘.

야촌(1) 2007. 5. 12. 11:23

↑윤관장군 묘'와 영의정 '심지원의 묘'

 

[파주=뉴시스]기사입력 2007-12-23 17: 42
조선시대 명문가였던 파평윤씨와 청송심씨간에 400년 묵은 '산송(山訟·묘지에 관한 다툼)'이 두 문중 후손들의 화해로 막을 내리게 됐다. 

 

23일 경기도와 중앙문화재위원회는 두 문중간의 화해정신을 기리고 두 종중의 타협안을 존중해 묘지 이전을 가결했다고 밝혔다.

(사진=경기도2청 제공)/김형수기자 vodokim@newsis.com

 

 

 

 

↑윤관 대원수(1040년(정종 6)~1111년(예종 6))는 고려 때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쪽 9성을 차지해 고려의

지도를 넓힌 명신이고, 심지원(1593년(선조 26)~1662년(현종 3))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대사헌을 거쳐, 좌, 우의정과 영의정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익현(益顯)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사돈이 됨으로써 효종의 두터운 신임

을 받았다. 심지원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의마총과 교자총

 

좌측은 윤관 장군이 타고 다니던 교자총(교자轎子의 무덤)이다, 오른 쪽은 전쟁터를 누비며 타고 다니던 戰馬의

무덤, 전마총이다. 평교자(平轎子)의 준말은 교자 : 종1품 이상 및 기로소 당상관이 타는 가마로.

앞뒤로 두 사람씩 네사람이 어깨에 메는 가마이다.

 

 

↑윤관장군 묘역 아래는 장군의 영정이 봉안 돼 있는 여충사가 자리하고 있다.

 

윤관 묘 봉분 뒤에는 약 2미터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데 5년 전만 해도 그 담장 너머에는 조선 효종 때 영의정을지

냈던 심지원(沈之源) 선생의 묘와 그의 조부 심종침『 沈宗忱, 1553(명종 8)∼1614(광해군 6)』과 조모단양우씨의 쌍분묘가 있었다.

 

 

↑새로이 이장된 심지원(沈之源)선생 묘입니다.

 

↑영의정심지원선생묘[이장전 쌍분에서 이장후는 배위분과합폄(合窆)입니다]

 

이 심지원의 묘와 윤관장군 묘를 둘러싸고 1763년(영조 39년)때부터 역사적인 산송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조상의 묘 관련 산송은 무척 많이 발생하는데 그 가운데 분수원 산송은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두 명문간의 산송으로 지방관서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중앙으로 이첩돼 임금이 친히 재조사를 명하고 심리 판결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산송이라 할 수 있다.

 

이 산송분쟁은 그로부터 240여년이 지난 2005년도에 와서야 양가 문중의 협의를 거쳐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는데 파평윤씨 측에서 이장에 필요한 부지 8천여 ㎡를 현재 위치에서 12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제공하기로 하여 윤관장군 묘역 내에 있는 청송심씨 묘 19기를 모두 이장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장 하기전 심지원선생묘의 뒤에서 앞을 바라본 모습으로 담장 바로 넘어 윤광장군 묘가있다.

 

↑청송심씨 묘이장을 위한 고유제

 

그리하여 2007년 12월 경기도 문화재위원회의 변경허가를 받은 후 2008년 5월 심지원 묘와 바로 위의

할아버지 심종철 묘를 경기도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후에 이장하였고 다른 묘들도 모두 한 달 안에

이장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두 문중간의 껄끄럽던 산송분쟁은 245년이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두 가문

후손들의 합의에 의해 깨끗이 정리가 된 것이다.

 

 

↑심지원선생 묘 이장을 위한 파묘 모습.

 

그럼 이 오랜 산송의 원인과 발단은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지금 현재 윤관 묘가 자리 잡고 있는 묘역은 17세기만 해도 비석도 없이 오래된 산소로 거의 방치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관의 묘는 1111년에 조성됐고 1662년 심지원의 묘를 조성할 때는 550여년이나 지난 후라 풍상 속에서 비석도 어디론가 묻혀 버린 오래된 고총이 되어있었다.

 

그렇지만 동네 노인들이나 젊은이나 모두 그 묘는 윤관장군 묘이며 그 아래 동그란 흙더미는 윤관장군이 타던 가마묘라고 누구나 일컫고 있었고 파평윤씨 집안에서는 묘비나 묘표가 없어 확인을 못하고 있었지만 『동국여지승람』에 ‘윤관의 묘가 분수원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연히 윤관 묘이거니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1658년 영의정 심지원이 국가로부터 이 일대 땅을 하사받아 청송심씨 문중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의 묘를 안장해놓았다. 그리고 심지원도 1662년 사망 후 이곳에 묻혔는데 그 위치가 윤관장군 묘라고 일컬어지던 오래된 산소 3미터쯤 위였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 파평윤씨 문중에서 윤관장군 묘라 일컫던 그 산소에 이씨 묘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어찌된 일인지 확인하고자, 그 묘를 관리하고 있다는 이씨 후손 이형진의 집을 찾아가 연유를 캐묻고 동의를 얻어 그 묘의 광속을 파보았다.

 

그러자 청송심씨 집안에서는 심지원의 묘 망주석이 서 있는 곳까지 파 들어와 남의 묘를 훼손하였다고 격분해 윤씨 문중사람들을 구타하여 쫓아내고, 심지원의 손자 심정최가 1763년(영조 39) 5월 윤씨 가문의 처벌을 당시 고양군수에게 요구함으로써, 두 집안의 묘지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양군수 신희(申?)는 심씨문중의 고발로 세밀한 조사까지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파평윤씨와 인척관계에 있다하여 산송담당을 기피하였고 이에 경기감사가 파주목사 조덕상(趙德常), 교하군수 홍정유(洪鼎猷)에 해결을 지시하였으나 이들 역시 윤씨집안의 외손이 된다하여 판결을 기피하고 사건을 도(道)에 반송하고 만다.

 

사실 묘의 주인공 심지원도 윤관장군의 외손이 된다. 윤관장군이 600년 전의 사람이니 그 자손들이 수없이 많고, 파주의 양반가문 대부분은 파평윤씨와 혼인으로 엮어져 있었다.

 

또한 당시 중앙권력의 실세로 자리 잡고 있던 파평윤씨와 청송심씨의 분쟁에 대해 지방관아 수령이 판결을 내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산송은 중앙으로 이첩되어 윤씨 심씨 두 문중에서 번갈아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임금 영조의 판결을 청하게 된다.

 

영조임금은 이 산송에 대하여 신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청송심씨와 파평윤씨는 다 같이 당대 명문벌족일 뿐만 아니라 두 집안이 모두 왕실과 혼사가 가장 빈번했던 집안이요, 더욱이 윤관장군은 전 조정의(前朝)의 혁혁한 부국공신이며, 심지원 정승은 이번 조정(今朝)의 덕망 높은 명상이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로 해서 어느 한쪽이 억울하게 여긴다든지 두 집안에 불화가 생겨서는 안 될 일이라고 본 것이다.

 

영조는 즉시 한성부에 명하여 분수원 현지를 답사하여 상세한 지도를 그려오게 하고 한편 풍덕에 사는 이씨를 문초하여 심정승 묘 아래에 있는 묘가 자기 선조의 묘라고 모시게 된 경위, 비석을 세운 경위 그리고 윤씨들과 같이 그 묘의 광중을 파헤친 경위 등을 낱낱이 조사하였다.

 

또 영조임금은 심씨와 윤씨 양쪽에서 올린 진정과 상소문을 꼼꼼히 검토하면서 의심나는 점은 빠짐없이 대신들에게 물어 조사를 했다. 파주 분수원 산송재판을 이렇게 신중하고 면밀하게 진행시킨 영조임금은 마침내 1763년(영조39년) 10월 13일에 양쪽 가문을 화해시키고자 “이후 윤씨 집안과 심씨 집안은 마땅히 분란을 그치고 각기 선조의 묘를 잘 지키도록 하라.”는 최종판결을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0년(1764) 6월 14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중(高麗侍中) 윤관(尹瓘)과 고 상신(相臣) 심지원(沈之源)의 묘에 사제(賜祭)를 명하였다. 당초에 윤관·심지원의 묘가 파주(坡州)에 있었는데, 윤씨가 먼저 입장(入葬)하였으나 해가 오래되어 실전(失傳)하니 심씨가 그 외손으로서 그 산을 점령하고 묘를 썼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씨 집 자손들이 산 아래에서 비석 조각을 습득하여 심씨 집 자손과 쟁송(爭訟)하여 끝이 나지 않자, 임금이 양쪽을 모두 만유(挽留)하여 다툼을 금하게 하고 각기 그 묘를 수호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관은 전조(前朝)의 명상(名相)이고 심지원은 아조(我朝)의 명상이라 하여 똑같이 치제(致祭)한 것이다”

영조임금은 이와 같이 판결을 내리고 두 문중에게 각각 어제문(御祭文)을 지어 승지를 보내 윤관장군 묘와 심지원 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로부터 두 집안에서는 별다른 분규 없이 각각 자신의 조상 묘를 잘 지키고 받들어 모셔왔다. 그러다 1969년 양측 집안에서는 이 오래 묵은 두 집안의 산송분쟁을 마무리 짓는다는 의미에서 두 분묘 사이에 곡장을 쌓고, 화해증서를 작성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하지만 이후 청송심씨 집안에서는 그 곡장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고 분묘에 그늘이 진다고 하여 불만을 터뜨려왔고, 다시 두 집안 사이에는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후 2005년 청송심씨와 파평윤씨 두 문중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윤씨 측 문중에서 윤관장군 묘역 바로 옆 산줄기에 새로운 묘역부지 8천여㎡를 제공하고 심씨 측 묘소를 이장을 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2008년 5월 19기의 청송심씨집안 묘가 모두 이장함으로써 244년 전 발단이 되어 영조임금조차 명쾌히 해결하지 못한 분수원 산송이 마침내 그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

 

새로 이장해간 심지원선생 묘 아래에는 청송심씨 묘가 이미 여럿 있고, 심지원의 아들 심익현과 숙명공주의 합장묘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심익현과 숙명공주의 합장묘

 

주인공 심익현은 인조 19년(1641년)에 영의정 심지원의 3자로 태어나서 숙종 9년(1683년)에 43세로 졸한 분이다.

10세때 효종의 3녀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 청평위에 봉하여 졌다.

 

사신으로 청나라 연경(북경)에 3차례나 다녀오고, 오위도충부 도총관(요즘 육군본부 최고 지휘관 격, 실권보다는 명예적 의미가 강하다.) , 내섬시 제조를 지냈으며, 촉서체에 능하여 여러 곳의 비문을 남기는 등 재주가 뛰어났으나. 수명이 단명한 것이 안타깝다.

 

원래 산소는 고양군 원당면 석천리 도내동산에 넓은 선산에 묻혔으나, 1926년 몰지각한 후손이 매각하여 주위가 개발되고 주택이 들어서서 산소로소는 부적합 환경이라 문중이 고심하여 오던 차에 2009년 아버지 심지원 묘역 아래로 천장하고 11대 후손 심봉구가 대표가 되어 이 천장비를 세운 것이다.

 

그곳의 다른 선조들의 묘는 돌 볼 겨를이 없고, 우선 청평위와 숙명공주 내외분 합장묘만 옮겨 온 것이 안타깝다. 숙명공주는 숙종 24년(1699)에 60세로 졸하였다. 조상의 숭배와 조상의 산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읽는다.

--------------------------------------------------------------------------------------------------------------------------------------

 

400년 '묘지 다툼' 끝냈다

2006년 4월 11일 (화) 05:32 중앙일보

 

조선시대 대표적 명문가인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에 392년을 끌어온 조상 묘를 둘러싼 다툼(산송.山訟)이 두 문중 후손들의 극적인 타협으로 마무리됐다. 10일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대종회에 따르면 두 문중은 지난해 8월 청송 심씨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소재 윤관 장군 묘역(사적 제323호) 4만 평 내에 조성된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는 데 합의했다.

 

두 문중은 2월 다시 만나 파평 윤씨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 2500여 평을 500m 정도 떨어진 청송 심씨 문중 땅 옆에 제공하기로 했다. 청송 심씨 측은 다음달 묘지를 이장할 예정이다. 두 문중 간 묘지 다툼은 조선시대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단은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윤관(?~1111)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며 비롯됐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 년이 지난 1763년(영조 39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이어져 왔다. 당시 임금이던 영조(1694~1776)는 고민 끝에 윤관 장군 묘와 영의정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두 문중의 화해를 구했다.

 

그러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 "용미(龍尾:산소 뒷부분)를 누르는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매를 맞아 죽는)을 당하는 사태까지 빚어졌으며 이로 인해 두 문중 간 원한은 깊어져만 갔다. 현대에 이르러 두 문중 후손들은 원한을 풀기 위해 1969년 9월 화해각서를 교환하는 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번번이 최종 단계에서 실패했다가 최근 대타협을 이루게 됐다.

 

파평 윤씨 소정공파 윤도현(71)씨는 "조선조 명문가인 두 집안이 400년 가까이 조상의 묘소를 놓고 대립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판단해 화해했다"고 말했다.청송 심씨 안효공파 심종복(67)씨는 "400년 가까이 끌어온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게 돼 기쁘다"며

"두 문중 모두 조상을 올바로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더 이상 원한은 없다"고 말했다. 파평 윤씨는 성종비.중종비 등 조선시대 왕비 네 명을, 청송 심씨는 세종대왕비 등 조선시대 왕비 세 명을 각각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 가문이다. 파주=전익진 기자

--------------------------------------------------------------------------------------------------------------------------------------

 

파평 윤씨-청송 심씨 ‘400년만의 화해’ 새국면

2006년 8월 16일 (수) 20:55 경향신문

 

파평 윤(尹)씨와 청송 심(沈)씨 양 문중의 묘지 다툼(산송·山訟) 핵심이 됐던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의 윤관 장군(?~1111)의 묘(사적 323호)가 지금의 자리가 아닌 임진강 북쪽 지역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와 파문이 예상된다.

 

조선시대 묘제 전공자인 김우림 서울 역사박물관장은 16일 “최근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1091~1150)의 묘지명을 확인하던 중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김관장은 “윤언이 묘지명의 뒷면 끝 부분에는 ‘경오년 4월14일 임강현 용봉산 숭복사 동쪽 기슭에 유골을 장례지내니, 아버지 시중 문숙공의 능침과 같은 경내이다’(庚午四月十四日葬骨于臨江縣龍鳳山崇福寺東麓乃王父侍中文肅公陵寢一境內)라고 적혀 있다”고 밝혔다.

 

김관장은 “묘지명에서 말하는 ‘임강현’(윤관과 아들 윤언이의 묘가 있는)의 위치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에 따르면 고려때는 개성의 속현이었다가 조선 태종 14년에 장임현, 이후에는 장단(長湍)으로 됐다”며 “결국 (윤관의 묘는) 임진강 아래의 지금 파주지역이 아니라 임진강 북쪽, 지금의 민통선과 북한 지역 일대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묘역이 있던 ‘용봉산’ ‘숭복사’ 등의 위치에 대해선 현재로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어 아쉽다”고 덧붙였다. 윤언이 묘지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려 묘지명’전에 전시 중이다.

 

김관장의 주장이 최종 확인될 경우 ‘400년 만의 화해’로 화제가 됐던 양 문중의 최근 합의는 새 국면을 맞게 된다. 또 사적 지정 과정에서 이미 학계에 알려진 윤언이 묘지명 등 정확한 근거나 자료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지적될 수 있다.

 

양 문중은 1614년 영의정 심지원(1593~1662)이 부친의 묘를 윤관 묘역 바로 위에 조성하면서 산송을 벌여 영조가 중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윤관 묘역과 인접해 심지원 묘(경기도 기념물 137호) 등 심씨 문중의 묘 19기가 있다.양 문중은 지난 4월 문화재청의 중재로 윤씨 문중에서 2,500여평의 부지를 제공하고, 청송 심씨 문중은 심지원묘 등 19기를 이장하는 것으로 화해를 했다.

 

이에 따라 청송 심씨 문중은 묘지 이장을 위한 현상변경안을 제출했으나 경기도 문화재위원회는 “문화재의 원형 훼손이 우려된다”며 부결됐고 문중은 이어 7월24일 경기도에 행정심판을 청구, 문화재청으로 이관됐다. 문화재청에서는 의견서를 행정심판위원회에 전달하면 9월 이전에 이장 허가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경기도문화재위원회 한 위원은 “심씨 묘역이 이장될 경우 문화재 훼손은 뻔한 일”이라면서 “개발 압력이 높은 경기지역에서 문화재 이전이라는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도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