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두사충(杜師忠) 선생 묘.

야촌(1) 2007. 1. 22. 19:52

↑두사충선셍 묘 /소재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716 

 

두선생묘의 후경

 

 뒤쪽에 보이는 비가 두선생의 신도비이다.

 

두사충 묘 옆엔 낡은 신도비가 하나 서있다. 마지막 구절은 ‘삼도통제사 이인수찬'(三道統制使 李仁秀撰)이다. 이인수는 이순신의 7대손이 된다. 두사충은 이순신과도 친교가 깊었다. 이순신의 처음 묘터도 그가 잡았다 한다. 전쟁터에서 맺은 선조들의 인연, 그 아름다운 인연을 후손들이 이어간 셈이다.

 

 

 

 

모명재(慕明齋)

 

■ 두사충(杜師忠)

 

조선시대 명풍수로서 숱한 전설을 남긴이 가운데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21대손 두사충(杜師忠)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중국에서 온 섭정국(葉靖國), 시문용(施文用), 이문통(李文通) 등과 같은 풍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지리에 밝아 명나라 군대의 '진지와 병영 위치 선정' 참모로 활동하다가 더러는 귀국하고, 더러는 조선에 눌러앉았다. 이들로 인해 조선 중기 이후 한반도 풍수, 특히 묘지 풍수 양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두사충은 생전에 경기 양평에 있는 한확 사대가 택당(澤堂)과 이식(李植)의 조부묘를 감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그는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무덤을 정하는데 관여했기 때문에 그 전설이 아직도 전해오고 있으며, 그가 잡지않은 자리까지도 '두사충이 소점한 자리'라고 전해지는곳이 많다.


두사충(杜師忠)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21대 후손이었다(두사충의 11대 후손인 고(故) 두재규 선생이 증언했다). 그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처남으로, 복야(僕야 : 벼슬이름)로서 진린을 따라 조선에 왔다.

 

수군이었던 진린 도독이 이순신 장군과 자주 만났는데 이때 두사충도 이순신 장군과 친교를 맺었다.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준 '봉정두복야(奉呈杜僕야)'라는 시가 아직까지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귀국했던 두사충은 정유재란(1597)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온다. 이때 그는 조선에 가지 않겠다는 부인을 혼자 중국에 남겨두고 두 아들만을 데리고 오는데, 그것으로 영영 부인과는 이별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진린 도독이 귀국하려 하자 두사충은 '도독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니 되돌아가야겠지만 나는 이곳에 남겠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미 명나라가 망할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가 대구에 정착해 '고국 명나라를 잊지 않고 섬긴다'는 뜻에서 '대명(大明)'이란 지명을 붙이고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대명동'이다. '대명동'이란 지명은 경북 성주군 용암면에도 있는데 이 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들어와 귀화한 풍수 시문용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붙인 지명이다.

 

시문용은 광해군 당시 실세 정인홍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가 궁궐터 소점에 관여한 풍수로 유명하다. 대구에서 살다가 죽은 두사충은 만촌동(대구 남부 시외버스 터미널 뒤)에 묻힌다.

 

그곳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잡아놓은 자리로 지금까지 그대로 전한다. 두사충의 후손들은 현재 전국에 약 100여 가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직계후손이 두사충 묘 입구에 있는 사당 '모명재(慕明齋)'를 지키며 살고 있다. 모명재 역시 고국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사충의 묘는 당시 중국 풍수들의 터 잡기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서 현재 술사들이 선호하는 혈장(穴場 : 유골이 안치되는 일정한 곳으로서 혈을 이루며 특정한 형태를 갖춘다)을 찾기는 힘들다. 그 대신 주변 산들이 편안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곳을 감싸고 있다.


특이한 점은 두사충 무덤 주변에 국가정보원 지부와 2군사령부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손 두재규씨는 "살아있을 때도 군대 속에서 살았는데 죽어서까지 군사들을 보초 세울 정도로 땅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풍수에서는 '사람은 자기 세계관에 맞는 땅을 찾아 들어간다'고 말한다. 두사충의 세계관과 당시의 풍수 양식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첨언]

 

두사충이 진천의 초평에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선생의 묘터를 잡은 일화로 유명한데, 그는 임진왜란당시 이여송 장군의 진지를 잘못 점지한 까닭으로 왜군에게 대폐하자 이여송은 화가나서 두지사(杜地師)를 참수형(斬首刑)에 처하려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벽오 이시발이 이여송을 설득해 사형집행을 면했다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벽오와 두사충은 친분이 두터웠는데 두 지사(杜地師)가 오늘날 대구에 살게된 연유도 당시 벽오 이시발이 경상도 관찰사로 대구에 있을때 터 를 잡은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