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相卨 12

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추서자

신한촌, 초대성균관관장, 헤이그특사, 李相卨 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추서자 강기동(姜基東) 1884 ~ 1911 강무경(姜武景) 1878 ~ 1909 권동진(權東鎭) 1861 ~ 1947 권병덕(權秉悳) 1867 ∼1944. 김경천(金景天) 1888 ~ 1938 김동삼(金東三) 1878 ~ 1937 김상옥(金相玉) 1890 ~ 1923 김성수(金性洙) 1891 ~ 1955 김순애(金淳愛) 1889 ~ 1976 김완규(金完圭) 1876 ~ 1949 김익상(金益相) 1895 ~ 1925 김지섭(金祉燮) 1884 ~ 1928 나석주(羅錫疇) 1892 ~ 1926 나용환(羅龍煥) 1864 ~ 1936 남상덕(南相悳) 1881 ~ 1907 남자현(南慈賢) 1872 ~ 1933 노백린(盧伯麟) 1874 ~ 192..

박용만과 그의시대(책 내용중에 평한 이상설)

'박용만과 그의 시대'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25) 애국동지 대표회 연해주대표 이상설 (2) 이상설은 원래가 조용한사람이었다. 아무 때나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내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이 남긴 유언이었다. 자괴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버리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다. ▲서전평야(瑞甸平野)에 설립된 ‘서전서숙’은 만주에 독립지사가 세운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이었다. 1917년 그가 우수리스크에서 병으로 죽자 동지들은 화장한 재를 강물에 뿌렸다. 공중으로 흩어지고 강물에 흘러간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20..

권업회(勸業會)의 창립

■ 권업회(勸業會)의 창립 니콜리스크로 추방된 이상설은 7개월간의 유형생활 끝에 1911년 5월 18일 석방되어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이상설을 비롯한 러시아의 한인민족운동 지도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1911년 6월 1일 ‘조국독립’을 최고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 권업회(勸業會)를 발기했다. 이 날의 권업회 발기인대회에서는 최재형이 회장, 홍범도가 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한인세력의 파쟁은 권업회의 조직과 인가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1911년 6월 21일의 ‘정순만 피살사건’으로 기호파(畿湖派-경기, 충청, 호남)와 서도파(西道派-평안도, 황해도)가 대립하자 정재관과 이강이 치타로 피신했다. 주1) 또 이상설의 기호파와 이종호의 북..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신한혁명당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국내외 독립운동의 양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에 휩싸이게 된 러시아와 그 영향권에 있는 중국은 유화적인 대한인(對韓人) 정책을 철회하고 당시까지 합법적 한국독립운동단체조차도 해산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이전까지 러시아령·서북간도 등 각지의 독립운동기지에서 독자적으로 한인자치 및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북간도의간민회(墾民會) 등이 이 시기를 전후해 해산 당했다. 또한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과 신흥학교(新興學校)도 백두산서편으로 이동해 백서농장(白西農場)으로 위장한 채 유지될 정도로 운영이 어려워졌다. 1910년을 전후해 애국지사들이 이들 지역에 망명해서 심혈..

이상설 특사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잃어버린 한국고대사 연구회 이상설 특사의 불꽃같은 독립운동| 역사이야기 홍순주 | 조회 249 |추천 0 | 2015.08.14. 12:31 이상설((李相卨, 1870~1917) 선생은 1870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나 7세 때인 1876년, 동부승지 이용우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선생은 한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도 거의 독학으로 도달한 비범한 인물이었는데 1894년(고종 31년) 25세 때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급제하기에 이르렀다. 관계에 진출한 선생은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었고 그 후 1896년 1월에는 27세의 나이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되었으나 관직생활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선생은 전통 학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유학은 물론, 정치, 법률..

조선의 마지막 과거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 식년시 문무과 전시(式年文武科殿試)를 춘당대(春塘臺, 창경궁 안에 있는 대)에 설행(베풀어행함)하였다. 문과에서는 신종익(愼宗翼) 등 59인을, 무과에서는 신영균(申永均) 등 1,147인을 뽑았다. -고종 31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5월 15일(신묘) 2번째기사 과거는 지금으로 치자면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사관학교 입시를 합쳐놓은 형태의 시험으로 엘리트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958년(광종 9) 쌍기의 권유로 처음 실시된 과거제도는 900여년만인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된다. 그리고 위의 제시문은 마지막 과거시험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이다. 장원 급제를 차지한 신종익(愼宗翼)은 누구일까? 부친의 이름이 신병곤(愼炳坤) ..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1. 독일 제국과의 동맹 1915년 3월, 이상설은 상해 영국 조계내의 배달학원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유동열·이춘일 등 독립운동가 들과 회합했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당시 유럽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따른 광복운동의 방략을 논의했다. 그 결론은 국내와 국외를 효과적으로 연결하면서 독립전쟁을 주도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자는 것으로 모아졌다. 외교 분야를 담당키로 한 성낙형의 주장은 이러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독일이 승리할 것이고, 일제의 지나친 요구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인들도 독일과 결탁해서 일제와 결전할 것이고, 러시아와 영국과 미국도 합세하면 일본이 고립될 것이므로, 이를 독립회복의 적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하여 해외에 있는 사람들은 외세를 이용하고,..

독립운동가 이상설 한국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

독립운동가 이상설 한국 근대수학교육의 아버지 [주간동아 2004-08-13 16:0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바로 그 일송정(一松亭) 정자에서 우리 답사반 일행은 ‘선구자’를 합창했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외국어대 사학과는 창과 20주년을 맞아 7월 중순 고구려 및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를 다녀왔다. 사학과 교수와 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33명의 답사반 일행은 고구려사 전공인 여호규 교수의 인솔 아래 고구려 유적답사를 마치고, 청산리 전장을 가로질러 용정(龍井) 초입 해란강(海蘭江)이 감싸 도는 일송정에 올랐다. 사방이 탁 트인 일송정 정자에서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용정 땅은,..

우리나라 최초 중등수학교과서 - 이상설 저

산술신서(算術新書) ↑산술신서(算術新書)/우리나라 최초 중등수학교과서) 이 책은 원래 일본학자 우에노[上野淸]의 의 내용을 보재 이상설선생이 1900년(광무 4) 사범학교와 중학교 등 각급 학교의 교과서로 편찬저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학교과서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당시 학부편집국장 이규환(李圭桓)의 서문과 편저인 이상설선생이 쓴 범례가 붙어있습니다. 단 포스팅의 책은 1908년에 간행한 책입니다.